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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슈리 님과 그의 글을 (부분적으로) 옹호하는 박가분 님은 슈리 님 글에 대한 비판 가운데 오직 “슈리는 맑스의 이론을 오해했다.”는 측면의 것만 받아들이고 있다. 하긴 맑스주의로 사태를 재단하려던 사람이 맑스주의에 무지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본인에게 돌아갈 정서적 데미지만 보면 그 지적이 가장 중요해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겐 그 부분이 사태의 핵심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슈리 님의 글이 활용한 근거가 모두 타당하다고 인정할 때라도, 그의 글은 논증적인 부분에서 좌충우돌하고, 결과적으로 ‘무의미’를 발생시킬 뿐이라는 지적을 하였다. 그런데 슈리 님이나 박가분 님이나 그 사실을 수용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역지사지를 동원해 보자면 그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 논증이란 것이 보통의 생각과는 달리 산수 문제처럼 딱딱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일정한 맥락을 공유해야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슈리 님과 박가분 님(너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이하 두 사람을 함께 언급할 땐 ‘슈가분 님’으로 표기)이 어떤 이들의 비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는 저들이 모르는 맥락을 고려하고 있고,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은 나는 그들이 말하는 ‘맥락’과 ‘문제의식’이 이미 남들도 다 알고 지나친 내용이라고 판단한다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벌거벗은 꼬맹이들이다. 심지어 그들은 내가 그들의 무지함에 경악하며 똥씹은 표정으로 랜턴을 비추었을 때, 내가 그들을 부당하게 발가벗겼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나는 이 글에서 방금 내가 든 비유가 문자 그대로의 사실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시작하기 전에 양해를 구해야 할 부분이 있다. 나는 모든 종류의 글을 명료하고 가독성 있게 쓰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는 불명료하고 복잡하게 쓰여진 글에 대해서 논박할 경우에 대해서만큼은, 내 노력의 성과가 매우 부실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글은 명료하되 쉽게 읽히지는 않는 글일 수가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글의 가독성 문제에 대해서 내게 항의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글은 슈가분 님이 맑스주의의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글보다 훨씬 더 예민하고 섬세한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혼란스러운 텍스트 중에서 그런 문제를 집어 내는 일은 근본적으로 복잡한 일이기 때문이다. 슈가분 님의 텍스트를 눈물 흘리면서 읽어본 경험 없이 내 글의 가독성에 대해 항의하는 것은 공정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다.   


====


슈리 님은 "좌파는 성매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후, 맑스에 대한 얘기로부터 논의를 출발했다. 여기엔 암묵적인 몇 가지 가정들이 있다.


1) 좌파는 어떤 이론적이거나 도덕적인 친화성을 가진 집단이다. 
2) 그러한 집단으로서의 좌파는 특정한 정세나 문제에 대해서 하나의 판단을 공유할 수 있다.(혹은 공유해야만 한다.) 
3) 좌파를 좌파이게 하는 그 친화성의 핵심은 맑스의 이론이다.


이 가정들은 제각각 논박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많다. 그리고 그런 질문과 답변을 통한 갑론을박이야말로 1)번의 가정을 성립시키는 기반이라 할 것이다. 아마도 슈가분 님이 “이 글이 쓸모없다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는 심리의 기저에 있는 것도 이 논쟁이 1)번의 가정을 구성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 때문일 게다. 슈가분 님이 이 문제에 대한 자료를 찾아본다고 했을 때, 그들은 자료를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좌파’나 ‘페미니스트’들이 성매매에 대해 상이한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욕하는 ‘좌파’이든, ‘페미니스트’이든 간에)당신들끼리도 의견일치가 안 되는데 어째서 우리 얘기만 그르다고 말하는가?”라고 말하고픈 충동에 사로잡힐 것이다.(이미 그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그들의 ‘반응’이 자기 논박적이라는 데에 있다. 가령 좌파 진영 내, 페미니즘 진영 내에 성매매에 대한 상이한 입장이 있는 것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애초에 슈리 님이 “좌파는 성매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 자체가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설익은 이상주의의 발로로 평가되어야 한다. 반면 슈가분 님이 그 문제제기에 대해 여전히 의미를 느낀다면, (물론 이 논쟁이 한 진영의 공통해답을 결론으로 이끌어낼 수는 없을지라도 그런 논쟁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면) 그들은 그 ‘논쟁’에 끼어든 갖가지 입장 중 어떤 것은 의미있다는 평가를 받고 어떤 것은 무의미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의 글에 대해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이 만만치 않은 논쟁에 설익은 입장 하나가 밥숟가락을 디밀고 들어오는 것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논쟁이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 해도 그 논쟁에 참여한 모든 글이 의미있는 것으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즉 어떤 사람이 그들의 글이 의미없다 논평한다고 하여, 그가 좌파 진영이나 페미니즘 진영이 성매매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가지지 못하고 분열하는 현실에 대해 해명할 의무를 지게 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슈리 님의 글에 대한 “쓸모가 없다.”는 일반적인 평가에 대한 슈가분 님의 반박에 대한 내 답변이다. 슈가분 님은 “그럼 도대체 어떤 글이 현실세계의 운동에 쓸모가 있단 말이냐?”라고 반박하고 싶은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무의미나 무쓸모가 그런 차원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가령 내가 블로그에서 성매매 합법화를 주장한다 한들, 혹은 성매매 특별법을 찬성한다 한들, 그게 현실세계의 운동에 영향을 미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게 명료하게 전개된 견해는 어떤 식으로든 평가될 수 있다. 


슈리 님 글의 가장 큰 문제는 그 글이 말하는 바가 전혀 명료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식으로도 평가될 수 없고, 슈리 님이 외려 그 점을 활용하여 약간씩의 추정을 동반한 다른 이들의 평가에 저항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슈리 님이 맑스를 잘못 활용했다는 것은 그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이기는 해도, 그렇게 잘못 활용해서 도출된 결론이 명료하다면,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바가 없지는 않다. 적어도 그와 같은 방식의 논증이 오류라는 사실만큼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슈가분 님이 그 잘못된 활용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핵심논지를 어떤 방식으로 고수한다고 했을 때, 그 고수하는 바가 명료하지 않다면, 그들의 글은 정말로 쓸모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글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슈리 님 글의 결론이 무엇이라고 판단될 수 있느냐에 있다. 일단 내 질문에 대해 답변하지 않는 슈리 님은 자신의 글의 결론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까지 진전된 논의를 따르자면 슈리 님 글의 결론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미 언급한 대로 슈리 님의 글이 오류로서라도 의미를 지니려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선택되어야만 한다. 


하나의 방법은 이거다. 나는 첫 번째 비판 글에서 슈리 님의 글의 논지를 요약한 후, “정리하자면 이글의 논지는 좌파들은 성매매특별법에 찬성해서도 안 되고, 성매매 합법화에 찬성해서도 안 되며,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근데 슈가분 님은 이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입장인 것 같다. 


그들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박가분 님이 제시한 슈리 님의 결론을 살펴본다면 이렇다. “결국 슈리의 최종적 논점은 좌파들에게 정치적 진리(혹자에게는 이 단어가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당파성이라는 용어를 차용해도 무방하겠다)를 판가름할 수 있는 유일한 객관적 장소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그 자체이며, 거기서 일어나는 유의미한 변화에 관해 취할 수 있는 당파적 입장을 제외한다면, 그 나머지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은 말 그대로 '열려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 영역에 대해 좌파가 정치적으로 취할 수 있는 입장은, '상황'에 대해 열려 있는 문제이며, '실용적 판단'에 의해 대답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선의가 넘치는 사람이고, 더 이상 구분하는 것도 귀찮기 때문에, 편의상 박가분 님의 정리를 슈가분 님의 견해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발생하는 문제는 이렇다. 슈가분 님의 정리가 옳다면, “좌파는 성매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주어진 대답은 없다. 그 대답은 열려 있다. 그러므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열려’ 있다는 것만 인정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고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슈가분 님이 ‘좌파’를 무엇이라 정의하는지 불분명하지만, 여하간 좌파들은 그 문제가 닫혀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보기엔 별로 그렇게 생각해야 할 근거가 없다. 내가 보기에 슈가분 님의 ‘결론'이 현실세계에서 모종의 의미를 획득하려면 다음과 같은 맥락이 필요하다. 


1) 좌파들이 성매매 문제에 대한 단일한 대답을 가지고 있고, 다른 생각을 하는 좌파들을 억누르고 있는 경우 
2) “모름지기 좌파라면 이 문제를 이렇게 봐야 하는데...”라는 말로 시작하는 상이한 견해를 가진 두 개의 집단이 끝이 없는 패싸움을 하는 경우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슈가분 님은 어디 다른 우주에서 살다 오신 모양이다. 물론 내가 모르는 곳에서 저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수는 있다. 근데 우리 우주에서 저런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하려면 그 ‘맥락’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만약 슈리 님이 그런 맥락을 찾아봤다면 본 글의 구성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슈리 님의 글에는 ‘맑스’와 ‘나’만 있을 뿐, 그 사이에 이 문제로 뭔가 논의를 했을 다른 사람들의 자리는 없다. 뒤늦게 슈가분 님이 이런 저런 자료들을 찾아보며 “우리 얘기도 별로 틀리지는 않았잖아?”라고 써먹을 만한 텍스트의 조각들을 들춰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애초에 그들이 그들 자신만의 어떤 상상적인 우주에서 논의를 시작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내가 보기에, 좌파를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은 맑스가 이 문제에 대해 ‘닫힌 대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접근할 때 굳이 맑스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려 들지 않는 것일 게다. 맑스에 의하면 열려 있는 문제이니 무언가 판단하고 행위하기 위해선 다른 것을 끌어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박가분 님은
슈리의 논점 성매매 여성의 문제에 대한 입장이 정치적 당파성을 결정하는 데 유의미한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야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성매매 합법화에 찬성한다고 해도 좌파일 수 있고, 성매매 특별법에 찬성한다고 해도 좌파일 수 있다. 성매매에 관한 입장만 가지고 어떤 사람이 '좌파도 아니다'라고 비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다만 좌파들은 성매매 여성이 사회적 약자인 한에서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초보적인 원칙에만 합의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게 박가분의 입장에서 읽어낸 슈리의 논점의 합리적 핵심일 것이다. 그리고 슈리 님이 단지 그렇게만말했다면 비판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슈리 님은 바로 그렇게 행동하는 좌파들을 비판한다! 


(...) ‘노동’이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나는 맑스의 견해를 참조할 것이다. 이는 신 존재 증명 문제를 다루려고 할 때, 안셀무스와 칸트를 참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것이며, 이 문제에 관하여 인식적 가치가 있는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모두가 동의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문제는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나에게는 이러한 현상 그 자체가 문제적인 것으로 보인다.

(...) 나는 전통적인 맑스주의가 성매매에 관해 취했던, 혹은 취해야 했을 접근을 다시 한 번 세공했을 뿐이다. 내가 이 글을 통해 진정으로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이처럼 나 자신이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 길고 지루한 글을 써야만 하는 상황 자체가 심히 문제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좌파가 정세를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는 계급투쟁에서 밀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 그런데 맑스가 뭐라고 했는가? 평범한 의식에게는 경제적 실재의 메커니즘이 완전히 전도되어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현상과 본질이 일치하면 과학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단적으로 말해서 성매매를 둘러싼 수많은 입장차이들 사이에서 좌파가 선택해야 할 것은 거의 없다. 그 자체만으로 문제가 되는 차이들, 다시 말해 사회적 적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입장의 차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 정확히 침묵하는 것도 진리를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다. 역으로,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정확한 타이밍에 능동적으로 침묵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맑스가 청년 시절에 쓴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실적 힘을 가지지 못한 좌파들의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무기는 진리였다.

(...) 맑스의 자본주의 체제 분석은 여전히 우리가 이 분야에서 가지고 있는 최고의 진리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맑스의 이론이 무슨 심각한 학문적 반박을 받고 몰락했기 때문에 오늘날 읽히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이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런 일은 없었다. 주류 학계는 맑스가 발견한 진리들을 그냥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해왔다. 동시에 그들은 맑스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굵은 글씨 강조는 편집한 내가 한 것) 



슈리 님은 사실 좌파들이 맑스의 대답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성매매 문제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을 용납할 생각이 없다. 슈리 님의 논점이 박가분 님이 정리한 바와 같다면, 적어도 성매매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맑스의 이론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즉 무력함을 인정해야만 한다. 맑스 이론이 성매매에 관한 지침을 주지 않으므로 좌파들은 다른 기준들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슈리 님은 정반대로 나아간다. 위에서 보았다시피, 슈리 님은 도대체 왜 좌파들이 맑스라는 진리를 외면하냐고 호통을 친다. 그가 말하는 바는 우리는 오직 맑스의 진리에 입각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슈가분 님은 사라지고 다시 슈리와 박가분은 분리된다. 


슈리 님의 좌파 비판이 공허해지지 않으려면 다시 한 번 결론은 이쪽으로 돌아와야 한다. “정리하자면 이 글의 논지는 좌파들은 성매매특별법에 찬성해서도 안 되고, 성매매 합법화에 찬성해서도 안 되며,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슈리 님의 논지를 이보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리고 슈리 님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본인의 결론이 이것이었음을, 그리고 그 결론이 오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오류도 명백해야 의미를 가진다. 명백하지도 않은 오류는 무가치하다. 


박가분 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 성매매 여성의 문제에 대한 입장이 정치적 당파성을 결정하는 데 유의미한 기준이 아니라는 슈리의 논점이 여성주의에 대한 '공격'인가? 그리고 그것이 왜 여성주의에 대한 연대를 선험적으로 '거부'하는 제스처가 되는가?” 


이 질문에, 내가 정리한 슈리 님의 결론을 포개보도록 하자. 그 결론은 그 자체로 여성주의에 대한 공격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여성주의에 대한 연대를 선험적으로 '거부'하는 제스처”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발화와 행동은 구별될 수 있다는 식의 말장난을 거부한다면 말이다. 


이를테면 내가 청소년 인권조례 서명운동에 찬성하는 것을 금지당한 상태로 서명지에 사인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상황을 가정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굳이 상황을 구성하자면 가령 내가 부모님에게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에 있고 그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 같은 것이 있겠다. 그런 상황에서라도 물론 나는 부모님을 속이고 서명지에 사인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경우 내게 금지를 요구한 대상, 즉 부모님은 분명히 청소년 운동에 대한 내 연대를 ‘거부’하고 있다. 


여기서 부모님을 ‘좌파라는 정체성의 굴레’로 바꾼다면 어떻게 되는가? “좌파들은 성매매특별법에 찬성해서도 안 되고, 성매매 합법화에 찬성해서도 안 된다.”는 요구가 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주어진다면, 좌파는 여성주의에 대한 연대를 거부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는가? 혹시 좌파라고 인정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 채 성매매 문제에 대해 이런저런 입장을 취한다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몰래 서명지에 사인하더라도 내 부모가 나의 연대를 금지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사태를 이렇게 정리할 때에 이 오류는 너무나 명백해서 더 이상 논의할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슈가분 님은 본인이 이러한 오류를 범한 것은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그렇게 강변할 때, 문제는 또다시 아까의 것으로 회귀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상우주에서 좌파들을 공박한 책임을 인정해야 하며 그 주장이 자기논박적이란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남들이 다 아는 소리를 주장이랍시고 하면서 이것도 모르냐고 잘난 척하는 영구 같은 짓을 한 것이다.      


왼발과 오른발이 모두 물에 빠져있는데 발을 열심히 놀린다 하여 물에 안 빠질 방도는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도 아니고, 무협소설에 나오는 등평도수(登萍渡水)의 경공을 쓸 방도도 없다. 도망다녀봤자 오류는 오류일 뿐이다. 우회를 해도 오류는 오류다. 이만큼 자명한 일은 없다. 두 개의 명백한 오류 사이에서 슈가분 님은 적어도 양자택일은 해야 한다. 어쩌면 내가 미처 모르는 다른 가능성이 열려 있을지 모르지만, 그 경우라도 슈가분 님은 그 가능성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를 설명할 의무를 스스로 진다. 


글쓴이가 자신의 글의 결론을 모른다는 것이 참으로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리고 그런 글을 옹호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물론 나는 슈리 님의 문제제기에도 경청할 만한 맥락이 있었다고 본다. 그 컨텍스트는 적어도 그의 텍스트보단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그의 텍스트는 그 컨텍스트를 전혀 소화해내지 못하고 좌충우돌했다. 이 문제는 박가분 님이 말씀하신 “맑스주의의 아포리아”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글이 길어졌으므로 이 얘기는 다음 글에서 하도록 한다.  

 

outitz

2011.05.24 20:21:51
*.169.102.163

sugar粉 이라니 굉장히 달콤한 이름을 만들어 내셨군요.

순수 학술적인 논쟁이 아니라 현실 사회의 문제를 논하는 글은 대체적으로 크게 복잡하거나 읽기 힘들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슈리라는 분은 전달하고 싶은 내용에 대한 열정보다는 전달하는 행위에 대한 열정이 더 넘치는 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뉴녕

2011.05.24 20:30:48
*.171.69.149

본인의 글이 순수 학술적인 논쟁의 영역에 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리

2011.05.24 21:57:59
*.117.115.16

네번째 문단 '슈가분'.......ㅋ

참으로 달콤하고 고운(?)이름이어요!

하늘타리

2011.05.24 22:21:53
*.36.170.102

맑스를 현실 맥락에 맞춰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맑스주의 내 학술적인 논쟁이었다면 더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 봅니다. 학술적 논쟁 내에서라면 오류야 인정하고 가르침을 받으면 되니까요.

하뉴녕

2011.05.24 22:36:36
*.171.69.149

저 역시 학술적 논쟁을 할 능력은 없지만 그 부분의 맥락에 대해 다음 글에서 다루게 될 것 같습니다. ^_^

Y

2011.05.25 07:01:30
*.40.253.114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 한 선생은 정규 석박사 코스를 밟으면 더 큰 세상에 있을 수 있는데, 왜 안 하는지요?^^

양승훈

2011.05.25 19:00:14
*.132.5.36

한선생님은 학부를 졸업하셔야지요.. 하...

김대영

2011.05.25 14:36:28
*.66.49.84

노동가치설 얘기를 안하면 대출이자를 더 내는 분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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