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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노정태의 최장집 비판에 대해

조회 수 1254 추천 수 0 2008.09.13 03:30:17
정치의 철학화, 철학의 정치화 - 최장집 '고별 강연' 비판 및 실천적 방향에 대하여



노정태가 최장집의 고별강연에 대해 비판하기로 했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솔직히 말하면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할 것인지”가 궁금해서 빨리 써보라고 닦달한 적도 있다. 그리고 며칠 전 어떤 사적인 자리는 아닌 모임에서 노정태가 그 문제에 대해 얘기를 조금 했고 나도 거기에 대해서 볼멘소리로 대꾸도 좀 했는데, 이제 와서 노정태가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겠다고 나선 데에는 그날의 체험이 사뭇 불쾌했기 때문인가 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노정태의 글이 1) 팩트 확인에 있어서 부실한 게으른 글이며, 2) 어떤 종류의 지적인 논점을 던져주지 못하고 단지 수사만으로 가득찬 ‘반지성주의적인 글’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그가 말했던 ‘정치의 철학화’라는 단어를 그에게 도로 던져주고 싶은 생각도 있고, 사실 나 역시 분과학문의 문제를 철학의 문제로 워프시키는 많은 이들의 논쟁방식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수사만으로 가득한 그의 글엔 ‘철학화’라는 레토릭도 아까운 지경이다. 모든 문제를 철학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좀 다르게 말하면 모든 문제를 제로베이스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문화적으로 전승해온 지적인 탐구의 전통들, 분과학문의 방법론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그저 자신의 경험과 상식과 편견에서 논지를 전개하다보니 유사-철학적 성격의 문제로 워프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노정태의 글이 딱 그런 꼴인데, 이 글에선 인문학적인 논점이나 사회과학적인 논점 무엇 하나 제대로 잡히고 있는 것이 없고, 그저 자신의 편견과 뒤틀린 감정을 조금 에둘러 배설하고 있을 뿐이다.


먼저 그가 명백하게 팩트를 틀린 부분부터 지적한다. “이후에 등장한 무슨 웹 2.0이니 뭐니 하는 소리들도 결국 최장집이 깔아놓은 논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것이 내가 받은 인상”은 인상이 아니라 망상이다. 왜냐하면 웹 2.0 담론은 최장집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가 한겨레 지면에서 웹 2.0 세대 운운한 것이 이 담론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당시 이 담론의 숨겨진 목적은 “어째서 20대들은 보수적인데 10대들은 이런 시위를 기획하게 되었을까? 그 원인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그 시점은, 가두시위가 시작되기도 전, 그러니까 10대들이 주도한 시청 앞 촛불집회가 정점에 도달했던 때였다. 이후 20대들도 거리시위에 뛰쳐나오게 되자 ‘웹 2.0 세대’라는 말은 조금 우스워지기 시작해서 슬쩍 ‘세대’라는 말은 사라지고 시위현장에서 문자중계질을 하며 경찰들을 피해다니는 젊은이들을 가리킬 때 기사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되었다. 한마디로, 이 담론은 최장집과 관계가 없다.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결집된 이들이 광장에 모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직접 외친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데, 이건 직접민주주의에 더 가깝다.”라고 눙친다고 해서 이 담론이 최장집과 무슨 관계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야바위를 쳐도 정도껏 쳐라.


그런데 이 팩트의 오류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모종의 성급한 단정에서 도출되는 것 같다. 즉 노정태는, 최장집의 논의가 촛불시위대를 담론적으로 무력화시키는데 탁월한 역할을 했다고 가정하고 있다. 나는 이 가정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우선 촛불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최장집의 얘기를 들었더라도 ‘꼰대소리’로 취급했고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촛불시위에 반대한 이들, 보수언론이나 인터넷의 쿨게이들이 최장집의 말을 인용하면서 촛불시위를 깠다는 정황증거도 없다. 적어도 난 그런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나는 이 부분에서도 노정태가 팩트를 왜곡하고 있다고 본다.


내가 이해하기로 최장집에게 격렬하게 반응한 것은 이 사건이 “대의 민주주의 그 자체의 한계”를 지시한다고 해석하고 싶어했던 좌파들, 그리고 “이제는 그만 들어갔으면 한다.”는 식의 어느 인터뷰에서의 그의 발언에 분개했던 극히 일부의 시위참여자들이었다. 그런데 노정태도 기억하겠지만 최장집은 고별강연에서 “사실 내 역할은 지금 이순간 촛불시위에 나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고 천명한바 있다. 즉 후자의 영역에서 최장집은 강력하게 견해를 개진하지도 않았고, 개진했더라도 사실상 한발 물러선 셈이다.


사실 이 두가지 사안은 명백하게 구별될 수 있다. 즉 촛불시위와 같이 대중이 직접 거리로 뛰쳐나와 집단적으로 정치적 주장을 개진하는 사태가 벌어진 원인이 1) 정당정치가 제대로 확립되고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2) (아마도 정당정치는 제대로 작동했지만?) 대의민주주의 체제 자체가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인지는 섣불리 대답하기 어렵다. 이걸 두고 노정태가 말했듯이 ‘정치의 철학화’라고 말해야 할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서지 않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총론에서 실천적으로 따라나올 수 있는 정책적 쟁점으로 국민소환제와 같은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구현하는 정책의 효용성에 대한 찬반논쟁이 있을 수 있겠는데, 이 문제도 진지하게 논의되지는 않았다.


한편 “(시위참여자, 혹은 정치인들이) 지금 이 순간 촛불시위에 나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는 방금 언급한 총론에 비하면 아주 미세한 각론의 문제다. 이것은 굳이 최장집의 총론에 동의하더라도, 그 총론에 입각해서 해석을 달리하면 다른 결론이 나오는 문제다. 나는 씨네21에 기고한 글에서 최장집의 총론을 긍정하면서도 “촛불시위에 거는 희망의 총량을 감소시키는 것은, 떨어지는 한나라당의 지지율을 제 것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타 정당들의 한심한 역량이다. 시위를 지도하려다가 욕먹은 민주노동당과 얌전히 시위를 따라다니면서 ‘아고라의 여당’이라 불리게 된 진보신당의 길을 넘어, 시민들의 욕망을 정치적 지향으로 전환하는 설득에 성공하는 그런 정당과 그런 정치인이 필요하다. 그게 최장집이 은퇴 강연에서 말한 ‘카리스마적 정치인’의 역할이 아닐까. 지금 정당이 촛불시위에 결합해야 한다면 그것은 아직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고, 거리의 대중과 호흡하면서 그런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을 가진 이가 없다면 무슨 수로 우리가 정치에 희망을 걸 수 있겠는가.”라고 썼다. 레디앙에 기고한 이재영의 글은 이보다는 최장집에 비판적이었지만, 역시 “최장집의 총론에는 동의하지만, 지금 우리는 촛불시위에 나가야 할 때다.”라는 논지의 주장을 펼쳤다. 이처럼 최장집의 총론에 동의하면서도 얼마든지 각론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 있다.


노정태 글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이 총론-각론 구별이 없다는 데에서 생겨나고 있다. 먼저 노정태가 동시대에 쓰여진 타인의 텍스트를 잘 안 읽는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심지어 그를 옹호하겠다고 떠벌이는 자들조차도 최장집의 '카리스마'론에는 일말의 관심이 없다."는 그의 진술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일단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노정태가 내가 씨네21에 쓴 글을 다 읽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를 옹호하겠다고 떠벌이는 자들’의 숫자가 극히 적었고 그중에 대중적인 잡지에 실린 글은 거의 내것 하나뿐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의 단언은 몹시 어리둥절하다. 참고로 나는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담은 정책을 확대하는 좌파적 기획에 호의적인 쟁가 님과 다른 블로그에서 덧글 논쟁을 하면서 최장집의 주장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자는 것” 직접민주주의 운운하는 좌파들의 주장을 “그게 안 되니까 고양이 목을 따버리자는 것”으로 정리했고 ‘카리스마적 정치인’의 역할은 “고양이 목에 누군가 방울을 달아야 하니까 요구될 수밖에 없었던 실천적인 역할”로 보았다. 시위에 개근하기에도 바쁜 그가 이런 인터넷 쪽글들을 챙겨보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자기한테 안 보인다고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는 어느 멍청한 유아론적 관념론자의 태도에서는 벗어나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노정태에게 최장집의 ‘총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도 확인된다. 그리하여 총론과 각론을 구별하지 않고, 그의 얘기가 현실정치에 미친 효과를 두고 (그것도 다른 이들이 보기엔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운 효과를 두고) 최장집의 총론을 규탄하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야 만다. “정당정치의 복원 내지는 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강화가 최장집의 정치학이 지향하는 바라면, 대체 왜 한나라당이 대선과 총선 모두를 압승하는지에 대한 납득할만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어야 했다.”라고 그가 물었을 때 내가 느낀 황망함이란! 노정태가 말했듯 최장집의 정당정치론이 ‘이상적인’ 기획이라면, 한나라당이 득세하고 있는 ‘현실’은 최장집의 기획을 반증하는 것이 될 수 없고 오히려 그 기획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것이 될 텐데도 말이다. 최장집의 “민주주의” 시리즈가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니던가.


(게다가 노정태는 한나라당이 대선과 총선 모두 압승하는 현실이 대체 납득하지 하지 못할만큼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인데, 나는 뭐가 납득이 안 간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대선과 총선의 텀이 짧았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 사건은 이해불가능한 사건이기는커녕 무난하게 이해할만한 사건이다. -쇠고기 정국 이후에 총선 치른 것도 아니다.- 지금의 정치상황은 보수 양당제의 구도에서 한축을 담당했던 민주당 계열이 참여정부 이후 국민의 신뢰를 완전히 잃어서,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빠지더라도 그것을 챙겨먹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다. 그러므로 노선의 변화나 정계개편, 혹은 이틈을 노린 다른 정치세력의 양강구도로의 진입이 필요한 실정인데, 전자는 민주당의 무능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고 후자에 성공할만큼 진보진영은 국민의 신뢰를 쌓지 못했다. 진보신당에 관한 농담 하나. “민주노동당이 삽질하면 진보신당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진보신당이 열심히 하면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올라간다.” 동작을에 출마했던 진보신당 김종철 후보는 선거운동을 하다가 “그러니까 민주노동당 8년 역사가 얼마나 거대하고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는지.”라고 중얼거렸다. 여기에 무슨 추가적인 설명이 더 필요할까? 이 선거의 결과는 놀랍지 않다. 그 결과가 지금의 정치적인 파국을 초래하고 있긴 하지만.)


세번째로 노정태가 최장집의 ‘총론’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끈덕지게 노력하고 있다는 점도 감지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최장집을 적극적으로 탓할 생각이 그다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정태의 글의 제목은 최장집 고별강연 비판이고 글에서도 그 사실은 명백하다. 노정태는 촛불시위에 대한 최장집의 언급이 그가 말하는 “정치의 철학화” 현상을 이끌어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의 정리에 따르면, “그 대립 구도가 언어의 형태로 던져졌을 때, 그것을 수용한 사람들의 태도” 때문이다. 수용한 사람들의 태도 때문인데 이게 왜 최장집을 비판해야 할 이유가 될까? 이 점이 궁금해지지만 노정태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한편 노정태는 최장집이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던진 것에 대해 비판한다. 그리고 “그의 '카리스마'론은 사실 사회적 논쟁의 주제가 될 수 있었고 또 그랬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담론적 현실상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강변한다. (이 구절이 쓰여진 문단은 새로 덧붙여진 것인데, 여기서 상술하기는 귀찮지만 노정태가 그렇게 한 이유는 최장집이나 박상훈이 말하는 카리스마적 정치인이라는 개념이 노정태가 진보신당의 정치인들에게 요구하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노정태가 지금까지 했던 말을 돌이켜보면 ‘카리스마적 정치인’을 비판할 입장이 아니다. 오히려 찬사를 보낸다면 모를까.) 그것이 의미는 있을 수 있지만, ‘한국의 담론적 현실상’ 이런 식으로 튀어나와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자기 맘대로다. 그나마 들어줄만 한 건 ‘카리스마’ 개념이 아직 미완성이라는 건데, 이것도 고별강연의 짧은 텍스트만으로 내린 단정이라면 민망하다. 그리고 최장집이 이 “카리스마적 정치인”의 개념을 이용해서 촛불을 비판한 적도 없기 때문에, 도대체 여기서 그가 무엇과 싸우려는지 알 수가 없어진다.


여기서 그는 다시 ‘맥락’ 비판을 넘어 ‘총론’ 비판으로 향한다. 결국 최장집이 마르크스에서 베버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 그가 분석을 잘못 하게 된 원인이라고 단언한다. 심지어 글 초반부에 “사상적 전향”이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말이다. 내가 지금 고별강연 팜플렛을 분실하여 그의 인용을 검토할 수는 없지만, 정치학자가 요즘 들어 마르크스보다 베버에게 강조점을 더 주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고 하여 ‘사상적 전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믿는 그의 사회과학에 대한 얄팍한 이해의 수준이 두렵기까지 하다. “어떤 민주주의인가”에 실린 최장집의 인터뷰를 보면 마르크스와 베버가 동시에 그의 지적 연원 중 하나로 언급된다. 20년 전이라면 모르겠으나, 노정태와 내가 기억하는 한에서의 최장집은 한 거장의 이론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이론을 펼치는 학자인 적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이렇게 주장을 하려고 했다면 처음부터 최장집의 총론이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어서 분석에 실패했다고 말하면 되는 일이다. 그는 그렇게는 말하지 않다가 나중에 이렇게 듬성듬성한 소리는 하는데, 이거야말로 씹고는 싶은데 어떻게 씹어야 할지는 모르겠고 해서 일단 맥락 탓이나 하다가 나중에 내용도 한번 찔러는 보는 그런 심보가 아닌가? ‘카리스마’ 담론에 완결성을 요구하기 전에 도대체 자신이 최장집을 비판하는 논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리해 볼 일이다. 그의 글을 이리 뒤집어 보고 저리 뒤집어봐도 ‘논점’이란 걸 찾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들은 최장집 주장의 총론과 각론을 구별한다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이다. 노정태가 “최장집 논쟁”에 대해 지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면 대충 다음과 같은 세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 한국 정치의 문제에 대한 해법이 “정당정치 강화”라는 최장집의 주장을 지적으로 공격한다. 둘째, 최장집의 총론은 기본적으로 긍정하되,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국민소환제 등과 같은 제도들이 어째서 유용한지를 지적으로 밝힌다. 셋째, 최장집의 총론을 긍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시위를 이어나가는 것이 최장집의 총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최장집의 논의에 비추어 밝힌다. 구별될 수 있는 논점으로부터 따라나오는, 필연적인 결론이다. 하지만 노정태는 이중 아무것도 택하지 않는다. “지금은 정당의 외연이 운동으로 넓어져야 하고, 동시에 정당이 운동의 역량을 흡수하여야 할 시점이다.”라는 언술은 세 번째 것에, 그러니까 이재영이나 내가 택했던 방식에 맞닿아 있지만, 노정태는 이 주장이 최장집에 대한 ‘반론’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나! 최장집의 주장에 지적으로 맞설 의사도 능력도 없으면서, 수사법만으로 스크래치를 내려고 덤비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반지성주의적 작태다. 그것에 포함될뿐더러, 가장 훌륭한 예시이기도 하다. (구)서프라이즈의 논객들의 글을 반지성주의의 예문으로 쓰는 건 그들이 쓰는 비문 때문에 무척 피로한 일이므로, 나는 오늘부로 노정태의 글을 한국적 반지성주의의 집적체로 선언하기로 한다. “반면 '나는 직접민주주의자가 아니오'라고 베드로처럼 부인하면, '그럼 촛불을 끄고 국회의 개원을 촉구합시다'라는 온건한 자들에게 대꾸하기가 매우 난망해진다.”라는 말을 들어보라. 난망하기는 뭐가 난망한가. 머리라는 건 그런 말을 하는 이들에게 반박할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얘기했던 것처럼 정당과 운동이 모순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직접민주주의자가 아니라면 운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따위의 명제를 짓밟는 건 최장집을 인용하지 않아도 우습다.


시위참여자들이 잘못된 프레임에 빠졌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 될까. 한명의 학자가 자신의 소신을 발언해도 그것이 잘못된 프레임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정말이지 그 학자의 책임인가? 답변이 어렵다면 책임 운운은 집어치우고, 그렇다면 그 프레임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따져보자. 답은 간단하다. 촛불시위를 지지하는 시민이든, 그렇지 않은 시민이든,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더욱 정확한 이해를 하게 되었을 때, 최장집의 발언이 잘못된 형이상학적 대립구도로 미끄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이쪽이든 저쪽이든 사람들은 더 똑똑해져야 한다. 프레임에 빠지는 건 우리가 충분히 알지 못해서다. 그러한 무지는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는 아니므로, 비난받을 일은 아닐 수 있다. 그렇더라도 “무지가 도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은 진실이다. 노정태가 남들보다 최장집을 더 안다고 생각했다면, 그의 말이 그러한 프레임에 빠질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으로 밝혔어야 했다. 공동체의 문제를 지적으로 취급하기 위해선, 바로 그러한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노정태는 그런 작업은 하지도 않으면서, 정치의 철학화를 비판하고, 철학의 정치화를 말하면서, 최장집을 비판하고, 공부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글의 실천적 효용은 공부하는 게 아니라 한 학자의 소신있는 발언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러면 당시의 최장집에게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생각해보자. 1) 소신대로 발언을 한다. 2) 소신대로 발언하지 않고 적당히 촛불시위대를 찬양한다. 3) 입을 닫는다. 이것 뿐이다. 2)가 비록 노정태가 보기에 흐뭇한 행동일지라도, 적어도 그것이 ‘지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1)과 3)이다. 이 상황이 침묵해야 할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침묵하는 것이 ‘철학의 정치화’에 도움을 주는 행동인가? 무슨 선불교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그런 것이 어딨나? 그리고 지금이 입을 닫아야 하는 시점이라는 판단은 도대체 누가 내리는가? 노정태?


발화자는 자신의 발언이 사회적으로 왜곡되는 방식을 모조리 다 책임져야 한다는 류의 주장에 대해, 지난 세월 나와 노정태는 반대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따지면, 아무 말도 못한다. 이를테면 조중동과 노빠가 싸우고 있다. 노빠를 까면 조중동이 인용하고, 조중동을 까면 노빠가 인용한다. 그러면 노빠도 싫고 조중동도 싫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왜곡의 방식을 모조리 책임지려면, 말을 마는 수밖에. 그러므로 노정태의 최장집 비판이 옳다면 과거에 나도 노정태도 아가리를 닥쳐야 했다. 이제 와서 그런 방향으로 견해를 수정한 거라면 내게 알려주길 바란다. 그러면 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둘다 변호하려고 한다면, 그곳에는 이론적인, 아니 유사-철학적인, 아니 수사적인 곡예의 길만이 남을 뿐이다.


한국사회의 지식인들이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쓸모있는 대답을 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선 동의할 수 있다. 동의할뿐더러 나 역시 문제적으로 느끼는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사실도 관찰해 왔다. “지식인들은 현실에 대해 쓸모없는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들은 탁상공론이나 한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지식인을 비난할 때, 그 비난의 대상은 종종 가장 현실에 밀착해서 발언을 하려는 지식인들이었다. 당연하다. 탁상공론하는 지식인들은 대중과 반목할 이유도 없으니까. ‘지식인 무용론’으로 특정한 지식인을 규탄하는 저러한 목소리는, 대부분의 경우에 자신의 상식(혹은 편견?)과 지적인 탐구의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고집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주로 진중권이나 최장집같은 지식인들이 그같은 고집스런 목소리의 비난을 들어왔다. 오늘의 노정태가 최장집에 대해 하는 말의 구조도 그 고집의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 그는 최장집의 이론에 지적으로 정당하게 덤빌 생각도 않고, 한국의 맥락이 어쩌구 하면서 최장집의 책임도 아닌 외곽을 때리다가, 그것을 핑계로 최장집 주장의 의의마저 부정하려는 비겁한 자세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만일 정말로 그 지식인이 자신의 책무를 게을리하는 더러운 글을 썼다면, 노정태는 그 지식인보다 더 지적인 레벨에서 그를 논파했어야 했을 거다. 노정태의 글은 과연 그런 글이었나? 물론 내 대답은 단호하게 "No!"다.


“결국 우리는 지고 또 지면서도 꾸준히 배워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부하고 싸우고, 싸우면서 공부해야 한다. 그게 바로 철학의 정치화이다.”


갑툭튀 '철학'이 소환되어 정치화까지 하라니 아직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공부하자"는 말엔 동의한다. 내가 노정태에게 하고 싶은 말도 바로 그거다. 이 긴 글을 통해 나는 노정태의 무의식을 분석하려는 의도가 없었고, 다만 그의 무식을 타파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의 글이 워낙에 배배꼬여 있어 이 작업이 무척 수고스러웠기 때문에, 이 친절한 작업에 합당한 경의를 그에게 요구하는 바이다. 결론은 이만하면 됐다.
 


hyun

2008.09.17 19:37:13
*.99.80.36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왜 포스팅 한 글의 행간이 다닥다닥 붙어 겹쳐 떠서 거의 읽기 불가능한 모양일까요. 펌 해온 글은 안 그런데, 윤형씨가 올린 글은 그 모양으로 뜨네요.

하뉴녕

2008.09.18 03:06:27
*.49.65.32

헐 그런가요. 저는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2008.09.18 01:55:39
*.149.64.146

"철학의 정치화"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이 저만이 아니었군요. 다행입니다^^

하뉴녕

2008.09.18 03:09:51
*.49.65.32

제목을 멋있게 하기 위한 레토릭에 불과했던 게 아니었을까...라는 혐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의 철학화"는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철학의 정치화"는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철학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세상도 아니고 (노정태씨가 철학의 전문가인 것도 아닙니다만) 각 분과학문들이 고유한 방법론들을 가지고 있죠. 저기서 '철학'이란 말의 용법은 거의 철학이란 말이 모든 학문이란 말과 비슷한 말이던 시대의 것인 것 같아요. 그래서 사회과학자를 씹어놓고 인문학자들의 성찰을 요구하는 어이없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 테죠.

hyun

2008.09.18 21:12:22
*.99.80.36

이제 보니 티스토리 블로그는 모두 그 모양으로 뜨네요. 제 컴에 윈도우가 안 깔려서 그런건가봐요, 쳇.

마치래빗

2008.09.19 01:28:43
*.183.105.224

"철학의 정치화"와 "정치의 철학화"
철학을 미학으로 바꿔서 읽어보면 베냐민인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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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정태의 최장집 비판에 대해 [6] [1] 하뉴녕 2008-09-13 1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