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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이택광-조정환 논쟁 요약정리 (1)

조회 수 1402 추천 수 0 2009.05.14 02:46:41


남의 블로그 덧글에서 좀 쓸데없는 싸움을 벌인 감도 있고 해서, 자숙하는 의미로 정리 포스트를 올리기로 했다. 이 논쟁이 (나를 포함한) 관전자들에게 따라잡기 쉬운 것이 아니라 이런 포스트를 원하시는 분들은 꽤나 많을 듯. 논쟁참여자들이 올린 포스트들의 내용을 요약하는 형식을 취할 것이다. 능력의 한계로 미흡한 점이 많을 것이나 양해바란다. 내용에 이의가 있으신 분들은 곧바로 댓글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납득이 가는 만큼 반영하겠다.


1. 이택광, “조정환의 촛불론”, 5월 5일
http://wallflower.egloos.com/1902259

1) 조정환은 왜 자율주의의 관점에서 촛불을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미있는 설명을 하지 못했다.
1-1) 촛불이 자율주의의 관점에서 그토록 혁명적인 봉기였다면, 왜 2005년 프랑스 폭동만큼의 타격도 적들에게 주지 못했는가?
1-2) 2008년 촛불에서 존재론적 관점에서 변화가 일어났다는 조정환의 설명은 납득할 수 없다. 2000년 이후의 여러 대중적인 사건들 중에서 유독 2008년 촛불만 자율주의적 봉기로 바라봐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2) 조정환은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다.
2-1) 조정환의 <그대는...> 비판은 생각이 조금씩 다른 필자들을 한묶음으로 보았기 때문에 논리적인 문제가 생겼다.
2-2) 조정환은 백승욱의 반지성주의 비판을 자율주의 비판으로 치환해서 비판했다.
2-3) 조정환이 <그대는...> 필자들을 ‘지적 엘리트’라고 비판했다면, 그 비판은 몹시 부당하다.


2. 조정환, “[이택광의 『미네르바의 촛불』 비판에 대한 반비판. 1]폭동과 봉기”, 5월 7일
http://blog.daum.net/nalsee/16521637

1) 이택광은 방리유 봉기를 지배계급의 시각으로 본다.
1-1) 방리유 봉기를 폭동으로 칭하는 것이 문제다.
1-2) <공존의 기술>의 저자들과는 달리 방리유 봉기가 끝난 것처럼 쓰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1-3) 이택광은 경멸의 감정을 표하면서 방리유 봉기와 촛불이 종결되었다고 평한다.

2) 이택광의 촛불 비평과 나는 대립한다.
2-1) 촛불을 환등상으로 보는 관점은 촛불을 유령이나 광기로 보는 조선일보식 관점과 큰 거리가 없다.
2-2) <공존의 기술>의 저자들은 방리유 봉기를 ‘환상-유령’을 ‘실재-유령’으로 대치시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2-3) 나는 촛불은 현재진행형으로 본다. 그러므로 다중의 활력들의 다양한 표현들을 매장하려는 인식틀, ‘방리유/촛불 패배 - 종결’이라는 인식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3. 이택광, “조정환의 반비판에 대해”, 5월 8일,
http://wallflower.egloos.com/1903202

1) 방리유 봉기를 폭동이라 부른 것은 ‘권력과 자본의 시선’에서 서술했기 때문이다. ‘적’의 관점에서 볼 때 촛불이 프랑스 폭동만큼 두렵지 않았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런 객관적인 인식 속에서 구체적인 전략이 나올 수 있다.

2) 나 역시 촛불이나 방리유 사건을 “끝난 것”이라 보지 않는다. 나는 촛불을 ‘정치적인 것’의 출현이라 주장했다. 이기적인 욕망에서 어떻게 정치적인 것이 나오는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욕망의 정치’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김호기를 비판한 것은 그 때문이다.

3) 촛불을 누가 더 혁명적으로 보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촛불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촛불을 구태의연하게 설명하는 진보-좌파를 비판했다. 그들은 촛불에서 드러나는 한계를 외면하고 손쉽게 직접민주주의의 구현이라거나 예외적 상황의 도래라고 촛불을 보았다. 그에 반해 나는 촛불을 정상국가와 치안에 대한 중간계급의 욕망이라 분석했다. 몫 없는 자들에게서 촛불의 정치성이 나오지만, 몫 있는 자들이 동참하면서 그들에게 힘이 실렸다. 촛불은 이 둘이 결합해서 만들어낸 환등상이었다. 이 꿈에서 깨어나는 충격을 만들기 위해선 실재의 충동을 받아 안을 제각기 다른 주체를 판독해야 한다.

4) 이런 한계들로 인해 촛불이 실패했다고 판정하는 것이 내 목적이 아니다. 촛불의 경험은 잔류하고 있고, 아마도 귀환할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내지 못한다면 촛불을 합의제 민주주의로 박제화하려는 손석춘 류에게 촛불의 동력이 흡수당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촛불 비판은 조정환의 목적과 만난다.


4. 조정환, “[이택광의 『미네르바의 촛불』 비판에 대한 반비판. 2] 승리와 패배”, 5월 8일
,
http://blog.daum.net/nalsee/16521638

1) 사람들은 인생에서 성공과 실패를 따지지만 삶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다. 계속되는 삶이 있을 뿐이다. 성패를 따지는 것은 전쟁의 차원이다.

2) 운동의 성패를 따지는 것은 군사적 전쟁의 양상이다. 그러나 운동은 군사적 전쟁의 양상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운동은 전쟁의 형태를 지니고 있을 때라도 전쟁으로 환원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운동이 실패했다는 것은 그것이 그저 전쟁이 되어버렸다는 말과 같다. 

3) 촛불 역시 삶과 마찬가지로 활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승리했다’나 ‘패배했다’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 “촛불은 승리한다.”라는 말만이 정당하다. 촛불이 삶을 개방하고 변형하는 한 촛불은 끝나지 않고 승리한다.

4) 이 존재론적 차원의 승리는 사회정치적 차원에서까지 실현되어야 한다. 이게 내 본의다. 그런데 이택광은 내 말을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촛불은 패배했지만, 존재론적 차원에서 촛불이 승리했다”로 이해한다. 전적으로 잘못 읽은 것이다.

5) 촛불이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열었고 또 열고 있는지가 얘기되어야 한다.


*조정환의 “간주곡” http://blog.daum.net/nalsee/16521641 은 벤야민 이론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요약정리에서 생략하겠습니다. 논쟁에서의 의미를 따지자면 이택광이 벤야민의 환등상 개념으로 촛불을 바라보는 것을 반박하기 위해 벤야민의 얘기를 하는 글입니다. 논쟁과 관련이 있는 부분은 조정환의 다음 글에서 다시 언급될 겁니다. “보충자료” http://blog.daum.net/nalsee/16521642 도 생략합니다. “미네르바의 촛불” 책머리의 일부를 옮겨온 글이기 때문입니다. 논쟁에서의 의미는 <그대는...> 저자들의 일부가 조선일보 류의 신보수주의의 신성동맹에 합류하고 있다는 조정환 자신의 관점을 재확인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신은 촛불을 위해 글을 쓰고 있지만 <그대는...> 저자들의 일부는 그렇지 않다고 조정환은 말합니다.


*이택광의 “논점이 무엇인가?”
http://wallflower.egloos.com/1904092 역시 다소 지리해지는 논쟁에 대한 툴툴거림이기 때문에 역시 요약정리에서 생략하겠습니다. 논쟁에서의 의미는, “조정환 선생이 지금 해야할 일은, 내 글이 얼마나 친이명박적이고 친신자유주의적인지를 '이론적'으로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촛불의 대중은 다중이다'는 자신의 명제를 증명하는 것이다. 조정환 선생의 <미네르바의 촛불>이 이런 질문에 대한 미흡한 답이라는 게 나의 평가였다. 그렇다면, 이런 의구심을 해소시킬 정당한 주장을 하면 될 일이다.”라는 일부 구절 인용으로 명백해진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이택광은 1번에서 제기한 자신의 논점에 대해 조정환이 전혀 답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논쟁이 된다고 믿는 거죠. 이 게시물의 덧글에서 조정환과 이택광은 벤야민의 개념에 대한 얘기를 나눕니다. 한겨레 기자가 정리한 것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 여기까지 하는데 한 시간 남짓 걸렸습니다. 내일은 예비군 훈련을 가야 해서, 일단 여기에서 끊습니다. 나머지는 되도록 내일 작업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바람과나무

2009.05.14 03:57:10
*.162.38.2

수고하셨어요. 더 많은 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명쾌하게 정리 잘 하셨네요 ^^

pelle

2009.05.14 09:43:31
*.44.150.6

정말 훌륭하시네요^^;

한단인

2009.05.14 15:52:16
*.55.143.230

읽기 능력이 떨어지는 3류 역덕으로써 재반론 글 올라왔을 때부터 이미 나가떨어지고는 '나중에 읽자' 란 인지부조화를 일으킨 1인으로써 이 포스팅은 아주 적절하군요.(응?)

이챠

2009.05.14 17:28:00
*.200.87.74

이챠임.

오랜만에 안부 전하러 들렀음.

방명록 같은 게 읎어서 제일 위의 포스트에 인사하는걸 양해 구하빈다.

재미있는 거 많이 읽고 감.

나도 열심히 살고 있음.--; 성실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환경이 작대기를 들고 집돼지처럼 그렇게 나를 몰아가기에

계속 함께 싸워주시라. 자주 웹에서 놀지 못해도.

이따금 다른 일 하다가 초호기가 떠오르면 진심으로, 짧게라도 건필을 기원하고 있음.

하뉴녕

2009.05.14 19:58:20
*.49.65.16

감사. ㅋ

근데 방명록은 있음 ㅎ

오른쪽 상단 참조 ^^;;

이챠

2009.05.14 20:37:59
*.200.87.74

아 글쿠나.--; 난 왜 계속 오른쪽 줄에서만 찾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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