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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말] “꼬마 조선일보"를 경계하라

조회 수 1619 추천 수 0 2002.10.30 19:32:00
말 그대로 월간말지에 기고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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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조선일보"를 경계하라


제 16대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올해 초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번 대선이 이른바 "쌍이(雙李) 대세론"의 대결장이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거대 정당의 오랜 안정이 낳은 오만은 당내 비주류의 도전과 충돌했고, 그 결과물 중 하나인 민주당 국민경선은 노풍(盧風)이라는 태풍을 불러일으켜 대세론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그 노풍마저 오래가지 못하고 사그러들자, 과거와 마찬가지로 선거에 임박해서야 대결지형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가변적인 상황이 만들어졌다. 조금 여유있는 쪽에서는 결국 2자구도로 몰렸던 과거를 상기하며 "2등" 안에 들기 위해 세력게임을 하고 있고, 여유없는 쪽에서는 2등 안에 못 들어도 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강변한다. 사실 어느 쪽이나 지금 진짜 "여유"가 있을 리는 없다.  


여유가 없다보니 무리가 생기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여유가 없는 사람들"의 범위다. 신문을 펼치면 대한민국은 마치 "전국민 대선총력전" 체제에 편입된 것 같다. 사설은 상황과 내용에 상관없이 누군가를 비판할 때에 "대선을 겨냥한 것 아니냐"고 말한다. 신문이 얼마나 "대선을 겨냥"하고 있었으면! "정권 말기"를 말한다. "정권 말기"란 사실이 얼마나 신경이 쓰였으면!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와 비교해보면, 이는 분명 문제가 있는 현상이다.  


조선일보와 한겨례는 동전의 양면

이러한 편향성은 언론의 정치지향점과는 상관없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조선일보 사설은 이회창 후보의 20만달러 수수의혹을 제기한 민주당 설훈 의원이 "카더라" 뒤에 숨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병풍 시나리오" 문건에 대해서는 "일이 터질 때마다 매번 부인부터 해놓고 보는 그간의 전례로 미루어...."라며, "괴문서일 뿐"이라는 민주당의 해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매번 문건이 흘러나온 이후 정쟁만 격화되다가 진위여부는 유야무야되어 온 그간의 전례로 미루어 보면, 조선일보의 주장을 선의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은 별도로 병역비리 문제를 언급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반면 한겨레 사설은 지속적으로 병역비리 "의혹"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하지만 4억달러 대북지원설 "의혹"을 검증하는 데에는 끊임없이 산업은행을 물고 늘어지는 조선일보의 정성을 따라가지 못한다. 오히려 의혹을 검증하려는 세력들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다. "한나라당이 의혹 상태에 불과한 주장을 제기하면, 수구언론들은 의혹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남북화해 무드에 찬물을 끼얹는다." 물론 그런 면이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의혹 규명을 정치 문제로 환원시키면, 한겨레나 오마이뉴스의 지속적인 병역비리 특집 역시 "이회창 대세론"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해야 할 것이다. 4억달러 대북지원설의 문제의 쟁점은 "화해냐, 냉전이냐"가 아니라 뒷거래다. 뒷거래를 캐는 이들에게 "냉전시대가 그리운 세력들"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일이다.  


언론이 이럴 정도니 정치에 관심있는 일반인들의 분석이 온전할 리가 없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보이는 네티즌들의 편향성은 조선일보나 한겨레보다 훨씬 노골적이다. 어떤 한나라당 지지자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실형선고를 김대중 정권의 더러움을 이유로 면죄시키고, 어떤 노사모 회원은 장상 장대환 두 총리서리의 비리를 더 죄질이 나쁜 이회창 후보의 병역비리를 이유로 용서한다. 정치분석은 문제를 문제로 바라보는게 아니라, 원시적인 힘과 힘의 대결장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이 대결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쪽이든 편을 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이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정치인들이 "대선을 겨냥"해 행동하는게 사실이고, 온갖 세력들이 "정권말기"를 맞아 살 궁리를 찾아 헤매는 게 사실인데, 어찌 그것을 무시할 수 있느냐고 주장할 수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힘의 원리를 인지하는 것과, 힘의 원리대로 행동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검은 색도 흰색도 아닌

잠시 시간을 거슬러 언론사 세무조사를 돌이켜보자. 당시 조중동은 이것을 "타락한 정권의 언론길들이기"로 규정했다.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적 의도에 대해 분석을 해야 하는가? 분석을 하려 한다면 할 수 있다. 정권 초엔 계획도 없던 세무조사가 느닷없이 시행되었다는 사실은 정치적 의도를 짐작케 한다. 물론 선의적으로 해석하면 언론운동의 저변확대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더 캐묻게 되면 세무조사를 건의한 청와대 보좌관들의 성향을 문제삼게 된다. 그 사람이 개혁에 대한 소신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충성스런 가신이었는지에 따라 순수성의 밀도가 차이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조중동이 검증하고픈 것은 이런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역사의 평가는 이런 식으로 내려지지 않으며, 내려져서도 안된다. 간단히 말해서, 언론사 세무조사는 공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치적으로 인정된다.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조차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이를 갈면서 "앞으로 정권에 언론이 휘둘리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고 부르짖었다. 그러므로 세무조사에 대한 비판의 지점은 "의도"가 아니라 "수행과정"에서 발생한다. 만약 유달리 조중동에게만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가혹한 세무조사였다면 그들은 그 사실을 근거로 삼아 세무조사의 부당함을 주장할 수 있다.  


문제는 이처럼 대개 힘과 힘의 충돌, 세력싸움의 문제와는 다른 층위에서 분석된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해야하는 부분이다. 이 토대 위에서 자신의 입장에 따라 여러 길을 가면 된다.


그런데 이 부분은 우리 사회가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부분이다. 세무조사 정국에서 한겨레는 조중동에 맞서기 위해 조중동의 그릇된 역사를 특집기사로 내보냈다. 물론 그간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조중동의 과거 행태를 기록하는 것은 충분히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그것이 세무조사 정국에서 조선 중앙 동아의 행태에 진정으로 "맞서는" 행위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 반대편에는 세무조사가 끝난 후 안정남 국세청장의 비리를 정조준하여 그를 기어이 낙마시키고 마는 조선일보가 서 있다.  


흰색은 검은색의 반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흰색과 검은색은 모든 점에서 일치하고 단지 하나의 기준에서만 반대편에 있을 뿐이다. "조선일보적"(그것이 “조선일보”로 특칭될 수 있는 지도 최근엔 의심스럽지만)인 사고방식을 깨뜨리려면, 검은색의 반대편인 흰색으로 나아갈게 아니라 먼셀 색상표 자체를 찢어버려야 한다.  


문제는 상식이다

색상표를 찢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조선일보를 가장 효과적으로 옹호하는 논리를 생각해 보자. "조선일보가 이회창을 옹호하긴 하지...하지만 한겨레도 노무현을 지지하잖아?" 이 논리를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 이른바 안티조선 운동은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조선일보가 옹호하는 이념은 똘레랑스를 베풀 수 없는 극우이념이라는 것. 둘, 지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 지지를 풀어내는 방식이 왜곡이라는게 문제라는 것.


첫째 대답은 극우 헤게모니를 타파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문제, 둘째 대답은 최소한의 룰을 지키자는 상식적인 문제를 말한다. 두 가지 모두 보편적이지만 두 번째가 더욱 보편적인 대답이 될 것이다. 극우파는 현대 시민사회의 상식을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배격된다고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시 정치적 입장을 넘어서는 공통지반, 상식의 문제로 귀결된다.  


대선정국에서 진보와 개혁이 실현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의사소통 구조를 만드는 데에 힘써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심지어 조선일보를 비판하려고 해도 기준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공통지반이 없으면 토론이 불가능하다. 한국 사회의 큰 문제는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은 각종 정치쟁점에서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을 거의 찾아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우리는 다른 나라를 살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 지지자, 민주당 지지자, 개혁국민정당 지지자, 민주노동당 지지자, 반 파시스트 전선을 외치는 일부 NL들, 그리고 사회당 지지자의 텍스트는 대개 처음부터 화해불가능한 전제조건을 놓고 시작한다. 이들이 제각기 의회정치의 한축을 이루려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출발점부터 다른 두 사람의 말은 나란히 평행선을 그린다.


그러나 토론이 사라진 곳에는 다수결밖에 남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이 맹위를 떨치는 이유가 아닐까?  


기준을 만들려면 “반칙”을 잘라내야 한다. 안티조선 운동이 조선일보의 “왜곡보도”를 찾아내가며 성장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원활한 의사소통구조를 위한 상식적 공통지반”을 만들어가려면, 진보 세력과 개혁 세력의 “반칙”을 먼저 지적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작은 차이를 가진 사람들끼리 상호비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정치적 입장에 동의한다는 이유로 자잘한 잘못을 묻어두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손해가 된다. “반칙”과 “반칙”이 싸우면, 결국 덩치크고 힘좋은 놈이 이기게 되어 있다. 원칙이 아닌 꼼수로 다수자들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자.  


상식적 공통지반을 만들자

그러나 그 비판은 이전처럼 상대방의 세계관을 말끔히 덮어버리고 그 위에 자신의 세계관을 줄줄이 읊는 행위가 되서는 안 된다. 홍세화는 한 칼럼을 통해 “특히 상대방을 간단히 ‘개량주의자’니, ‘비판적 지지자’니 하면서 마음대로 규정하는 나쁜 버릇을 없애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선 ‘…주의자’라고 규정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에 대해선 ‘…주의자’라고 아주 쉽게 규정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새겨들을 만한 말이다. 문제는 “주의”가 아니라, 논거다. 그런데 홍세화의 충고는 역으로도 성립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일부 노무현 지지자들은 진보세력에 대해 “이상”, “비현실” “관념” 등의 딱지를 함부로 붙이는 언어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딱지들은 되도록 글의 결론에서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 비판을 할 때 공통지반이나 긍정적인 것은 슬쩍 생략하고 차이점만을 부각하는 것도 공정한 태도는 아니다.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에 얼마 전 실린 개혁국민정당에 관한 기사, [‘노무현 상병 구하기’ 정당 버전]은 개혁국민정당에 대해 적절하고 현실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국민정당의 의의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형평성에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면 개혁국민정당의 긍정성은 다 숙지하고 있으리라고 판단한 걸까.


특히 "노무현 친위세력의 '노무현 옹립 작전'에 다름없고 민주당의 신당창당 과정에서 노무현을 중심으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사전행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상현 대변인의 평가는 지나치게 당파적이라는 느낌이다. 더불어 진보정치의 기사를 언급하며 섭섭함을 표시한 유시민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평가 역시 신중한 것 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유시민은 민주노동당의 강령이 2차대전 이전의 것이라 비판하는데, 민주노동당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민주노동당의 문제는 조직과 사고방식이다. 오히려 강령은 서구의 사례를 중구난방으로 수집한 덕분에 노무현과 개혁국민정당 쪽에서도 좋은 참고자료가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사소한 지점부터 서로 지적해주면서 인식의 공통접점을 서서히 넓혀 나가야 하지 않을까.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토론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말은 대선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선의 의미 역시 토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지향에 따라 대선의 의미가 다르고, 특히 그 다름이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되는 상황에서 진보와 개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이를 계속해서 방치하면 우리는 비이성적으로 지지세력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많은 “꼬마 조선일보”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정치적 입장을 넘어선 안티조선 운동이 성공하고, 다양한 개혁세력이 존재하게 된 지금이야말로 토론을 통해 토론을 위한 상식적 공통지반을 만들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이번 대선은 이를 실행해야할 장(場)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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