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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경향신문 '2030콘서트' 원고

원본주소: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2121652465&code=990000

저는 '상식'이란 단어를 이런 식으로는 잘 쓰지 않아요. 제가 보낸 제목은 그냥 "지하철 환승통로에서"였더랬습니다. 에세이스트인 척 했네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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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뛰어간다. 뛰어가면 더 빠른 환승열차에 탑승할 수도 있다. 열차가 안 오면 마냥 기다리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달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약속에 늦었다는 걸 깨닫고 구두를 신은 채 달리던 어느날, 한국 사회에서 산다는 게 지하철 환승통로의 불확실성과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경쟁이 국가경쟁력을 기를 거라고. 그런데 종종 의문이 든다. 환승통로에서 우리는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경쟁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고전적인 경쟁의 모델은 달리기 같은 거다. 출발선상에서 우르르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그런 달리기 말이다. 이런 상황에선 경쟁의 효과라는 게 눈에 보인다. 흔히 좌파는 이 달리기의 출발선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꼬집곤 했다. 부자 아이들은 몇㎞ 앞에서 출발하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부자 아이들이 이미 보이지도 않는 저 뒤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쟁은 ‘완전경쟁’이 아니라 ‘불완전경쟁’이 된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이런 달리기보다 훨씬 더 나쁘다. 사람들에겐 실력주의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 있다. 몇㎞ 뒤에서 출발하더라도 내 다리가 튼튼하고 내가 성실하다면, 그러니까 열심히 달리기만 하면 언젠가는 앞에 있는 녀석을 추월할 수 있다는. 이런 달리기라면 초반에 좀 넘어져도, 혹은 비실비실 달려도, 정신을 차리고 다시 열심히 뛰기만 한다면 어느 정도 선상에는 오를 수 있을 거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건 진부한 일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믿음이다.


한국 사회의 시스템은 이런 믿음을 체계적으로 배반 또는 배제한다. 고1·2 때 공부를 못 하다가 느닷없이 미친 듯 공부하여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는 식의 전설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1학년 때부터 빈틈없이 내신점수를 따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는 커져만 가고 경력직의 이직이 보편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청년들은 ‘첫 직장’에 목숨을 건다. 환승통로에서 뛰어가 앞 지하철에 탑승해 버리면,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과 ‘하늘과 땅’처럼 처지가 갈리기 때문이다.


비평준화의 시절에 환승통로는 상급학교 진학에 달려 있었다. 중입, 고입, 대입…. 한국 사회는 ‘합리적인 경쟁’을 위해 이 환승통로들을 없애왔다. 그런데 이제는 대입 이후에 새로운 환승통로들이 생긴다. 지하철 환승통로에선 경쟁이 이상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환승역이 어디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불균등한 데다 마지막 순간엔 ‘운’에 따라 결과가 결정된다. 달리기를 잘 하는 소년·소녀의 마음은 예측할 수 없는 환승열차 시간표에 농락당한다.


앞선 차량에 탑승한 이들은 그 안에서 ‘경쟁’하지 않는다. 우리네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것을 경쟁이라 불러왔다. 평준화를 없애고 환승역을 몇 개 더 만들어야 우리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환승역은 우리의 스트레스를 유발하지만, 그게 정말로 우리를 발전시키는지는 알 수 없다.


진보주의자의 어려움은 이런 것이다. 경쟁의 결과에 따른 성과의 차이가 너무 극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실력 향상에 필요한 제대로 된 경쟁의 룰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는 것. 한국 사회의 경쟁에는 이러한 면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환승통로에 설 때마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생각한다.

Carrot

2010.02.13 14:26:53
*.128.181.44

한윤형님 사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우 박사님 젊었을 적 모습과 너무 닮으셔서 흠칫흠칫.

유치한 악플러

2010.02.14 00:34:32
*.140.136.145

악플을 달아주게따....하려고 했는데 위 덧글이 악플이라 쥐쥐.

발칙

2010.02.15 00:06:24
*.47.128.218

"달리기를 잘 하는 소년·소녀의 마음은 예측할 수 없는 환승열차 시간표에 농락당한다."
달리기를 잘하는 소녀가 아닌데도 쩔게 농락당하는 기분이라능.
내일부턴 지하철탈때마다 슬플꺼같네여 흐규흐규

Q

2010.06.03 13:19:24
*.132.93.150

그런점에서 핀란드식 협동 교육이 좀 재미있을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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