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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 님의 허수아비 논증에 대해.

조회 수 1536 추천 수 0 2003.07.25 13:52:00
이건 무슨 '사투' 대자보도 아니고.... 진보누리의 아흐리만. 서프라이즈에 올라온 노혜경 시인의 "계급의식과 정치적 바리사이즘(1)"을 비판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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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 님의 허수아비 논증에 대해.


다시 내가 자꾸 노혜경 님을 문제삼는 이유를 확실히 하고 지나가야겠다. (나는 불필요한 오해를 사기 싫어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이런 얘기까지 하는 것이다. 대개의 비판자는 이런 얘기 없이 바로 비판으로 들어가도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어떤 구체적인 정치적 문제에 대해 노혜경 님과 토론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노무현 지지자들이 가지는 고도의 동질성은 정치적 견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좀 다른 것이다. 내겐 그걸 설명할 용어가 없으니, 일단 그저 '동질성'이라 부르겠다.


강준만, 유시민, 그리고 서프라이즈 논객들이 아무리 글을 많이 쓰더라도 그들의 글은 노무현의 노선에 대한 정당화일 뿐이다. 그러나 노혜경 님의 글에서 드러나는 사상은 바로 그 '동질성' 자체에 대한 개념화 작업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개념은 노무현 지지자들이 자신들의 '동질성'을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데 나는 그 '동질성'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다. 그래서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선 먼저 노혜경 님이 그 '동질성' 위에 씌워놓은 포장지를 들춰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내 글의 이유다.


"이러한 시도 안에 깔려있는 심적 특성을 나는 계급이분법에 입각한 정치적 바리사이즘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바리사이즘, 진리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율법의 목록으로 외화시킨 다음 조금이라도 그것에 대해 위배되면 가차없이 죄인으로 규정하는 저 "의인들"의 폭력은 종교적 상황에서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바리사이즘. 이것이 노혜경 님이 자신들의 논적들에게 붙인 칭호다. 계급이분법적 관점은 이미 현대사회를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으므로, 이것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은 매우 손쉬운 일이면서, 또한 적절하지 않은 일이라는 얘기 같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이번 논쟁의 맥락을 떠나 생각한다면 노혜경 님의 얘기에 거진 다 동의한다. 예를 들면 이런 얘기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점점 극심해지는 2:8적 경제구조를 깨뜨리기 위한 충격요법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지닌 효용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 없이 동의한다."

사회주의적 세계관에는 그다지 동의하지 못하지만, 이 세계관이 파생시킨 정책적 수단들이 분배불평등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선 어느 정도의 효용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사실 이는 내 입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노혜경 님이 정치적 바리사이즘을 설명하고, 본인이 그것에 벗어난 어떤 입장임을 설명하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어째서 진중권을 포함한 자신의 논적들이 바로 그 정치적 바리사이인들인지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도 없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희한한 글쓰기가 아닌가?


"다섯 번째로 이 논쟁이 무모하고 불필요한 이유는, 진중권씨가 스스로 옹호하고자 하는 계급적 세계관에 과연 진씨 자신이 동의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다."


노혜경 님의 말이다. 이 말에 따른다면, 그녀는 진중권이 "정치적 바리사이즘"의 신봉자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기에 "정치적 바리사이즘"적 행태로 자신을 비판해오니 진정성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가장 큰 문제는 진중권의 비판이 "정치적 바리사이즘", 비유를 벗어나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계급 이분법적 패러다임에 근거한 비판이냐다.


노혜경 님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전혀 검토를 해주시지 않으니, 내가 한번 복기해보겠다.


첫째, "달동네" 사건이나 "대통령에게 힘을 몰아주자" 사건에 대하여 나는 그것이 진중권 씨의 오독으로 인해 비롯되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독을 넘어 진중권 씨의 의도를 본다면, 그 의도가 계급 이분법적 패러다임에 근거했다고는 볼 수 없다.

노혜경 님의 발언이 정말로 '민주노동당은 달동네에나 가라'라든지, '파병을 반대하여 파병에 찬성하는 대통령에게 힘을 몰아주자'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계급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벗어난 입장에서도 얼마든지 비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혜경 님이 '민주노동당은 달동네에 가야 하는게 아니냐'고 말했다면, 노혜경 님이야 말로 계급적인 패러다임에 의거해 말을 한 것이 아닌가. 물론 민주노동당측 논자들이 그렇게 말하기에 그렇게 실천하라고 말했겠지만 말이다. 여하간 이 문제에 있어 계급 이분법적 패러다임이 끼어들 소지는 없는 것 같다.


둘째, 노혜경 님이 다른 사례를 제시하지 않았으므로 이번 희망돼지 논쟁으로 들어가 보자. 희망돼지 비판은 계급이분법적 패러다임에 근거하는가?

얼핏 보기엔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서민의 돈과 기업의 돈을 구별하는 것이 이 비판의 주요 논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급을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층이 있다. 계층은 노혜경 님이 말한 20 : 80 사회의 문제의식과 상통한다. 이 층위에서, 민주당은 서민과 중산층의 정당이라고 말했고, 그리고 선거 역시 (물론 이번 선거 뿐이지만) 그들의 힘으로 치르는 것처럼 선전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지 않느냐. 이 상징은 과도한 것이었으며, 진실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냐. 라고 묻는 것이 과연 계급 이분법적 패러다임에 근거한 것일까?

노혜경 님은 기업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인에게 지원금을 내면 안 되느냐고 반문한다. 물론 안 될 리 없다. 단지 기업가의 돈을 받는다 해서 비판하는 것은 "계급 이분법적" 패러다임에서 나온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비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이 과연 '기업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인에게 지원금을 내'는 현실일까? 물론 노사모 일부 회원은 그랬을 수도 있다. 지난번에 내가 활동한 깨손에서도 일부 중소기업가들이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기업가가 참여했다고 노사모나 깨손을 비판한다면 나는 그의 낡아빠진 패러다임을 비판할 것이다. 하지만 전체 대선자금이란 맥락에서, 도대체 그런 기업가들의 숫자나 그들이 낸 성금의 액수가 유의미하다고 보시는가? 노혜경 님이야 말로 담론의 새로움을 추구하느라 자신이 발딛고 있는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노무현의 대선자금의 대다수가 기업의 돈이 아니었냐는 비판에서, 어찌 '기업의 돈을 받으면 안돼느냐.'라는 식의 반응이 나오는 지를. 그 돈은 기업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돈이 아니라 한국 정치구조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돈이다. 노무현이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저 한나라당과 같은 부분은 같다고 말하고 지나가면 되는 일이다. 새로운 공동체는 그러한 인정 위에서도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번 사태에 대한 유시민의 해법을 들어보자. 정치자금법 상향 제한을 없애자고 하지 않는가? 이야말로 돈 많이 끌어올 수 있는 능력있는 놈이 이기는 선거를 만들겠다는 얘기가 아닐까? 이는 계급 문제이기 이전에 20 대 80 사회의 문제이며, 계층의 문제가 아닐까? 그런데 이런 지점에 대한 비판들이 어째서 "계급 이분법적" 패러다임으로 치부되어야 하는 걸까?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다---계급의식없음이라는 유령이.

이 유령의 입장은 더 난감하다. 아직도 강고하게 사회문화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정치권력의 겨우 일부를 빼앗겼을 뿐인 수구집단으로부터는 계급투쟁을 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동시에 진보를 독점하고자 하는 집단으로부터는 몰계급적이란 비난을 받아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공공연하게 자신의 견해와 자신의 목적과 자신의 지향을 표명하여 계급의식없음의 외피를 섬세하게 구분하여 다양화시킬 시기와 여건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이제 겨우 싹을 틔우고 있을 뿐이라는 역사적 현실이 이 유령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좋은 것은 죽지 않는다는 종교적 확신에 기대어 이 유령의 모습을 드러내어야 할 것인가."


쓸데없는 걱정이신 듯 하다. 실은 노혜경 님이 그 유령의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에, 그 유령은 진보누리에서 이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진보누리 초창기에 이강토 님은 '계급이 아닌 계층'이라는 식의 주장을 하여 많은 이와 논쟁을 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데, 동시에 노무현 정권의 비판자다. 진중권 님은 수군작 등 계급 투쟁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과 깨손 시절부터 수없이 싸워 왔다. 노혜경 님이 그런 맥락들을 모른다는 건 문제가 아니겠거니와, 자신이 대단한 발견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일종의 공주병이 아닐는지.


"교도소 마당에 아리아 [피가로의 결혼]이 울려퍼질 때 죄수들의 얼굴에 피어오르던 천상의 평화로움이었다. 이 천상의 기억이 마음 속에 있는 한, 인간은 밑바닥까지 잔인해지기 전에 스스로를 추스려 다시 인간에 대한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음악이 부즈주아지적 감성을 지닌 모차르트의 것이라서 주로 하층민들로 구성된 죄수들에게 들려주면 안되는가? 그래서 나는 계급의 적이 되는가?"

이 얘기, 수군작에게 신경질 내면서 진중권이 쓴 쪽글을 연상시킨다. "그럼 부르주아 물리학도 있니? 프롤레타리아 수학도 있니?" 게다가 진중권의 말에 의하면 레닌조차 부르주아 예술은 보편성을 지니며, 이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속류 유물론자'라 칭했다 한다. 노혜경 님이 지금 얼마나 낡아빠진 틀로 자신을 방어하는 지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여기서 계층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계급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노무현 지지자들의 대다수가, '좌파 이론에 막혀 계급담론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민주노동당 사람들' vs '더 유연하고 현실적으로 개별적인 사안에 대처하는 우리들'이란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한심해서 하는 말이다. 좌파들이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 논쟁을 걸어도 이들이 피해가면서 하는 소리는 '너희는 계급 담론에 빠져 있으니까'다. 나는 이런 사례 수없이 많이 접했다. 얼마나 황당한 얘긴가?


물론 민주노동당측에 부적절한 글을 쓰는 논객들이 없을리 없다. 하지만 그리 따지면 노무현측도 마찬가지 아닌가. 허수아비 논증을 통해 상대방을 '선의는 가지고 있지만, 멍청한 녀석들..'로 치부하는 동안 노무현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정녕 모르는 모양이다.


"나는 우리모두/노사모/개혁당에서 다시 노사모/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긴 공동체적 작업으로부터 분명 새롭고 힘찬 흐름을 감지하고 또 그 흐름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흐름은 제각기의 방법론으로 궁극적으로는 공동선을 향하여 나아가는 새로운 엑소더스이다."

좌파들의 '조직'과는 다른 어떤 공동체, 노혜경 님은 이것을 염원한다는 것은 잘 알겠다. 그런데 조직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대안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좌파 안에서도 쌔고 쌨다. 나는 노혜경 님이 열거하신 조직들보단 차라리 10대들이 만든 연예인 팬클럽에서 더 큰 희망을 보는 중이다. 노혜경 님 역시 일전에 '노사모는 HOT 팬클럽을 본땄다.'고 자랑삼아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그 희망은 사실 그렇게 애지중지할 만큼 희소한 희망도 아니다. 대한민국에 연예인 팬클럽이 몇 개인가? 또한 인터넷의 소모임은 몇 개인가?  


다른 건 잘 모르겠고 개혁당 문제만 짚고 넘어가보자. 어디서 들어보니 개혁당의 당원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심지어 8천명 수준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썰'도 나온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나갔다는 얘기다. 아무래도 공동체의 기본은 민주주의다. 대화, 합의, 토론의 방법론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동의하지 않는 반수 가량의 사람이 탈퇴하는 조직이라면, 과연 그 조직이 대화, 합의, 토론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노혜경 님은 '나간 사람들은 다 구세대적 조직관을 가진 운동권들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생각이 든다. 하긴 개혁당에 민주노동당보다 운동권이 훨씬 많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선 과연 운동권이 없을까?


나는 노혜경 님이 말하는 새로운 공동체와, 일상정치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국민의 힘은 생활정치 네트워크를 칭하나, 그 단체가 내가 생각하는 생활정치에 대한 활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일상정치, 생활정치라 함은 일상을 민주당과 한나라당을 패권다툼에 종속시키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일상에 가지는 고충을 정치적 요구로 전환하는 건전한 시스템을 의미할 것이다. 나는 그러한 생활 정치의 건전성은 민주노동당 전종덕 시의원이 행했던 급식개선안에 대한 주민투표 성취와 같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이런 지점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주지 않고 그저 세계관을 피력하기만 하는 노혜경 님이야말로, 현실에 맞닿아 있지 않은 어떤 관념의 유희를 벌이는 중이 아닐까?

아흐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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