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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투쟁하는 주체'와 '자기계발하는 주체'

조회 수 2308 추천 수 0 2009.12.21 15:25:56

서동진 쌤의 <자유의 의지 자기 계발의 의지>를 아직 보지는 못했는데, 쟁가 님이 이에 대해 간략한 코멘트를 했다. http://xenga.tistory.com/175 이 코멘트를 보고 서동진의 프레시안 인터뷰를 찾아 들어가 읽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1218194250&section=04 이 인터뷰를 보니 쟁가 님이 문제삼은 부분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쟁가가 문제삼는 것은 '투쟁하는 주체'와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구별하는 부분이다. 서동진은 자신은 '지배당하는 사람'의 문제를 해명했으며, 여기서 '투쟁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기는지에 대해선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것을 쟁가는 '투쟁하는 주체'와 '자기계발하는 주체'에 관한 '구분'으로 받아들이고 그 '구분'에서 어떤 일이 생겨나는지를 예시하려 한다.


여기서 쟁가가 비판하게 되는 것은 사실 서동진의 논의라기보단 김용민의 논의다. 혹은 술자리 담화를 용감하게 발설한 김용민으로 대표되는 진보좌파 지식인들의 어떤 프레임이라 볼 수 있겠다. 말하자면 '투쟁하는 주체'와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구별하는 것은 1980년대의 대학생과 1990년대의 대학생을 구별하는 것과 같다. 이런 구별은 1990년대를 '환멸의 시대'로 규정하게 만든다. 정확하게 이것은 '20대 개새끼론'으로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김용민의 발언이 문제가 된 이후 김용민은 자신의 발언의 수위에 대해 조절을 거듭했다. 20대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그의 의도(?)는 아니었을 거다. 나는 그의 선량함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발언의 수위를 조절하더라도 그의 발언에 담겨 있는 기본적인 프레임은 이런 것이다. "386들은 어쨌든 젊어서 투쟁을 했음에도 오늘날 이렇게나 무력하다. 그런데 이렇게 얌전한 20대들은 얼마나 체제에 복속당하는 존재가 되겠는가?" 여기서 김용민의 논리는 노빠의 것이 아니라 좌파의 것이며, 20대를 향하는 그의 감성은 경멸이라기보다는 연민이다. 이러한 인식은 역설적으로 '촛불시위'라는 (386의 눈으로는) 뜻밖의 사건을 통해서 전면화된다. 그 전에는 '시대'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말이 될까봐 쉬쉬했지만, 촛불시위라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 '새로운' 현상에 초점을 맞추어 마음껏 '세태'를 규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투쟁하는 주체'와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구별하는 눈으로는, 촛불시위라는 돌발사건에서 '새로운 투쟁하는 주체'를 발견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 새로운 투쟁의 주체와 기존의 90년대를 구별해야 하기 때문에 '20대'와 '10대'는 변별의 대상이 된다. '10대'의 투쟁의 '자질'은 심지어 그들의 부모가 386세대라는 사실에서 나온다고 추론된다. 10대들에 관한 온갖 장미빛 예찬이 어떤 욕망에서 발현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촛불시위의 역량의 어떤 부분이 온라인에서 나왔다는 추론이 일반화되자, 우습게도 90년대에서 2000년대 내내 온라인의 문화현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던 진보지식인들이 갑자기 온라인의 힘을 예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했던 그 현상에 대해 갑자기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에 대해 해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은 관심이라 할 것도 없다. 촛불시위와 관련해서 온라인을 예찬한 후, 그 지식인들은 다시 온라인에 대한 관심을 꺼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 자신들이 인용하는 철학자의 담론을 온라인의 문화현상에 적용하기를 거부했던 그들은, 촛불시위라는 하나의 현상에 그 철학자의 담론을 간단히 결합해보는 유희행위를 한 후 다시 온라인에 대한 관심을 끄고 동굴로 들어간다. 진중권의 촛불시위 평론에 온전히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지난 시기에 온라인에서 계속 무언가를 했던 진중권이 그런 지식인들에게 신경질이 났다면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쟁가의 서동진 비판의 함의가 이 정도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서동진 비판이 아니다. 왜냐하면 서동진의 논의는 차라리 '촛불시위'나 '10대'와 같은 것들도 '자기계발하는 주체'에 엮으려는 것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80년대의 투쟁의 결과가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낳았다는 진술에서 80년대의 투쟁 자체를 돌이켜 보려는 의도를 띄고 있기도 하다. 굳이 이어본다면 서동진의 '구별'은 '자기계발하는 주체'와 '투쟁하는 주체'를 구별하는 논의에서 가장 급진적인 일관성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투쟁하는 주체'를 손쉽게 분리하여 80년대를 긍정했다기 보다는,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폭넓게 설명함으로써 그것과 구별되는 '투쟁하는 주체'의 존재를 의문시하게 되는 결과를 낳은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는 것이기도 한 서동진의 90년대 비판은, 그 비판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80년대와 90년대를 무가르듯이 구분하는 종류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투쟁하는 주체'와 구별하는 것이 형이상학적이라면, 쟁가가 말하는 바대로 "자기계발하는 주체와 투쟁하는 주체의 동일성을 증명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 역시도 형이상학적인 일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성형을 통해 자기계발하는 여성의 욕망이 촛불시위의 동력이기도 했음을 '경험적'으로 얘기한다고 해서 증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서동진은 이에 대해 '촛불시위 역시 투쟁하는 주체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코멘트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좌파들이 촛불시위를 순수하게 상찬하는 것은 그 시위의 이면에 좌파들이 경멸해 마지 않은 그 욕망이 넘실거린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지적 게으름의 발현일 것이다. (그 '경멸'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따져야 할 어려운 문제이긴 한데, 촛불시위를 칭찬하면서 그렇게 귀찮은 일을 한 사람은 거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같은 식의 구별법이라도 그것을 '윤리적'으로 부여잡을 때엔, 종국엔 그 구별법 자체가 해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서동진의 논의는 보여주는듯 하다. '투쟁하는 주체'를 '자기계발하는 주체'와 분리할 때, 그는 그 구분의 선을 80년대와 90년대에 그은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곳에 그었다. 그리고 그 선 너머의 '투쟁하는 주체'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이것은 386세대의 자뻑과는 좀 다른 이야기다. 하지만 '그 이후의 진도를 빼야 하지 않겠느냐'는 쟁가의 투덜거림도 타당하기는 하다. 말하자면 이 맥락에서 볼 때의 서동진의 논의는 '우리는 왜 무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인 것인데, 사실 좌파들이 무력한 이유 따위는 (좌파들 빼면)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P.S 읽지도 않고 이리 긴 글을 쓰다니 미안해서라도 리뷰를 한번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0-;;

정해찬

2009.12.21 18:07:19
*.199.134.229

좌파는 왜 무력한가?

한국에서 이념적이지 못한(스스로가 그리 여기는 경우) 보통 사람의 투표시 나타나는 정치적 지지는 능력에 대한 지지라기 보다는 매력에 대한 지지며, 그 매력의 핵심 요소가 이미지와 기득권이라는 점에서 그 둘중 좌파가 차지 할 수 있는 어떤 몫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와 더불어 박근혜가 박통의 딸이라는 이미지로 또는 점잖고(본질은 기회주의지만) 곱다는 이미지만으로 챙겨 먹을수 있는 지지율을 생각하면 갑자기 억울해 지다가 어쨌든 이 문제 인식이 그리 틀리지 않다면 방법은 노회찬대표를 아이돌로 만들어야 한다는 암담한(?) 결론이 나오는군요. (이건 아닌가??? ㅎㅎ)

쿠르세

2009.12.21 20:57:33
*.149.185.199

그람시 신을 소환합니다!!! 헤게모니여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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