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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박용진 1971년생 : 당시 31세
주대환 1954년생 : 당시 48세
강준만 1956년생 : 당시 46세
...주대환 글에 잠깐 등장하는 황광우는 1958년생 


십 년 전에도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 근데 십 년이 지난 후에 다시 보는 느낌은 묘하다. 빗나갔지만 그때의 시점에서 반박하기 어려웠던 예측들과,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해결될 수 없는 쳇바퀴들이 있다. 이 논쟁글들을 일독한 후 느낀 점들을 각자 조금씩 써봐도 좋을 것 같다.

나는 당시에, 박용진의 글은 별로라고 생각했고 강준만과 주대환의 글은 좋아했다. 강준만은 이전부터 좋아한 사람이었고 주대환은 훗날 더 좋아하게 되었다. 강준만의 글은 평소의 글과 다르게, 강준만도 정서적으로 격앙된 비판을 받으면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글이었다.(사실은 강준만의 글 스타일은 정치적포지션과는 별개로 박용진에 더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주대환의 글은 몇 가지 현실인식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런 강준만의 글에 대한 좌파진영의 깔끔한 반론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십 년만에 다시 읽어보니, 당시 박용진의 글은 우리가 오늘날 허다하게 발견하는 '좌파'들의 글보단 훨씬 낫다. 오늘날 박용진이 복지국가 단일정당론을 지지하는 이가 되고 주대환은 "유럽 사민당 노선이 실패했으니 이젠 미국 민주당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게 된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아니, 그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라 진보정당 운동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일 게다. 진보정당 독자노선이 필요함을 가장 설득력있게 주장하던 논자들이 이탈한 국면, 을 진보정당 지지자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게다.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세 사람의 글의 논지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능만 한 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많다. 박용진의 논지는 좌파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고, 강준만의 논지는 민주당 지지자나 참여당 지지자 중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으며, 주대환의 논지 역시 참여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 지지자들 사이에 널려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십 년전에 나왔던 논점임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정치에 대해 하는 말은 이보단 더 진전된 면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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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지지'의 망령을 경계하라 

-강준만의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비판 

박 용 진 


강준만의 책을 읽다보니 그의 말투를 따르게 되는가보다. 중간에 이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욕구를 참아가며 끝까지 읽은 이유는 하나다. 신문에서 이 책의 광고를 보는 순간 이 책의 의도를 의심했고 그 의심을 밝혀내려 했기 때문이다. 결론도 하나다. 당원들은 절대 이 책을 읽지 마라. 이 책은 그야말로 말 많은(두 가지 의미다. 강준만은 실제 말이 많고 또 논란도 많이 일으킨다.) 강준만이 ‘노무현 대통령 후보 만들기’를 작정하고 쓴 노무현 찬양, 혹은 DJ에 대한 애틋한 애정 표현의 기록이다. 문제는 그것을 언론개혁이라는 시대적 요구와 등치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내가 충실한 감방생활(?)을 마다하고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도 강준만의 선정적인 글과 책 제목에 의해 당원들이 시간을 낭비할까봐서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내 시간이 너무 억울해서 한 가지는 더 이야기하려 한다.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한 유령에 대한 경계와 투쟁 의지를 당원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유령의 이름은 ‘비판적 지지’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강준만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국민사기극’을 DJ 때에 이어 다시 한 번 자행하고 있음을 밝히고 행여 우리 주변에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비판적 지지’라는 망령을 퇴치하자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 


강준만의 ‘국민사기극’ 

이 책에서 강준만의 노무현 찬양과 그를 위한 변론은 책 전체에 넘쳐 흐르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한 두 곳을 지적하기란 힘들지만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지경인 몇 표현만 일단 옮겨본다. 

“노무현은 그 어떤 실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곧 이야기하겠지만 그는 모든 면에서 매우 앞서가는 탁월한 역량을 보여왔다.”(252쪽) “노무현의 경우엔 흠잡을 게 거의 없다. 칭찬할 것 뿐이다.”(253쪽) “조선일보사와의 일전은 ‘노무현다운’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48쪽) 
 
거의 한 ‘영웅’에 대한 서사시 수준이다. 여기에 더해 강준만은 노무현과 인터뷰하는 모든 기자들에게 질문하지 말아야 할 항목까지 나열하면서 불경죄를 저지르지 말 것을 당부한다(205쪽, ‘기자들의 냉소주의와 패배주의’). 

강준만은 노무현이야말로 대통령감이라는 심지를 확고히 굳히고 있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믿음을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좋아하는 정치인을 칭찬하고 지지를 공개하는 것이야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지난 97년 대선에서 
『김대중 죽이기』를 통해 ‘DJ에 대한 지지’를 유포하고 민중을 현혹하여 나타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외면하면서, 또 다시 ‘노무현 지지’를 조직하려는 것이 그가 늘 이야기하는 ‘지식인다운 행동’인가를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하는 각종 근거에서 ‘노동자·민중을 위한’ 것은 없다. 그저 잘 보고 찍는 ‘국민’의 역할만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강준만은 노무현을 비전도 갖추고 지역감정을 뛰어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을 한 인물이라고 내세운다. 보수언론과의 일전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고 칭찬하면서 망국적인 학벌주의와 학연주의로부터도 자유로운 상고 출신 사법시험 합격자라는 점을 강조한다. 노무현을 두고 그는 ‘노동자의 편’(60쪽)이라고까지 하고 있으며 ‘서민의 친구’라고 주장한다. 

그의 노무현판 ‘용비어천가’가 단지 한 독특한 지식인의 글쓰기에 그친다면야 내가 없는 돈에 그 책을 이 감옥에서까지 구입해 볼 일이 뭔가. 그리고 손 저려가며 이 글을 쓸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나는 그가 이 책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 때문에 이런 ‘글쓰기 전투’를 하는 것이다. 

“나의 당파성으로 말하자면, 나는 새천년민주당의 비판적 지지자이다. 어느 정도로 ‘비판적’인가? 당 총재부터 말단 당원에 이르기까지 국민에게 석고대죄(席藁待罪)해 마땅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비판적이다. 그런데 지지는 왜 하나? 국정운영에 대한 책임과 집권 가능성을 전제로 해 최선(最善)도 차선(次善)도 없는 상황에선 차악(次惡)이라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7쪽, ‘지식인의 현실참여 방식에 대해’) 
 
이거 어디선가 늘 듣던 소리 아닌가. 지난 87년에도, 92년에도, 97년에도 듣던 이야기다! ‘차악’이라 … 지긋지긋한 논리가 다시 부활하고 있음이다. 물론 강준만은 316쪽에 이르는 이 책에서 ‘석고대죄’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의 ‘비판’은 ‘지지’를 위해 따라온 수식어에 지나지 않는다. 

강준만의 이른바 ‘당파성’ 운운의 주장은 필경 우리 운동 진영 내부의 미혹한 틈을 비집고 분열의 싹을 틔우게 할 것이며, 보수정치에 지쳐있는 노동자·민중에게 또 다른 환상을 심어 지옥같은 삶을 계속하게 만들 위험한 병균이고, 퇴치되어야 할 전염병이다. 


2002년 대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이라는 책 속에서 강준만은 보수세력과 수구언론의 전횡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그리고 DJ 정권과 그 적자인 노무현만이 이 세력들과 맞서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며 ‘이 놀라운 전투’에 나선 DJ 정권에게 감히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진보진영에 대해서는 ‘현실을 모르는 집단’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강준만은 왜 노동자들과 좌파가 DJ 정권을 비판하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강준만에게 비판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왜 뒤에서 돌을 던지느냐는 항의뿐이다. 그에게는 진보진영의 ‘이적행위’는 철없는 짓일 뿐이며, 노동자와 민중이 이 정권의 집권 이래 얼마나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른바 빈민층이 1천만명을 넘어섰다는 것도, 비정규직이 무려 58%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도, 노동자의 소득수준은 낮아지고 여성노동자의 모성권과 건강권은 짓밟히는 반면 불평등은 심화되고 재벌들의 요구는 즉각 반영되는 현실도 언급하지 않는다. 농민들이 그토록 DJ에게 지지를 보내주었음에도 배신의 칼을 맞고 농사짓기를 포기해야 하는 수입개방의 문제도, 청년실업자들의 고통도 강준만은 노무현의 입을 빌어 이렇게 쏘아부친다. 

“… 그런데 이 노동자들이 요구를 안 들어준다고 이번에 멱살잡이를 한 번 해버리고 지속적으로 정부와 갈등 관계에 들어선다면 … 여기 계신 분들이 노동현장에 계시는 노동자들 같지는 않습니다만, 맡겨 놓았으면 당장 첫 달부터 이익을 내라고 들들 볶아댈 것이 아니라 좀 더 장기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부탁하고 싶습니다.”(262쪽, ‘노무현의 세계화 마인드’) 
 
강준만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지금 한 두 달 지난 이야기인가? 당장 해고의 칼날이 닥치고 가정의 평화가 위기에 닥쳤는데, 느긋하게 지켜봐달라고 이야기하는 게 가당한 이야기인가? 노무현은 자기 집에 강도가 들어도 느긋하게 지켜보는 사람인가. 

강준만은 지금의 시절을 ‘보수세력(=한나라당)과 수구언론’ 대 ‘개혁세력(=민주당)’의 대결 국면이라고 규정하고 싶은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지금은 사회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노동의 소외를 극대화하며 해외자본과 독점재벌의 이윤을 위해 다수 국민의 이익과 요구를 짓밟는 ‘악의 집단’(차악 정도가 아니다!) 김대중 정권과 그 동업자들의 시대다. 그리고 지금은, 여전히 힘도 없고, 단결도 지지부진하고, 정치적 각성도 뒤떨어지지만, 빼앗기고 빼앗기다 못해 ‘팬티만 입고 거리에 누워 버린’ 노동자·민중이 이 ‘악의 무리’에 맞서는 유일한 세력인 시대이다. 그래서 이 시절은 이 두 세력이 ‘맞장’을 준비하고 있는 시절이다. 강준만이 욕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시절을 직시하려는 노동자·민중의 시선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진실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개혁의 중요성을 들어 노동자·민중의 ‘혈전’을 ‘쓸 데 없는 징징거림’으로 치부하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은 이 두 세력의 대결이 제대로 벌어지는 것만으로도 한 걸음 진전을 이루어낼 수 있는 계기이다. 우리는 강준만처럼 소위 ‘차악’을 선택할 생각이 없다. 노동자·민중의 힘을 조직해낼 것이며, 최고의 전투를 치를 것이다. 2002년 대선은 그래서 강준만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노무현을 위한 준비된 쇼’가 아닌 것이다. 


DJ 행동대장 노무현, 그는 노동자·민중에게 희망일 수 있는가 

청문회 스타, 현대중공업 파업현장에 지원연설 나간 국회의원,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대치상황에서 보여준 해결사 기질, 상고 출신의 변호사, 민주화운동 경력 … 노무현의 이력은 그를 보수정치인이라는 이유로 간단하게 손가락질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강준만이 노무현의 전력을 앞세워 ‘대안은 노무현!’임을 강조하는 데에는 노무현이 이런 ‘상품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 와서 ‘언론개혁’ 발언과 김중권 대표 등장 이후 한 ‘기회주의자’ 발언으로 그의 경력에 그럴싸한 환상까지 덧칠해져 있는 셈이다. 

그런데 먼저, 한 술좌석에서 내가 민주당 인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풀어놓아야겠다. 한 잘 알려진 민주당 정치인이 있다. 이 사람의 정치신념은 오직 하나, ‘어르신께서 …’ 하는 것. 그는 지난 세월 DJ와의 관계를 통해 DJ의 숨결로도 그의 뜻을 알아낼 수 있을 정도의 최측근 중 하나이다. 그의 말과 행동은 그대로 DJ의 속마음을 대변한다고 보면 된다나? 

노무현이 ‘보수언론과 전쟁 불사’ 발언을 하고 나서 조·중·동에게 공격당하고, 언론의 말길에 오르자 당내 시각은 ‘견제’와 ‘책망’이었으나, 위의 그 정치인이 그랬다는 것이다. “어르신께서 을매나 기뻐하시겠나!”라고. 

언론개혁의 깃발을 들긴 들었는데 ‘언론과 정치인의 특수관계’상 아무도 움직이지 않아 부아가 치밀어 있을 DJ의 마음을 알고 노무현이 치고 나갔다는 해석이었다. 그 예만이 아니라 노무현이 ‘DJ의 행동대장’이 되기로 마음 먹은 것도 이미 곳곳에서 확인된다. 

노무현은 DJ 정권에 대한 PK 지역의 불만이나 지식인 사회·노동계 등의 비판에 맞서 적극적인 반론과 보호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심지어 과거 국민회의 창당 시절 반(反)DJ 노선을 걸었던 경력을 두고 한 월간지 기자가 DJ와의 불화 가능성을 물었을 때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철학과 능력에 반한 사람입니다. 충돌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나를 불리하게 만들려는 사람들이 지어낸 것입니다.”(214쪽, ‘원칙과 신뢰의 조화’)라고 말한 정도였다. 그의 말처럼 노무현은 이제 철저히 DJ 사람이다. ‘삼김퇴진’을 요구하던 ‘통추’의 깃발을 ‘정권교체 가능성’에 꺾어버렸듯이, ‘대권 후보 가능성’에 자신의 모든 것을 DJ에게 바치는 것이다. 그와 DJ가 정치 스타일과 지역 기반은 다를지라도 노무현은 이제 DJ가 추진하는 모든 정책, 신자유주의 정책을 오롯이 추종할 뿐 아니라 그것의 실패도 미화하려고 하고 반발을 적극적으로 무마하는 ‘행동대장’을 자임해, 이른바 ‘정통 민주노선의 적자’로서 선택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노무현은 “… 우리 민족이 세계사에서 웅비할 수 있는 민족적 자산이 무엇이냐? 그것은 뛰어난 재능과 더불어 정의와 자유와 평화와 평등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할 줄 아는 이성적 인간상과 ‘시장’에서 정정당당하게 ‘경쟁’할 줄 아는 페어플레이 정신입니다.”(24쪽, ‘ ’는 필자)라고 말한다. 그에게도 우리 사회를 극도의 혼란과 분열로 몰아가고 있는 극단적 시장우선주의와 경쟁만능주의가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노무현이 앞서 말한 이력과 이미지를 가지고 다시 한 번(?) 민중의 눈과 귀를 현혹하는 인물로 부상하고 있으며, 강준만은 그 나팔수로서의 노력을 이 책을 통해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DJ에게 노무현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민주화 투쟁의 이력이 있다는 것, 심지어는 사형까지 받았던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난의 상징이었던 지팡이로 노동자와 민중을 구타하는 것에 대해 강준만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답변을 회피하고 오히려 노동자를 탓하는 강준만의 이 두 번째 사기극은 성공하기 쉽지 않은 것 같다. 지난 5월 23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노무현은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에게 계란을 맞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는 다음의 몇 가지를 함축적으로 의미한다. 

첫째, 우리 노동자들이 이미지를 앞세운 정치인에게 ‘계급적 입장’의 현실론으로 대했다는 점. 둘째, 계속되는 자본의 공격과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이 그저 정치인들의 헛된 구상에 홀려 표나 던지고 기다리는 정치의 객체가 더 이상 아니라는 점. 셋째, 노무현이 DJ 행동대장으로 이젠 안 나서는 데가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노무현으로서는 이날 계란을 맞아 이미지를 구겼더라도 짭짤한 이득을 챙긴 것으로 보인다. 국민들에게 어필한 것뿐이 아니라 DJ의 신임과 그 친위부대인 동교동계의 박수도 받았을 것이다.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리지 않은 행동
대장이 보스에게 주는 만족감이란 대단한 것이다. 

한 가지 노무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계란’ 정도가 큰 다행인 줄 알라는 것이다. 온 가족의 생사를 걸고 절박하게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해외매각’을 설법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부당노동행위 근절과 부상자 치료비 해결’ 요구를 “노조원 기만 살리는 일”이라며 거절했다니 그는 겁을 상실했거나 매우 잔인한 사람인 것 같다. 3년 전 대선에서 DJ에게 표 몰아주던 대우차 노동자들이 아니고 민주노총 위원장의 대선 출마에도 시큰둥해 하던 노동자들이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노무현은 깨달아야 한다. 

DJ 정권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반성없는 지식인, 강준만 

앞서 밝힌 강준만의 당파성 진술과 달리 강준만의 DJ 지지는 ‘비판적 지지’가 아니다. 그건 일방적 지지이고, 그 지지를 위해 DJ 비판론자들을 ‘비판하는 지지’이다. 심지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동지를 신뢰하지 않고 사사건건 의심하고 트집을 잡는 분열주의적 사고와 행태는 개혁의 가장 큰 적이다. 배반당할 때 당하더라도 일단 밀어줘야 한다. DJ 정권 하에서의 개혁이 엉망이 된 이유도 일부 개혁세력의 DJ에 대한 강한 불신에서 비롯된다는 걸 깨닫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217쪽) 이건 아예 어이가 없지 않은가? 

“내가 여러 차례 지적했지만, 국가보안법 개정만 해도 그렇다. 나는 그 점에 있어선 DJ를 신뢰한다. 문제는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면 나라가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수구기득권 세력의 결사적인 반발 … 그런데, 어떻게 된 게 국가보안법의 폐지 또는 개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비판과 시위를 했다 하면 무조건 DJ만 겨냥한다. … 어떻게 그런 어리석음이 가능할까?”(217쪽) 이제 강준만은 DJ를 비판한다는 이유만으로 진보진영과 <조선일보>를 같이 취급하고 있다. 강준만의 DJ 보호의지는 지나치다 못해 그 자신이 비판해 마지않는 조·중·동의 조폭적 수준까지 치닫고 있다. 

그러나 그가 예를 든 개혁입법의 지체에 대해 <한겨레>까지도 다른 생각을 내놓고 있다. “몇 가지 중요한 개혁 정책은 한나라당 개혁성향 의원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추진할 수 있는데도, 공동여당 및 민주당 내부의 ‘어설픈’ 국정운영 경험자들, 그리고 편의주의에 빠져 있는 관료집단의 반발을 이유로 하염없이 미루고 있다. 국가보안법 개정이 바로 그렇고, 인사청문회와 특별검사제 도입이 전형적인 사례다.”([김대중 정권, 무엇이 문제인가] 下, <한겨레> 5월 26일자) 

강준만의 억지 주장은 이제 바닥이 드러난다. 강준만은 DJ의 실정은 보수세력과 수구언론의 탓이며 심지어는 ‘진보진영’ 탓이라고 강변한다. 물론 DJ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반동성에는 외면으로 일관한다. 지난 대선에서 DJ를 지지하자고 발가벗고 뛰어다녔던 그가 DJ 집권 3년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네 탓이다’만 연발하는 동시에 또 다른 예정된 ‘(국민을 상대로 한) 사기극’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강준만이 진정 책임있는 지식인이라면 스스로 선동했던 ‘DJ 지지’에 대한 겸허한 평가와 반성을 선행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 스스로 지적해 마지않는 무책임한 ‘지식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개구리 한 마리가 울어댄다고 가뭄에 비오지 않는 것처럼 강준만이 아무리 DJ 옹호론을 편다 해도 이 정권이 노동자·민중에게 저지른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노동자와 민중이 삶의 현장에서 체득한 이 정권의 잔혹함은 이전 정권의 그것을 뛰어넘고 있다. 이 불만을 모아내고 투쟁하는 우리에 대해 강준만은 ‘지역감정을 부추긴다’고 하고 ‘보수세력이 좋아할 짓’이라고 펄펄 뛸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강준만의 논리가 썩은 둥치를 붙잡고 건물의 튼튼함을 우겨대는 우매하고도 못난 지식인의 선동으로 보인다. 만일 그 썩은 건물에 강준만의 선동에 속아 단 한 사람의 민중이라도 남게 되고 화를 당한다면 강준만은 역사의 매서운 심판을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점을 밝혀 둔다. 

‘망령’ 부활의 주문을 멈추게 하자! 

사람들은 말하리라. 누가 또 ‘비판적 지지’를 말하겠느냐고. 누가 또 DJ 지지를 이야기하겠느냐고. 그러나 다음 대선에 DJ는 출마하지 않지만, 그 노선의 추종자가 여당의 후보로 나올 것이고 ‘비판적 지지’는 재생산될 것이다. 내가 조용한 침묵으로 스스로를 닦아야 할 수인(囚人)의 처지에 끙끙거리며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비판적 지지’라는 망령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것은 악몽이다. 87년부터 97년까지 계속되어진 아편같은 기억, 노동자계급에게 자신의 노예 상태를 거부하지 못하게 하는 무기력한 환각제 같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두려움이다. 과거 우리 진보진영을 갈갈이 찢어놓았던 분열의 싹, 지긋지긋하게 우리를 괴롭혔던 ‘지옥 논리’의 당당한 등장이 예고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당선가능성’이라는 논리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며,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강준만식 균형감각(242쪽)의 잣대로 우리를 에워싸려 할 것이다. 

만일 이인제나 김중권 같은 파쇼 잔당들이 여당 후보가 되지 않고 노무현이 여당 후보가 되었을 때 ‘망령’의 그늘은 ‘인물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내부에 들이밀어질 것이다. 강준만이 벌써부터 이런 책을 내놓는 것은 그런 ‘상품가치’를 노무현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무현은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이회창과 오차 범위 내에서 경쟁하고 있으며(<동아일보> 2001년 2월 22일자), <한겨레21> 조사 선호도 1위인 정치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더군다나 <말>이 2001년 3월호에서 ‘운동권 세대’ 200명에게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는 ‘지지하는 정치인의 이름을 쓰라는 항목’에 노무현이 39명으로 1위를 차지해 권영길(10명)보다 높게 나타났다. ‘운동권 세대’에서의 조사임에도 말이다! 

노무현, 대중들에게 치장하고 팔아먹기에 얼마나 매력적인가. 엘리트 냄새도 없는 대중스타가 인권 변호사 출신의 영남 후보로 나섰을 때 대중들은 민주당과 DJ에 가지고 있었던 부정적 시선의 혼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보수정치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아! 게다가 민중운동 내의 일각에서 민주당 후보가 ‘6.15 정상회담 정신 계승의 적자’라고 주장이라도 하는 날이면 진보진영 내부에서 혼란이 시작되지 않겠는가. 나는 불안하다. 다시 살펴보자. 우리 운동 내부에 DJ에 대해 총체적으로 접근하지 못해 선별적 지지를 주장하고 통일운동에서는 ‘협조’할 수 있다는 경향은 없는가. 우리 노동운동에서 노무현 개인에 대한 호감을 정치적 지지로까지 이끌어갈 지도자들은 없는가. 우리 지식인 사회에 ‘차악’을 선택하자는 선동에 손들어줄 나약함은 없는가. 그리고 민주노동당 내부에, 부활하려는 ‘망령’의 심장에 칼을 꽂을 단호함이 부족하거나 노동자·민중의 운명을 책임지겠다는 결연함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노동자·민중·학생 동지들은 가두에서, 공장에서, 학원에서, 삶의 현장 곳곳에서 DJ 정권이 강요하는 고통과 맞서 싸우고 있다. 나는 이 치열함을 확전(擴戰)시켜내고 한 단계 높여내기 위한 민주노동당의 준비를 촉구한다. 

강준만의 주장이 갖고 있는 위험함은 2002년 정국에서 민주노동당의 능동적 준비가 부족할 때 ‘치명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혹시 지금 내년 지방선거에 뚜렷한 대책도 없이 손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비판적 지지’의 변종인 ‘시민운동 제3후보론’이 나돌려 하는데도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진보진영의 균열을 이끌어내려 할 것이고, 노동진영을 견인하려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대중조직과의 결합력과 정치적 연대는 과연 확고한가 살펴보아야 한다. 선거공간을 통해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확장시키지 못하면 민주노동당의 창당은 아무 의미가 없다. 큰 싸움을 앞둔 우리에게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준비되지 않은 투쟁은 민중의 쓰라린 패배만을 남긴다는 것을 잊지 말자. 
민중의 혜안을 어지럽히는 ‘망령의 부활’을 우리 내부에서부터 저지하고, 진보진영의 분열을 막아내자. 그리고 힘을 모아 맞서 싸워야 한다. 망령의 부활을 저지하고 노동자의 새벽을 열어갈 책임이 민주노동당에 있다. 



[반론]

‘비판적 지지’의 망령을 어떻게 퇴치할 것인가 
- 박용진의 비판에 답한다 

강 준 만 


'민주당-민주노동당’ 양대 체제를 꿈꾸며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과 여건에도 불구하고 귀한 글을 주신 박용진 위원장님(이하 존칭 생략)과 <이론과 실천>에 깊이 감사드린다. 나는 본말(本末)의 전도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 거친 표현에도 불구하고 박용진의 주된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었고 공감할 수 있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나 역시 이른바 ‘비판적 지지’의 망령에 대해 내 나름대로 오랫동안 고민해 온 사람으로서 이 지면을 통해 그 주제에 대해 생산적인 논의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이 주제와 관련해 나의 ‘정체’부터 확실하게 밝혀 두는 게 좋겠다. 나는 민주당이 보수 정당, 민주노동당이 진보 정당으로서 한국의 대표적인 양대 정당이 되는 그런 날을 꿈꾼다. 다른 정당들에겐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나, 사회당·한국신당·자민련·한나라당이 제3의 정당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이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따라서 나는 민주노동당이 잘 되기를 바라는, 민주노동당에 대해 대단히 우호적인 사람이다. 나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상호 선의의 경쟁을 하되 가급적 공동으로 반(反) 한나라당 노선을 견지해 나가는 것이 두 정당의 안녕과 번영에 긴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바로 이 반(反) 한나라당 공동 노선에 있어서 나와 일부 민주노동당 지지자들 사이에 견해차가 있는 것 같다. 


박용진의 글이 안고 있는 여섯 가지 사소한 문제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박용진의 글이 안고 있는 ‘말(末)’ 차원의 비교적 사소한 문제 몇 가지는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첫째, 글 쓰기 방식의 문제이다. 우리는 어떤 파시스트의 글을 비판하더라도 그 파시스트가 한 말과 그 파시스트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 해석을 독자들이 구분해서 판단할 수 있게끔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박용진의 글엔 그런 구분이 매우 부실하다. 일단 적(敵)이라고 판단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도해야 한다는 게 박용진의 생각이 아니라면, 이는 앞으로 조심해야 하리라 믿는다. 

둘째, 감정적 선동의 문제이다. 사회당이 볼 때에 민주노동당의 노선이 마음에 안 들 수 있다. 과거의 ‘사노맹’이 볼 때에 사회당의 노선이 마음에 안 들 수 있다. 폭력혁명을 부르짖는 어떤 지하당이 있다면 그들이 볼 때에 ‘사노맹’의 노선이 마음에 안 들 수 있다. 마음에 안 드는 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겠는가?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강조해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면서 상대방을 ‘악(惡)’으로 몰아치는 방식의 비판이 바람직한가? 박용진이 나를 비판하기 위해 동원한 감정적 선동은 자신을 향한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셋째, 이념적·정치적 성향에 대한 이중잣대의 문제이다. 박용진은 자신의 이념적·정치적 성향은 그 어떤 원칙에 따른 소신인 반면, 나의 이념적·정치적 성향은 인간관계적 편향성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나는 박용진이 ‘권영길에 대한 애틋한 애정’ 때문에 민주노동당원이 되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나는 ‘DJ에 대한 애틋한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단정되어야 하는가? 물론 권영길과 김대중은 다르다. 그러나 나 역시 민주당원이 아니며 될 뜻도 없다는 점에서 박용진과는 다르다. 지난 대선시 박용진은 권영길 지지를 위해 ‘발가벗고 뛰어 다녔’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김대중 지지를 위해 전주에 죽 치면서 옷 입은 채로 글만 썼을 뿐이다. 나를 비판하기 위해 ‘애정’이니 ‘발가벗고’니 하는 포르노 용어를 동원하는 것보다는 나의 ‘극우 헤게모니 타파 우선주의’를 정면 공격하는 것이 나에게 훨씬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넷째, 정치인 또는 정치세력에 대한 ‘절대 평가’와 ‘상대 평가’에 대한 문제이다. 박용진은 ‘절대 평가’를 하는 반면 나는 ‘상대 평가’를 한다. 박용진은 내가 ‘DJ에 대한 지지’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고 꾸짖고 있으나, 그러한 꾸짖음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무엇이 어떻게 더 좋았을 것이라는 근거를 수반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회창보다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던 게 백 번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박용진이 나 개인보다는 많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상대 평가’ 성향을 이론적으로 격파하는 것이 ‘비판적 지지’의 망령을 퇴치하는 데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다섯째, ‘자해적(自害的) 비판’에 관한 문제이다. 나는 박용진이 노무현을 비판하는
건 당연하거니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비판은 한나라당의 비판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노무현은 노동자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주 혹독하게. 그렇게 비판하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에도 어울리는 일이거니와 겨우 노무현조차도 ‘색깔론’으로 걸고 넘어뜨리려는 극우 파시스트 세력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박용진은 노무현이 언론개혁에 앞장서는 걸 비판했다. 그것도 어느 술좌석에서 만난 어느 민주당 인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근거로 말이다. ‘악(惡)의 집단’ 사람과 왜 술은 같이 마시는지 모르겠다. 이거야말로 근시안적인 ‘자해적 비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여섯째, 상황의 복잡성에 관한 문제이다. 박용진은 김대중 정권과 그 동업자들을 ‘악의 집단’으로 규정하면서 내가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는 내가 당 총재부터 말단 당원에 이르기까지 국민에게 석고대죄(席藁待罪)해 마땅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민주당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나의 주장을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폄하한다. 그거 참 재미있는 일이다. 나는 그간 ‘김대중 정권의 몰락’이라는 표현을 써 가면서까지 김대중과 김 정권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글을 대여섯권의 책으로 묶고도 남을 정도로 많이 발표해 오느라 김대중 지지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박용진으로부터는 정반대의 이유로 악(惡)이라는 단어까지 선물받으니 말이다. 박용진의 단순한 사고방식이 세상을 속 편하게 사는 데엔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박용진은 자신의 신분이 유권자들의 표를 얻어야 할 지구당 위원장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기 바란다.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을 읽지 말자 

박용진의 주장과는 달리, 나는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을 쓰면서 행여 민주노동당과 그 지지자들에게 조금도 누가 되지 않게끔 무진 애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박용진으로부터 ‘악(惡)’의 딱지를 선사받는다는 건 나 개인 차원을 떠나 ‘비판적 지지’의 망령이 박용진의 판단에 큰 장애가 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만든다. 나는 이제부터 그 ‘망령’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 보겠다. 

나는 앞서 ‘말(末)’ 차원의 문제를 지적하긴 했지만 ‘본(本)’ 차원에선 박용진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는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행여 내 책을 볼까봐 염려돼 그 글을 썼다고 밝혔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나는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그 책을 보는 걸 원치 않는다. 내 책에 넘어갈 리도 없겠지만 박용진이 우려하는 것처럼 만의 하나라도 넘어간다면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민주노동당을 굳건하게 지켜 주시기 바란다.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은 우선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는 ‘까마귀들’ 보라고 쓴 책이다. 나는 노무현이 민주당 후보가 된다면 그 때엔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또 다른 ‘까마귀들’ 보라고 새로운 책을 쓸 생각이지만,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책을 쓸 생각은 전혀 없다. 왜? 그 만큼 내가 민주노동당을 아끼기 때문이다. 나는 왜 박용진 ‘백로’가 ‘까마귀들’ 보라고 쓴 책을 읽고서 괜한 흥분을 했는지 그게 안타깝긴 하지만, 박용진이 그 글을 쓰게 된 두 번 째 이유만큼은 흔쾌히 공감할 수 있었다. ‘비판적 지지’라는 망령을 퇴치해야 할 필요성 말이다. 좀 더 유쾌한 방식으로 그 필요성을 제기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미국에서 나타난 ‘비판적 지지’의 망령 

‘비판적 지지’라는 망령은 한국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그건 정당 정치를 하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다. 최근 미국에 나타난 망령을 살펴보자.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은 녹색당 후보인 랄프 네이더를 염두에 두고 앨 고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역설하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조지 부시의 승리로 끝났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입장에선 ‘도둑 맞았다’고 느낄 정도로 다 이긴 선거를 놓쳤으니 녹색당 지지자들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크랴. 

아니나 다를까, 민주당 지지자인 MIT 교수 폴 크루그먼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 2001년 4월 23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지난 미국 대선은 이상주의를 좇아 랄프 네이더(녹색당 후보)에게 표를 던진 두뇌가 없는 사람들이 세계 최강대국을 심장이 없는 사람들이 통치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반세계화 운동의 부작용을 확연히 보여주는 예”라고 비판했다.(<중앙일보>, 2001년 4월 24일자) 

그러나 네이더를 지지한 영화배우 팀 로빈스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최근 주간 <네이션>지에 기고한 글에서 “수잔(수잔 서랜던: 부인이자 동료배우)과 함께 IMF-세계은행 반대 시위차 워싱턴에 가서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스웨트숍(Sweatshops: 제3세계 어린이와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는 사업장)에 반대하는 팸플릿을 나눠주는 열세살짜리 꼬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클린턴 시기 민주당의 결정적 우경화를 목도하고 나서, 전략적으로 투표하기보다는 나의 양심에 따라 투표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썼다.(<한겨레 21>, 2001년 9월 6일자) 

나는 폴 크루그먼의 주장과 팀 로빈스의 주장 가운데 로빈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단기적으론 크루그먼의 주장에 타당한 면이 있을 망정 고어가 집권하고 나서 공화당을 흉내내는 짓을 또 한다면 적어도 녹색당 지지자들에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오히려 녹색당이 만만치 않은 지지 기반을 갖고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야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한 변화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차별화된 비판이 필요하다 

나는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민주노동당이 대선에서 많은 표를 얻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당연히 ‘비판적 지지’의 망령을 퇴치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까지는 박용진과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퇴치할 것이냐?’ 하는 점에서 나는 박용진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나와 박용진은 똑같이 큰 과오를 하나 저지르고 있는 게 있다. 나는 한국 사회의 ‘극우 헤게모니’를 깨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노동자들의 고통을 염두에 두고 그걸 배려하는 글 쓰기를 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점에서 『노무현과 국민 사기극』이 비판받을 점이 있다고 보며 이 점 죄송하게 생각한다. 

반면 박용진이 저지른 과오는 ‘비판적 지지’ 쪽으로 기운 사람들의 심리를 전혀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그들을 ‘악의 집단’으로 공격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위험한 병균’이요 ‘퇴치되어야 할 전염병’으로 매도한다고 해서 그들이 생각을 바꿀까? 물론 박용진은 그 글을 주로 민주노동당 당원들을 염두에 쓰고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자면 내 책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민주당 지지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일 뿐이다. 우리가 피차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내 책이나 <이론과 실천>이나 주로 겨냥하는 대상 독자가 있겠지만, 어차피 ‘매품(賣品)’으로 시장에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독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잊어선 안되리라는 점이다. 

박용진의 글이 오직 당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비밀 문건이었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당원들로 하여금 일상적 삶의 전선에서 만나는 ‘비판적 지지’ 쪽으로 기운 사람들을 설득할 논리를 제공하는 데 있어서 겨우 ‘위험한 병균’이요 ‘퇴치되어야 할 전염병’이요 ‘악의 무리’라는 구호만을 외치게 한다는 건 그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시위를 할 때엔 그렇게 할 망정 ‘생활 투쟁’의 용도로 좀더 세련되고 정교한 논리를 제공해줄 수는 없는 걸까? 

외람되지만, 너무 답답한 나머지 내가 한번 제공해 보겠다. 물론 나는 ‘극우 헤게모니’를 깨고자 하는 나의 목표와 공생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지만, 이 이상 더 좋은 논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 내가 ‘비판적 지지’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귀신같이 꿰뚫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현 단계의 한국 정치는 ‘반사 정치’요 ‘반감 정치’다. 누굴 좋아서 지지한다기보다는 누굴 싫어하기 때문에 그 싫어하는 세력과 경쟁 관계에 있는 정당에게 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이른바 ‘반(反)DJ 정서’의 가공할 파괴력을 잘 아시지 않는가. 그 파괴력엔 미치지 못할 망정 ‘반(反)한나라당 정서’도 만만치 않다. 민주노동당은 어떤 정서를 이용할 것인가? 

물론 이건 쉽게 결정한 문제가 아니다. 어느 한쪽을 택하면 반드시 다른 한쪽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두가지 정서를 다 이용할 것을 권하고 싶다. 단,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한나라당을 공격할 때엔 그 수구성와 극우성을 전방위적으로 공격하되, 김대중과 민주당을 공격할 때엔 노동자들의 생존권 차원에서만 공격해야 한다. 

이건 아주 쉬운 원칙인 것 같지만, 의외로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예컨대, 박용진의 글을 보자. 그는 김대중 정권의 모든 걸 부정하면서 ‘악의 무리’로 단죄하고 있다. 노무현을 공격하기 위해 언론개혁마저도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하면 ‘비판적 지지’라는 망령을 퇴치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내가 장담하지만 이건 ‘비판적 지지’라는 망령을 키우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절대 이런 식으론 안 된다.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자 

‘비판적 지지’의 망령이 살아 있는 가장 큰 원인은 ‘극우 헤게모니’에 대한 우려임을 잊어선 안 된다. 제발 제대로 된 설문조사라도 한번 해보시기 바란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민주노동당이 그 ‘극우 헤게모니’를 깨는 데에 일조하면서 김대중 정권을 공격한다면 이거야말로 일석이조(一石二鳥)다. 
 
그러나 그간 극소수나마 내가 직접 겪은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은 한결같이 ‘극우 헤게모니’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상호 분리된 이분법으로 보면서 양자택일을 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내가 보기에 제일 어리석은 게 “<조선일보>가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문제다”와 같은 주장이다. 물론 나는 그 주장의 선의를 모르진 않는다. 제한된 투쟁 역량을 어느 쪽으로 집중시키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양자택일은 전략상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를 사령탑으로 하는 ‘극우 헤게모니’와 신자유주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이다. 그건 이론적으로 따질 필요조차 없는 문제다. 민주노동당이 ‘극우 헤게모니’를 깨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그 이슈에 대해 최소한의 성의만 보이면 되는 문제다. 예컨대, 박용진도 나를 비판한 글에서 그런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면서 나를 비판했더라면 나의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마음조차 흔들리게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는 박용진의 글에서 그간 한국의 노동운동이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걸어왔는가를 감지할 수 있어서 가슴이 아팠다. 온몸을 던져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세련되고 정교한 설득의 논리를 펼친다는 게 그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박용진의 말마따나 “망령의 부활을 저지하고 노동자의 새벽을 열어” 가기 위해선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동시에 구사해야 하지 않을까? 
 
끝으로 한 말씀만 드리겠다. 『김대중 죽이기』에 이어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이라는 책을 낸 나의 ‘튀는’ 행태를 너무 나무랄 생각만 하지 마시고 정반대로 왜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대학 교수들은 ‘비판적 지지’의 망령을 박살내고 민주노동당을 키울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대중적인 책을 전혀 내지 않는지 그 점을 의아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민주노동당이 언론으로부터 정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가? 내가 부르짖는 언론 개혁을 하게 되면 가장 득을 볼 집단이 민주노동당인데도 불구하고 왜 나를 ‘악(惡)’으로 모는가? 언론개혁은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다면 우리 시대의 가장 자유로운 매체인 책을 통해서나마 ‘홍보 투쟁’을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국의 그 많은 강단 진보주의자들은 도대체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그들은 툭하면 ‘민중’을 부르짖으면서도 왜 자기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어려운 용어로만 글을 쓰고 대중적인 글 쓰기를 무시하고 경멸하는가? 그런 의아심을 갖게 된다면, 나와 내 책에 대해서도 좀더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상호 생산적인 선의의 논쟁과 경쟁을 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강준만에 대한 재반론]
'비판적 지지'는 없다.

주대환/demomasan@korea.com/민주노동당 마산합포지구당 위원장


나의 마음이 이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넘치는 상태가 아님을 먼저 밝혀야겠다. 강준만이 써놓은 글을 반이라도 읽어보아야 강준만에 대해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가 쓴 글을 십분의 일도 읽지 않은 것 같다. 나도 게으르지만 그 사람도 너무 많은 글을 써놓았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글을 쓰지 않는 생활의 즐거움에 깊이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여러 동지들과 친구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나는 시비(是非)를 가리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한없는 게으름'의 경지에 오른 지 오래 되었다. 그래서 간혹 내가 충성하는 당을 위하여 몇 줄씩 쓰는 매우 실용적인 글 이외에는 거의 글을 쓰지 않고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과 실천] 최영민 편집장의 요청에 따라 박용진과 강준만의 토론에 대한 나름의 느낌과 감상, 연상되는 생각들을 몇 자 적어 보려고 한다. 우리 당의 당원 동지들이나 우리 당을 지지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우선 문제가 된 책은 [노무현과 국민 사기극]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책을 읽고서는 별다른 자극을 받지 않았다. 아마도 이미 [김대중 죽이기]를 통해서 그의 어법이나 사고방식에 면역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그가 무어라고 하든 노무현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노무현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 걱정을 하지 않고 빨리 세월이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을 통해서 정리될 일, 민주당 내부의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역시 젊은 박용진은 참지 못했다. 그리고 매우 좋은 글을 썼다. 그러나 박용진의 계급투쟁 및 계급의식의 성장에 대한 과장과 비판적 지지에 대한 피해의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박용진이 "당원들은 이 책을 절대로 읽지 마라"고 하였지만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나는 말을 바꾸어 "당원들은 이 책을 절대로 사지 마라"고 하고 싶다. 우선 돈을 주고 사서 읽을만한 가치는 없기 때문이지만, 사지 않아도 이 책은 노무현 캠프에서 사서 돌리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손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우리 민주노동당이나 당원들이 가장 부족한 것이 돈이 아닌가? 그러나 이 책을 읽는 것은 말릴 필요가 없다. 아니 오히려 이런 책을 읽고서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을 위해 성의를 다하는 자세를 우리는 본받아야 한다.

또 하나 박용진과 생각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다. 김대중이 당선된 것이 강준만의 덕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김대중 정권의 실패에 대하여 강준만이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김대중을 지지한 데 대하여 반성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나의 기억이 맞다면 강준만은 [김대중 죽이기]에서 김대중은 결코 정계 복귀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을 했다. 그리고 유시민의 논리적 예언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이 당선된 것은 다른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인제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이인제야말로 유시민이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였다. 

아니 그런 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박용진이 말하는 김대중 정권의 '죄악'은 충실하게 신자유주의 이념을 실천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이니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강준만이 '김대중 정권이 국민 앞에 석고대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분명히 박용진이 김대중 정권을 '악의 무리'라고 규정하는 이유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박용진의 글에 대해 강준만이 반론을 보내왔다. 그가 [이론과 실천]도 읽고 있다는 말인데 정말 그 부지런함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내용도 반파쇼 투쟁에서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연대를 제안하는 매우 신중한 글이라 놀라운 일이다. 나는 그의 글에 대체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강준만의 이 글은 지금까지 그가 했던 말들과는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 아니 그는 말을 너무 전략적으로, 흡사 정치인처럼 하는 것 같다. 그의 글은 거의 외교 문서에 가깝다. 그래서 신뢰감이 가지 않는다. 그가 "나 역시 이른바 '비판적 지지'의 망령에 대해 내 나름대로 오랫동안 고민해"왔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민주노동당이 잘되기를 바라는, 민주노동당에 대해 대단히 우호적인 사람"이라고 하니 귀를, 아니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웃는 낯에 침을 뱉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일단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언론개혁 투사인 강준만이 정치개혁에 대해서는 헛발질하고 있다

나는 강준만이라면 언론개혁의 투사로 알고 있다. 중요한 순간마다 파쇼적 시각으로 왜곡 보도를 일삼는 조선일보에 대한 그의 비판과 공격은 선구적이었다. 그가 집요하게 조선일보를 물고늘어진 끝에 이제는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운동에 민주노총까지 가담할 정도가 되었다. 나는 조선일보 반대 운동이 널리 확산되고 언론개혁이 시대적 과제로 된 데에는 그의 공이 크다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아마도 언론학자로서 그를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거기에다가 대중이 읽을 수 있는 좋은 문장으로 많은 글을 써서 지식을 대중화하는데 공이 크다. 또 실명을 거론하며 인물 비평을 하여 지식인들의 비일관성과 위선을 폭로하고 있는 그의 작업도 의미가 크다.

이렇게 훌륭한 강준만이지만 그의 우리나라 정치에 대한 이해는 아무래도 다소 피상적인 것 같다. 그가 언론개혁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주장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정치개혁에 대해서는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좀 엉뚱하게 김대중을 지지하거나 노무현을 지지하고 있다. 물론 그가 지식인이 공개적으로 정치인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는 하는 의도는 좋다. 그러나 그 정도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사람을 선택하여 그를 지지하고 밀어주면 정치가 실제로 달라지거나 개혁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다. 사람이라면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한국정치는 개혁이 되지 않고 있으며 거기에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그가 학벌주의와 연고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정치개혁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 그것을 부추기는 지식인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도 정치개혁과 연관이 있다. 정치인들을 도매금으로 비난하면서 권력에 접근하고 싶어 안달하는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이중적 태도와 위선을 폭로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치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정당이 없다"는 점에 있다. 아니 "당원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의미의 당원이 없다. 당원이 없으니 정당이 없는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보고를 보면 1997년 당시 신한국당에서 2만2천7백93 명의 당원이 당비를 내었다. 그리고 국민회의는 2천6백37 명의 당원이 당비를 내었다. 자민련은 4백 명이었다. 신한국당이 당비를 낸 사람 수가 좀 많지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실존적 이유에서 당비를 냈는지는 당시에 신한국당이 여당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금방 알 수 있다. 당비를 낸다는 것은 당원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다. 그런데 지구당 부위원장 명함이라도 하나 받아서 생업에 도움이 되거나 장차 시의원이라도 한번 해볼 생각이 없으면서 당비를 내는 평당원은 없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현실 위에 우리나라 정치는 서 있다.

현재 당비를 내는 당원의 수는 민주노동당이 가장 많음이 분명하다. 당원의 수로 본다면 민주노동당이 우리나라 최대 정당이다. 아니 당원이 있는 정당은 민주노동당이 유일하다. 물론 그런 민주노동당도 역시 당원의 범위를 당비를 낼뿐만 아니라 당의 이념과 정책을 학습하고 선전하고 조직하는 사람으로 본다면 2만 명의 당원 가운데 5천명 정도가 진정한 당원이고 1만5천명은 후원회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당원'은 우리나라에서 희귀한 존재인 것이다. 매우 진보적이라고 알려진 대학 교수라도 정작 우리가 입당 원서를 들고 가면 온갖 핑계로 입당 원서를 써주지 않을 때 우리는 슬픔을 느끼면서 '한국적 삶의 방식'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래서 나는 강준만이 '민주당 당원이 아니며 될 뜻도 없다'고 촌스럽게 순한국식으로 버틸 것이 아니라 민주당에 입당하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의 발전과 개혁, 현대화에 책 몇 권 쓰는 것보다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사회주의자로서 나의 정체성을 확인한 후부터 나는 '당원'이었으며 '당인(黨人)'이었다. 당은 내 마음속에 항상 빛나는 별처럼 존재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 당을 이해시키고 모든 사람을 우리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불행'은 내가 '당원'이라는 데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 와서 깨달았다. 그리고 나의 조국과 동포들에 대해 화가 났다. 그래서 나는 [경남도민일보] 라는 지역 신문에 [그대 진정으로 정치개혁을 원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산문시(散文詩) 비슷한 글을 쓰기도 했다. 짧아서 한번 인용해보겠다.

그대, 혹시 우국지사인 척하려고 정치개혁을 부르짖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왜 개혁신당이나 국민신당에, 아니 이 말은 그대가 혹시 자유주의자일 경우에 할 말이지만, 당원이 되지 않았던가? 그대는 왜 이인제 후보를 찍기만 하고 국민신당의 당원이 되지는 않았던가? 500만 명의 그대들이여, 그대들 중에서 100분의 1이라도 국민신당의 당원이 되어주었더라면, 당원이 된 그대들이 한 달에 1만 원씩의 당비라도 내고 당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주었더라면 이인제 씨가 몇 달도 버티지 못하고 그 찬란한 국민신당의 깃발을 포기했을까?

그대가 혹시 사회주의자라면, 아니 사회주의자까지는 아니라도 급진적 민주주의자이거나 급진적 민족주의자라면, 왜 민중의 당이나 한겨레민주당, 또는 민중당의 당원이 되지 않았던가? 감옥살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대들이여, 왜 그토록 '당원'이 되기를 두려워하는가?

우리는 믿지 않는다. "진정으로 정치개혁을 원한다"는 그대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우리는 그대가 그저 한 번 농담을 하였다고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대가 진정으로 정치개혁을 원한다면, 그토록 간절히 원한다면 여러 가지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진보정당이든 보수정당이든 어느 당에나 그대의 세계관과 정치적 취향과 신조와 원하는 정책에 맞는 정당의 당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정치개혁을 열망하는 '국민', 바로 그대들을 믿고 정치개혁의 깃발을 들었던 신생정당들에 참여했어야 했다.

그대들, 정치개혁의 온갖 방법을 논하는 그대들이여, 혹시 그대들은 대로를 피하기 위해서 다른 길을 찾고는 있지 않은가? 아니면 피할 수 없는 길을 피하기 위한 의논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시민의 의무를 피할 궁리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대들이 공무원이라서, 언론인이라서, 교사이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간부라서, 온갖 핑계로 '당원'이 되기를 죽기로 회피할 때 이 땅에는 당원이 없는 이상한 정당들이 정권을 잡아 여당이 되거나 야당 행세를 하고 있다.

당원이 없는 이상한 정당에는 또 다른 국민이, 공직 선거에 출마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주위에는 그들의 동창생과 친척과 고향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대는 그들 중의 한 사람이다.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순수한 마음으로 정치개혁을 열망하고 있다.

정치개혁을 진정으로 원하는 그대여, 먼저 당원이 되라!(경남도민일보 1999년 5월 18일)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김대중이든 노무현이든 정치인 개인을 지지하는 그런 방법으로는 우리나라 정치를 개혁할 수 없다. 우리나라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치 생활의 방식, 정치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입만 열면 정치인이 다 도둑놈이라고 욕하지만 자기가 어떤 정당의 당원이 되어 당비도 내고 직접적인 대가를 바라지 않고 정당 활동이나 선거운동을 할 생각은 없다. 이런 정치 문화를 그대로 두고서는 돈이 없으면, 검든 희든 돈을 만들지 않으면 정치를 할 수 없다. 왜 너는 기업으로부터, 각종 이해당사자로부터 '검은 돈'을 받았느냐고 질타하는 여론에 대한 정치인들의 항변을 진지하게 들어보았는가? 

우리나라의 정치 문화를 그대로 두고서는 이념 정당, 정책 정당이 나올 수가 없다. 오로지 연고의 그물망으로 얽힌 패거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민주당도 전혀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정책 정당, 이념 정당이 나오지 않고서는 지역 감정이 우리나라 정치의 가장 큰 동력일 수밖에 없다. 강준만이 우리나라 정치의 개혁을 원한다면 어느 정당의 당원이 되든지 아니면 요즘 민주노동당과 참여연대 등에서 벌이고 있는 1인2표 정당명부제 실현을 위한 운동(나는 소선거구제의 폐지와 대선거구제의 실시를 요구 사항에 포함하지 않아서 불만이지만)에라도 참여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후 50년 동안 내려오는 우리나라의 정치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노력이 필요하지만 선거 제도를 바꾸는 것이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대선거구제와 아울러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면 우리나라 정치 문화는 커다란 변화의 계기를 맞이할 것이다. 일찍이 1998년 1월 24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법, 공식명칭으로는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에 대한 개정 의견을 국회의장에게 제출하면서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 현행 소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시·도 단위 정당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러한 중앙선관위의 개정안에 대해 당시의 국민회의 원내총무 박상천 의원은 즉시 '국민들로부터 구체적인 인물 선택권을 빼앗는다'는 이유로 반대했다.(한겨레신문 1998년 1월 27일) 국민회의가 왜 선관위의 개정안을 반대하는지 우리 민주노동당 당원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강준만은 이 문제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이기 이전에 '진정한 정당'으로서 한국의 정치문화와는 이질적이며 완전히 다른 정치 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이 일의 중대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보는 것은 선거 결과, 득표 수 뿐이다.

아직도 극우 헤게모니가 존재하는가?

강준만은 아직 극우 헤게모니가 존재하며 극복해야 할 당면의 장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극우 파시스트와의 싸움은 이미 판가름이 났다고 본다. 1987년 이후 이미 우리나라의 국가적, 국민적 문제는 정치체제와 사회경제체제를 포함하여 총체적인 나라의 발전 방향으로서 "미국을 목표로 해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유럽을 목표로 해서 나아갈 것인가"였다. 

1987년을 전후하여 우리나라가 아직도 식민지 반봉건 사회니,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니,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니 하는 논란이 한창일 때부터 나는 이미 우리나라는 충분히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이며 다만 세계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중진국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군사독재를 벗어난 우리나라의 새로운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현대적 사회민주주의를 택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전근대적, 봉건적 요소도 남아 있고 파쇼의 잔재도 남아 있다. 더욱이 커다란 내전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는 분단국의 특수성으로서 극우 파시스트들은 냉전적인 반공주의라는 갑옷을 하나 더 걸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래이다. 심지어 반동적인 파시스트들과의 투쟁 속에서도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나라를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켜나갈 것인가라는 비전이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리고 과연 김영삼 정권은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은 그 충실한 계승자로서 IMF의 무리한 요구를 너무나 흔쾌히 아니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한국의 미국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주의 혁명의 주도권을 쥐고 나라의 정치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잡았다.

나는 얼마 전 민주노동당 사이트에서 오랜만에 과학의 신선한 바람을 쐬었다. 최장집이 9월 25일 경실련 시민강좌에서 "햇볕 정책은 남북관계의 유일한 활로를 모색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설령 야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햇볕 정책 이외의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나는 너무나 반가워서 쪽글을 달았다. "모처럼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상쾌합니다. 최 교수는 역시 사회과학자입니다."라고 썼다. '사회과학자'라고 썼지만 원래는 '과학자'라고 말하고 싶었다.

과학,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상의 이면에 있는 사물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다. 고래의 다리가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비슷하게 생긴 것은 현상이지만 그것이 지느러미가 아니라 다리인 것은 본질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다리라는 본질에도 불구하고 왜 지느러미처럼 되었는가를, 현상을 설명하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강준만에게는 그러한 과학이 없다. 과학의 있음과 없음, 그것이 우리가 최장집을 들으면서 상쾌함을 느끼고 강준만을 읽으면서 짜증을 느끼는 이유인 것이다. 보수 정치가들이 서로 매우 심각하게 다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철천지 원수가 아니며, 대의나 정치 철학을 크게 달리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들이 서로 다투는 사기극이라는 현상의 이면에 그들의 본질이 같음을 밝혀주는 것이 과학이다. 그런데 김세균은 본질이 같다고만 주장할 뿐 현상을 분석하여 현상을 통해서 본질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김세균도 과학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꾸로 강준만은 다만 현상을 말할 뿐이다. 잡다한 현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과학적 분석을 해서 본질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신에 그는 노무현이나 김대중의 사기에 놀아난다. 그래서 최장집은 과학자이지만 강준만은 과학자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비판할 수가 없다. 무엇을 비판할 것인가? "너는 왜 김대중을 지지하는가? 너는 왜 노무현을 지지하는가?"라고 멱살잡이를 하고 따질 것인가? 그러면 거꾸로 강준만이 우리에게 "너는 왜 예전에는 백기완을 지지하고 이제 와서는 권영길을 지지하는가, 왜 안 되는 사람만 골라서 지지하는가"라고 따진다면 어쩔 것인가?결국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과학적 토론이 아니다. 서로가 볼 때 서로가 미친 놈이다. 미친 놈끼리 무슨 토론이 될 것인가?

강준만은 아직도 '극우 헤게모니'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에 커다란 사명감으로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강준만의 그런 전쟁을 높이 평가하고 지지하지만, 그 전쟁은 1987년 6월 민주주의 혁명의 연장이고 굳이 말한다면 정치혁명에 뒤이은 문화혁명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장집은 "냉전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분단과 전쟁을 경험한 구세대,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인성 형성을 부추기는 냉전반공주의를 흡인한 그룹, 한반도의 평화보다 기득권 유지에 더 관심이 큰 사회그룹들이 분투하고 있지만 결국은 탈냉전을 추동해 낸 사회적인 힘과 현실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최장집은 한나라당 이회창이 집권하더라도 그것이 곧 냉전 헤게모니의 복귀로 귀결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장집은 한나라당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는 다만 과학자로서 연구의 결론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강준만이 이회창이 당선되어서는 안 된다고 외칠 때 최장집은 이회창이 당선되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는 셈이니 강준만의 처절한 외침과 지루한 장광설과 다급한 주장에 찬물을 끼얹어 김을 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강준만의 과장과 엄살을 최장집이 폭로하고 있는 꼴이다. 강준만의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과 언론개혁에 대한 주장은 매우 좋다. 우리는 그의 주장을 적극 지지한다. 지역 감정과 연고주의에 대한 비판도 좋다. 그러나 강준만의 그러한 활약, 문화전선 곳곳에 숨어있는 파쇼 잔당을 찾아내어 총을 쏘아대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우리 눈에는 자유주의자의 헤게모니가 이미 확립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하나의 현상으로 보인다.

이회창은 누구인가? 그를 극우 파시스트라고 볼 수 있는가? 그는 아마 자유주의자이지만 몰락하는 소부르주아지의 반동적 심리와 영남의 반김대중 정서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의 주위에는 민정계가 가득하니 그가 극우로 기울고 있다고 볼 근거도 전혀 없지 않다. 그러나 강준만이 유시민의 비판으로부터 김대중의 DJP 연합을 옹호하기 위하여 김종필이 온건하고 합리적이며 유신체제를 겪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듯이 그렇게 반동적이고 파쇼적이지도 않다고 주장하고 조순이야말로 김종필보다 더 반동적이라고 말하는 식으로 한다면 김영삼 계, 민주계가 오히려 더 전근대적, 반동적이고 사실은 민정계가 더 합리적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그러했듯이 이회창과 민주당도 근본적으로 자유주의 내부의 분파 투쟁일 뿐이고 그래서 분열의 명분이 없다보니 지역 대결 구도로 가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북한의 문을 연 사람은 누구인가? 김우중이고 정주영이었다. 남한의 자본이 북한이라는 새로운 시장과 생산기지를 필요로 느끼고 있다. 남한의 부르주아지는 계급적 본능으로 김대중 정권의 대북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남한의 보수의 주류는 이미 합리화, 미국화, 세계화, 대북 화해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다만 부르주아지의 낙오자들, 몰락하는 소부르주아지들이 바로 반동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의 망령이 서성거리는 곳도 바로 그곳이다. 이회창이 그들을 안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의 전략이다. 그러나 이회창은 원래부터 한국 자본주의 주류의 대변자이다. 그가 한국 자본주의가 살기 위해 가야 할 길을 아니 갈 리가 없다.

이 나라가 나아갈 길에 대해서 김대중과 이회창이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가? 다른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가? 아니다. 김대중과 이회창이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금융시장 개방에 대하여, 공기업의 사기업화와 해외매각에 대하여, 정리해고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나라가 나아갈 길에 대하여 '미국이냐 유럽이냐'를 묻는다면 결국 김대중이나 이회창이나 모두 미국으로 가자고 한다. 그러나 권영길은 유럽으로 가자고 한다. 비전이 다른 것이다. 나라가 나아갈 길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미국이니 유럽이니 한 것은 큰 방향을 알기 쉽게 말한 것이고 우리나라가 곧 미국이나 유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니 동지들은 안심하시기 바란다.

파시스트들과의 투쟁에서 사회주의자는 자유주의자와 손 잡을 필요가 있다

그래도 파시스트들과의 투쟁에서 사회주의자는 자유주의자와 손 잡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이미 헤게모니를 잡은 자유주의자와 아직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사회주의자가 손을 잡고 사회권력 중심으로부터 밀려나서 악을 쓰는 파시스트들을 잠재우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문제는 "자유주의 진영 내부 분파들의 투쟁에 대하여 사회주의자는 어떤 정책을 취할 것인가?" 이런 것들이다. 강준만은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반파쇼 연합전선을 제안한다. 그것은 매우 좋고 필요한 일이다. 프랑스나 독일에서도 파시스트들, 신나찌주의자들,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득세를 막기 위해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거기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먼저 자유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조선로동당이나 한나라당이나 새천년민주당, 그 어느 정당에도 정신적, 물질적으로 종속되거나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 존재로서 우리 스스로를 세워나가야 하겠지만 다른 정당들도 우리를 인정해야 한다. 파시스트와의 투쟁을 사회주의자가 독립하고 진보정당을 만들 권리를 부정하는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박용진이 경계한 '비판적 지지의 망령'이 될 것이다. 그러나 벌써부터 일각에서는 2002년 대선에 진보정당이 후보를 낼 필요가 있느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강준만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상대에 대해 비타협적인 것은 사회주의자보다는 자유주의자다.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의 존재를 인정이라도 한 적이 있는가? 민주노동당의 대표가 출마한 창원을 선거구에 민주당이 후보를 꼭 내어야 했는가? 거기서 얻은 1만2천 표 득표로 전국구 의원을 몇 명이나 더 배정 받게 되었는가? 민주당이 지난 총선 직전에 내어놓은 선거법 개정안을 보면 민주당의 안중에 민주노동당은 없다. 1인2표 정당명부제를 도입한다고 하면서도 전국 득표율 5퍼센트 이상 되는 정당에게만 비례대표 의석을 배정한다고 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두 번째 전제는 정계개편이 이루어져 자유주의자들이 파시스트들과 결별하고 지역 정당의 한계를 벗어나 전국적 정책정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강준만은 민주당이 자유주의 정당이라고 믿고 싶고 한나라당을 파시스트 정당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그렇게 말하기는 힘들다. 양당의 구성이나 지지 기반은 어디까지나 지역이다. 한국의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이 아니다. 강준만이 뜻밖에도 지난 대선에서의 미국의 녹색당 지지자들의 행동을 너그럽게 이해하면서 잠시 혼돈하지 않았나 싶어서 하는 말이다. 아직 한국의 정당은 보수양당 체제로 정착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일정한 정책적 차이를 가진 보수 양당 체제가 아니라 여전히 전근대적 지역정당일 따름이다. 그래서 지난 대선에서 '김대중이 당선된 것이 이회창이 당선된 것보다 백 번 잘 된 일'이라면 그것은 정책에서 큰 차이가나서가 아니라 호남 사람들도 권력을 한번 잡아서 호남 사람에 대한 차별, 영호남간의 지역적 불평등이 다소라도 해소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비판적 지지는 없다

'비판적 지지의 망령'이 있다면 우리 민주노동당으로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비판적 지지'의 망령이 있다기 보다는 노무현 캠프의 진보진영, 또는 민주노동당 주변, 민주노총이나 시민단체들에 대한 공작이 있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노동당이 그러한 공작에 대해 과민하고 피해의식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자신감의 부족이고 우리 당의 정체성, 우리 당의 철학적 빈곤을 고백하는 것이니 한편으로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비판적 지지의 망령'에 대해 피해의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오랫동안 '비판적 지지'라는 말은 곧 '진보정당의 존재'를 부인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용진의 비판적 지지의 망령에 대한 우려는 과하다. 사실을 말하면 이미 비판적 지지는 없다. 굳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할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은 없다. '비판적 지지'라는 이상한 단어와 정치적 태도는 1987년에 있었으며, 오늘 그런 것은 없다. 

'비판적 지지'는 어디서 왔던가? 15년이나 계속되었던 군사독재 시절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반파쇼 투쟁을 오랜 동안 함께 해왔다. 아니 서로 구분이 안될 정도로 한 덩어리로 뭉쳐서 투쟁했다. 그 한 덩어리를 '운동권'이라는 이상한 용어로 표현했다. 말하자면 '반파쇼 운동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문화권'이라는 뜻일 터인데 군사독재가 길어지면서 상당히 붉은 빛깔로 물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전히 자유주의자들이, 아니 혁명적 민주주의자들과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이 다수를 이루었다. 즉 운동권은 원래 겉만 붉은 사과가 많은 과일 바구니였던 것이다. 사과들, 자유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과 결별하고 지금까지 정치권에 있던 자기 동지들과 합류하면서 명분을 세울 수 없으니까 궁색하게도 '비판적 지지'라고 했던 것이다. 대표적 비판적 지지론자였던 김근태와 이해찬의 언행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또한 '운동권'이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면서 '보수 정치인’들을 아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 이유는 있지만 근거는 없는 집단적 자존심이 김대중이든 김영삼이든 보수 정치인에 대한 절대적, 무조건적 지지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차선을 선택한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세상에 차선을 선택하는 바보가 어디 있나? 사람은 누구나 그 시점, 그 상황, 그 조건에서 최선을 선택한다. 그런데 자기가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을 최선이라고 표현하지 못하고 차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람은 분위기에 맞추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 하나 역사적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이야기한다면 비판적 지지의 원천이 하나 더 있다. 역사적 사실로서 북한의 대남 정책이라는 것이 있었고 그들의 시대착오적 50년대식 정세 인식이 있었고 그들의 소박한 반제 반파쇼 연합전선 전략이 있었다. 그리고 북한의 김대중에 대한 과대 평가, 또는 과대 기대가 있었다. 장차 등장할 김대중 정부를 ‘자주적 민주정부’라고 칭하고 김대중 정권이 서면 그와 더불어 남북한 평화 공존 체제, 국가연합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김대중이 70년대 초반에 들고 나온 ‘공화국 연방제’라는 통일 방안을 북한에서는 60년대 그들의 통일 방안인‘고려연방제’나 1980년에 발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 방안과 근접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북한의 오해는 다시 남한 극우반공 세력의 오해가 되었다. 즉 남한의 극우 반공주의자들은 북한이 사랑한 김대중을 필요 이상으로 미워하고 적대시했던 것이다. 김대중은 분단국의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실제로 북한은 남한 내의 조선로동당 지지자들로 하여금 김대중을 지지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렇다면 조선로동당이나 남한의 조선로동당 지지 세력들이야말로 어떻게 보면 진정한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자'들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진정한 정치 사상적 소속은 조선로동당이면서 전략적으로 김대중을 지지하는 것이었으니 범(汎) 김대중 당의 일원이 김대중을 지지한 것과는 사정이 다른 것이다.

문제는 노무현의 '사기극'이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노무현은 낙선했지만 인기는 더 올라갔다. 아니 그는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군에 들어갔다. 그는 '망국적 지역감정'에 저항하여 장렬히 싸운 의병장으로 커다란 명예와 명분을 얻은 듯이 보인다. 그런데 지난 총선을 차분히 다시 생각해보자. 선거의 과정이나 결과를 잘 보자. 노무현이 정면 대결한 것으로 되어 있는 지역감정이라는 문제를 보더라도 노무현이 문제제기일 수는 있지만 답은 아니다. 권영길이야말로 답이다. 지난 총선에서 노무현이 낙선한 데 대해 애석해하는 사람들이 조금 깊이 생각해보았다면 실제로 한국 정치의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권영길의 낙선이 훨씬 더 애석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노무현은 만 표 이상 차이로 낙선했다. 아니 노무현은 처음부터 당선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출마했다. 그것은 해결책이 없는 문제제기와도 같은 것이다. 노무현의 투기, 계산된 행동, 영남에 출마해서 낙선해도 본전이라는 계산에 근거한 정치 쇼, 즉 사기극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권영길은 당선될 수 있었다. 왜? 그것은 권영길이 진지한 답이었기 때문이다. 그 다람쥐 쳇바퀴 같은 지역감정의 대결구도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내용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노무현의 선거운동은 보수 정치인의 선거운동 그 자체였다. 그것은 새로운 시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개인 사업이었다. 후보 개인이 선거자금을 다 내거나 만들어내고 투기를 했다. 그러나 권영길의 선거운동은 수천 명이 한 푼 두 푼을 내고 자발적으로 선거운동을 벌인, 한국 정치에는 없던,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권영길 후보는 정말 한 푼도 내지 않았으며 권영길의 선거운동에 활동비를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이었으며 우리가 책에서 보았던 영국노동당 선거운동과 같았다. 그러나 노무현의 선거운동은 전혀 달랐다. 마찬가지로 모든 점에서 노무현에게 근본적 차원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은 없다.

그래서 노무현이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하였을 때 우리는 커다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노무현만큼 언론의 혜택을 받았던 사람이 또 있을까? 물론 그래도 언론과 전쟁을 할 수 있다. 아이들은 때때로 부모와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노무현이 '사기극'을 벌이고 있으며 강준만은 거기에 넘어갔다고 보는 것이다. 강준만은 언론개혁의 든든한 동지를 만나 너무나 기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국민을 상대로 한 '사기극'을 벌이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다시 강준만은 노무현에게 큰 힘을 주고 있다. 

노무현 캠프에서는 강준만의 책을 수천 권 사다가 홍보물로 돌리고 있다. 그거야 우리도 흔히 하는 일이니 큰 허물도 아니다. 다만 '나는 노무현 캠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강준만의 주장이 문제인 것이다. 너무나 피상적인, 그래서 사기적인 발언인 것이다. 

노무현이 정치에 입문할 즈음, 그는 김대중 지지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김대중 지지자를 넘어서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정치가로서 변화 '발전'했다고 본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도 박용진이 지적한대로 자유주의자로 '발전'했다. 그는 1987년 당시에 백기완 편에 서서 이해찬과 논쟁했다. 그는 당시에 매우 소박하게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지지했다. 물론 당시에는 그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이부영도 제정구도 그랬다.

강준만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것, 1987년 대선

내가 강준만의 글을 처음 읽은 것은 [김대중 죽이기]였다. 좀 오래 되어서 내용은 잊어버렸지만 나의 느낌은 남아 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나서 두 가지를 추측하고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선 "강준만은 1987년에 미국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내가 추측한 처음 한 가지는 즉시 그의 약력을 보고 확인할 수 있었으며 나머지 한 가지는 최근에 어느 글에서 그가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가 70년대 또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큰 결함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권 이데올로기'에 감염되지 않고 고정 관념이 없이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7년에 미국에 있었다는 문제는 심각하다. 왜, 1987년 대선을 모르고서는 한국 정치를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가 1987년의 대선에 대해서 국민 정서나 상식과 먼 소리를 하는 것은 그가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15년간의 헌정 중단, 군사 독재 후에 치러진 대선, 15년간의 민주화 투쟁으로 쟁취한 1987년 대선이 여느 대선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대선일 뿐이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알기 어렵다.

비판적 지지론의 잘못은 단순히 노태우를 당선시킨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의 속도와 철저성과 주도 세력과 방향을 모두 뒤바꾸어 놓은 데 있었으며, 민주주의 혁명의 타락에 있었다. 1987년 대선에서 저지른 김대중의 과오가 예사로운 과오인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과오였다. 앞으로 두고두고 씻지 못할 과오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장사에는 성공했다. 그들의 목적의 반은 달성한 것이다. 1988년 봄의 총선에서 김대중은 드디어 저 한민당의 원류에서 나온 이 나라 보수 야당의 한 줄기를 떼어내어 하나의 정당을 만들고 지긋지긋한 김영삼과의 동거를 끝장내고 이 나라 제 2당의 당수가 되었다.

강준만은 정치 장사를 모른다.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아니 몰매를 맞을 각오를 하고서도 장사를 해야만 하는 그들의 입장을 모른다. 그러니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나의 투기에 대한, 한 정파의 장사를 위해 나라의 일을 그르친 자들에 대한 비난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1987년은 그저 예사로운 대통령 선거가 아니었다. 15년 동안의 군부독재에 대한 고난의 투쟁이 결실을 맺는 것이었다. 국민정신이 고양되는 혁명적인 변화의 순간이었다. 잘하면 누적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강준만이 그토록 통탄해하는 지역 감정도 해결의 길로 갈 수 있었다. 이제 그 지역 감정은 보수 정당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진보정당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남아 있다.

강준만은 그 당시 비판적 지지론자들이, 4파전 필승론자들이 무엇을 망쳤는지 모른다. 노태우의 당선이라니,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 그로 인해 민주화는 불철저하게 추진되고, 지지부진하다. 과거는 청산되지 아니하고 지역 감정은 심화되었다. 그런데 왜 김대중이 책임을 지느냐고? 그 이유는 비판적 지지론자였던 유시민이 이미 잘 설명하고 있으니 덧붙일 말이 없다. 다만 유시민처럼 그런 이론적 분석을 하지 않고서도 대다수 국민들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황광우가 지적했는데 그에 대한 반론을 펼치면서 대학교수라는 편안한 직업을 가지고 글이나 쓰는 주제에 감히 풍찬노숙하며 의병을 일으킨 사람에게 결코 해서는 안될 말까지 하고, 선거에서의 득표수까지 들먹거리며 인신공격을 하는 것을 보고서는 "말로 상대할 놈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후에 그가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을 보고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글에서 좋은 이야기도 많이 발견하였다. 내가 잘 모르는 것을 그가 쓴 글을 통해 알게 된 것도 많다. 결국 나는 강준만의 부지런함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지런한 그의 노력으로 조선일보의 영향력이 약화되거나 대한민국의 언론들이 개선된다면 그 득을 우리도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미리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 개혁에 대한 그의 열정과 집념은 분명 찬탄할 만하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그의 글은 아무래도 피상적이다. 그 이유는 그가 '정치', 특히 '한국 정치'를 잘 모르는 데 있다.
 

dd

2011.05.29 00:20:08
*.78.112.77

그리고 민노당이 노동계급의 노동자들로 구성ㅎㅎㅎ. 울산 정규직들 비정규직들 무시하는거 보면 참도 계급의식 투철하네ㅎㅎ...조합주의는 투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뭔가 착각하나 본데 노동자들까지 흡수한 민주당이 차라리 대단하지, 님들 노동자의 벗이라더니 노동자들은 님들을 안 좋아하잖아. 어떻게 된게 김대중, 노무현 거치면서 환경도 좋아졌는데 예나 지금이나 지기 싫어하면서 싸움은 못하는 전형적인 문꽈 먹물 좌빨들만 우글거리며 서로가 머리이고만 싶어하는 동아리만 운영하고 있잖아염....

사실 님들은 계끕정당이라고 하기도 우습지.... 솔직히 양심적으로 얘기해서 진보신당 당원 중에 계급정당이라고 할만큼 노동자, 기층, 농민의 비율이 높기나 한가? 백번 스크리닝 해도 그런 결과가 안 나오겠네 ㅎㅎㅎㅎ

dd

2011.05.29 00:29:19
*.141.219.112

뭐, 근데 좌파, 노빠, 유빠들의 마지막 발악은 이해가 갑니다. 사실 개헌이라도 해서 대통령제를 폐지하지 않는 한 집권 경험이 있는 정파간의 대결로 굳어지는 건 자명한 일이고, 차라리 조직의 힘이라도 쓸 줄 아는 민노당이야 어떻게든 살겠지만 입만 살았지 할 줄 아는게 없는 PD와, 이번에 정권을 못 찾으면 결국 영영 사라지게될 자칭 영남 개혁세력이야 이번에 마지막 기회죠.


그러니까 빨랑 심누님과 진형님과 국형님, 그리고 우리 유짱 발언대로 듣보잡 삼당연합이 빨리 이뤄줘야 할텐데.....

사실 나가 올해 제일 보고 싶은 정치적 이벤트가 그거여요ㅎㅎ

하뉴녕

2011.05.29 02:21:15
*.152.162.105

...두분 죄송한데 저는 호남인들이 민주당 지지하는거 뭐라 한 적 없거든요... 글쎄 한 9년전까지 거슬러올라가면 모를까 7년전부터도 특별히 호남인들에 대해서 진보정당 지지 안한다고, 민주당 지지율이 90프로 넘는다고 뭐라 한 적 없습니다... 게다가 님들이 좌파 비판이랍시고 끄적이는 것들, 제가 여기서 훨씬 정교하게 쓰는 것들입니다. 근데 그런 것들 끄적이면서 여기서 뭘 얻으려는 겁니까? 제발 인정투쟁하려면 뭔가를 줄 수 있는 사람한테 가서 하세요...저는 님들이 원하는 걸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기 이상한 덧글 다는 분들은 제 견해를 비판하는게 아니라 그냥 자신들이 생각하는 좌파(?)의 이미지를 비판합니다...그냥 비판도 아니고 '영남'이라고 비아냥대는데요... 뭐 거기다 대고 제가 어찌 말이 곱게 나가고 논의가 되겠습니까? 걍 같이 웃고 놀수밖에요... 그러니 이런 무의미한 토론 그만두시길 바랍니다. 십년 전에 하던 얘기에 비해 진전이 없어요...

렌즈

2011.05.29 11:06:33
*.41.224.95

말 하는 거 들어보니까 꼴받는 것 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진짜 니들이 욕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서 사는 실제 (니들이 말하는 소위) 상도PD도 어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많진 않겠지만 한 두놈 정도는 찾기 별로 어렵지도 않을 거 같고. 그럼 그런 놈 블로그에나 가서 키배 붙어보지. 왜 개소리 섞어가면서 니들 뇌속에 든 애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 있는 여기와서 지랄들인지? 한윤형이 민주당 와해를 바랐나, 민주당 찍는다고 전라도민 무시하고 욕했나? 그것도 아니면 전두환한테 막걸리라도 사줬나?

아, 혹시.

아, 혹시 니들.... 한윤형한테 딱히 이쁨받고 싶은 건 아니겠지? 흥흥. 츤데레 년들아? ㅋㅋ

역시

2011.05.31 05:42:16
*.18.199.173

대구고향+서울대출신+좌파논객 = 출신성분으로는 한국좌파정당에서 삼십년지나면 포스트 할만하겠네.

미래의 사회당 당수 자질을 몰라봤음요

하뉴녕

2011.05.31 08:05:24
*.171.89.97

삼십년 후에 좌파정당이 있을지, 영-호남 구도란게 유효할지, 그리고 제가 살아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만, 그런 출신성분(?) 따질거면 '남자'라는게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요....그건 30년 후에도 유효할 거 같은데.(비관적 전망)

개쌍도

2013.08.16 20:23:43
*.218.160.92

이상 쌍도수꼴 유전자가 생산해낸 쌍도좌좀의 괴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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