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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지난번 글에서 슈리 님 글의 결론이 두 가지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음을 살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가능한 결론이 모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슈리/박가분 님의 그 글에 대한 옹호가 성공할 수가 없음을 살펴보았다. 만에 하나 그 글에 대한 옹호가 가능하려면, 내가 말한 두 개의 결론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제시해야 할 것이며, 이 경우 그에 대한 입증의 책임은 슈리/박가분 님에게 있음도 지적했다. 


그러나 이 글의 결론을 논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를 집어내고 그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일 게다. 나는 사실은 ‘무지한 이의 글쓰기’를 실천하고,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슈리 님이 맑스주의나 정치경제학에 ‘무지한’ 상태로 글을 썼다는 것이 그것 자체로 큰 문제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나 자신이 슈리 님보다 그런 것들에 대해 잘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도 없다. 


다만 ‘무지한 이의 글쓰기’에는 지켜야 하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하나는 자신이 어떤 이론의 맥락을 다 안다고 전제하지 말고,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구체적인 사례가 꼭 경험적인 얘기일 필요는 없다. 이를테면 이런 얘기다. 나처럼 무지한 사람이 “맑스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에 뒤떨어진 이론이다.”라고 단언하는 것은 꽤나 무리한 이야기다. 하지만 “맑스주의자 A님이 위와 같이 말씀하시는데 이와 같은 인식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는 것 같다.”는 얘기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이런 논의는 그 자체로도 의미를 지닐 수 있고, 만약 내가 A님과 말을 섞으면서 친절한 설명을 듣게 된다면 서로 더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다. 


둘은 본인이 글을 쓰게 된 문제의식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탁월한 지적능력을 과시하는 글쓰기 중 어떤 것들은 자신이 글을 쓰게 된 진정한 목적을 숨기곤 한다. 그리고 뭔가 멋있어 보이는 말/글을 따라하고 싶은 건 옹알이를 시작한 아이와 먹물 워너비를 관통하는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하지만 ‘무지한 이의 글쓰기’를 실천하려면 이런 욕망을 조금은 접어야 한다. 대화를 함에 있어 조금 말이 꼬인다 싶으면 본인의 문제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소통과정의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 정도만 지켜준다면 '무지한 이의 글쓰기'는 그렇게 큰 해악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무지한 이의 글쓰기'는 '반지성주의'와는 다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이론에 대한 흔한 오해를 범한 문제제기를 했다고 하자.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그 이론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설명을 하면서 나의 무지가 들통났다고 치자. 이것은 보는 이들에게 그리 나쁜 상황이 아니다. 만일 내가 범한 오해가 흔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자주 범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 오해가 오해임을 밝히는 것은 그 논의를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공부 잘 하는 학생이 선생님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나와 비슷한 수준의 학생이 선생님에게 던지는 질문과 그에 대한 친절한 답변은 더 쉽게 이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편으로 내가 범한 오해가 흔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그 자체로 그 이론이 받을 가능성이 있는 반박에 대한 창의적인 고찰이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별로 나쁘지 않다.


문제는 슈리 님이 자신의 문제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며, 더 이상은 그럴 의사도 없어 보인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문제의식을 컨텍스트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다소간 그가 글을 쓴 의도를 추정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이렇게 추정을 할 때엔 '추정'이라고 밝혀주는 것도 '무지한 이의 글쓰기'가 갖춰야 할 하나의 윤리적 덕목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추정이 크게 어긋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일 슈리 님이 내 추정에 발끈한다면, 그것은 이 추정의 설득력을 크게 높여주는 행위일 거라고 생각한다. (농담이다. 정신분석학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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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 님은 대체 왜 문제의 글을 썼을까? 본인이 얘기했다시피, 성매매 문제에 관심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본인이 스스로 밝힌 글의 목적은, 
 "명시적으로든암묵적으로든 좌파라는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성매매 문제에 관해 이론적으로 접근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혼란들을 줄이는 데 일조하는 것"이었다. 그가 '무지한 이의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한 불쾌감은 잊어버리고, 목적에 집중하자. 그는 "여러 혼란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가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부분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혼란은 무엇일까?


(...) 성매매에 관한 논쟁들은 성매매가 노동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 
슈리/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는 그 혼란이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성매매가 노동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야말로 그 혼란의 원인이다. 즉 그가 성매매 문제에 주목하게 된 것은, 성매매에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었고, 성매매를 '성노동'으로 호명하고 그것의 합법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글에 보이는 쿨싴(?)한 태도에서 드러나듯이, 논란이 커졌을 때 말했던 바와 같이, 그는 성매매가 합법화 되어야 하는지 금지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따위(?)의 문제엔 별로 관심이 없었을 거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성매매가 노동으로 호명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여기서부터 나는 분명 '추정'을 하고 있지만, 그 추정의 수위는 정신분석학 담론의 세례를 받은 일반적인 글쟁이들- 지젝이나 박가분을 포함한- 의  그것에 비해서도 약소한 것이다.) 


그런데 그 문제의식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왜 성매매에 관심이 없던 슈리 님은 성매매가 노동으로 호명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는가? 냉소주의적 시선은 "맑스가 진리임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비웃겠지만 이것이 사태의 전부는 아니다. EM 님이 지적했던 것처럼, 맑스의 이론으로 성매매가 노동임을 밝히려는 시도도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슈리 님이 맑스가 진리임을 밝히기 위해 택한 길이 가능한 양갈래에서 왜 하필 성매매가 노동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한 길이었는지에 대한 추정이 필요하다. 사실은, 그 추정에 대한 답도 쉽사리 글에서 발견된다.

 

(...) 언뜻 듣기에는 직관에 잘 와 닿지 않으므로,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어느 시점에서 자본가들은 자기들이 노동자들을 관리하는노동을 하고 있으며, 그 대가로 노동자들보다 약간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이, 그들이 누리는 부의 원천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물론 이것은 터무니없고 역겨운 망상이지만, 만약 그 자본가가 높은 교육수준 덕택에 언변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그 자본가는 자기가 하고 있는 노동이 어째서 노동자들이 하는 노동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지, ‘노동의 여러 속성들을 거론하며 신학적, 형이상학적 논변을 펼치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노동을 추상적으로 파악하려 할 때 생겨나는 문제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자본가의 망상, 더 정확히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려면, 맑스처럼 노동 개념을 규정하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구조를 밝히는 것이 필수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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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가 슈리 님의 글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그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사례를 들었다고 믿는다면 그건 너무 순진한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이 사례야말로 슈리 님이 스스로 고민하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말하자면 슈리 님은  '노동' 개념의 확장을 방치할 경우 '자본가의 노동'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가능성에 주목했으며, 이것이야말로 그가 '노동' 개념의 확산을 경계한 진정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어떤 맥락에 서 있나? 한국 사회의 진보운동이 추구하는 전략과 관련이 있다 볼 수 있을 것이다. 현 시기 한국의 자본주의 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당신은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공무원은 노동자가 아니고, 교사도 '선생님'이지 노동자는 아니며, 화물연대 조합원은 자신의 화물차를 소유하고 있는 이들이므로 노동자가 아니다.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도 노동자가 아니며, 회사에서 업무를 감시/감독한다고 알려져 있는 '보험 아줌마'들도 노동자는 아니다. 심지어 동희오토나 현대기아차의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노동자'이긴 하지만 '현대기아차'의 노동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소위 '진보운동'은 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 '노동자성'을 인정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노동자가 아니라 주장되는 이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법률적 고용관계가 아닌 은폐된 진실한 고용관계를 드러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런 요구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은, 저 '노동자성'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바로 그 사람들, '활동가'들 자신에 대한 노동자성 인정 요구일 것이다. 이 문제는 예전부터 첨예했고 '활동가'는 노동자가 될 수 없다고 믿은 사람들과의 마찰과 논쟁도 있었다. 분당 이전 민주노동당에 잠깐 존속했던 '민주노동당 노조'(2007년 1월 성립)의 10문 10답 내용 중 일부는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의 지형도를 매우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 민주노동당의 상근자는 민주노동당의 강령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사업과 그에 따르는 일상적인 업무를 집행하는 노동자입니다. 당연히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의 노동자와는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특수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공무원, 교사, 경찰, 종교단체 및 시민단체 활동가들에 대해서도 전혀 노동자라 부를 수 없게 됩니다. 비록 각각의 노동이 가지는 사회적 성격은 다르지만, 이들 모두는 오로지 ‘자기의 계산’ 하에서 이익을 자신에게만 귀속시키지 않기 때문에 결코 사업주가 아니며, 넓게 보아서 누군가의 지휘감독 하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임금으로 생계를 꾸려나간다는 점에서 모두 노동자입니다. 프랑스 등에서 프렌차이즈 점장(우리나라의 편의점이나 주유소 점장 등)이나 모델 등에 대해서도 노동자로 인정하는 것, 캐나다의 교장노조 등은 참고할만한 사례입니다. 

민주노동당 상근자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민주노동당 상근자는 중앙위원회와 대의원대회에서 통과된 사업방향에 따라 사업계획을 세우고 일상적으로 당의 업무관리 하에서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지급받는 노동자들입니다. 

민주노동당 상근자는 ‘활동가’이지 ‘노동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활동가’와 ‘노동자’가 배타적이고 선택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민주노동당 상근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민주노동당의 강령정신,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새로운 사회 건설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활동가’로 규정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자신의 노동에 대한 기본적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노동자가 한국사회의 진보를 위해 투쟁하는 활동가가 된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활동가’와 ‘노동자’를 대립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민주노동당 상근자가 ‘노동자’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주장에는 당에서 일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가 빠져있습니다. 심지어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마저 포함되어 있는 듯 합니다.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만을 이기적으로 주장하는 집단이라는 인식 말입니다. ‘노동자’로서의 권리 보장이 조직의 발전 뿐 아니라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인식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으로서 당원 민주주의와 운영의 투명성, 사회진보에 모범적으로 기여하기 위해서는 당 운영의 한 축인 ‘상근자’가 당당히 ‘노동자’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제 역할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노동자 정당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지킬 것은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노동자 정당이 모범을 보이지 않고서 어떻게 감히 노동자들의 권익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초판본 p155-156
전문은 
http://greenreds.tistory.com/182 에서 볼 수 있음 
(돈 안되는 글을 이렇게 길게 썼으니 책 좀 사서 봐라....) 



나는 위 문건의 내용에 깊이 동감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비록 '상근자 노동조합'의 필요성은 인정할지라도, 여하간 정당 상근자가 '노동자'는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슈리 님의 견해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슈리 님은 본인의 글에서 '임금노동'과 '비임금노동'이란 잣대로 성매매 문제에 다가섰지만, 시간강사나 공무원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그의 진술
은 여러 사람이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생산적노동'과 '비생산적노동'의 대립항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 thehole 님이 재차 문제제기한 것은 '비생산적노동'에 종사하는 이들도 임금을 받는 한 '임금노동자'라고 맑스가 <자본론>에서도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슈리 님은,


(...) 기업화된 대학에 고용된 비정규직 시간강사는 마치 노동자처럼 보인다. (...) 무슨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비정규직 시간강사는 노동자가 아니다. (...) 현실에는 엄밀히 말해 노동자 계급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만든 많은 노동조합들(예를 들자면, 공무원 노조라든가, 전교조라든가)이 있다. 나는 그것을 부정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권장하는 편이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슨 단체를 만들고 어떻게 이름을 붙이든지, 궁극적으로 그 조직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사회 자체라는 것이다. (...)
슈리/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라고 말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엄밀히 말해 노동자 계급'에 속한다 말할 수 있는이들은 '생산적노동'에 종사하는 이들 뿐이라 이해하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왜 '임금노동'의 문제로 성매매 문제에 접근하던 슈리 님이 부지불식간에 '생산적 노동'의 문제로 '점프'해 버렸는지를 추정해 봐야만 한다. 내 생각에 이는 슈리 님이 성매매여성의 문제보다도 훨씬 더 '자본가의 노동'을 신경쓰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농담이다.) 맑스 시대와는 달리, 테일러가 경영학을 탄생시킨 이후의 자본주의는 경영자 역시 월급을 받는 사람으로 만든다. 말하자면 그들도 임금노동자인 것이다. '비생산적 임금노동자', 소위 말하는 '화이트칼라'들의 노동자성을 자명한 것으로 인정하고 나면, 우리는 월급을 받는 CEO가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이 "터무니없고 역겨운 망상"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어딘가에 선을 긋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슈리 님의 진정한 문제의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임금노동'과 '생산적노동'을 헷갈렸다는 여타 사람들의 지적은, 그에게 있어서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었던 것이다.


(...) 그럼에도 이 부분을 확실히 해 두도록 하자. EM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궁극적인 논점은 "적어도 슈리의 논점은 그것에 이르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지만 결론적으로 옳다"고 봐도 좋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논지전개의 과정에서 확인된 정치경제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가 내린 결론을 크게 '훼손'하는 성격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슈리의 글에 대한 '비판'의 취지는 (혹자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것과 달리) '반박' 그 자체에 있었다기보다는 "조건부적인" "옹호"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박가분/ 슈리의 글과 논쟁을 읽고서 - 맑스주의의 아포리아



여기서 슈리 님의 본래 글을 옹호하는 박가분 님의 얘기를 들어보자. 박가분 님이 가지는 불만은, 슈리 님의 맑스주의에 대한 부족한 이해를 질타하는 EM 님의 비평이 '조건부 옹호'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비판자들이 그것을 근거로 슈리 님의 글 전체를 질타한다는 것에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EM 님의 비평이 '조건부 옹호'였다는 점을 이해한다. 그러나 내가 트윗에서 EM 님의 비평을 언급했던 이유는, 그 비평이 있기 전엔 슈리 님이 본글에서 '임금노동'의 범주와 '생산적노동'의 범주를 헷갈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M 님이 슈리 님의 글을 '조건부 옹호'했다는 사실은, 내겐 별스런 일이 아닌 것으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EM 님은 슈리 님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늘타리 님은 노동가치론을 옹호하는 맑스주의자들의 인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맑스의 노동가치론에 따르면 잉여가치가 자본과 노동 간의 착취가 발생하는 근원이고, 따라서 잉여가치를 발생시키는 노동만이 생산적 노동이며, 이 생산적 노동 관계의 변화와 해소가 진정 자본주의를 변혁시키는 유일한 길이자 인류사상 보편적인 이익이다. 고로 생산직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이 자본주의 관계를 변혁시킬 수 있는 진짜 노동계급이다.'(...)
- 하늘타리 / 가정과 신념의 혼동 : 맑스주의와 신자유주의  

  

추정컨대 EM 님은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슈리 님의 글이 일부 오류는 있어도 전반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그러한 대략의 인식을 공유하지 않은 이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는 방법이 아닌가?


(...) 맑스가 보기에, 가치의 유일한 원천은 노동이고, 노동자만이 본질적으로 사회의 물적 토대를 만들어내는 계급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계급이고, 나머지 모든 계급들은 이로부터 파생하여 노동자가 만들어낸 잉여가치를 나눠 갖는다. 사회에 대한 이와 같은 파악에 이런저런 토를 다른 사람은 많지만, 나는 이보다 더 합리적인 이해를 알지 못한다. 또, 맑스는 과거에 노동이 아니었던 많은 업무들(특히 서비스업에서)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으로 되어간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현실을 개탄스러워했다. (...)
슈리/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노동가치론에 따르면 잉여가치를 발생시키지 않는 노동자들이 늘어나는 '현실'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직관적으로 볼 때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1) 노동가치론은 더 이상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노동을 설명해내지 못하므로, 언급할 필요가 없다.

2) 노동가치론은 여전히 현대의 노동을 설명하는데 유의미하며, 그 유의미함은 이러저러하게 서술될 수 있다.



맑스주의자가 아닌 사람들, 맑스주의자라도 더 이상 노동가치론을 고집하지 않는 사람들은 1)번을 택할 것이다. EM 님이나 박가분 님이나 슈리 님이라면 2)번을 택해야 할 것이고, EM 님은 슈리 님에게 2)번 작업을 좀 더 정교하게 해야 할 필요성을 주문하고 있는 것일 게다. 그리고 한 가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문제는 2)번을 택한 사람들에게만 문제일 뿐, 1)번을 택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문제거리가 안 된다는 거다.


가령 나같은 사람에게는 '월급 CEO의 정당한 몫'이란 문제도 전혀 문제거리가 아니다. 나는 고용된 CEO도 월급을 받을 만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편이다. 문제는 장하준의 지적처럼, 그들에 의해 생산성이 높아졌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들의 월급이 지속적으로 상승해 왔다는 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월급 사장'들이 제 월급을 정하는 것을 통제할 제도적 방책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한다.


문제는 박가분 님이 자신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을 남들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에서 생긴다. 가령 그는,


(...) 그러나 또한 나는 그의 실수가 그에 대한 인신공격과 비아냥을 서슴지 않는 자들이 보여준 동일하게 명백한 '실수'들과는 "종류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의 경우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관련된 '인식론적 지도'를 만들기 위해 일정부분 유의미한 노력을 기울이다 실수를 한 것이어서, 그를 비판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노력이 요청된다는 그의 최소한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그러한 노력조차 하지 않은 사람들이 안전한 거리에서 그에게 서투른 비웃음을 쏟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경우라고 생각한다. 나는 주변으로부터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상수'로 취급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상수'가 아닌, 슈리만큼이나 나만큼이나 스스로의 잘못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할 '주체'라고 생각한다. (...) 
-  박가분/ 슈리의 글과 논쟁을 읽고서 - 맑스주의의 아포리아



라고 말한다. 굳이 이 얘기를 선의적으로 받아 안아, 슈리 님이 '인식론적 지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다 실수를 한 것은 사실이라 가정해보자.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슈리 님이 그리는 그 인식론적 지도가 다른 이들에겐 필요없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지도는, 좌파에게, 좌파 중에서도 맑스주의자에게, 맑스주의자를 자칭하는 이들 중에서도 노동가치론을 옹호하려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런 옹호를 애저녁에 포기했거나 한 번도 의도해 보지도 않은 이들의 경우엔,  "안전한 거리에서 그에게" "비웃음을 쏟아내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박가분 님은 인간으로 태어나 맑스의 노동가치론을 믿지 않는다는 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인양 행동한다. 이것은 그의 오래된 글쓰기 방식으로, 나는 예전에 그가 사실상 자신의 얘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일반을 '냉소주의자'로 칭한다고 지적한바 있다. 그래서 그에겐, EM 님의 비평만이 적절한 것으로 와닿는 것이다. 
 

그런데 슈리 님은 과연 '인식론적 지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다 실수한 것일까? "
맑스는 과거에 노동이 아니었던 많은 업무들(특히 서비스업에서)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으로 되어간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현실을 개탄스러워했다."란 말을 할 때 그는 지도를 그리기는커녕 오히려 '현실'을 역행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노동가치론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전유될 수 있는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가치론의 설명을 피해가는 현대 사회를 개탄한다. 


이 구절만 본다면 슈리 님의 인식은 조선 사대부의 이상사회에 관한 인식과 다를 바가 없다. 조선 사대부에 따르면, 사회의 물적 조건을 생산해내는 것은 농민 뿐이다. 기타 산업은 농민의 생산물을 나눠먹고 있을 뿐이므로, 그것은 억압되어야 한다. 사대부는 그런 농민의 노동을 빌어먹는 존재로서, 농민을 위한 정치를 할 때만이 자신이 먹고 입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 나는 조선 왕조의 치국 이념을 비웃을 생각은 없다. 나는 조선 왕조가 자본주의의 맹아를 발달시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지 않는다. 나는 조선 왕조의 전근대적 이념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 인구의 90% 이상이 농업에 달라붙어야 겨우 전 인구가 먹을만한 농산물을 생산하던 시대의 생산력 하에서만 가능한 이념이다. 마찬가지로, 생산적노동의 비율이 줄어드는 것은 개탄해야 할 일은 아니고 적은 인원이 투입되어도 전 인구가 소비할 수준의 공산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의 산물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가분 님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결국 슈리의 최종적 논점은 좌파들에게 정치적 진리(혹자에게는 이 단어가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당파성이라는 용어를 차용해도 무방하겠다)를 판가름할 수 있는 유일한 객관적 장소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그 자체이며, 거기서 일어나는 유의미한 변화에 관해 취할 수 있는 당파적 입장을 제외한다면, 그 나머지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은 말 그대로 '열려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 영역에 대해 좌파가 정치적으로 취할 수 있는 입장은, '상황'에 대해 열려 있는 문제이며, '실용적 판단'에 의해 대답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좌파란 사람들이 무슨 문제에 대해 그들이 취한다는 그 '당파적 입장'을 취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워진다. 요 며칠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가장 대표적인 '노동자 투쟁'은 유성기업에서 있었던 사건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명백하게 임금노동자이며 생산적노동자이지만, "좌파들에게 정치적 진리를 판가름할 수 있는 유일한 객관적 장소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그 자체"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야간노동을 금지시켜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같은 논법이라면 좌파들은 이 영역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답변해도 되는가?


물론 슈리 님이나 박가분 님이 그렇게 생각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들은 아마도 발화가 아니라 그 공장이라는 '장소'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그 자체'라고 답변할 것 같다. 그곳에서의 투쟁은 다른 곳의 투쟁보다 훨씬 더 자본가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확실히, 유성기업 같은 곳에서 파업을 하니 이마트 노동자가 파업하는 것과는 수준이 다른 반응이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대자동차의 개입 의혹과 공권력의 신속한 투입은 이 '장소'가 자본가 계급에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의 것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은 유성기업이 생산적 기업이기 때문일까? 유성기업처럼 자동차에 들어갈 꼭 필요한 부품을 독점공급한다는 특수한 사정이 그러한 '장소'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다른 '생산적 노동'을 하는 기업들의 파업은 자본가들에게 그 정도의 위협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 즉, 여기서 나는 실재론적이다. 나는 본질적으로 노동자가 아닌 계급이 만든 ‘노조’가 진짜 노조와 일반적인 경우에 같은 수준의 동력과 강도로 경제투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가 딛고 있는 물질적 토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노동자와 연대한다면 노동 해방을 위한 투쟁에 엄청난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보다 여유로운 입장에 있는 그들이 신경 써야 할 것은, 그러므로 보편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이다. 노동자들은 지금 당사자 투쟁을 하기에도 벅찬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
슈리/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여기서 슈리 님은 실재론자이기보다는, 노동가치론을 재서술하기 보다는, 맑스의 텍스트에 현실이 일치하지 않음에 짜증을 내는 히스테리증자인 것처럼 보인다. (히스테리증자는, 농담이다.)  이전에도 얘기했듯 나는 슈리 님의 관점에서 볼 때 '보다 여유로운 입장에 있는(생산적 노동자가 아니란 점에서)  '청소미화원노동자가 슈리 님의 관점에 '보편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인 생산적 노동자의 투쟁에 더 신경써야 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혹은 (임금노동자는 아닌) 화물연대 조합원이 생산직 임금노동자들의 투쟁에 더 신경써야 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굳이 민주노총과 이들의 관계를 비교해 보자면, (물론 노조원들은 민주노총 산하...모 단체의 소속이 되기는 하지만, 투박하게 현자노조등과 비교해본다면) 이들은 도움을 줄 입장이라기보단 외려 도움을 받아야 할 입장에 있다. 즉 이런 지점에 대해서도 슈리 님이 말하는 '원칙'은 정말로 원칙이라기보다는, 역시나 상황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우리가 선험적인 원칙을 말할 수 있을까? 



(...) 맑스의 자본주의 체제 분석은 여전히 우리가 이 분야에서 가지고 있는 최고의 진리다. (...) 주류 학계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경박한 일반인들은 학계의 견해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면서 마치 그것이 자신의 견해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황당한 것은 다음과 같다. 맑스는 자본가-노동자 관계에만 너무 배타적으로 집중한 나머지, 현대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새로운 갈등들, 예를 들자면, 인종, 젠더, 성소수자 같은 갈등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등등. 자본주의가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체제라는 것은 맑스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도대체 맑스가 왜 그 고생을 해 가면서 자본주의 사회를 가장 단순화한 형태에서 고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본주의 사회가 아무리 바뀌더라도, 그 안에는 반드시 기본이 되는 어떤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다양한 변화들, 현상들은 이 기본 틀을 바탕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들이지, 결코 이 기본 틀을 반박하는 사례가 될 수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를 끝장낼 수 있는 핵심적인 세력은 노동자 계급이다. 이는 맑스의 이론적 분석의 논리적 귀결이다. 지난 세기말부터 최근에 이르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은, 착취를 끝장내겠다는 근본적이고도 ‘큰’ 각오로 임하지 않는 운동은 ‘작은’ 성취마저 이루어내기 힘들다는 것, 그리고 설령 이루더라도 오래 지켜낼 수 없다는 교훈을 준다. 따라서 현실의 노동자 계급이 좌파들이 생각하는 그런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는 작금의 상황으로부터 우리가 이성적으로, 즉 현실적으로 끌어낼 유일한 결론은, 혁명적 정치가 선배들이 낙관했던 것보다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것뿐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 운동을, 부정확한 현실 파악으로 방해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슈리/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 사실 여성주의라는 맥락을 떠나서 내가 고민하는 '아포리아'는 바로 그러한 것이다. 정치적 진리의 장소와 그러한 진리의 주체들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으로 '아포리아'로서 '사고'할 수 있는 것은, 어쨌거나 자본주의라는 저 '현실'을 사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존 사회에서 '목 없는 자들'로 사고되었던 특정 사회적 집단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는 것이 그 체제 내의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예컨대 노예해방)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역사 특수적인' 생산양식 속에서 몫 없는 자들을 양산하는 '실재' '메커니즘'으로 소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로 "타인의 노동에 기초한 사적 소유"로 특징 지어지는 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정치적 주체들에 의해 고수되어 온 정치적 진리(보편적 기획, 혹자들은 이것을 평등-자유라고 이름 붙인다)의 진리-효과를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는 것, 바로 이것이 슈리의 논점이었다. (...) 
박가분/ 슈리의 글과 논쟁을 읽고서 - 맑스주의의 아포리아 




그렇다고 슈리 님과 박가분 님의 '결론'이 섣불리 부정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헤겔철학이 우주가 망하기 전까지 반증될 수는 없는 것처럼, 이런 종류의 얘기 역시 자본주의 체제가 어떤 식으로든 망하거나 결정적인 변혁을 겪게 되지 않는 한 검증될 방도가 없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것이 그들의 '자유'이듯 믿지 않는 것도 나나 다른 냉소주의자들의 '자유'일 것이다. 결국 이런 종류의 얘기가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져?"로 결말이 나지 않으려면, 그들의 믿음이(혹은 이론적 가정이) 현실세계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 쓸모있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난감한 문제는 맑스주의자만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도 맑스주의를 분석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가 맑스주의의 비평을 성공적으로 '우회'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인종/젠더/성소수자와 같은 정체성의 정치와(만) 결부된 얘기도 아니고, 이주노동자와 같은 '몫 없는 자'와(만) 결부된 얘기도 아니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것은 '노동' 그 자체의 성격의 변동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서술은 그 변동에 대한 지극히 평이한 스케치일 것이다. 


(...) 이러한 변칙 역시 성매매업에서 맨 처음 발생하였다. 포주는 단지 장소와 옷가지 같은 편의시설을 제공하고 성 노동자는 이에 대해 일정한 액수의 사용료를 지불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영업자의 지위에 있게 된다. 하지만 이때 많은 성 노동자들은 포주에게 실제적으로 빚의 형태로 묶여 있다. 

(...) 스포츠와 연예 산업, 성 산업과 같은 주변부 노동뿐만이 아니라 주류의 모든 노동 역시 자영업화하고 있다. (...) 간단하게 말해 노동자가 자기 몸과 시간에 대한 경영자가 되어, 다른 (진짜) 경영자와 노동 계약을 맺는 황당한 방식으로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바뀌고 있다.

몇몇 병원에서는 간호사에게 자기 경영의 원리를 도입하고 있다. (...) 이러한 시스템이 확산된다면 결국 병원은 마치 간호사들이 입점한 커다란 쇼핑몰과 다를 바 없게 될 것이다. 

(...) 이처럼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지위와 몸은 점점 노동자도 자영업자도 아닌 모호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산업은 존재하지만 노동은 존재하지 않고, 노동은 존재하지만 노동자는 존재하지 않고, 노동자는 존재하지만 자본에 대항하고 국가가 보호해야 하는 노동권은 존재하지 않는 꼴이 되어 가고 있다.(...)
- 엄기호,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낮은산, 2009, p79-81




슈리 님이 이러한 '변칙'의 출발점인 '성매매'라는 소재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분명 '징후적'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변칙'이 보편화되는 현상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그저 특수한 사례로만 파악한 것 역시, 너무나도 '징후적'이다. (농담 아니다.)물론 이러한 '우회'는 그저 착시현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맑스주의자들의 예감대로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는 19세기와 비교해서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그 예감을 신뢰하며, 또한 종종 그 예감을 불신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회가 어떻게 착시현상인지를, 노동가치론이 어떻게 이 사회를 여전히 설명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도, 바로 '신자'들의 의무가 될 것이다. 아포리아는 사회 전체를 설명하는 총체적 이론을 여전히 고수하는 사람들에게나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박가분이 말한 '맑스주의의 아포리아'는 노동가치론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에게나 문제될 수 있다. 그들이 그 의무를 떠안았다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져야 할 것이다.  


 



sibrid

2011.05.25 06:49:02
*.146.250.228

긴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런식의 맑스주의 논변은 '무지한 일반인'에게 씨알도 안 먹힌다고 보는데, '무지한 일반인'들을 끌어안지 않고서 대체 뭘 할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씁쓸합니다 저정도 수준의 현실인식이라는게..

나그네

2011.05.25 06:49:33
*.109.75.119

긴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노동가치론'의 절대화는 문제 있다는 지적, 동감합니다. 그리고 까는 건 아니지만 슈리님과 박가분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치 번역서를 읽는 기분입니다.

플레브스

2011.05.25 08:44:30
*.246.68.71

잘 봤소. 항상 빚지고 있구려. 몇 군데 밑줄을 그어놓지만, 일단은 혼자만의 메모로 남겨놓으려 함...

드래곤워커

2011.05.25 12:37:33
*.234.105.202

박가분님은 저랑 비슷한 연배의 논객이라서 응원하고 싶은데, 교조주의적인 맑스주의가 좀 느껴져서 저같은 비신자에게는 설득력이 안 느껴지네요.
노동자가 무슨 벼슬이라고 노동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모르겠네요.
노동자든 아니든 같은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박가분님이 주장한다는 기본소득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그리고 성매매에 대해서는 (논쟁이랑은 별로 상관없어진 것 같지만) 합법화하고 국가가 인권침해나 위생관리에 규제를 강화하는 게 현상황에서는 제일 바람직한 해결책일 것 같네요.

잼잼

2011.05.25 13:21:36
*.224.47.51

흠.. 그럼 슈리 님 측에서는 이 글이 상당히 이론적인 면이 있는만큼 애초에 글을 쓴 주요한 타겟이 노동가치설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뉴녕

2011.05.25 13:30:00
*.70.102.78

...논점없는 글의 맥락 살려냈더니 그런 식으로 우기면;;; 이론적인 글이라고 우기지 않는 편이 더 이해받기 쉬울걸요 ㅎㅎㅎ

김대영

2011.05.25 16:22:28
*.66.49.84

이 글은 작품이네요. 한윤형씨는 이제 입신 반열에 오른 듯.

그리고 세상엔 좌파보다 더 좋은 게 많은 것 같아요. 이를테면... 저는 BMW 520d 같은 모델이 그에 해당된다고 봅니다만.

...

2011.05.25 18:45:05
*.183.15.130

트윗보니 박가분 열받았음 ㅋㅋ 피의 보복이 시작될듯

렌즈

2011.05.26 11:39:05
*.41.224.95

문장이야 좀 길고 복잡하고, 구성이야 산만해도 좋으니, 빡은 쳤다해도 조롱과 비방과 당위에 관한 말들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논의가 생산성 있게 진행 됐음 좋겠구만.
실은 내 입장에서는 몇몇개를 두고 추측이다! 과장해서 내 의도를 설명하고 있다! 라고 말할 것 외에는 걸어 볼게 안 보이는데..... 그리고 그 중 대부분이 이미 추론이라고 이야기를 해 뒀고. 추론이라고 해도 너무 더럽게 하면 본질에서 어긋난 공격이 되지만 이 경우는 선의를 다해 추론 한 것 같은데.
박가분님이 대체 더 뭐라고 할지 참 기대 됨. 이 글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보니 난 갈 데 없는 더러운 키보도와리어.

렌즈

2011.05.26 11:48:25
*.41.224.95

뭐, 안 하실 거면 그만이지만. 하실거면 "나도 그 문제점은 알고 있어서 직접 하려던 말이야. 순서상 조금 밀렸는데. 그 타이밍에 니가 조롱 섞어서 막 이러는 거임" 이 정도 반응은 아니길. 뭐, 할 수는 있는 말이고, 나 기분좋으라고 하시는 키배는 아니겠으나.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뭔가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논의상의 진전, 발전 되는 게 있기를 바라며 기다려 봄. 아니라면 짧은 인정과 짧은 불쾌 표시 정도가 더 경제적일 듯.

렌즈

2011.05.26 11:49:20
*.41.224.95

피의 보복 보다는 ㅋ

두더지

2011.05.27 22:25:47
*.57.234.123

에혀 이걸 언제 다 읽나ㅠㅠ 속세의 범인(?)들을 위해 조금만 짧게 써주세요 ㅋㅋ 일단 스크롤하고 답글부터 답니다 ㅋㅋ

흙빛운

2011.05.28 22:26:42
*.104.89.57

맑스좌파는 영성좌파필이 나는듯. 일단 전 사회구성원이 노동자가 되어야지만 저 헤겔의 제국을 건너가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이 마련이 되는 거겟죠. 근데 생각해보면 저런 우주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하뉴녕

2011.05.28 22:43:53
*.171.89.97

맑스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제보하는 바로는 슈리 님이나 박가분 님이 딱히 맑스주의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ㅡ.,ㅡ;;;

흙빛운

2011.05.28 22:30:57
*.104.89.57

성매매 논쟁이 도화선이 되었지만, 한윤형님이 박가분님에게 던지는 메세지는 성매매가 문제가 아닌듯.. 마치 김규항 진중권의 주니어 버전의 논쟁으로 옮겨갈 듯한 예감이 아주 살짝 듬.

하뉴녕

2011.05.28 22:44:24
*.171.89.97

진선생님은 "맑스주의는 낡았는데!"라고 단언하시는 거고 저는 걍 실용주의자라서 그렇게까지 도돌이표 싸움을 하게 될 일은 없을듯요...ㅎㅎㅎ

흙빛운

2011.05.29 18:14:49
*.104.89.57

문득 든 생각이 있어서, 성매매와 노동의 관련성에 대해서 사견을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전 그냥 일반 독자라서 맞는지 틀리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원론적으로 성매매가 노동이 되기 위해서 재화와 용역의 카테고리에 속해 있어야 하는데, 성매매는 재화(재화의 생산)이 아니고, 재화의 용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역도 아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런지는 매우 단순하게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만약에 성매매를 재화의 용법인 용역으로 치부하면, 말도 안되는 낮은 가격으로 산정된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남습니다.

서비스업은 전부 용역입니다. 그리고 물류 산업도 용역입니다. 소매업도 용역이라고 봐줘야죠. 자본사회에 포진되어 있는 거의 대부분의 직종이 재화의 생산(재화)이거나 재화의 배치. 유통. 사용. 활용과 관련성이 있는 용역입니다. 상품을 만들어 놓으면 뭐합니까. 그것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선 용법이 있어야겠죠. 예컨대 미용실 가위는 주방 가위보다 훨씬 비쌉니다. 왜냐하면 헤어스타일을 섬세하게 조각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싼 비용이 투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역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재화의 용법이라고 일괄해서 답하는 게 가능합니다. 용역은 당연히 노동이죠. (이걸 비생산 노동이라고 카테고리 분류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매매는 재화의 용법(용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합니다. 만약에 어떤 사회주의 국가에서 성매매를 용역으로 치부해버리고, 성매매 여성에게 사회공동체가 임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고용한다면, 재화의 용법이라는 용역의 성질에 비추어 볼때, 말도 안되는 낮은 임금이 산정된다는 문제점이 남습니다. 이 말을 돌려 말하자면 사회공동체가 여성의 몸이라는 독특한 재화를 인정해 주면 자본주의 하에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용인되어오는 성매매 보다 훨씬 높은 값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이죠.

왜 성매매가 (상대적으로) 비싼지는(훨씬 더 비싸야 하는지는) 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여성의 신성한 권리를 지속적으로 팔기 때문이다. 이건 일종의 거래입니다. 노동이 아니라 교환이죠. 물론 노동으로 분류될 수 있는 요인도 많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고유한 여성성의 훼손이 담보되어 있는 거래라는 점이 가격의 척도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몸이 사실상 재화가 되고, 재화의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어떤 사회주의 공동체가 완성된다는 가정 하에 성거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할지가 문제로 남습니다. 근절되어야할까요?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런 독특한 거래를 차단해야하는 도덕적 당위도 없습니다. 인류 문명과 매춘의 역사는 똑같습니다. 성을 거래하는 형식의 관습, 문화는 안 없어집니다. 절대로요..

그렇다면 본질상 성거래가 될 수 밖에 없는 이런 은밀한 합의를 아예 노동으로 승인하고, 여성의 몸을 재화로 인정해 주는 것은 어떨까요? 흔히 말하는 몸을 파는 대가로 정식으로 임금을 지불하는 방식이죠. 또한 여성의 몸이 재화가 되면, 인간의 몸과 고유한 태생적 가치로 변용될 수 있는 수많은 거래들은 어떻게 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이런 형태는 이미 자본사회와 똑같이 않습니까. 노동가치론 그 밖에 것들요. 모든 것을 팔 수 있는다는 저 다이나믹한 시장이지요.

문외한이 한번 뻘 생각을 해본 건데, 너그럽게 봐주시길..

흙빛운

2011.05.29 21:50:43
*.104.89.57

아무래도 재화와 재화의 용법의 구분에 대해서 설명이 부족한 것 같아서 덧붙입니다.

사회가 발전되면서 수많은 직종들이 파생되었지만, 사회가 더 많이 발전되면 수많은 직종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 또한 사실입니다. 로봇이나 기계가 그 역활을 대신하겠죠(그 때는 미용실을 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상한 헬멧을 뒤집어 쓰고 버튼 하나 누르면 1분만에 원하는 헤어스타일로 만들어주는 기계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이 말을 돌려보면, 길게 잡고 200년 후에 미래에 로봇이나 기계가 하고 있는 일들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따라서 용역은 재화의 용법으로 환원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커피 자판기가 없었던 시절에는 다방에서 커피를 사먹어야 했죠.) 세상에 모든 노동은 재화이거나 재화(기계, 로봇)가 아직까지는 대체하지 못하는 나머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데 성매매는 재화(기계, 로봇)가 영원히 대체할 수가 없습니다....이런 뻘 생각에서 성매매는 노동이 아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브리

2011.05.30 23:02:47
*.140.145.74

흙빛운/
1.성거래는 절대 다수가 남성 구매자, 여성 판매자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맞지만 성판매자 중에 남성과 수술 전/후의 성별전환인들도 있습니다. (생물학적?)여성의 몸만을 재화로 인정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2. 섹스워커들이 성노동이라는 용어를 쓰려는 이유 중에는, 성노동자 자신의 '몸' 을 파는 것이 아니라 합의 하에 성적 '서비스' 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달라는 요구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성 구매자가 일정 시간 성판매자의 '몸' 에 대한 무제한적인 권리를 갖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성노동자에게 합의되지 않은(합의된 것 이상의) 성행위를 강제할 때 강간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구요.

흙빛운

2011.05.31 03:14:52
*.104.89.57

이브리/

무슨 바람이 들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위에 댓글을 달아 놓고 한 편으로는 씁씁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해명을 해야되는데 타이밍을 잡지 못해서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마침 제 댓글에 대한 언급을 해주시니 기회가 생기는군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브리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제가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노동이라는 개념을 너무 원론적인 취지에서 정리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이죠. 뒤늦게 깨닿았지만, 노동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하에 작동하는 다양한 생존권으로 파악하는 게 가장 간명한 정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본주위는 자본주의 식의 노동이 있는 것이고,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식의 노동이 있는 것이죠. 이 둘을 일괄적으로 묶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성노동이 노동이 될수 있니 없니 하는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죠. 분명히 성노동은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상황(작게는 특수한 경제적 환경) 속에서 생존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당연히 노동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냐면, 매트릭스라는 영화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매트릭스 바깥의 인큐베이트에서 사육되고 있는 주체와 매트릭스 안쪽의 가상세계에서 노가다를 하는 주체 중에 누가 노동의 주체일까요? 유물론적 취지에서는 매트릭스 바깥의 주체가 엄연한 노동의 주체지만, 노동을 하지 않으면 죽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는 매트릭스 안에서는 가상의 꿈을 꾸는 주체가 당연히 노동의 주체입니다. 저 프로그램을 이데올로기나 특수한 경제적 환경으로 대체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솔직히 가상 세계속에 사는 인간을 아예 숨 조차 안쉬게 프로그램해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숨은 바깥 쪽에서 쉬고 있으니까요. (꿈속에서는 밥도 안먹고 숨도 안쉬지요.) 그러나 그럴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숨을 쉬고, 에너지를 섭취하도록 매트릭스가 프로그램이 되어있기 때문이죠.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따라서 한 실존의 삶에 어떤 프로그램이 크게는 이데올로기, 작게는 경제적 환경이라는 이름으로 지배적인 권력으로 작동한다면 이런 상황에 속해 있는 삶이 곧 노동이라는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고 이론의 베이스가 없는 사람이 허영심이든 머든 바람이 들어 이렇게 글을 쓸 때에 특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어휘나 용어를 정밀하게 사용하지 않고 두루뭉실하게 환유적인 수사로 쓴다는 것이죠. 제가 딱 그 불성실함의 표본이 된 것 같습니다..

이챠

2011.06.01 16:32:57
*.41.224.95

여기에서 '무지한 이의 글쓰기'라 말한 내용을 포함 더 후퇴시켜 나는 '방어적 논쟁술'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했었다. 힘 없는 좌파가 생각하는게 다 비슷한 듯.

하지만 내 방법이 훨씬 더 저질스러웠는데.(당당) 이 방법이 애초에 글쓰는 시점에서 개소리 덜하고 덜까이는 방법이라면, 나는 좋은 결론을 얻기 위해 개소리 다하고 까일 거 다 까이고 굴욕을 각오하는 존나 무식한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그 정도까진 아니구요.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개별 지식 없음.... 기본적 논리와 자료, 말빨만 있을 때 논의하는 태도 같은데. 내 경우에는 거기에 더해 나처럼 키배력도 없고 말빨도 없고 기본적인 흐름도 모르고 몇 권짜리 남의 분야 자료 찾아볼 정력도 없을 때, 질문과 아주 기초적인 논의로만 어떻게 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까이면 나중에 정상적 논의로 후퇴할 걸 계산하고 상대방이 눈치 못채는 듯 보이는 쟁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도발적 개소리를 포함하고(이건 자기 이득이 없다 싶으면 말을 안해주는, 또 예쁘게 말해줘도 지가 뭘 못보고 있는지 도무지 알아채려 하지 않는 놈들이 우글거리는 디씨 환경탓이 크다. 이름 팔린 시점에서 못쓰는 방법) 논리를 후퇴시켜야 된다 싶으면 후퇴할 만큼 어디까지나 후퇴해주고 방어할 수 있는 부분만 확실히 방어하며 다시 시작한다. 또 생각 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스압이 날 정도로 쉽고 자세히 논하는 것이었다. 이건 고수 입장에서 뭐라 까기도 힘들고 상대해주기는 무지 귀찮은 부류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필요 이상의 개소리를 하지 않는 것,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 내가 제일 하수라는 마음가짐, 그러므로 배워 올라갈 데 밖에 없다는 생각, 등이다.
이렇게 지내면서 배우는 건 단순히 지식이 많은 사람은 물론이지만 평소에 '명민한' 사람들도 레벨도 없는 사람에게 발목잡힐 만한 멍청한 짓을 많이 한다는 것과, 그 굴욕과 후퇴의 순간을 의도적이었던 것이라 정신승리하면(죄송했었습니다.) 참기 쉽고 어쨌든 나중엔 다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성장을 거치면 기본에 민감하고 성실해진다. 그렇다고 자기도 기본을 물말아먹는 짓을 안하게 되는 건 아니다.
정신 안차리면 언제든 다시 삽질을 하게 마련이므로......요즘도 정줄 놓고 보면 삽질하고 있고.....
이 방법을 써도 하수임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삽질은 없는 '결론'을 얻을 수 있고(그거 얻으려고 하는 짓이니까) 또 하수는 몰라도 이 방법만으로도 '최하수'는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 보는데....


윤형빠가 되고 한윤형의 글에 대해 신뢰가 깊은 것도 그런 무지의 인정과, 세밀한 데까지 가능성을 최대한 포함하는 노력과, 정당한 입장을 선택하는데까지 망설임이 항상 보이기 때문이다. 기본에 충실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나는 저기까지 못한다 싶은 생각에 항상 감탄한다.
여기에, 남들이면 그냥 무시하고 말, 얼핏보면 개소리인 것을 진짜 상대의 뼛속까지 돌이킬 여지도 없는 '멍청갑 개소리성인'이라고 판명 될 때까지 끝까지 상대해주는 걸 보면 책을 아직 더 많이 팔아야 되긴 하나보다.... 아니, 친절과 소통의 성자 + 정력왕 기믹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지만 참고사항.
가끔 아주 엄청난 개소리를 하는 상대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시점부터 멀쩡하게 이야기하니, 아니 어떻게 이거 볼 줄 아는 놈들이 저걸 못보고 이랬지? 싶은 놈들이 있다면, 정말 그 부분만 눈에 안 보이게 뇌내 필터를 깔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상대가 제대로 상대해주지 않을까 걱정 돼서 일단 이런 도발의 방식을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세상 못 믿는 불쌍한 사람일 수도 있다. 엉엉..... 불쌍한 내 어린 시절이여. ㅠㅠ 까이길 원하는 것이므로 힘있게 까주자 10초만에 착해져서 멀쩡하게, 아니 심지어 정치하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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