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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끌고 가는 민주주의

조회 수 948 추천 수 0 2007.02.26 16:15:35
 최장집 교수가 어떤 점에서 훌륭한지를 말하는 건 정치학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평론의 합당한 관심사는, 노빠들이 최장집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어냐는 거다. 이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을 듯하다. 첫째는 노빠들이 최장집의 진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성의 구조에 대한 고찰일 것이고, 둘째는 노빠들이 그들의 지도자에 대한 지지를 결코 철회하지 못하는 심리적 기제에 대한 탐구가 될 게다. 이 글에서는 첫째 문제에 대해서만 논하기로 한다.


최장집의 몇 개의 인터뷰가 문제가 되었을 때, 이택광은 나에게 황당한 심사를 토로한 적이 있다. 말인즉슨 인터넷에 올라온 최장집의 인터뷰 밑에 ‘민주주의란 그런 게 아니다.’는 식으로 최장집을 훈계하는 노빠들의 댓글이 달렸다는 건데, 도대체 그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책 한권이라도 읽고 그런 말을 하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책을 읽지 않았다면, (한국인들의 한달 평균 독서량은 0.8권이고, 그 책이 대개 어떤 것들인지는 여러분이나 나나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이택광의 가정은 정당하다고 생각되는데) 그들이 도대체 무슨 ‘깡’으로 정치학자 앞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강연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빠 수용소 서프라이즈에서 ‘지식인 전담마크맨’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동렬의 논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김동렬의 관점은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민주주의란 자전거와 같은 것이다.”가 될 게다. 자전거를 탈줄 아는 사람들은 자전거의 구조에 대한 기계론적인 설명을 듣지 않아도 자전거를 잘 탄다. 자전거 타기는 학습이 아니라 행동이다. 따라서 만일 그 사람이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이란 행동을 실행해온 ‘경험’이 있다면, 책 한권 읽지 않아도 노학자의 ‘민주주의 관’을 논박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체제의 기능이 과연 자전거에 비유될 만큼 단순한 것이냐는 것이다. 둘째 문제는 과연 노빠들이 민주적 의사결정을 실행해 왔다고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이 독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조직을 민주주의적으로 꾸리고 있는지는 명백하지 않다. 근 몇 년동안 김동렬의 글은 계속 길어지고 있는데 그의 장광설은 이렇게 명백하지 않은 가정에 근거해 있다.


민주주의를 자전거와 같은 물건에 비유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이해가 ‘절차적 민주주의’에 한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최장집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나 “민주주의의 민주화”와 같은 레토릭을 통해 교정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해다. 그러니까 김동렬 류의 비난은 애초부터 논적이 인정하지 않는 지평 위에서 논적을 옭아매려는 어설픈 시도다. 천번만번 양보해서 민주주의를 자전거 정도의 물건에 비유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해도, 과연 그들이 민주적 의사결정을 실천하고 있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한국인들은 평소 생활이 서열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대충 몇 마디 할 기회를 보장해 주고 (결코 ‘토론’이 아니다.) 다수결로 의결이 되기만 하면 감격해 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여기저기서 “이만큼 민주적인 집단을 본 일이 있습니까.”라고 감격적인 목소리로 말하는 한국 남성들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 그들이 그 감격적인 목소리로 찬양하는 집단은, 대개 몇 마디 할 기회를 보장해 주고 다수결로 의결해 버리는 정도의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었다.


노빠들의 민주주의가 겨우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된다는 것을 예증할 자료는 꽤 있다. 대개 열린우리당원으로 이루어진 참정연이 기간당원제 사수를 외치다가 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기초당원제 수용으로 애매하게 돌아섰다든지, (“ 참정연의 선택, 그리고 '유시민 효과' ”라는 글을 참조할 것)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서 표결도 없이 박수로 안건을 통과시키는 파행을 저질렀다든지(“진보주의자들이 대통령 억울함까지 헤아릴수야”라는 글의 뒷부분 참조할 것) 하는 것들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에 속한다. 그건 열린우리당 내에서의 일이고, 게다가 열린우리당이 ‘막장’이니까 벌어진 일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오히려 개헌에 찬성하는 그들의 찌라시의 내용이 그 수준의 천박함을 보여준다. 그 찌라시의 핵심적인 주장은 “개헌을 국민이 판단하게 하라.”는 것이다. 고약한 문장이다. 저 문장은 추상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직접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추상적으로 해석할 때 저 문장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천명한 것이나 아무런 내용이 없다. 국민의 대의자로 지정된 국회의원들의 판단은 국민의 판단이다. 대통령은 그 판단에 마땅히 승복해야 한다. (다른 방법도 없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해석한다면, 저 문장은 “개헌을 판단할 수 있는 건 국민투표밖에 없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이건 웃기는 소리다. 국민투표하려면 국회의원 2/3가 찬성해야 하므로, 국회의원들에게 개헌에 무조건 찬성해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것밖에 안 된다.


그렇게 국민투표 좋아한다면 한미 FTA에 대해서나 국민투표할 일이다. 개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국회의원이 아니라)의 숫자와 한미 FTA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할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려 본다면 어떨까. 대통령과 노빠들은 대개 의회를 경시하고 ‘국민’들을 직접 상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국민들이 민감한 이슈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민감한 이슈에서만 그렇게 한다. 이것은 그들의 ‘민주주의’가 굉장히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 증거는 또 있다.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보여주는 민주주의가 ‘절차적 민주주의’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수준에서만 민주주의를 논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도 않는다. 최장집의 글에서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한나라당이라서 안 되고 그런 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반발한다는 것은 그들이 ‘민주화 세력’과 ‘독재 세력’의 구분을 견지하고 전자의 세력을 지지하는 것이 ‘민주주의적’이라고 간주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오히려 여기서 무시된다. 그들은 절차를 넘어서는 ‘실체’로 민주주의를 체험한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종시 대답하지 못한다. 그들이 고작 하는 답변이라고는, 민주주의를 지적으로 정의내리는 것이 아니라 세력으로 정의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저급한 정치공학에 불과하다.


노빠들이 딱히 다른 집단보다 민주주의적이라는 근거는 없다. 그들이 자랑하는 민주주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구현되는 민주주의 수준밖에 안 되거나, 그만도 못 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자전거를 타고 간다고 믿는다.


왜 그럴까? 가령 이런 광경을 상상해 보자. 석양의 어스름 속에서, 일군의 무리들이 자전거를 끌고 가고 있다. 다같이 자전거를 끌고 붉은 태양 아래 뚝방길을 걷던 그들의 공통체험은 너무나 강렬하여, 그것을 소재로 한 아름다운(?) 수필들이 생산된다. 그들은 그 수필이 자전거에 대한 지적으로 탁월한 서술이라고 믿는다. 그 수필의 수만큼 그들은 자신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때 노교수가 페달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고 여유롭게 그들을 앞질러 나간다. 사람들은 웅성웅성한다. 그때 김동렬 자전거족(族)이 말한다. “저 이의 두발은 땅을 딛지 않는다. 저 이는 비현실적이다.” 이로써 노교수의 자전거는 현존하는 물체가 아니라 이데아 세계의 이념으로 소환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열심히 자전거를 끌고 다녔던가? 사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을 만나도 욕하지만, 자전거 없이 그냥 두 발로 걸어다니는 사람을 봐도 욕한다.


이 자전거 끌고 가는 무리의 수장은 이렇게 말한다. “저 녀석들은 ‘교조적’이다. 반면 나는 ‘유연한 폭주족’이다.” 고작 자전거 하나 끌고 다니는 주제에 폭주족을 참칭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민주주의는 ‘끌고 가는’ 민주주의다. 자전거 끌고 가는 이들이 자전거의 구조에 힘을 싣지 않고 원래 하던 것처럼 두 발에 힘을 주고 걸어다니는 것처럼, 우리는 민주주의를 끌고 간다. 자칭 현실주의자들은, “자전거 페달에 두발을 올려놓으면 넘어지고 말 것이다.”라고 윽박지른다. 한국에서 운위되는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의 논쟁이란 흔히 이런 식의 코미디로 전락한다.



노정태

2007.02.27 13:55:50
*.152.106.134

"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열심히 자전거를 끌고 다녔던가? 사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을 만나도 욕하지만, 자전거 없이 그냥 두 발로 걸어다니는 사람을 봐도 욕한다.

이 자전거 끌고 가는 무리의 수장은 이렇게 말한다. “저 녀석들은 ‘교조적’이다. 반면 나는 ‘유연한 폭주족’이다.” 고작 자전거 하나 끌고 다니는 주제에 폭주족을 참칭한다."

말투가 니체식이군. ㅎㅎ

하뉴녕

2007.02.28 15:44:40
*.148.250.72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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