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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미디어스] 후배의 발견

조회 수 1862 추천 수 0 2008.11.25 17:59:24

후배의 발견
[기획] 발견 2008 “내가 만난 2008년의 무엇” ④


“선임병은 하나의 정체성이다. 따라서, 만일 본인이 선임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결코 선임병은 탄생하지 않는다. 중대 왕고가 되는 그 순간까지 바로 윗고참에게 갈굼을 먹었다는 어리버리들의 전설이 전해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일병 생활을 하는 어느 순간엔가 자신이 선임병이라는 사실, 고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고참들은 그런 자각의 단계를 거친 후임은 (상대적으로) 건드리지 않는다.”

‘개념 없는’ 후임으로 갈굼먹던 시절을 돌이켜보며 상병의 어느 날 나는 이런 글을 끄적였다. 어디 군대뿐이랴. 사회에서도 어느 순간 더 이상 자신이 후배가 아니라는 사실, 챙겨야 할 후배가 있는 ‘선배’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내게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늦게 왔다. 학부제 실시 이후 대학에 들어온 나는 과에 일찍 진입하지 못하고 버벅대는 사이에 ‘계통도 족보도 없는’ 원자화된 개인으로 전락했다. 이것은 나의 특수성만은 아닌 것이, 신문기사를 보면 요즈음엔 ‘대학을 혼자 다니는’ 대학생들이 흔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2001년에 대학에 들어온 내가 이런 일을 겪었다면 나는 나름대로 시대를 앞서간(?) 셈이다. 나는 오랫동안 학교에서 ‘후배’라는 동물을 만나지 못했고, 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학교 후배만이 후배가 아니라면, ‘후배’를 만나지 못한 더 큰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2001년에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처음으로 상경했던 내가 ‘놀던 물’은 주로 사회운동과 관련이 있는 단체들이었다. (‘관련이 있는’ 이라고 퉁친 이유는 내가 ‘빡세게’ 활동하는 단체들은 피해 다녔던 뺀질뺀질 날라리였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왔을 때 대학사회의 운동권 조직, 소위 학정조(학생정치조직)는 완만하지만 뚜렷한 경향성을 보이면서 붕괴하고 있었다. 그곳에 들어갔더라면 소수의 ‘후배’는 구경할 수 있었을 테지만, 나는 “가라앉는 배에 타는 쥐는 없다”라고 읊조리며 다른 경로를 택했다. 인터넷 운동단체나 민주노동당 당원 활동을 하면서, 나는 자신이 언제나 ‘막내’라는 사실에 익숙해졌다. 19살에도 막내였지만, 22살, 23살이 되어도 막내였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너댓살 많은 ‘선배’들을 ‘친구’처럼 만드는 생존전략(?)을 택했다.

요즘도 종종 같이 술을 마시는 지인들은 대개 나보다 3~6세 가량 많다. 이들과 ‘동년배’ 의식을 불태우던 내게 ‘선배’는, 386세대 혹은 가두투쟁을 ‘빡세게’ 한 90년대 초반 학번들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미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들이었고 당연히(?!) 내게 술을 사줘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시고 택시비까지 타내면, 금토일 주말 3연전을 치르고 난 후 돈이 남아서 그 돈을 집에 쌀 떨어졌다고 불평하는 여동생에게 쥐어주는 일까지 생겼다. <88만원 세대>가 출간되고 386세대와 현재의 20대들의 긴장관계가 표면으로 드러난 지금, 나는 종종 “한국에서 386세대를 가장 잘 착취하는 20대”라고 자신을 소개하곤 한다.

2007년 8월 <88만원 세대>가 출간된 이후, “한국에서 20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조심스럽게나마 울려 퍼졌다. 그리고 가망이 없는 몇 가지 액션들이 추진되기 시작한 2008년에 이르러 나 역시 그동안 ‘운동권 선배’들과 극소수의 지인들과 술 먹는 재미에 거의 신경을 못 쓰던 우리 세대의 20대들, 내 동년배 혹은 나보다 약간 어린 젊은이들과 만나게 될 기회가 있었다. 26세에도 학부생인 내 처지는 “88만원 세대인 주제에 대학생활을 386세대처럼 한 어떤 한심한 문화지체자의 그것”이겠지만, 선후배 관계라는 문제로만 본다면 나는 이들에 비해 훨씬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 초반, 인터넷 운동의 여명기에 ‘선배’ 지식인이나 활동가들과 함께 놀 수 있는 ‘물’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가 19살이었던 내게 아주 잠깐 열렸고, 아마도 그 이후 그 문은 닫혀버렸던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언제나 막내였던 것이고, 내가 술값까지 뜯어내는 그들을 지금의 20대들은 텍스트로밖에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현상은, “어째서 운동권은 오덕 히키코모리가 되었는가?”라는 물음과도 조금은 관련이 있다. 운동권이 주류였던 시절엔 ‘조직’에 참여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머리 싸매고 공부만 하는 이들을 사회부적응자라고 놀렸겠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정반대다. 내 주변의 20대 좌파들은, 정말로 사교성이 없다. 사교성이 없어서 좌파가 된 건지 좌파질을 하다 보니까 사교성이 사라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올해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그러한 조류는 운동권 바깥에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젊은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는 거다. 내가 그들에게서 발견했던 것은 일종의 우울증이었다. 동년배에게서 공통의 화제를 찾거나 지적 자극을 받는 일을 포기한 그들은 각자의 환경에서 원자화되어 그로부터 파생되는 우울함의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그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선배들과 노는 재미에 빠져, 나 역시도 선배이기도 하다는 것, 그리고 선배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나의 불찰인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 나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이 있는지를 결코 알지 못했다. 그렇게, 이 사회의 우울함의 총량은 커져만 갔다.

2008년은 내게 그렇게 잃어버렸던 후배들을 되돌려준 해가 될 것 같다.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 말기에 심화되었던 냉소주의를 타파하고 극적인 정치의 시대로 우리를 인도했다. 여기저기서 20대를 만났고, 10대를 만났고, 술을 사줘야만 하는 처지에 굴러 떨어지는 처절한(?) 체험을 했다. 공통적인 체험이 거의 없는 이 젊은이들의 무리 안에 나 역시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서, 나 자신의 위치를 좀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반갑다 후배들아. 사랑한다 후배들아.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는 것 같아. 일단 모이긴 모였는데, 우리 이제 뭐하지? 지구를 박살낼까? ㅋㅋㅋ (미안, 이것도 님하들에겐 너무 오래된 노래가사의 일부구나.)

 


2008.11.25 22:45:48
*.254.101.152

그리고 결국 한윤형에겐 후배를 뜯어먹는 날까지 도래하게 되는데
나는 거짓말쟁이 님도 거짓말쟁이

쟁가

2008.11.28 22:53:27
*.254.121.27

제가 얼마 전 대학교 강연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한 말.
"도둑질을 해도 같이 하세요."

햅메이커

2008.12.06 12:31:23
*.125.182.119

서른에도 막내라는것 뿐,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지구를 박살....낼까요? ㅋㅋ
좋은 저녁시간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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