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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박가분에게 답함

조회 수 6096 추천 수 0 2011.02.15 02:59:57


박가분의 최장집 비판 '3부작'

최장집주의자들에게 답하며 왜 최장집주의자들을 비판하는가?  민주주의는 그 누구의 대의도 아니다


내 비판
2011/02/11 - [정치/분석] - 박가분의 최장집주의 비판과 진보정당 운동론에 대한 논평


박가분의 응답
한윤형에게 답한다



: 이 글은 위 응답에 대한 재비판으로 이 글에 인용된 박가분의 발언(빨간색)은 모두 위 응답에 나온 것이다.




박가분의 글을 몇 번이나 꼼꼼하게 읽어보았는데, 처음에 논의한 순서대로 전개하다간 얘기가 너무 지루해질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그의 논점들에 대해 선별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얘기가 어긋나지 않는 지점이 하나도 없어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의 글은 모든 문장이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돌고 있으며, 핵심과 주변, 주장과 근거를 구분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다만 나는 중요한 논점을 앞에 세우고 세세한 논점을 뒤에 세우며 그의 논점에 대한 발언에 대한 내 대답을 뒤섞는 식의 순서 재배치를 하면서 그나마 다른 사람들이 이 ‘대화 아닌 대화’를 읽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 보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너무 수고로운 일이었고, 사실상 이 이상 할 수는 없었다.


시작하기 전에 먼저 용어정리. 내게 제안한 일은 아니지만 그는 스스로 최장집을 ‘C'라 표기하겠다 한다. 이 표기를 따르면 ’최장집주의자‘는 ’C주의자‘가 된다. 나는 최장집을 C라 표기할 필요는 못 느끼지만, ’C주의자‘란 호칭은 무척 매력적이다. 일단 축약이 되고, “내가 이해하는 최장집은 그게 아닌데.”란 말이나 “그가 언급하는 ’C주의자‘의 외연이 어디까지인지 잘 모르겠는데.”와 같은 부연을 할 필요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즉 나는 ’C주의자‘에 대해서만큼은 박가분이 자신의 글에서 묘사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양쪽으로 해명할 필요를 없애고자 한다. 그러므로 박가분이 ’C', 'C주의‘, ’C주의자‘라고 부르는 것들을 나는 ’최장집‘, ’최장집의 견해‘, ’C주의자‘라 표기하기로 한다.


1. 촛불시위 평가의 문제


나는 지난 날의 광우병 촛불시위의 방향성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촛불시위대는 자신의 정치적 대의와 요구사항들을 '잘못' 정식화했다. 그럼에도 내가 반대하는 것은, 촛불시위를 통해 분출된 저 정념적 차원의 분노와 열망들을 단순한 '일탈'로 치부하는 저 관료적인 태도이다.(...)


내가 그에게 한 질문의 요점은 당시의 대규모 시위가 (그가 말하는 식대로 하면) ‘상상적인 것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냐는 것이다. 적어도 2008년의 촛불시위대가 자신의 정치적 대의와 요구사항들을 (박가분이 보기에) ‘잘’ 정식화했다면, 그 정도 대규모 시위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다 대고 박가분은 전혀 엉뚱한 해석을 한다.


내가 마오쩌둥의 <후난성 농민보고서>를 인용한 요점은(...) 일견 중간파들의 시각에서 '과도하고' '지나친' 것으로 보이는 저 정념적 분출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데 있었다.(...) 즉 그러한 분노가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러한 분노를 지금의 정치적 틀이 자명한 것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중적 분노가 확산될 때 더욱 더 현행의 민주주의적 제도를 더욱 더 당위적인 것으로 보고 싶어 한다. (...) 촛불시위는 C의 이론이 스스로의 징후를 보여주게 만든 사건이었다.


당시 촛불시위대의 정념적 분출에 환호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 있었던가. 물론 최장집은 환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최장집에게 그 사건은 ‘정당정치와 의회민주주의가 잘 작동하지 않아서’ 나타난 사건일 뿐 변혁의 기반이 되는 사건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황을 보면 실제로 그 판단에 힘을 실어줄만 했다. 실제로 시위의 과격화를 막은 것은 최장집과 같은 외부의 먹물이 아니라 시위대 내부의 ‘중간파’들이었다.(물론 거기서 좀 더 과격화 되어봤자 큰 효과는 없었으리라.) 시위가 확산되었을 때 나타난 건 전대협의 깃발과 “그리워요, 노무현”이란 구호였고, 시위에 대한 탄압에 직면해서 대중이 분노한 ‘지금의 정치적 틀’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명박 독재체제’였다.(혹은 이명박을 일본인이라 부르며 그를 ‘외래인 군주’로 취급했다.) 박가분은 시위의 스펙터클만 보면 그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균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석하는데 시위대가 “이명박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를 달라!”는 식으로 생각했다면 얘기가 어떻게 되는가. 최장집의 이론은 그 전이나 그 후나 변화가 없었는데 대체 무슨 징후를 보여준단 말인가?


설령 최장집이 촛불시위에 대해 그때 한번 말한 것이 박가분의 폭언처럼 그의 품성을 의심케 하는 사건이라 치더라도 분명히 남는 것이 있다. 최장집이 그 시위를 막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시위의 과격성이나 지속가능성은 공권력과 시위대의 상호작용에 의해 줄어든 것이지, 최장집의 일은 아니다. 그런데 촛불시위대나 그것을 옹호한 먹물들이나 박가분이나 시위대가 공권력에 수그러 들었다는 사실을 종시 인정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이미 이전 글에 말했듯이 외부에 있는 먹물에 책임을 돌린다. ‘이것은 최장집 때문이다!’


최장집의 등장에 촛불시위의 스펙터클에 취해있던 먹물들이 왜 겁을 먹었을까? 대중이 죽어도 먹물 말을 안 쳐듣는다는 걸 뻔히 아는데도 말이다. 그건 그 스펙터클이 혁명이나 전민항쟁의 전초인양 설레발을 떨던 그들 앞에 나타난 최장집이 심플하게 이것은 야당이 제 역할을 못해서 생긴 일이라고 말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허공을 밟고 있었는데, 최장집이 알려주었을 때야 겨우 그 사실을 깨달은 게 아닌가? 그들이 이 말에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면 최장집에 대한 그들의 혐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문제는 이미 입증되었듯이 그러한 '당위'가 전혀 '선험적'일 수 없다는 데 있다. 오히려 대중적 봉기에서 핵심적인 것은, 그러한 봉기의 순간 속에서 현재의 민주주의의 제도적 틀 자체가 '정당'한 것인지의 여부가 '내기'에 걸린다는 것에 있다. 그것이 지난날 촛불시위에서 진짜로 외상적인 지점이었다.


그 당위는 선험적일 수는 없지만 다른 당위가 등장하지 않는 한은 경험적 우위를 독식하게 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상황을 살피면, “봉기의 순간 속에서 현재의 민주주의의 제도적 틀 자체가 '정당'한 것인지의 여부가 '내기'에 걸린다.”는 단언이야말로 전혀 선험적일 수가 없다. (물론 경험적 근거도 전무하다.) 아무도 그런 내기를 안 걸었는데 왜 박가분 혼자 내기를 걸고 의미를 산출해내는가. 그리고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이 어떻게 외상적인 지점을 드러낼 수가 있는가. 머리  속으로 상상하면 현실이 되는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틀을 변혁하는 PT독재의 전망은 이러한 일종의 '징후'로서 폭발하는 대중적 분노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 봉기는 현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불가피한' 것이라는 모든 저 냉소적인 현실인정을 허공에 날려버리는 현상이다.(...) 우리는 이익단체를 통해 보장될 수 없는 저 보편적인 민중적 권리의 공백에 대한 저 광범위하고 미분화된 분노를 정식화하고, 그것을 더 잘 조직하고 결집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을 결집시키는 과정에서 '적'은 피해갈 수 없는 범주이다. (...) 물론 지금 상황에서 우리의 적을 정식화하기가 매우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정식화하는 이론적 틀과 노력들을 이미 오래 전에 내다 버렸기 때문이다.


봉기에서 “자본가 물렀거라!”나 “의회를 뒤엎어라!”란 구호도 안 나왔고 “못살겠다! 방화하라!!” 수준의 체제 불인정의 격렬한 파토스가 터져 나오지 않았는데도 이것을 기반으로 PT독재의 전망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PT독재 문제는 일단 뒤로 제끼고, 분노를 정식화한다고 치자. 그래서 ‘적’은 누가 되는가? 정식화하기가 매우 어렵단다. 시위대는 ‘이명박’으로 잡고 있었는데, 거기다 대고 뭘 더 정식화하자는 건가? 자본가? 자본가를 어떻게 정의할 건데? 자산가치 평가해서 몇 프로 수준에서 재단할 텐가? 1가구 2주택자들에 대한 분노를 유도해 볼텐가?


이렇게 정식화가 어려워진게 맑스주의를 내다 버렸기 때문이라고? 그럼 맑스주의가 적을 너무나도 잘 정의해줬는데 사람들이 미쳐서 그걸 내다버렸다는 건가? 설마하니 이제와서 생산수단 소유여부로 따져서 덤프트럭 운전수들을 자본가로 몰자는 걸까? 왜 인과관계를 뒤집어서 세상을 바라보는가?


물론 맑스주의를 잘 발전시켰다면 ‘적’을 잘 규정할 수 있었을거라 기대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경우라도 그걸 발전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쪽은 그 가능성을 굳게 믿는 그 사람들이다. 'C주의자'들이 맑스를 계승/발전 안 한다고 욕을 먹어야 하겠는가?  


2. PT독재와 의회민주주의의 문제


여기서 한윤형은 프롤레타리아(PT) 독재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그건 그렇다고 치자.


중요한 것은 맑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의회독재란 정확히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의회주의적 방식을 지칭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PT독재는 결코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적 전망이 아니라, 정확히 의회독재 속에서 불가능한 민주주의를, 새로운 민주적 합의의 틀을 구현하기 위한 대중동원적 실천들을 의미한다.


도대체 그건 뭘까? ‘의회독재 속에서 불가능한 민주주의를, 새로운 민주적 합의의 틀을 구현하기 위한 대중동원적 실천’‘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적 전망’과 어떤 지점에서 구별 할 수 있을까? 어떤 직접 민주주의적인 제도를 선택적으로 대의 민주주의에 결합시키나? 혹은 대중을 어느 시점에 기술적으로 어떻게 동원하여 어느 정도까지의 합의를 산출해내나?


박가분은 이에 대해 아무런 진술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얘기가 가능하다면, 그것이 민주주의 체제를 보완/발전시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는 민주주의는 ‘의회독재’라는 현실태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PT독재의 이념형과 대립시킨다. 의회는 독재를 막기 위해 행정부나 사법부라도 있지, PT독재의 현실태엔 어떤 권력분립이 있을까? 혹은 소비에트연방에서 그랬듯 권력분립이 없다면,  피지배자들은 평상시에 소비에트를 어떻게 통제할까? 의문은 끝이 없니 늘어진다. 설마하니 의회 뒤편에는 ‘자본가’가 있으니까, 그 자본가만 없어지면 통치자와 피치자의 거리가 자동적으로 사라진다고 말하려는 걸까?  


도심 재개발(이는 자본의 잉여생산물을 흡수하기 위한 국가와 자본의 결탁이다)과 같은 계급적 현상들을 충분히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직감적으로라도, 자본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대중동원적인 정치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계급투쟁을 통해 PT의 계급적 이해를 결집시키지 않는 이상 어떠한 쟁점에서도 우리는 어떤 유의미한 사회경제적 계량조차도 이끌어낼 수 없다. 그렇다. 나는 PT독재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전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오히려 의회주의적 독재의 한계에 직면하는 한에서, 안고 가야할 숙명적인 정치적 전망이라고 생각한다.


이 직감,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유럽에서는 인구의 절반 정도가 공공주택에 산다는데, 이것은 ‘의회주의적 독재의 한계에 직면하는 한’에서 ‘PT독재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전망’‘숙명적인 정치적 전망’으로 안고 갔기 때문인가? 하긴 이건 증명도 반증도 안 되지.


그럼 이렇게 물어보면 어떤가? ‘계급투쟁을 통해 PT의 계급적 이해를 결집시키’는 것이 (박가분이 말하는 바) ‘의회독재’ 안에서 불가능한가? 오히려 그것은 ‘의회독재’의 권력을 의회 내부에서 분점하는데 성공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운동과 조직화와 그것을 받아 안는 원내 진보정당의 역할을 긍정한다면, 최장집에 대한 그의 비판은 도대체 어떤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정당에 대한 운동의 우위를 인정하라는 것? 그런 테마라면 나는 앞으로 그와 ‘C주의자’들간의 언쟁에 다시는 끼어들지 않겠다. 그런 논쟁엔 하등 실천적인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오히려 맑스의 요점은 '합의'에 기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의 영역 내부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정확히 동일한 부르주아적 '합의'의 틀을 통해서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치적 결정(합의)에 도달하는 계급적 방식이다.(...) 따라서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가 작동하는 계급적 틀 자체를 변경하는 것이지, 민주주의에 대한 저런 무력한 규범들을 가지고 정치에 대해 무력하게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현행의 민주주의는 우리의 '대의'가 아니다. 오히려 맑스주의자들에게 있어 관건은 민주주의의 틀 자체를 재발명하는 데 있다.   


그 ‘정치적 결정에 도달하는 계급적 방식’을 의회가 불충분하게나마 실현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PT독재를 구성하는 제도가 무엇인지는 박가분은 말하지도 않았는데, 우리의 의회는 그 ‘계급적 틀 자체를 변경’할 수 있는 장소라는 위상을 두고 대체 누구와 경쟁해야 하나?


나는 여기서부터 벌써 '실천적 대안'이 없다는 지적을 예상하게 된다.


당연하지!


그러나 최소한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맑스주의의 일련의 공리적인(axiomatic) 비판들은, 우리가 진보적 정치의 전망을 논하는 자리에서 부르주아 정치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추수'하는 게 '쓸데없는' 짓이라는 점을 알려주는 데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건 또 대체 왜 그런가? 어찌됐건 당장은 진보정치를 ‘부르주아 의회 민주주의’ 내에서 해야 하는데 어째서 그 이론들을 다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가? 그리고 대체 어디까지가 ‘부르주아 정치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의 이론’인가? ‘부르주아 의회 민주주의’의 역설을 분석하고 있으니까 샹탈 무페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나? 경제학자들의 모든 이론은 쓰레기통에 쳐박고 '맑스주의 정치경제학'만 공부해야 하나? 그 정도 수준의 얘기가 아니라면 왜 최장집은 쓰레기통에 가야 하나? 최장집이 한국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차원에서 ‘부르주아 정치학자’였단 말인가? 그리고 대체 왜 맑스주의는 비판만으로 다른 이론들을 쓰레기통에 쳐박을 만한 권위를 지니는가. 선험적 당위?


물론 맑스주의적 전망에도 이론적인 공백이 존재한다. 예컨대 한윤형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정식화했다. "'잔여'가 '계급적 현상'이란 말은 '계급적 현상'이 (라캉적 의미에서의) '실재'란 말과 다를바가 없는데, 그 실재가 정치권력이라는 상징계에 어떤 방식으로 출몰할 수 있는가?" 물론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정말로 그렇다.


내가 C에 대해 항상 동의하는 것은, 갈등이란 원칙상 '제도화'되어야 한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한윤형과 더불어 C주의자들이 모르는 것은, PT 독재를 옹호하는 사람 역시 그 원칙에 대해 항상 동의한다는 점이다.


이때에 그 PT독재는 어떤 PT독재인가? PT가 PT를 통치하니 통치자와 피치자가 일치하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갈등이 생긴단 말인가? 그리고 이 논리가 아니라면, 거기에 PT독재라는 이름이 붙는 근거는 무엇인가? 분명히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잔여’는 제각각 다르고 그걸 합산한 게 PT라면 그들은 서로 다른 것들이고 이해관계가 상충될 텐데 그 점은 어떻게 처리하느냐고. 이 지점을 인지한다면 그건 정의상 PT독재일 수 없고 무언가를 바꾸어 봤자 ‘또 다른 민주주의’다. 그 나라에도 공권력이 필요하고 그렇다면 그 공권력을 감시하는 대의된 사람들도 필요하며 그들을 의원이라 부르든 소비에트라 부르든 또 그 사람들을 견제할 사람들이 필요하며 삼권분립이든 사권분립이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에선 의사결정이 이루어져도 ‘이견’이 그대로 남는다. 그리고 결정(합의)이란 게 그저 ‘내전의 잠정적인 중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적대’는 그대로 남아 다음의 선거를 기다리게 된다. (이건 지젝이 로크를 독해하면서 했던 얘기 아닌가?) 다음엔 자신들이 질 수도 있으니까 서로 조심하고 반대파를 용인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우리나라엔 아직 이게 무르익진 못했다.) PT독재도 이것과 같다면, ‘민주주의’가 아니라 ‘PT독재’란 이름을 유지해야 할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게 아니라 PT독재에서 ‘잔여’가 사라진다고 주장한다면, 모든 사람의 욕망을 동일하게 만드는 그 마법은 어디에서 오나? 끝없는 이념적 교육? 무자비한 신적 폭력? 그게 ‘의회독재’의 대구적 의미인가?


더더욱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저 '잔여'에 대한 위와 같은 한윤형의 논평들은 순수한 '환상'을 구현한다고 본다. 물론 그는 계급적 현상으로서 사회적으로 대표되지 않는 '잔여'들의 출현이 구조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런데 그는 좋은 사회의 척도를 그러한 잔여가 수적으로 '덜' 존재한다는 점에서 찾는 것 같다.(...) '잔여'라는 현상이 구조적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그는 '누가' 잔여이고 아닌지를 저런 몽매한 방식으로 계량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것이다.


누가 드래곤볼에 나오는 스카우터 차고서 잔여를 측정한다고 했나? 왜 이렇게 ‘몽매’한가?


어떤 점에서 자본가가 아닌 이상 우리 모두가 '잔여'이다.


스카우터를 자신이 찼다. 아니 위에선 수적측정이 안 된다고 해놓고서 '자본가 빼고 잔여!'라고 주장하면 어떡하나? 그럼 이집트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미국이나, 독일이나, 프랑스나, 스웨덴, 노르웨이나 ‘잔여’의 비율은 도찐개찐이란 말인가?


혹은 고전적인 생산수단 소유여부로 따질 때, 신자유주의화가 심하게 진행된 영국, 미국, 한국의 ‘자본가’ 비율이 높아서 (어지간한 놈들은 다 자가영업자-'사장님'으로 만드는게 신자유주의화니까) ‘잔여’가 적단 말인가?


박가분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본소득이 시행된다고 자본가 숫자가 느는 건 아닐게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시행된다면(이건 당장으로선 가능성도 안 보이는 '혁명적인' 얘기인데) 우리 사회가 없는 이들의 요구를 더 대변했다고 볼 수 있는가, 없는가?


만일 지금 내가 던진 질문들이 우스꽝스럽다면, ‘좋은 사회’의 척도를 ‘잔여’의 상대성으로 비교하는 것은 어째서 틀린 얘기란 말인가? 어떤 사람도 자신의 모든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도 자신의 욕망을 하나는 실현하고 있다면, ‘잔여’를 사람 수로 구별하지 않더라도 대의되는 욕망과 대의되지 않는 욕망의 정도를 비교하는 척도는 이러저러하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직능이익단체의 조직률, 노동조합 조직률, 노동조합 단체협약 적용률, 의회 내 진보정당의 규모 및 관계맺는 단체의 범위 등등. 이걸로 부족하면 다른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왜 비교할 수 없단 말인가? (실질적인 삶의 질을 측정해 보면서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게다.) 그게 아니라면 진보란 종자들은 어떤 사회가 ‘살만한 사회’인지 ‘살만하지 못한 사회’인지는 뭘 보고 판단할 것인가? 우파들을 따라서 GDP?  


다시 한번 묻겠다. PT독재 체제에선 ‘잔여’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만일 거기서도 ‘잔여’가 존재할 수 있지 않느냐는 내 물음을 박가분이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면, ‘잔여’는 결코 비교될 수 없으므로, PT독재가 의회독재(?)보다 더 우월하다는 박가분의 심증도 영원히 증명할 수 없는 영역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만일 PT독재 체제에선 잔여가 사라진다면, 그건 대체 어떤 식으로 사라지는가? 어떤 식으로 사라질지 말도 못하면서 All or Nothing으로 사태를 판단할 수 있는가?


이런 식이라면 진보정당 운동에서 퇴장해야 할 것은 (그들이 박가분이 지적한 오류와 부적절함과 나쁜 품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C주의자’가 아니라 박가분이 아닌가? 지금 말한대로라면 박가분은 진보정당 아무리 성장해봤자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은 없고, 다만 이게 의회내에서 권력을 잡으면 나중에 한방의 도약을 감행하는데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차라리 ‘C주의자’는 자신이 믿는대로 행동하는데 왜 박가분은 자신이 믿는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건가? 그것은 그가 냉소주의자이기 때문인가?


이런 식으로 박가분의 진술들을 물고 늘어지게 되는 이유는 글을 앞뒤로 몇 번씩 뜯어봐도 그의 '대의'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야 '대의'가 없거나, 내 '대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므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좋은 정치'가 실현되는 일은 '더 좋은 일'로 여긴다. 박가분은 그런 관념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박가분은 1) 그의 대의가 무엇인지, 2) 그의 대의가 무슨 성격을 지니고 있길래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좋은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이론이 무의미한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하고 있는 것은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개념적 규정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다. 그렇게 해서 설명된 PT독재론이 '다수의 지배'라는 그리스 민주정의 이념을 다시 한번 해설하는 것과 무슨 차이를 지닐는지 잘 모르겠다.
 

그는 직접 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하지도 않고, PT독재를 논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옹호한다고 말하지도 않으며, 기술적 요소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 요소를 결합한 대의민주주의라고 말하지도 않고, 경제체제로서의 공산주의가 대의민주주의를 더 완전하게 할 거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이 네개 중에 그나마 내가 상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세번째와 네번째다. 그리고 세번째나 네번째라 하더라도, 이것이 자본주의-민주주의 체제 안에서의 '좋은 정치'를 위한 노력을 부정해야 할 근거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만일 체제 내 진보주의자들이 나아간 곳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려는 좌파들이라면, 그때까지 함께 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애초에 그 길이 의미가 없어 함께 걸을 필요가 없다고 믿는 좌파라면, C주의자들에게조차 시비를 걸어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있단 말인가? 


3. 냉소주의 문제


여기서 냉소주의 문제로 넘어가자. 박가분은 ‘C주의’가 냉소주의임을 입증하고 이를 비판하려고 한다. 나는 그의 냉소주의 개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박가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지만, 여기서 입증책임은 그에게 있다. 그의 글의 전체 논지를 고려해 이 문제를 다시 정식화하자면 이렇다.


1) 그는 대체 왜 냉소주의가 정치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없는 인식인지 말해야 한다.
2) 그는 냉소주의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
3) 그는 왜 ‘C주의’가 냉소주의인지를 해명해야 한다.


박가분이 내 비판적 질문에 대해 개탄하려면 그의 글만 보고 위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은 그의 주장이 위의 논리적 구조를 따라 구성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글에 주어진 요소를 두고 아무리 추론을 해도 위의 논리적 구조가 도출되지 않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산만하게 썼다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내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젝의 냉소주의 규정을 옮긴 박가분의 논의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약간의 해명이 필요하다. 지젝에 따르면 냉소주의는 공식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키니컬한 비판(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 뒤에 가려진 특정 이익)에 대한 지배문화의 응답이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p62-63, 웹에서도 찾아보니 나온다. http://rulurulu.tistory.com/272 혹시 이거 말고 다른 전거가 있다면, 박가분이나 다른 누구든지 보여줬으면 한다. 내게는 7-8년 전에 몇 권 읽다만 지젝일 뿐이다.)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허울에 불과하고 그 가면 뒤에 특정 이익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를 유지할 핑계거리를 찾아낸다. 나는 이에 대한 한국적 예시를 지난번 글에서 이미 들었다. 전형적인 “그놈이 그놈이지 뭐.” 논증이다.


"조중동과 경제신문에서 부동산 곧 오를 거라 하지만, 사실 걔네 신문이 건설회사 광고받고 살아서 그런 거잖아?"(키니시즘)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다른 신문들도 다 자본에서 자유롭지 못한대. 한겨레 경향도 뭐 김용철 책가지고 생쇼하더라?"(냉소주의)


대충 맞는 예시를 찾아낸 듯하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논쟁을 통해 이런 저런 상황을 겪으면서 과연 저런 구별이 의미가 있을까, 란 생각을 했고, 그런 생각들을 지난번 글에서 풀어냈다. 그러나 박가분이 스스로 성찰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다시 지젝의 논의에 맞춰서 얘기해보자. 내가 의아한 것은 내가 박가분에게 ‘냉소주의’의 정의를 요구했는데 그가 ‘이데올로기’의 정의를 말하고 있다는 거다.


물론 지젝의 논의에서도 이데올로기는 냉소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공식 이데올로기에 대한 키니시즘의 대응이 있고, 그 키니시즘을 무력화시키는 방책이 냉소주의인 거다. 물론 냉소주의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고전적 규정에서 현대적 규정으로 변한다.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행한다."에서 "그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한다."로) 이쯤에서 우리는 지젝의 냉소주의가 1), 2), 3)에 어떤 답을 주는지 판단할 수 있다.


1) 그는 대체 왜 냉소주의가 정치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없는 인식인지 말해야 한다. : 공식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2) 그는 냉소주의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
: 공식 이데올로기에 대한 키니시즘의 공격에 대한 방어책이다.
3) 그는 왜 ‘C주의’가 냉소주의인지를 해명해야 한다.
: ......이건 못하겠다.
 

그런데 박가분은 첫째로, 키니시즘에 해당하는 것도 긍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더 이상 누구도 정치인들의 제스처에서 진지하게 계급적 함축을 ‘읽어내지’ 않는다. 다만 이제 사람들은 그 이면에 보다 더 외설적이고 추잡한 권력욕과, 재물욕, 그리고 섹스를 ‘상상’하게 되었다." 이데올로기 뒤에 숨겨진 현실적 이익을 폭로하는 것만으론 부족하고 계급적 함축을 읽어내야 한단다. 그게 아니라면 냉소적인 태도다.


물론 나는 저런 것도 ‘정치’의 영역을 거세한 냉소적인 태도라 볼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실패한 음모론에서 보이듯, 저 상상은 그 자체로 진위판단의 대상이 된다. 이를테면 조중동과 건설업체의 관계는 사실에 가깝지만, 조중동을 타블로가 조종한다는 건 망상에 가깝다. (더구나 후자라도 그걸 '음모론적'이라고 비판해야지 '냉소적'이라고 비판해야 할 이유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음모론은 망상적 키니시즘이란 정의는 꽤 그럴싸한데?) 박가분은 이 모든 것을 싸잡는다. 여기까지만 와도 위의 도식이 어긋나기 시작하며, 냉소주의적 언명의 숫자는 감당하기 힘들만큼 늘어난다.


박가분은 둘째로, 냉소주의에 대해 이데올로기의 현대적 정의를 결합한다. “그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척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믿는다.” 이게 냉소주의의 정의라면, 다음과 같은 행태들도 냉소주의가 된다.


가) 한군은 한국 사회의 구조는 담론을 통한 사회변혁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줄곧 자신의 글에서 말하지만, 그래도 계속 글을 쓴다. (실은 글쓰기의 힘을 믿어도 냉소주의! 이제 와 그것밖에 밥먹을 수단이 없어서 하는 짓이라면 그것도 냉소주의!!)

나) 오아시스는 우리는 이미 끝났는데 돈 벌려고 앨범을 낸다고 말했다.(그야말로 냉소주의!!)

다) 박가분은 기본소득이 잔여를 수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믿으면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제를 주장한다. (어머머 냉소주의!!!)



‘공식 이데올로기’란 요소를 안 넣으면 이따위로 변해버린다. 이것도 그럴 수는 있겠는데, 이제 박가분의 냉소주의가 저 1), 2), 3)에 어떤 답을 주는지 넣어보자. 편의상 순서를 바꾸었다.


2) 그는 냉소주의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
: “그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척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믿는다.”
3) 그는 왜 ‘C주의’가 냉소주의인지를 해명해야 한다.
: 그걸 왜 못하겠어? 대충 야부리로 때려맞추면 될텐데...   
1) 그는 대체 왜 냉소주의가 정치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없는 인식인지 말해야 한다. : ......이건 못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박가분이 냉소주의의 정의를 애매모호하게 넓힘으로써 그것으로 상대방 논의를 비판할 권리를 상실했다고 보았던 것이다. 내가 보지 못한 지젝의 저술에서 지젝 스스로 냉소주의를 이렇게 '넓은 말'로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경우 지젝이 이 수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잘 보아야 할 것 같다. 내 생각에, 냉소주의란 말이 이 정도로 넓어질 경우엔 (나는 나 자신의 태도까지 지칭하면서 꽤 이 말을 넓게 쓰기도 하는데...그래도 이 정도까지 넓진 않다. 이건, 좀, 확실히, 너무 막 나간다...) 어떤 정치사조를 비판하는 결정적인 논리는 될 수 없을 것 같다. 부수적인 논리는 될지언정. 그런데 박가분의 글에선 C주의가 냉소주의일 뿐이라는게 주요한 비판 논리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그의 말대로라면 최장집의 교리를 강박적으로 신뢰하는 ‘C주의자’들이 냉소주의자라니 여기선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아니라 기독교가 이미 허무주의를 배태하고 있다는 니체가 느껴질 지경이다. 이 비유가 웃기는 게 뭐냐면, 우리의 니체짱은 허무주의를 벗어날 수 없는 걸로 봤다는 거다...


4. 손학규 문제


그런데 박가분이 ‘C주의’를 냉소주의로 바라보게 된 최초의 근거는 최장집이 손학규의 후원회장을 맡았다는 사건에서부터 나왔다. 나는 손학규 문제가 최장집의 동요를 보여준다는 지점에서 시작한 박가분의 비평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걸 최장집의 동요라고 봐야 할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미 지난 글에서 설명했다.) 물론 놀랄 수는 있다. 신해철이 하이스트 광고를 찍을 때 사람들이 놀란 것처럼 말이다. 이 놀람을 박가분은 ‘상상적인 것으로 드러난 자신의 기대’ 때문이었다고 말하는데,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진실로 냉소적이라 할 만한 것은, 상상적인 것으로 드러난 자신의 기대를 반성하는 대신, 즉 자신의 당혹스러움을 충분히 들여다보는 대신, 그의 행동을 이해할만한 정황들 사이로 재빨리 빠뜨리는 저 행위 자체라 할 수 있다.


동의한다. 그리고 나는 박가분이 조소하듯 “이러한 ‘냉소적 질문’을 자신이 ‘극복’했다고 다소 의기양양한 태도로 글을 전개”한 게 아니다. 냉소적 반문을 머릿속에서 지웠다는 게 무슨 극복했단 얘기가 되나. 그냥 그런 내용을 담은 글을 안 썼단 얘기지. 나는 스스로 냉소적 주체임을 부인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와 별개로 박가분의 서술에 두 가지 문제가 되는 지점이 있다.


1) 박가분은 최장집에 놀란 사람들의 기대가 ‘상상적인 것’이라 말했으면서, 첫 번째 글에서는 “그가 자신의 이론적 입장을 어느 정도 유보해야만 정치적 실천 노선을 가져갈 수 있다는 상황의 ‘역설’을 온전히 떠맡는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만일 후자가 옳다면 사람들의 기대를 ‘상상적인 것’이라 치부해야 할 필요가 없다. 후자가 옳지 않은데도 누군가 기대했다면, ‘상상적인 것’이다. (내가 그의 머리 속에 있을 라캉-지젝 용어 사전을 잘못 판독하고 있는 거라면 설명을 요구한다.) 그리고 최장집이 정말로 그렇게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고 스스로 생각했다면 무언가 중대발표를 했겠지. 그는 자신의 이론에서 그렇듯, 여전히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을 양손의 떡으로 들고 있을 뿐이다. 내가 지적한 건 바로 그 부분이다. 최장집은 양손에 떡을 들고 재보고 있지만, 박가분은 지금 떡이 하나 밖에 없는데도 양손에 떡을 다 들었다고 야바위를 친다. 이게 지금 이해가 안 가나?


2) 앞서 난 최장집의 선택에 놀랄 수 있다고 했다. 근데 그 놀람에는 몇 가지 층위가 있다. 첫째, 최장집이 민주당에 개입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랄 수 있다. 둘째, 최장집이 민주당에 개입했다는 사실에 대해선 놀람이 없었지만, 한나라당에서 넘어온 손학규를 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랄 수 있다. 셋째, 이 둘 다에 안 놀랐지만, 그래도 왜 손학규인지는 이해가 안 가서 놀랐을 수가 있다. 내가 놀랐다는 건, 셋째에 대해서다. 내 냉소적 반문은 세 번째 것과 관련하여 튀어나왔다. 첫째, 둘째, 셋째, 숫자는 안 붙였지만 지난번 내 글을 봐도 그렇게 구별되어 있다. 그런데 박가분이 논의하고 있는 것은 (이번 글에서도 보여지듯) 첫째 내지 둘째다. 그러니까 그의 반문과 내 반문을 비교해야 할 필요가 없다. (‘c주의자’들이 어떤 상황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내가 내 놀람에 대해 냉소적 반문이나 머릿속에 떠올리고 만 것은, 주변에 최장집이 왜 그랬냐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고, 이게 딱히 정치평론의 영역에서 문제삼아야 할 일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나는 박가분이 'C주의자‘들에 대한 최초의 글에서 시도한 정신분석적 접근이 잘못 되었다고 보는 거다. 그게 그의 세편의 글에서 드러난 최장집에 대한(...이라고 쓰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읽는다.) 꽤 쓸 만한 비판지점을 훼손했다 여겼기 때문에 나는 글을 써야 했다. 물론 이때 나는 박가분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접근(그러니까 정치학) 자체를 쓰레기 통에 버려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5. 최장집 문제


이렇게 박가분은 ‘손학규 문제’에 대한 자신의 동요를 ‘C주의자’의 동요로 바꾼 후 최장집을 겨냥한 분석을 감행한다.


우리는 어떠한 정당도 믿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외관’만큼은 어떻게든 유지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다원주의의 외관을 유지하는 일련의 다양한 정당들이 어쨌든 필요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문제는 저 심정적 진보주의자들의 저 냉소주의가 처한 곤경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지하길 바라는 민주주의의 외관을 정확히 ‘어떻게’ 유지해야할지 모른다. 저들의 믿음의 대상에는 별다른 실체가 없다. 손학규라는 철새정치인에 대해서도, 이제 우리는 무엇이 정당정치인을 망치는 철새정치인지를 규범으로서 정확히 설정할 수 없다.


꽤 재미있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그가 ‘C주의자’들의 행태에 '성질을 부리지 않고' 최장집을 바로 바라봤다면, 더 재미있는 얘기를 할 수 있었을 거다. 최장집은 한국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고 본다. 그는 민주주의를 절차적으로, 제도적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참여정부 말기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민주화가 후퇴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던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은 틀렸다. 이명박 정부 이후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틀렸다.


이는 최장집이 저술에서 하는 말도 아니고, 프레시안 같은 매체에 나와서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다. 심지어 저술을 보면 그는 ‘절차적/제도적 민주주의’와 구별되는 ‘질적 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해서도 긍정하지 않는다. 최장집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한 규범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다. 박가분도 이전 글에서 그의 이러한 태도를 ‘계몽주의’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위에서 그는 어떤 규범적 판단을 문제삼고 있는가?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역전이 일어난다. 최장집은 그러면서 ‘노동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노동하는 사람들을 대의하는 정당이 체제 안에 들어와 있어야 ‘좋은 정치’가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좋은’이란 형용사는 그가 이것을 민주주의의 규범의 문제로 보지 않음을 보여준다. 가령 하버마스처럼 “소외계층의 외침을 듣지 못하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도 아니다.”라고 말하지는 않는 것이다. 만일 이에 대해 지젝주의적 논평을 하려고 한다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형식의 측면에서 제대로 규정하면서, 한편으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좋은 정치’를 위해) 노동자 정당을 요구하는 이 모순에 대해 할 말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본다. 그러나 박가분은 이 ‘모순’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최장집의 견해에 나오는 규범이 계속 왜곡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대체 무엇이 어떻게 왜곡된다는 건가?


C에 대해서는 그의 추종자들은 무엇 하나 버릴 수 없다는 강박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 민주주의는 우리의 대의가 아니며, C의 이론은 그저 한 번 보고 버려도 좋은 참고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C를 부당하게 비판하든 말든 그것은 우리 알 바 아니다. 왜 우리가 그에게 신경을 써줘야 하는가? 왜 한윤형은 그 비판들이 지나치게 과도하게 들린다고 저렇게 긴 글을 써가면서 불평했어야 하는가? 나로서는 대단히 징후적으로 보인다. 마치 그것이 진보정치에 대해 결정적인 연결고리라도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이를테면 박가분에겐 최장집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몇번 지적했다는 이유로, 나 역시 최장집의 견해에 대해 무엇 하나 버릴 수 없다는 강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C의 추종자’인 것인가? (그가 ‘C주의자’라 부르는 이들이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다.) 최장집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누군가 최장집을 규범적으로 활용한다면, ‘최장집이 무슨 비판을 받든 알 바 아니다.’라고 말하면 되는 것인가? 박가분이 의회를 통해 대의되는 것들의 확장(잔여의 축소)에 아무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그가 말하는 ‘진보정치’는 무엇인가?


나는 최장집이 ‘한국 민주주의’란 대상에 대해 정치학의 상식을 잘 적용하고 있는 학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미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굳이 민주주의를 대의명분으로 삼고 있진 않지만, 이 체제 안에서 진보정치가 꽃피우기 위해선 그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최장집에게서 본 것을 나름대로 다른 것과 접목시키는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두지 않는다. 그리고 최장집이 그 이상의 어떤 특수한 정치적 실천을 요구하는 독창적인 소리를 했다고 보지도 않는다. 물론 최장집의 그런 평범함은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에선 비범함으로 나타난다. 내가 보기에 최장집의 미덕은 최소한의 것을 주장하며,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최장집의 견해를 ‘공리’로 삼아 특수한 사안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는 이들이 있을 때 그들과 가장 잘 맞서는 방법은, 최장집의 견해가 실은 그리 많은 것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얘기한 것도 최장집의 견해에 어긋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근 두 편 정도의 글 안에서 나는 그런 시도를 보여준 것 같다. 그런데 박가분은 최장집이 그리 많은 것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C주의자들’의 행태를 보고 최장집의 견해가 많은 것을 규정하려고 하는데 그 지점에서 실패하고 있다고 공박한다. 왜 그럴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라서? 아마도 냉소주의자라서?


6. ‘잔여’들


이번에 꼼꼼히 읽으면서 느낀 것이지만 박가분의 글엔 남의 말의 진의를 좀 허무하게 꼬아서 자신의 논의에 갖다 붙이는 식의 문장들이 너무 많다. 정신분석 비평담론의 지적 유산에 기대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그럴수록 상대방 말의 진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내면의 공백을 쳐내야 할 텐데, 박가분은 스스로의 글의 정당성을 위해 타인의 내면의 공백을 구성해내는 경향이 강하다. 애초에 내가 그의 최장집 비판에 대해 코멘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도 그러한 실패 때문이었는데, 이번 글에도 그런 실패를 따라 빙글빙글 돌고 있는 문장들이 있다. 이것들은 사실 중요한 논점도 아닌데, 이것조차 박가분의 글에서는 논증의 근거가 된다. 명백하게 그릇된 것들만 몇 개 집고 넘어가겠다. 박가분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여기서부턴 읽지 않아도 무방하다.


A. 박가분은 내가 “왜냐하면 글이 진행될수록 그의 의도는 최장집주의에 성질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라고 말한 부분에 대해, 1) C에 대한 성질부리기가 만연해 있다는 듯이 말했고, 2) 박가분의 글에 대해서만 그 사실을 면책해 주려는 시도가 기만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오해를 노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내 말은 훨씬 단순한 것으로, 박가분의 첫 글은 C주의자들에 대한 성질부리기로 보였지만 읽다보니 더 중요한 부분들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나는 박가분을 면책한 적 없다. 성질 부리기도 존재했고 그 이상의 것도 존재했는데, 그건 그도 이미 인정한 바다. 이글루스에서 박가분 혼자 싸우고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 맥락상 내가 무슨 만연에 대해 개탄했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아니라”고 말했는데 또 한번 “아니다!!!”고 강하게 대답하는 게 좀 희한하다.


B. 재미있게도 한윤형은 내가 마치 손학규를 ‘악마화’하고 있다고 불평한다. 내가 어디서도 그를 악마화하고 있지 않음에도 말이다.

내가 어디서 뭘 불평했다고 재미있을까. 하품이 난다. 내가 쓴 글은 정확히 이랬다. “손학규를 악마화하는 것은(...) 최장집주의자의 시각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주의자들의 시각이어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간단하다. 1) 한나라당에서 넘어온 손학규가 나쁜 놈이라 부를 시각의 근거는 김대중/노무현주의자들의 것이다. 2) 최장집주의자들은 그걸 안 가지고 있다. 3) 따라서 그들이 그걸 보고 동요할 이유가 없다. 4) 박가분도 그걸 안 가지고 있다. 5) 근데 왜 박가분은 최장집주의자들이 그걸 보고 동요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6) 그 시각을 포기한다면, 최장집을 규탄할 근거는 ‘냉소주의적 접근’ 뿐 일텐데?

본인은 정신분석적 독해로 남의 글을 후벼 파면서, 내가 하는 말이 메타-비평일 가능성은 고려를 안 하면 어떡하나? 더구나 나는 그 이후에 박가분이 냉소주의적 접근도 택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가 최장집의 행동을 규탄할 합당한 방법이 있는지 여부는 미궁 속에 빠지게 된다.”고 했는데, 그가 손학규를 악마화 했다면 대체 왜 이런 미궁에 빠진단 말인가? 악마 손학규를 지지한 최장집을 규탄하고 말겠지. 나는 그가 어디서도 손학규를 악마화하고 있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C. 게다가 나는 맑스주의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이 냉소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없다.(...)물론 그것은 내가 손학규를 악마화했다고 주장한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로(즉 일종의 넌센스로서) 맑스주의자와 맑스를 악마화하기 위한 것이다.

1) 그가 손학규를 악마화한다고 내가 주장한 적이 없음은 이미 위에서 말했다.

2) 나는 박가분이 ‘맑스주의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이 냉소주의자라고 말했다.’라고 주장한 적도 없다. 나는 그의 주장이 사실상 그걸 의미하게 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렇게 ‘말했다’와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는 다르지 않은가? 전자는 사실판단의 문제일텐데? 이걸 구별하지 않는다면, 나는 박가분의 글을 보면서 그의 팽이돌듯 이어지고 미끄러지는 논변들에 대해 대고 끊임없이 “박가분 거짓말...박가분 거짓말...”라고 반복해야 한다.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에겐 해석의 자유가 있지만 난 그 해석이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나는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이걸 보고 “무엇이 이러한 지극히 ‘전략적’이고 ‘의도적인’ 오독을 불러일으키는가?”라고 물을 생각도 없다. 지금도 이미 글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3) 정확히 말하면 나는 박가분의 냉소주의 개념이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말했던 ‘키니시즘’과 ‘냉소주의’를 가뿐히 포괄하고, 그것을 넘어서 훨씬 더 넓은 범위를 포괄하게 되는 것 같으니 “박가분의 도식에서 '냉소주의자가 아닌 이'란 결국 '맑스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냉소주의 이야기는 위에서 자세히 했으니 생략하자.

4) 왜 내가 박가분의 주장에 대한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사실상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맑스주의와 맑스를 악마화하기 위한’ 시도가 되는가? 박가분과 맑스는 영혼의 친구라서, 만약 박가분이 개념을 헐겁게 쓸 때에 그게 맑스가 책임져야 할 문제가 되는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걱정마시길 바란다. 나는 'C주의자'의 행태에 분노하면 최장집을 규탄해야 한다고 믿는 박가분과는 다르다. 설령 내가 박가분의 글에 고개를 젓더라도, 맑스와 지젝은 또 별도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ㅋㅋㅋ

2011.02.15 06:13:09
*.146.36.106

제가 볼 때, 박가분의 가장 멋진 적 중의 하나가 오늘 탄생할 듯. 그리고 이 적은 단순히 박가분을 두들겨패는 데 의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예리한 훅과 자잘한 잽들을 더 잘 피할 수 있을 지, 쓸데없는 움직임들을 줄일 수 있을 지 노력하게 할 코치같은 적이라 좋쿤요.

박가분

2011.02.15 07:50:23
*.133.144.18

잘 읽었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군요. 윗분이 말씀했다시피 좋은 코치를 만난 느낌입니다. 혹시 제 원글로 감정 상한 부분이 있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로서는 부당한 부분들이 눈에 띄기에 이 부분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박가분

2011.02.15 07:49:45
*.133.144.18

사실 주인장께서 해명하시길, "박가분의 입장에서는 맑스주의 외의 입장을 냉소주의로 규정할 수 있다"는 자신의 판단은 어디까지나 해석적 개연성의 영역으로 남겨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저는 이것이 하나의 해명이라고 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을 받아들일 때, 주인장이 제 글에 대해 가했던 공격중 상당수는 사실 힘을 잃어버리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 부분을 제 반론+해명글에서 조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지적하셨던 냉소주의에 대한 느슨한 규정이라든지, 최장집과 손학규 간의 에피소드에 관해 제가 필요한 설명들을 누락했던 것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따로 해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박가분

2011.02.15 10:10:25
*.133.144.18

http://blog.naver.com/paxwonik/40123307311

시만

2011.02.15 12:25:44
*.99.62.18

흰 것은 배경이요 까만 것은 글씨인데 흠...... 두 님 글들 따라가기가 벅차다.
(글자, 는 겨우 읽었는데 의미는......)
옛(?) 대가들도 이렇게 치고받으(?)면서 성장했겠지.

하뉴녕

2011.02.15 12:33:09
*.149.153.7

빨간 글씨와 파란 글씨가 핵심인데!!! ㅋㅋㅋ

하늘타리

2011.02.15 13:40:35
*.36.208.222

"비밀글입니다."

:

하뉴녕

2011.02.15 14:51:52
*.149.153.7

아이구 감사합니다. :)

몰킹

2011.02.15 14:47:38
*.238.57.215

회사에서 읽기엔 너무나 벅찬 두 남자의 글;;

드래곤워커

2011.02.15 15:30:19
*.234.105.202

잘 읽었습니다.
저도 박가분님의 글을 읽는 내내 독선적인 맑시즘적 사고방식에 갑갑함을 느꼈는데, 이렇게까지 정치한 논박을 읽고 속이 다 시원하네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트위터 팔로우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윤형님이 첫 팔로워네요.
근데 읽기전용으로 만든 거여서 트위트 할 생각은 없어요.ㅋ

괄태충

2011.02.15 15:33:42
*.30.45.137

글이 참 찰지네요. 찰지구나.

mah0140

2011.02.15 20:19:57
*.38.62.250

냉소주의라는 단어는 목적어가(그리고 주어도) 생략된 서술어라서
일상적인 맥락이 아니라 어렵고 전문적인 맥락으로 넘어와 쓰일 때에는 맥락이 바뀔 때마다 목적어를 아주 명확히 지시해 줘야 하는데
그걸 정말 징허게 안 해주시네

저런 글 길게 쓰다보면 내가 왜 이런 뻘짓을 하고 있지라는 생각 안 드나.... 신기하다

한윤형님도 참.. 이렇게 독심술 부려가며 분석-파악이 선행된 반박글 쓰시느라 피곤하시겠음

관중

2011.02.16 22:02:54
*.135.182.124

복싱장에 와서 "쟤들 왜 쓸데없이 저래 싸우냐"라고 의문을 가지고 계실 바에는 그냥 집에 가서 하고싶으신 일 하시길 바랍니다.

mah0140

2011.02.17 10:34:20
*.38.62.250

관중//앞의 두문단의 목적어는 박가분입니다

완소 한윤형님이 아니고요

저런 식의 방사성 토사물들을 제대로 처리할 줄 아는 능력자로서 한윤형님의 가치는 가히 독보적인거 같습니다.
정작 윤형님 본인은 아무런 돈도 안되고 어자피 이나라에서 논증적인 토론따위 코풀고 쓰레기통에 던져둔 휴지만큼의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비관하시는것 같지만 ㅠ,ㅠ

보다지쳐서

2011.03.01 00:36:34
*.176.3.148

가만히 보건대 이 논쟁에서 이기는 길은 누가 더 지루한 글을, 누가 더 많이 토해내어, 누가 먼저 상대방을 기가 질리도록 하는가 하는데 있다고 본다.
이런 논쟁은 결코 오래 끌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런 논쟁은 둘 중에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지루하기 때문이다.
둘 다 앞길이 창창한 구만리인테 항차 기대되는 건강한 성생활을 위해 논쟁이 십 회 이상 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래도 승부가 나지 않는다면 피차 원고지 5매를 넘지 않는 선에서 진검승부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럼 피할 수 없는 압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욕설과 비아냥이 오갈 수 있지만 뭐 오히려 내용 전달과 의미파악에는 더 좋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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