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레디앙 학생운동 논쟁에 부쳐 (2)

조회 수 2877 추천 수 0 2010.07.15 13:01:43


홍명교, “무지한 반성이 '학생운동 위기' 지속시킨다” 비평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078


조병훈의 글이 논리없이 스케치만 있다면, 홍명교의 글은 나름의 논리는 있는데 근거가 없다. 홍명교 글의 논리적 핵심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학생운동 몰락에 대한 조병훈의 해석은 그의 정치적 당파성과 협소한 정파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2)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실체도 없는 ‘기존 운동권’이란 대상을 호명하여 재미를 보아왔다.

3) ‘기존 운동권’이 없는 만큼 더 이상 ‘학생운동의 위기’도 없다. 십 년이 지난 ‘학생운동 위기론’을 지금 꺼내드는 거야말로 어쩌면 진보신당이 처한 진정한 위기, ‘이론적 안이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4) ‘위기’를 ‘부정적인 대상’(=운동권)이 지닌 도덕적인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

5) 조병훈이 운동권 정파의 폐쇄성을 문제삼는 이유는 뻔하다. 레닌주의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다.

6) 학생운동 주체들이 수많은 구조변혁을 이룩했고, 조병훈이 긍정적으로 보는 부문운동을 만들어 내왔는데, 그들의 폐쇄성을 비판하는 것은 결국 급진좌파정파에 대한 공격이 아닌가?

7) 그게 아니라면 조병훈은 어째서 진보신당 지도부의 폐쇄성을 비판하지 않는가?

8) 입당하고 선거만 하면 정치가 다인가?


이 글의 매력은 진위를 판별할 수 없는 보편적인 명제인 1)과 4) 같은 것 사이사이로 진위를 판별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명제인 2)와 3) 같은 것을 간간히 섞어서 ‘논리’를 전개하다가 불현듯 아무런 실천적 근거도 없이 5, 6) 7), 8) 같은 구체적인 단언으로 상대를 비판한다는 데에 있다. 이런 글은 그들이 평소에 읽는 사회철학자들의 글쓰기와 얼핏 보기에는 닮아 있어 멋있게는 보이겠으나, 그렇다고 그 학자들이 품고 있는 치열한 고민과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조병훈 글의 핵심적인 문제는 진보신당의 위기 문제를 학생운동의 몰락 문제로 치환해서 설명했는데, 그게 맥락에 닿는 말인지 누구도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오늘 니가 배탈난 이유는 어제 짜장면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인데, 그건 누구도 단언할 수 없는 얘기다. 여기에 대고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아니, 도대체 어제 짜장면만 먹은 게 아니라 짬뽕도 먹고 카레도 먹었고 오늘은 된장찌개도 끓여먹고 라면도 먹었는데 왜 하필 배탈이 짜장면 때문이란 거야?”라는 것이다. 그런데 홍명교는 이에 대고 근엄하게 선언한다. “문제는 짜장면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다. 짜장면을 자유주의적 방식으로 먹었기 때문이다.” 이게 3)에 해당하는 주장인데, 이쯤되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물론 이는 ‘어쩌면’이란 부사가 보여주듯 홍명교의 핵심적인 주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홍명교는 조병훈의 최초의 문제의식, 그러니까 ‘진보신당의 문제’에 대해선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관심있어 하는 것은 오직 조병훈이 스케치하는 학생운동권의 몰락의 방식이며, 그 스케치 방식의 정파성이다. 그리고 그 정파성에서 그는 레닌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의 공격을 읽어낸 후, 여기서 다시 한발 더 나아가 진보신당의 문제도 여기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그는 묻는다. “조병훈은 어째서 진보신당 지도부의 폐쇄성을 공격하지 않는가?” 물론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조병훈이 학생운동권의 부정적인 당파싸움(?)의 이미지를 현재 진보신당 진로문제를 두고 토론하는 이들에게 덧씌우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즉 조병훈의 학생운동권 비판은 진보신당 비판과 연결되어 있는 거다. 그런데 홍명교는 조병훈이 진보신당 지도부는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파적이라고 한다.(7) 좀 핀트가 어긋나 있다. 만일 조병훈이 진보신당 지도부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그건 조병훈이 왕년의 학생정치조직 활동가에 해당하는 위인이 진보신당 내부에서 다른 인물군에 비교된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정파성의 발현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조병훈이 진보신당 문제를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어서 홍명교는 조병훈이 진보신당 문제를 얘기하려다 제대로 쓰는데 실패한 저 한편의 글만을 보고 “8) 입당하고 선거만 하면 정치가 다인가?”라고 묻는다. 좀 황당한 일이다. 글 한편만 보면 상대편에 대한 사상검증이 끝나는가?  


홍명교의 주장 중에서 가장 올바른 것은 “4) ‘위기’를 ‘부정적인 대상’(=운동권)이 지닌 도덕적인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건 어디다 갖다 붙여도 올바른 말이다. 만일 조병훈이 도덕주의적 비판을 한 것이라면, 조병훈은 옳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큰 문제는 조병훈이 도덕주의적 비판을 했는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조병훈은 정파 활동가 중심 학생운동의 구조적 협소함이 극복되었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것이 학생운동권 몰락의 원인이라 보는 것 같다. 이런 그의 시각은 ‘정파 소속 몇몇 활동가’의 성찰과 반성이 중요했다는 ‘도덕주의 비평’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적어도 다른 방식으로 전유하는 것이 가능하다. 애초에 구조의 문제를 지적했던 만큼 구조적 접근도 가능한 것이다.


이를테면 조병훈이 글에서 “그래서 학생운동권은 몇 명이 말아먹었고, 지금 진보신당도 지도부 몇 명이 말아먹었다.”고 선언했다면, 이건 구조적인 문제를 몇 몇 인자들의 도덕성 문제로 치환하는 도덕성 비판이다. 그런데 홍명교는 조병훈이 바로 그런 짓을 안 했다고 비판한바 있다(6). 어안이 벙벙하다.


그러면서 홍명교는 조병훈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이에 반해 진보신당의 20대 당원들께서는 자기 생활공간에서 얼마나 대중들을 열심히 만났는지 되묻고 싶다.” 이렇게 물으면 안 된다는 걸 아니까 저렇게 덧붙인다. “결국 나는 지금 다소 무리해서 위악적으로나마 ‘도덕주의적으로’ 묻는 것인데, 우리의 이런 질문은 끝이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끝이 없는 질문을 던진 건 외려 조병훈이 아니라 홍명교다. 사실인즉 홍명교가 그 위악성을 발휘하고 싶었기 때문에 조병훈의 주장은 도덕주의적인 것이 되어야 했던 거다.


홍명교는 “우리 운동권들은 구조적 변혁도 많이 했고, 그 후 생긴 부문운동들 여러 가지도 사실 우리 운동권들이 만든 거다.”라고 얘기한다.(6) 스스로 문제를 도덕적인 차원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문제를 그렇게 바꾸면 운동권이 운동권 이후 세대들에게 꿇릴 것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도 그거 안다. 근데 지금 그게 논점은 아니다. 


전후맥락을 따져볼 때, “홍명교는 조병훈의 주장을 ‘도덕적 비평’으로 보아야만 했다”고 설명하는 게 올바른 일일게다. 왜냐하면 자신의 글의 구도를 이미 그렇게 짜놓았으므로. 아마도 본인의 경험 때문에. 그 심정 이해한다. 십 년동안 운동권이 동네북이었는데 한번쯤 팩 성질을 부릴 때도 됐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운동권을 만나보지도 못한 친구들이 ‘운동권 방식의 폐해’를 천연덕스럽게 논하는 세상에선 더 그렇다. 정파들 다 망하고 학교에 입학한 친구들이 어느 정파의 활동가를 자칭하는 세상에선 더 그렇다. 그렇긴 한데, 우리는 바로 그런 의미없는 ‘팩’을 볼 때 개인의 트라우마를 상상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런 식의 비난은 아예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조병훈씨 개인의 트라우마만 상상하게 할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건 홍명교에게 되돌려주어야 할 말인 것이다.


운동권이 구조적 변혁도 많이 했고 부문운동을 만들어냈다는 얘기는 도덕주의적 비평의 세계에선 의미가 지대하다. 그렇지만 다른 영역으로 넘어오면 별로 그렇지 않다. 상대편 논자는 “구조적 변혁을 많이 했지만 실패했잖아.”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부문운동 영역으로 넘어온 순간 그는 운동권의 조직논리가 아니라 부문운동의 방식에 적응하게 된 것이므로 얘기가 다르다.”고 하면 그만이다. 논리적으로만 본다면 그렇다. 실제로 조병훈은 이렇게 반론한다.


“대세를 잡고 있던 NL학생회 그룹이 폐쇄적으로 지도부를 지키는 선택을 했던 반면, 90년대 좌파학생조직은 홍명교의 말처럼 수 차례 자기 내부의 구조변혁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위하여' 진화했고, 더 많은 현장으로 진출했다.

'기존 운동권'의 좌파 학생조직 출신 학생들이 각 부문에서 활동한 바에 대해서는 홍명교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과 시민단체 활동가의 차이는 무엇인가. 설마 좌파는 좌파 학생운동조직 출신이라는 등식이 홍명교의 논리 구조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아니겠지.“


이런 문제에 대해 반론하려면 조병훈이 학생운동을 대함에 있어 정치운동과 자치운동도 구별하지 않고 뭉뚱그려 논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야 한다. 조병훈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모른다. “90년대 좌파학생조직은 홍명교의 말처럼 수 차례 자기 내부의 구조변혁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위하여' 진화했고, 더 많은 현장으로 진출했다.”라고 스스로 말하지 않았나. 그말인즉슨 결국 학생운동조직이 스스로를 해산한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다는 거다. 그런데 조병훈은 지금 자기 논리구조 속에서도 올바른 그 선택의 결과를 보고 학생운동권이 망했다고 시비를 걸고 있다. 더 나아가 진보신당이 그것들이 망한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시비를 걸고 있다.

가) 이념조직이 학교를 나와야 했고, 나) 자치조직으로서의 학생회가 더 강화되어야 했다면, 현재 학생운동의 문제는 가)는 대략 해결되었는데 나)는 전혀 길이 안 보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에 대해서야 정치조직을 꾸렸던 학생운동권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겠으나, 나)에 대해선 학생들 일반이 모두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을 거다. 이렇게 구별하고 나면 ‘기존운동권’이란 허상을 공격할 방법은 사라진다. 적어도 기존운동권의 공과를 공격하면서 현재의 진보신당의 문제를 공격할 방법은 사라진다. 당시 학생운동조직은 스스로의 어떤 부분을 와해시켜야 할 입장에 처해 있었는데 그걸 현재의 진보신당에 투영했을 때 논의할 수 있는게 뭐냐고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명교는 조병훈의 비논리를 적시하지 못한다. 그러지 않고 그저 자신의 논리구조를 근거없이 나열하는데 급급할 뿐이다. 조병훈은 자유주의자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여야 하니까! 홍명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조병훈이 기존 운동권정파의 폐쇄성을 문제삼는 이유는 레닌주의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6) 이로써 홍명교는, 기존의 운동권 정파 중에 유독 레닌주의 정파만 폐쇄적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책임을 지게 된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사실 운동권 정파들의 조직원리는 다들 비슷비슷했다. 그 조직원리만 보고 그게 수령론의 반영인지 혹은 민주집중제의 반영인지를 감별하는 것은 경험자들에게 가능했던 일인지는 모르나, 오늘에 와서 중점적으로 논의할 문제는 아니다. 무엇보다 조병훈은 뭉뚱그려 운동권을 논했던 바, 차라리 어떤 이념도 공격하지 않고 이념집단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보이고 있다고 공격했다면 더 맥락이 닿았을 것이다. 조병훈이 하필 레닌주의나 급진좌파 정파만 젓가락으로 골라내어 비평했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나?


홍명교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학생운동나 진보신당의 문제도 아니고, 조병훈의 비논리나 논리도 아니며, 한국 사회의 현실은 더더욱이나 아니다. 그저 그가 읽고 학습했을 텍스트들의 흔적과 편린일 뿐이다. 레닌을 열심히 읽고 논쟁의 현장에 뛰어들면 왠지 상대방이 '좌익소아병' 환자처럼 보이고, 지젝을 열심히 읽고 비평을 시작하면 왠지 삼라만상의 문제가 '자유주의자' 탓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 그러지 말자. TV에 나오는 요리사가 하는 그대로 칼질하지 말고, 우리가 잡고 있는 생선이 광어인지 우럭인지 아니면 도다리인지 정도는 확인하도록 하자.


양승훈, “20대, 좌파, 학벌 그리고 돈” 비평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123


이 글은 장황하고, 산만하며, 핵심이 없다. 이 글은 서두에 조병훈과 홍명교의 논쟁을 자유주의와 혁명적 맑스주의자의 대립으로 묘사하는데, 그건 조병훈의 운동권 조직 비판이 레닌주의 혹은 급진좌파정파 비판이라는 홍명교의 오도된 인식을 추인하는 것이다. 뒤이어 제시되는 문제는 ‘학벌’과 ‘돈’ 문제다. 말하자면 이렇게 투닥투닥대는 ‘운동권 정파 전쟁’(이 논쟁을 그렇게 정리하는 것 자체가 홍명교의 오류를 답습하는 얘기란 점은 이미 지적했다.)들이 ‘학벌’과 ‘돈’을 갖춘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인데, 맞는 얘기이긴 하지만, 이 논쟁 중에 튀어나와야 할 얘기인지는 모르겠다. 저 얘기를 좀 더 갈고닦아 이 논쟁에 개입한다면, “학생운동은 망한게 아니라 처음부터 유의미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이건 꽤나 재미있는 테제이긴 한데, 이 작업의 결말은 조병훈의 애초의 비평의 전제를 허무는 것이다. 물론 양승훈은 그런 일을 하진 않았다.


‘돈’ 문제 나왔으니 정리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다. 90년대 이후 학생정치조직이 스스로의 존재 이유에 대해 물음을 던졌고 ‘학생정치조직 해체’라는 주장까지 운위되었음은 이미 지적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학생운동권 몰락’과 ‘진보신당 위기’를 두루뭉실하게 포개놓는 조병훈 비평의 전제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이런 맥락은 학생운동에 고유한 맥락이고, 곧바로 진보신당의 위기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맥락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몰락을 고민하고 있었던 섹터 얘기는 지금의 진보신당 문제와 관련이 없다. 우리가 지금 “진보정당 운동은 끝났으니 다 접고 민주당 안으로 집단입당해서 하나의 분파를 결성하자!”는 ‘주대환 테제’를 따를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확인해야 할 문제. 그러면 왜 학생정치조직들은 학생회 활동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면서도 계속 탈정치화를 수반하면서도 학생회 선거에 개입했을까? 정답: 당선되면 돈이 나오니까. 돈 얘기 -끗-. 아마 홍명교가 본인의 글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도 이런 문제였던 것 같은데, 이런 사정 역시 진보정당 운동에 대입할 수 없는 맥락인 건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진보신당더러 선거에 나오지 말고 현장으로 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현장으로 가긴 가야 하지만, 선거에 안 나오는 건 정당조직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가 되니 말이다. 그런 얘기를 하려면 사노련이 되었든 노힘이 되었든 정당조직을 의도하지 않는 그런 쪽 단체들을 고민해야겠지.  


홍명교, “내가 비판한 건 유령이 아니다” 비평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156


이후로는 자신의 견해를 반복하는 드잡이질이 되어버려서 크게 문제삼을 부분들은 없는데, 홍명교의 이 글에선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첫째는 ‘자유주의’라는 말의 오용에 대해서다. 홍명교는 ‘자유주의’적 원칙이 확립된 세상에서 탄생한 정치평론의 잣대를 그대로 들여와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것들을 ‘자유주의’라고 칭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지금 “한국 사회는 자유주의도 확립이 안 되었으니 일단 자유주의를 위해서 싸우자.”는 식의 단계론을 설파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계론을 설파하지 않더라도 있는 건 있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경우 사회 전반적으로는 ‘자유주의’가 과소하되, 운동 진영의 일각에선 ‘자유주의’가 과도하게 실현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가령 스스로 좌파라 칭하는 이들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요구’보다 ‘표현의 자유’를 훨씬 더 중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현실사회주의의 전체주의적 오류에 대한 좌파들의 지나친 반성이 가져온 역편향일 수도 있겠고 한국 사회의 ‘미국화’의 한 단면일 수도 있겠다. 이런 부분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냥 모든 것을 자유주의라 얘기해버리면 진보신당에게 선거에 나오지 마라고 요구하는 저치들의 요구도 ‘자유주의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자유주의적 비평은 주류 기득권에 맞서 싸울 때 훌륭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자칫 낙인을 찍는듯한 ‘자유주의’ 놀이가 “자유주의의 모든 것에 반대하지도 않으면서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정파를 자유주의자라 호명하는” 코미디로 전락할까 두렵다.


둘째는 ‘실용적 독해’에 대한 비판에 대한 것이다. 담론에 대한 이론적 독해와 실용적 독해가 따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존재하는 것은 이론의 함의에 대한 정확한 숙지와 그 이론이 적용될 사회문제의 맥락에 대한 면밀한 파악이다. 논쟁이 어그러지는 이유는 그저 이 두 가지가 파탄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누구는 실용적 독해를 하고 누구는 정치적 독해를 제대로 하기 때문은 아니다. 홍명교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고 이 글의 결론이다.


 


haemi

2010.07.15 17:45:49
*.149.175.134

"비밀글입니다."

:

공현

2010.07.15 22:45:19
*.140.58.148

양승훈 씨 같은 경우는 저 두 분 논쟁에 개입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글을 시작하지만, 글 전체를 보면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거 같아요;; 딱히 홍명교 씨나 조병훈 씨 글에 관한 글로 보이지가 않던 --;;

양승훈

2010.07.16 00:16:25
*.33.161.252

저는 애당초 논쟁에 개입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따름이죠~ ㅎㅎ 윤형이 지적한 걸 뭐 빼도 박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그냥 또 제 이야기를 하려구요. ;

김슷

2010.07.16 03:49:46
*.10.27.118

공현 아직 대공분실 안갔음?

하뉴녕

2010.07.16 12:03:13
*.5.3.20

맞는 말이긴 한데 그 '다른 이야기'도 별로 정연하지 않았던...;;;

명교

2010.07.18 01:11:32
*.105.167.140

빈틈들을 비판적으로 잘 정리해주셨네요. 저의 첫번째 글에 대한 비평에서 지적하신 저 빈틈들은 감지하면서도 밑장 다보겠다는 식으로 밀고나가겠다는 심정으로 썼기에, 저 역시 동의하고, 그건 제가 꼼꼼하게 글을 쓰지 않은 것을 반증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때 영화표를 팔면서 정신없이 글을 썼는데, 송고하고나서도 너무 우격다짐식의 논리적 비약이 있어서 글 보낸거 취소한다고 레디앙에 전화까지 했었더랬죠. 그럼에도 레디앙은 그냥 올렸고, 제가 또 그걸 그냥 둔 것은 그냥 될대로 한번 되바라, 이런 심정이었던 것 같아요.

두번째 글에 대한 비평은, 한윤형씨의 저 해석에 공감하고, 저 역시 '자유주의 비판'에 대해 그런 입장을 갖고 그런 태도를 견지할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구요. 다만 저리 느껴지셨다면, 제가 글을 잘 못썼기 때문일겁니다. 일단 제 문체는 대단히 공격적이고 방방 뛰어다니죠. 제기시장에서 말싸움하던 버릇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번 논쟁을 경과하며 저의 관심사와 고민꺼리로서 '문체'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런 문체를 버리긴 어려울 것 같고, 독서와 공부는 항상 영화만들기보다 뒷전이라서, 그냥 그 조병훈비판글처럼 이따금 필요할때 아주 가끔 쓸 수 있는 것으로서만 생각하렵니다. 끝으로 저는, 진보진영 안에는 '자유주의자 아무개'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무수한 아무개들의 '자유주의적 면모'가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이따금 제 안에서 그런걸 보고, 또 예전에도 아주 종종 그런 모습을 보기도 했었지요. 또 이렇게 심각하다는 식으로 얘기하는건 확실히 막대구부리기이지만, 아주 한동안은 계속 이렇게 막대구부리기식으로 나아갈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은 NL씹기에 바쁘지, 자신에 대해선 아예 돌아보려고하질 않거든요.

하뉴녕

2010.07.18 03:13:44
*.39.144.120

감사합니다. 아마 술자리 담화였다면 더 흥미롭게 진행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은 있어요. 아쉽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저도 캐공감입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 [작가세계] 이건희는 생각하지마. [5] 하뉴녕 2011-07-13 26794
» 레디앙 학생운동 논쟁에 부쳐 (2) [7] 하뉴녕 2010-07-15 2877
5 레디앙 학생운동 논쟁에 부쳐 (1) [1] 하뉴녕 2010-07-15 3263
4 [레디앙] 진보신당 선거전술을 평가한다. [3] 하뉴녕 2010-06-22 3641
3 [레디앙] 심상정, 리사 심슨을 넘어서라 [5] 하뉴녕 2010-05-21 3970
2 [레디앙] 미안하다, 조선일보! 우리가 무능해서... [9] [2] 하뉴녕 2010-05-14 8094
1 [88세대와 쌍용3] 88만원 세대가 쌍용자동차 투쟁과 만나지 못한 이유는? [21] [1] 하뉴녕 2010-04-06 5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