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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두 개의 민주주의 -노동당과 개혁당

조회 수 1283 추천 수 0 2004.01.20 02:40:00
이건 '정당'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읽어보면 '메타-비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민주노동당도 형편없어진 지금 상황에선 시의성은 없는 글이긴 하지만, 내용은 내용대로 볼만하다. 진보누리의 아흐리만씨가 쓴 글. 이글루스 블로그에도 올렸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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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당'은 두 개의 정당을 지시할 수 있다. 하나는 유시민이 대선 직전에 만든 개혁국민정당이고, 다른 하나는 대다수의 당원들이 열린우리당에 합류하는 바람에 탄생한 잔류 개혁당이다. 나는 전자를 '개혁국민정당' 혹은 '개혁당'으로 쓰고, 후자를 말할 땐 '(소)개혁당'이라고 쓸 생각이다.


개혁국민정당은 비록 급조된 정당이지만 민주노동당과 흡사한 당내 민주주의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당내 민주주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진성당원" 역시 가지고 있었다. 개혁당이 당시 여타 보수정당들과 가졌던 차이점은 너무나 분명하여, 오늘날 "열린우리당은 민주당과 종자가 다르다."라는 유시민의 발언이나 "열린우리당은 최초의 참여정당이다."라는 노무현의 주장은 거의 농담처럼 느껴질 정도다.


기껏해야 당비 2천원을 내는 열린우리당의 진성당원 숫자는 어느 정도일까. 확실한 것은, 그들이 선관위에 제출한 자료에서도 '당비'는 정치자금의 1할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국고보조금이거나 국회의원들의 은행대출이다. 의원들이 자선사업가가 아닌 이상, 열린우리당에서 그 '대출금'을 '회수'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지 않은가? 반면 1만원 정도의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 1만여명을 확보하고 있었던 개혁당은 (개혁당은 노동당과의 경쟁의식 때문에 흔히 "3만당원"이란 구호를 내걸었으나, 3만명 모두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의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은 아니었다.) 노동당을 제외하면 정치권의 부패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정당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개혁당은 그만 못한 시스템을 가진 열린우리당에게 잡아 먹혔을까. 개혁당 구성원의 2/3 정도는 어찌하여 자당의 시스템에 우월감과 자부심을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좌파들은 "개혁당 지지자들은 처음부터 정당의 시스템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노무현 개인에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편리한(?) 대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에겐 충분할지 몰라도, 두 개로 갈라진 개혁당 지지자와 (소)개혁당 지지자에겐 전혀 충분하지 않다. 전자의 생각에, 그들이 노무현을 지지하는 이유는 결국엔 정당의 시스템을 관철하기 위해서다. (비록 우리와는 우선 순위가 다르긴 하지만) 후자의 생각에, 좌파들의 결론은 개혁당 안에서 민주주의 시스템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들에 대해서 정당한 평가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좀더 문화적으로 관찰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째서 똑같은 시스템을 가지고도 개혁당의 민주주의는 실패한 반면에, 노동당의 민주주의는 (적어도 현재까지는) 성공을 거두고 있는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정치분야에서의 민주주의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주의하고 노력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


나는 일전에 다른 글에서 노사모와 노무현 지지자의 문화가 "감정의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감정"은 한국인들이 판단을 내리는 최종 심급이라 할 만하다. 흔히 대한민국의 언론은 법논리보다 우선하는 '국민감정', 혹은 '국민정서'를 기반으로 논변을 펼친다.


극우세력이 이러한 "감정"을 정치적으로 가장 잘 활용한 것은 김대중 정권 말기에 유포되었던 소위 '심판론'으로 볼 수 있다. 김대중 정권의 부패에 대한 심판이 필요하다, 얼핏 들으면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선거라는 것이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대상을 집어내는 행위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그들은 선택지를 임의로 두 개로 축소시켜놓고, 부패를 심판하기 위해 더욱 부패한 집단에게 표를 달라고 야바위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논리가 아니라 저 먼 옛날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왕을 처형했던 부여 사회의 '감정', 혹은 '정서'다.


"감정"을 비논리적이다, 비이성적이다, 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한나라당 지지자가 '감정'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 그들이 비이성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다. 그들은 어떤 경우 이성적이며, 어떤 경우 비이성적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노무현 지지자들이 '감정'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할 때 그것이 "노무현 지지자는 비이성적이다."라는 주장의 다른 표현이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


'이성'에 대비되는 것은 '감성'이다. 반면 여기서 말하는 '감정'은, 그것들이 분화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어떤 것을 말한다. 조금 오버해서 말하면 '감정'은 신화에, 그리고 그것들의 분화물인 '감성', '영성', '이성'은 각각 예술, 종교, 철학에 비유할 수 있다. '감정'은 그 모든 것들의 혼합물이다. 그러므로 내가 노무현 지지자들이 "감정적"이라고 말할 때엔, 그들이 어떨 때엔 논리적인 이유로 노무현을 지지하고, 그들이 어떨 때엔 감성적으로 감화를 받아 노무현을 사랑하고, 그들이 어떨 때엔 거의 종교적인 정신을 노무현에게 바치는데, 이 세가지 것이 버무려져 도대체 무엇이 먼저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원시인, 원주민들의 행복한 세계에 존재했던 세계-인식 방식이다. 심리학자 융은 아프리카를 방문할 때에, 그 거대한 심리적 에너지에 압도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자아'를 무너뜨리지나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한국인들의 심성 속엔 이 거대한 심리적 에너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수입된 모든 종교를 무속신앙으로 녹여버린 이 나라의 잠재력은, 가끔 "붉은 악마"처럼 외국인들의 눈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으로 표출되곤 한다.


그런 경향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없애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지 의문이다. 한국인들은 굳이 에번게리온을 만들지 않고도 거대한 공동의 영 안에서 정서를 교감한다. 그것은 참여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행복한 경험이다. 그러나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역겨운 경험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문화가 건전하게 유지/존속되려면, 어떻게 참여자의 흥겨움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비참여자의 괴로움을 배려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감정"의 문화가 적어도 어떤 부문에서는 제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필요한 부분, 이성이 대화의 최종심급이 되어야 할 부분이며, 정치 분야 역시 마땅히 이 부분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감정"의 문화를 조금은 뒤로 밀어낸 곳에서 기능해야 한다.


윤리 교과서는 신라의 화백회의가 민주주의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가르친다. 내가 보기엔 허접한 주장이다. 화백회의가 추구하는 '만장일치'는, 정확하게 "감정의 정치"에 대응한다. 대립하던 심리적인 에너지가 응축되어 다시 하나의 영으로 수렴되기를 갈망한다.  


어디서 들은 얘기라 확실한진 모르겠는데, 유태인들의 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의결된 주장은 제도적으로 배격되었다고 한다. 유태인들의 생각에 '만장일치'는 어떤 억압적인 상황이나, 어떤 비정상적인 심리적 에너지의 합일에서나 생길 수 있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에선 이 '비정상'이야말로 바로 추구해야 할 '정상'이었다.


민주당으로부터 배격당한 노무현을 살리기 위한 지지자들의 모임으로 출발한 개혁당이, 총선을 위해 열린우리당으로 달려가기까지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이러한 '비정상', 혹은 '정상'의 화백회의를 떠올리게 된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것이 민주주의적인 문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매우 차갑고 수량적인 것이다. 그것은 심리적 에너지의 합일을 추구하지 않는다. 다만, '결정'에 '승복'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승복'하는 이유는 '납득'했기 때문이 아니다. 다음 번에는 내가 '승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때문이다. 당파 간의 내전을 전쟁터가 아닌 국회의사당에서만 치르게 하는 이 절묘한 '국가통합'의 전술은 로크의 "통치이론"에 명시되어 있다.


"감정"의 정치인들이 민주주의로부터 배운 것은 '다수결' 하나인 모양이다. 개혁당 지지자들은 '개혁당 해체'를 다수결로 '결정'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그런 것은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다수결은 집단이 유지되는 한에서만 기능한다. 집단을 떠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그냥 떠나면 되고, 남은 사람들이 당을 운용하면 된다. 그래서 선관위 역시 '개혁당 해체'를 '불법'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런 종류의 결정은 심리적 에너지의 합일이 된 상태에서나, 말하자면 만장일치의 상태에서나 나오는 것이다. 감정의 정치가 '다수결' 제도를 만나 더욱 부정적으로 틀어진 것 같아 매우 유감이다.


그렇다면 노동당의 민주주의는, 이러한 '감정의 정치'를 넘어선 곳에서 기능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한국 사회에서 최소한 정치 영역에서 그러한 집단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개혁당과 구별되는 노동당 민주주의의 비밀은 흔히 개혁당 지지자뿐 아니라 노동당 지지자조차도 자주 비난하는 사실, 바로 노동당이 "정파연합당"이라는 사실에 있다.


개개의 정파에서, 촌스러운 "감정"의 심리적 합일이 어떤 소극들을 만들어 냈는지에 대해선 몇 개의 사례가 알려져 있다. 노무현 지지자들 역시 그런 사례를 인용하며 비웃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는 것은 노동당에선 그러한 '소극'이 결코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감정"이 관철되기 위해선, 다른 "감정"과 대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감정과 감정은 소통하기 힘들다. 마징가제트와 그랜다이져가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누겠는가. 그래서 그 소통의 방식은 결국 언어적인 것, 논리적인 것이 된다. 비록 자신이 자신의 주장에 감성, 영성, 이성을 다 바치고 있다고 해도, 다른 이들에게 말할 때엔 이성적인 부분만 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연습이다. 정치적 의사결정을 위한 연습이다.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은 그 과정에서 성숙하는 것이다.


개혁당이 가질 수 없었던 경험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소)개혁당이 살아남기 바란다면 연습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와 같다. 비록 좌파들이 그러하듯 처음부터 무슨 무슨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개혁당 지지자"라는 통합성 중에서도 서로의 차이가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는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다. 차이를 드러내는 와중에서 공통점도 드러나는 것이요, 같이 당을 할 수 있는 이유도 드러나는 것이다.


노동당 역시 자신의 긍정적인 경험을 제대로 인식하고 계승할 필요가 있다. 섣부른 통합의 수사는 오히려 노동당의 맹목주의를 부추길 수 있다. "사회주의 대안정당"이란 수사가 한국 사회 내에서의 의의에도 불구하고 내 귀에 불편하게 들리는 것은, 그 수사가 갈라져 있는 노동당 지지자들의 "감정"을 통합하려는 의도를 지녔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런 수사는,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당내에서 활발한 토론이 일어나도록 하되,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제도를 훼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적 대안정당'이란 수사를 제창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NL을 제어하기 위해 그런 일을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NL을 제어하기 위해선 그런 수사가 아니라 종파사건이나 제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의 결론은 결국 저 유명한 격언(?)을 뒤집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지 않을까.


"보수는 부패로 흥하고, 진보는 분열로 흥한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진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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