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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학생운동 논쟁에 부쳐 (1)

조회 수 3263 추천 수 0 2010.07.15 11:05:42

레디앙에서 젊은 논자들끼리 학생운동에 관한 논쟁이 한참 진행되었다. 서로의 논점이 어그러져서 무슨 논쟁이라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르겠는데, 여하간 학생운동 얘기가 가장 많이 나왔으니 편의상 학생운동 논쟁이라 부르자. 이 글을 레디앙으로 보내지 않는 것은 내가 실패한 논쟁을 생산성 있게 바꾸겠다는 거창한 야심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더 글을 편하게 쓰고 싶기 때문이고, 여기에 올려도 어차피 볼 사람은 다 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또래집단의 진보진영 비판에 난감해 하는 이유


처음에 논점으로 제기되었던 건 학생운동 문제는 아니었다. 조병훈의 최초의 글이 실린 것은 “진보 야!”라는 지면이었다. 이 지면은 진보진영에 대한 (주로 젊은 친구들의) ‘고언’을 싣는 자리인 것 같다. 이 지면에 대한 내 감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필요한 것 같긴 한데, 읽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무슨 문제를 얘기할지는 뻔한데 그 문제의 해결방법을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젊은 친구들이 진보진영에 대고 우리를 잘 받아들이려면 이런 게 필요했으면 좋겠다, 저런 게 필요했으면 좋겠다, 하는 얘기들을 듣고 있으면 종종 내가 소비자의 불만을 접수하는 서비스 노동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들어 불쾌해진다. 그러니까 정신건강을 생각하면 안 읽는게 낫다.


그 친구들이 겪는 문제는 나도 겪는 문제다. 가령 이런 일이 있었다. 민주노동당 깨지고 진보신당 생길랑 말랑할 때 얘기다. 여의도에 분당하겠다는 좌파들이 우르르 모였다. 내 나이 그때 스물 여섯이었는데, 촛불시위도 나기 이전이었던 그때 나는 이 판에서 영원히 막내겠구나 생각하던 때였다. 내 위로 막내에서 두 번째 연령이 나보다 8살 연상인가 그랬다. 한 이십 명이 모여서 조개에 소주를 먹는데, 분당 과정에서 의견이 달랐던 두 패거리가 싸우기 시작했다. 이런 싸움, 해결 안 된다. 싸움이 해결이 안 되자 그들은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민중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소주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언제쯤 내가 아는 노래가 나올까 시간을 재고 있었다. 한 시간 반쯤 지나니까 청계천 8가가 나오더라. 그래도 따라부르지는 않았다.


“이러니까 애들이 못 나오지.” 알고 지낸지 5-6년쯤 지난 어느 386 옆자리로 가서 그렇게 말을 붙였다. 그러자 “에이 뭘 어떡해. 적응해야지, 응?”이라고 답변하더라. “아니 이걸 뭘 어떻게 적응해. 맨날 들은 나도 지겨운데.” 투덜투덜했다. 그때 나는 고민했다. 아니, 도대체 이 상황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1) 70년대~90년대초 학번 운동권들이 민가를 부르는 것을 금지시킨다. → 저 두 패거리, 소주병 깨고 끝까지 싸우는 꼴을 보자고?

2) 내가 소주병을 깨서 지랄발광한 후 70년대~90년대초 학번 운동권들에게 20대를 향한 서비스 정신을 강요한다. → 일단 내가 먼치킨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낫살 쳐먹었단 이유로 활동가 뿐만 아니라 평당원들까지 감정노동자로 만드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3) 20대들을 모아와서 우리만 아는 민가를 부른다. → 일단 그럴 20대들이 없다. 그리고 우리만 알만한 민가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 20대들을 모아서 민가를 억지로 외우게 한다면 그러고 있는 우리가 선배들보다 더 폭력적이다.

4) 우리 시대의 마지막 천재운동권 김민하씨가 일렉기타를 치고 옆에서 내가 “잔혹한 천사의 테제”를 부른다. → UCC로 찍어 올리기 전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실 찍어 올려도 아무 의미가 없다.

5) 이딴 더러운 정당은 내버려두고 20대들만의 조직을 만들어 기존 진보정당을 무력화시키거나 일신한다. → 내가 먼치킨이어야 가능하다. 사실 내가 먼치킨이어도 불가능하다.

6) 그냥 희망이 없는 진보정당 운동을 접는다. → 전반적으로 두루두루 검토해볼 때 이 쪽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인 것 같다. 


문제는 이렇다. 윗세대에게 자기들 좋아서 하는 문화를 일신하라고 요구하려면 그들을 무슨 영웅적 주체로 만들어야 한다. 내가 타인에게 그렇게 과도한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가? 그런 요구는 사실, “이 조직이 마음에 안들면 마음이 통하고 문화가 맞는 20대들끼리 조직을 만들어 윗세대 진보들을 후려치세요.”라고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요구다. 그런 요구 들으면 “아니 뭘 나더러 어쩌라고?”라는 말이 당신 입에서도 튀어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더 큰 문제, 20대들끼리는 공유하는 문화나 정서가 있을까? 뭔가 공통적인 것이 있어야 윗세대에게 이걸 배려해달라고도 요구할 수 있고, 혹은 우리끼리 뭉쳐서 윗세대에 대항하겠다는 기획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게 있지도 않으면서도 윗세대에게 뭔가를 해달라고 하는 건 결국 떼쟁이 심보 밖에 안 될 것 같다는게 내 생각이다. 상대방이 요구를 안 들어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실은 우리가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거다. 우리만 아는 민가를 불러야 할지, 아니면 모두가 레이와 아스카 피규어를 들고 와서 레이파와 아스카파로 나뉘어서 싸워야 할지, 그도 아니면 대로변에서 똥을 싸야 할지 누구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면서 운동권에게 젊은이들에게 환대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좀 성립하지 않는 말이다. 일단, 여의도의 어느 날 풍경에서 묘사되었듯 운동권은 자기들끼리도 서로를 환대하지 않는다. 둘, 나는 20대들 역시 서로를 환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 결론은? 여기서도 불평은 들리고 저기서도 불평은 들린다. 나는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설명하고 서로가 참고 감내해야 할 부분이 있음을 말할 수밖에 없다. 학생당원들 일도 잘 안 하면서 무슨 말은 그렇게 많은지 죽겠다는 아저씨 세대에게는 ‘아니 그럼 진보정당이 청년세대에 씨도 안 뿌리면 나중에 어디 가서 수확하려고 그러냐.’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청년세대에 대한 당의 무심함에 좌절하는 또래들에게는 ‘그래도 우리끼리라도 소통하고 힘 합쳐서 무언가를 자꾸 요구해야 당도 바뀌고 우리도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사람에게 당신 혼자 몸 불사질러 희생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으니까 각자에게 조금조금씩을 요구해야 하는 거다. 이런 귀찮은 일이 싫다면 정말로 당 접는 것 이외에 답은 없다.  


조병훈, "왜 진보신당에 입당 안해?" 비평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059


내 문제의식을 얘기했으니 이제 레디앙에 올라온 각 글에 대해 비평하겠다. 조병훈은 최근 글에서 “내가 현재 진보신당 지도부를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을 비판하기 위해 기존 학생운동권의 몰락을 다루면서, 고려대 학생행진 등으로 나타난 좌파 학생운동조직의 사례와 각 부문 운동의 일부 밑거름이 되었던 학생운동권 출신 활동가들까지 무리하게 재단했던 것은 나의 불찰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 구절은 조병훈의 최초의 글을 문제의식을 요약하고 있다. 그런데 불찰이라?


그런 것도 불찰일 수는 있겠으나, 사실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다. 학생운동권 활동가는 용가리 통뼈인가? ‘무리하게 재단’ 당하는 걸 거부하게. 재단도 많이 해야 솜씨가 는다. 그런 거야 서로의 경험을 맞춰보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상호간에 인식의 발전을 이룩하면 될 일이다. 혼자 다 알면 대화를 할 필요도 없으니까.


내가 보기에 조병훈 글의 결정적인 문제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의 글의 주제는 분명 “진보신당의 문제”다. 그걸 밝히기 위해 ‘기존 학생운동권의 몰락’을 다루었다고 본인도 밝혔다. 그러면 그의 글의 전제는 다음과 같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진보신당의 몰락의 원인은, (과거 진행된) 학생운동권의 몰락의 원인과 같은 차원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이건 전혀 말이 안 된다고는 볼 수 없지만 갑론을박이 가능한 명제다. 가령 나는 이 명제가 반만 맞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보신당의 구체적인 문제를 토론해야 할 시국에 이렇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맞는 것 같기도 한 명제를 들이미는 것은 냇가의 나룻배를 산 위로 올려 썰매를 타고 내려오자는 것과 비슷한 짓거리라고 본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눈이 내린...”응??? 진보신당 문제도 버거워 죽겠는데 지금 학생운동권이 왜 무력해졌는지를 토론해 보자고???


그래도 굳이 그런 작업을 하겠다면 그 전제의 근거가 무엇인지나 정연히 밝힐 일이다. 그런데 조병훈은 그런 작업을 생략한다. 본인의 머릿속에서는 너무나 명백한 일이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남들과 소통을 하려고 나왔으면 남들이 동의하지 못할 주장이 무엇인지를 체크해보고 그것에 대해 설명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런 게 없으니 이후 논쟁이 진보신당 논쟁인지 학생운동 논쟁인지 밥인지 떡인지 구별할 수 없도록 되어 버렸다.


글을 통해 유추해 보자면 그 대담한 주장의 근거는 이것인 것 같다. “00년 이후 학번들에게 왜 진보신당 입당 안 하느냐고 물어보면 운동권처럼 보여서 싫다고 얘기하기 때문에.”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그 반응을 체크하는 것은 매우 존중받을 만한 자세다. 그리고 이런 반응들에서도 우리는 많은 것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반응이 진보신당의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낸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령 길거리에서 사람을 붙잡고 민주노총의 문제가 무엇인지 물어보자. 그 사람이 민주노총의 노동자 조직률이 낮다거나, 민주노총 교섭의 혜택을 보는 노동자 비율이 낮다는 얘기를 꺼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무슨 소린지도 모를거다. 그 사람은 그저 ‘민주노총이 강경한 파업을 일삼아서’ 그 조직이 위기에 빠졌다고 대답할 가능성이 제일 높다. 그래서 이것이 민주노총의 근본적인 문제인가? 트위터에서 정치에 관심있단 양반들에게 진보신당이 왜 어려울까요, 라고 물어보면 “5+4연대 탈퇴하고 노회찬이 완주해서” 그렇다는 대답을 들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 그래서 선거를 포기했으면 진보신당이 잘 되었겠는가? 이런 반응들을 듣는 것도 의미는 있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현재의 진보신당과 왕년의 학생운동권에 대한 조병훈의 ‘비교’는 학생운동과 정당운동 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 ‘근본적인 차이’는 개념적으로도 서술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실천적인 차원에서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런 부분이다. 현재 진보정당 운동에 대해 논하는 사람 중에 진보정당이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학생운동에 대한 갑론을박은 학생운동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주장까지 포함해서 전개되었다.


그 이유는 과거의 학생운동이 비정상적인 국면에서 정립된 비정상적인 방식의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 맥락을 설명하는 것은 현재 진보정당 운동의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다. 학생운동 사례와 진보정당 운동 사례를 유비적으로 겹쳐놓으면 논의가 어그러지는 건 그래서다. 여하간 1) 예비 엘리트집단이라는 대학생의 자기인식, 그리고 2) 다른 공간에선 사회운동이 거의 불가능했던 시대상황, 이란 특수맥락에서 ‘학생정치조직’의 역할인식과 활동이 가능했다고 정리해보자. 그리고 이런 이의 활동을 ‘학생 운동권’이라 불렀다고 생각해보자.


90년대가 들어선 후 문제는 학생운동이 더 이상 부문운동 중에서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학생운동이 도대체 부문운동이기나 한지도 불분명했다는 것이다. 이건 진보정당 운동의 위기 분석과는 별개의 맥락인데, (뭐 사회문제이기는 하니까 책 한권 분량으로 설명하다 보면 같이 엮일 수는 있겠다.) 조병훈의 글에선 그런 면이 드러나지 않는다.


조병훈의 스케치에서 드러나는 문제의식도 물론 이런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을텐데, 거듭 읽어봐도 너무 막연하다. 일단 학생운동을 1) 이념에 의한 정치운동과 2) 대학이라는 생활공간에서의 자치운동의 수준으로도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학생운동이 1)의 역할을 부여받을 수밖에 없었다면, 조병훈이 스케치한 90년대 이후에는 2)의 측면이 대두되어야 했다고 볼 수 있다. 1)을 부여잡는 이들은 “그런데 왜 그 짓을 밖에서 이념운동(혹은 부문운동) 단체에 들어가지 않고 하필 너희들끼리 캠퍼스에서 모여서 해야 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왜 해체하지 않았는지를 분석하려면 ‘돈’ 얘기가 나오고 이는 양승훈이 하고 싶었던 얘기인 것 같긴 한데, 이건 이따 양승훈 글 얘기하면서 살펴보자.


조병훈이 스케치하는 ‘학생운동 몰락사’는 1)의 측면을 지키려던 이들이 쇠퇴하는 과정을 그리는 것 같다. 그리고 조병훈은 그 쇠퇴의 원인을 ‘운동권 정파의 폐쇄적 운영방식’이란 부분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런 후 그 원인을 오늘날의 진보신당에 투영하여, 진보신당의 위기를 학생운동의 몰락이란 사건에 포개는 것일 게다.


문제는 자치운동을 옹호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학생이념운동의 몰락은 학생운동권이 잘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거역이었다는 거다. 그들의 입장에서 운동권이 할 수 있었던 올바른 선택은 학생운동권의 일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해산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게 옳은 일인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어떤 운동권은 그렇게 했다. 그래서 나는 조병훈이 학생운동 사회에서 자치운동을 옹호하고 있기는 한 건지, 그런 구별을 하고 있기는 한 건지도 의심스럽다. 그게 아니라 이념운동을 옹호하는 거라면, 조병훈의 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막연히 ‘운동’이란 이름하에 묶이는 사회현상을 뭉뚱그려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념운동과 자치운동의 구별에 새로운 차원이 도입된 건 2007년 “88만원 세대론”이 히트친 이후 2008년 즈음에 ‘당사자 운동’이란 차원이 도입되고 나서다. 당사자 운동의 관점에서 ‘학생운동몰락사’를 재서술하는 건 유의미한 일이기는 하나, 십년 전엔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회문제의 틀거리로 당시 그들의 활동을 재단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덧붙여 조병훈의 글을 그저 ‘운동권 방식’에 대한 두루뭉술한 문제제기로 억지로 이해해 보려해도 문제는 남는다. 만일 조병훈이 바라본 문제가 서두에 내가 말했던 것과 비슷한 문제였다 본다면, 그런 문제는 진보신당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문운동 벌이는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운동권’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운동권의 유산이라 부르는 것도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렇게 보려면 조병훈의 글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내가 보기에 운동현장에서의 세대론은 두 가지 정도로 나누어진다. 하나의 축은 70년대-90년대 초 학번과 그 이후의 대립항이다. 그 이후 세대 중에는 ‘활동가’가 된 사례가 거의 없다. 아직 초년생이거나 인턴십일 뿐이다. 다른 하나의 축은 그들 활동가 내부에서 보이는 70년대-80년대 초반 vs 80년대 중반-90년대 초반의 대립항이다. 개발새발 잡은 거라 엄밀한 건 아닌데, 하여간 그 내부에서도 앞선 세대 활동가는 젊은 나이부터 단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반면 그 이후 세대는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그 앞선 세대 활동가를 선배로, 상사로 모시고(?) 살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다.


이건 조직운용방식의 문제와는 좀 다른 것이다. 조병훈의 말이 옳다면, 학생운동 위기를 가속시켰던 그 90년대 학번 운동권들은 당이나 시민사회단체에 들어가서 잘 적응하고 살고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 그들도 조직에 들어가면 지금의 20대들과 비슷한 신세가 되는 까닭이다. 이건 어떤 기득권 세력이 자기들끼리만 알아먹는 언어로 토론을 하며 논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만)은 아닌거다.


조병훈은 글을 보면 ‘운동권이 싫어서 진보신당에 입당하지 않겠다는 청년’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토론이 지겹다고만 하지 말고 그 토론이 무슨 의미인지 쉬운 언어로 풀어서 그런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 필요없다.’는 단언이 아니라 사람들의 견해를 만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교량이다. 그리고 이번 논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논쟁이 쓸데없다.”는 사람의 글에서 정말 천하에 쓸데없는 논쟁이 생기는 경우도 다반사다.


조병훈의 문제의식, 학생운동권의 문제와 진보정당의 문제를 구성하는 공통된 문화적 프레임이 없다고는 보지 않는다. 내 경우는 큰 틀에서 이것들을 ‘활동가’ 주도 운동의 문제로 엮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문제는 남는다. 일단 학생운동의 문제를 훌쩍 넘어선 얘기고, 활동가들이 계속 활동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엘리트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운동하겠다는 후배가 없기 때문이라는 점이 있다. 누구에게도 희생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한 내 최초의 문제의식이 기억나는가? 이런게 싫다면 말 그대로 당을 접는 수밖에 없다. 조병훈의 글에 대한 비평으로는 이쯤에서 줄이자.


학생운동권 몰락 문제와 활동가 주도 운동의 문제에 대해 개발새발 써놓은 글들이 있는데, 더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길 바란다.


2008/02/14 - [정치/분석] - 왜 학생 운동 조직은 20대로부터 멀어졌나?
2010/01/16 - [정치/정당] - [경향신문] 진보정당, 활동가의 종언


음..

2010.07.15 18:44:35
*.132.250.47

조병훈씨의 주장은 '연합/단독'이라는 운동권의 오래된 레토릭 대신에, 많은 대중들이 처한 개별적인 쟁점으로 직접 들어가야 한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보신당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일상사업을 확장시켜야 한다거나 의제설정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는 주장정도로 읽을 수 있겠지요. 여기서 스타일의 문제도 하나의 종속변수로 설정하는 것 같은데, 이걸 주요한 변수라 생각치는 않는 것 같아요.

홍명교씨는 조병훈씨의 주장 자체를 잘못이해하고 있습니다. 스타일을 문제삼아 90년대 초반, 운동권을 공격한 일부 자유주의자들? 과 같은 정치적 포지션으로 조병훈씨의 글을 이해하고 있는데 이건 오독이죠. 조병훈씨는 현재 지도부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홍병교씨는 조병훈이 스스로가 지금 지도부와 같은 정치적 포지션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합니다.

윤형씨의 조병훈씨 비판은 타당합니다. 논객, 혹은 글쟁이로써 성실하지 못했다는 것이 윤형씨가 조병훈씨에게 가한 비판의 핵심일 것인데, 저는 조병훈씨에게 조금 다른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논리의 성실함으로써 독자를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라기 보다는, 주장을 현실세계에서 증명해나가면서 그 힘을 통해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 사람으로 읽혀요. 글쟁이라기 보다는 활동가의 기운을 많이 느낍니다. 하지만 행동하지 않는 활동가, 투덜거리기만 하는 활동가라는 것이지요. 새로운 논리를 전개하기 보다는, 자신의 머릿 속에 있는 그림을 직접 실현하기를 권하고 싶었지요. 어중간한 글쟁이나, 어중간한 활동가라는 느낌이랄까요?

사실 처음에 윤형씨의 글을 봤을 때, 읽기 어려울 정도로 산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여러 사람들의 논의를 차분하게 쫓아가다보니 꽤 잘 정리된 글이란 걸 깨닫고 감탄했습니다. 글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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