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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어떤 포스트 구조주의자에게

조회 수 1270 추천 수 0 2007.09.21 18:47:02
 

'레비나스'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의 글 


진중권 선생님께


디워에 관련해서 진중권 선생님은 이를 너무 가볍게 다루고 있는것 같습니다. 또한 여기 계시는 몇몇 분들도 디빠?들의 출현을 너무나 쉽게 파시즘의 전조로 이야기하고 있지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이들의 출현은 시대를 나타내는 극단적 표면이며 포스트모던의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진중권 선생님의 결말은 여전히 네그리 다중입니다.


진중권 선생님은 주체들에게 서로의 공간을 침해하지 않는 그런 곳을 원하시나 봅니다. 그렇지만 현대 철학의 극단은 우리가 언어로서 말을 하는 순간 타자의 공간을, 시선을 두는 순간 타자를 침략할 수 밖에 없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매끄러운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세상을 보는 눈은 기본적으로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중권 선생님의 비판도 그 자체로 타인의 영역을 침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진중권 선생님이 애매한 위치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재적으로 우리는 분열되어 있고 그 분열은 서로를 침입하는 하에서 상징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감출 수 없는 진실은 디빠들이 파시즘같다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는 순간 이미 진중권 선생님께서 비판하는 그 주체로 다가설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스피노자에게 다중은 애매하나는 슬라보예 지젝의 주장은 어떻습니까?


다중은 스피노자에게 양면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파시스트일 수 있고 아닐 수 있다는 거지요. 진중권 선생님은 이를 단순히 순화 시켜서 다중론을 내세우지만 그런면은 솔직히 말해서 너무 보수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상징계 내에 분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진중권 선생님의 비판은 기실 그 자신의 논리와는 다르게 매우 보수적입니다. 그래서 비판받아야하는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내가 진중권 선생님의 말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비판은 날카롭지만 저들의 환상과 이데올로기를 횡단하지 못합니다. 진중권 선생님의 해결책과 주장은 그와 같은 논리로 비판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컨데 디빠들이 똘레랑스를 들면서 국가주의든 파시즘이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했을때, 또는 폭력을 담보하지 않는 방식으로 파시즘을 지키려고 했을때 진중권 선생님의 주장은 무효가 됩니다.


진중권 선생님은 파시즘 비판에 아무런 적실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외려 진중권 선생님은 파시즘을 방조하고 계신 겁니다. 진중권 선생님은 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너희들의 환상을 유지해라. 단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그러므로 진중권 선생님의 날카로운 칼날은 순식간에 타인에 대한 도덕론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또한 여전히 그들은 환상을 스크린에 상영을 할 것입니다.


진중권 선생님은 파시즘 비판에 아무런 적실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외려 진중권 선생님은 파시즘을 방조하고 계신 겁니다. 진중권 선생님은 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너희들의 환상을 유지해라. 단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그러므로 진중권 선생님의 날카로운 칼날은 순식간에 타인에 대한 도덕론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또한 여전히 그들은 환상을 스크린에 상영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중이지 않은게 아니라 이미 다중입니다. 다중이지만 그 분열점을 감추기 위해 무엇이 되어있을 뿐입니다. 무의식으로 인해 구조화 되었던 자아처럼 말입니다. 자본주의가 계급과 잉여를 감추는 하에서 유지되듯이. 그러므로 환상의 윤리학은 단지 서로의 전선을 확인하는데서 머무를게 아니라 이미 우리가 그러한 것을 인정하고 승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진중권 선생님의 모든 포지션은 명백하게 가식적입니다.


진중권 선생님께 저는 구좌파를 더 나아가 계급론을 껴안길 바라고 있습니다. 합리론, 똘레랑스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이지 계몽주의를 거치지 못한 한국만의 상황은 결코 아닙니다. 영국에서 차도르 금지는 어떻습니까? 프랑스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억압은.. 이런 상황은 똘레랑스가 아닌듯 보이지만 똘레랑스의 결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타성의 윤리라고 하는 똘레랑스는 명백히 기독교의 윤리와 닮아 있습니다. 즉 내 이웃을 내 몸과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식 윤리인데, 이것의 문제는 이웃이 내 모습과 같을때만 사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반대로 말해 이웃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향락을 누리거나 어떤 짓을 했을때 내 공간을 친입한듯이 느껴졌을때 무효화된다는 거지요.


우리가 자존감을 느끼거나 주체로 느끼는 것은 하나의 판타지에 속합니다. 반대로 우리의 공간이라는 것에 침입을 당했다는 것도 기실 판타지에 속하지요. 그러므로 얼마든지 우리는 똘레랑스하에서도 정당함이란 이유로 불법침입을 정당화 할 수 있을겁니다. 그것 자체가 주체성을 느끼는 현실감을 유지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진중권 선생님의 주체는 여전히 파시스트에 가까울 겁니다.


저는 그러므로 디빠들에게 명백하게 뒤틀린 진중권적 주체라고 주장합니다. 디빠들이 삼켰던 포스트모던(모든 권위가 사라진 시대)에서의 권위는 주체로의 탄생을 위한 그들의 몸부림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즈음에서 선생님의 합리론이 오이디푸스와 닮아있다고 주장하는게 어떨지요. 즉 아이가 주체로 탄생하기 위해서 받아들여야했던 법, 언어말입니다. 그러므로 현 세대의 보수화도 사실 이런 흐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여전히 주체들에게 결핍을 상정하고 언어와 법을(합리성) 삼키라고 강요하고 있는 겁니다. 황우석-심형래-이명박으로 이어지는 귄위에 대한 열광은 불안한 주체들이 느껴야알 어떤 만족감을 주지요. 우리는 이들에게 횡단의 조건을 귀뜸해 줄 수 있습니다. 선생님.


합리성이라는 무시무시한 남근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결핍된게 아니라는 것. 우리는 이미 다중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후의 주체. 디워가 아무것도 아님을 승인한 후의 주체는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한 후에 할 수 있었던 철학적 혁명처럼, 명백히 다른 주체가 탄생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레디앙에도 게재된 진중권의 문예중앙 원고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7686 에 달린 리플이다. 리플이 길게 안 달리는 모양이다. 위 글의 한 문단이 리플 하나씩이다. 물론 시간역순으로 거꾸로 정렬해 있었지만, 보기 좋게 다시 편집하니 위에서 보듯 한편의 글이 나온다.



1.

먼저 말해야 할 것. 레비나스는 변희재나 김휘영보다는 훨씬, 비교할 수 없을만큼 똑똑하다. 변이나 김은 사이트 장사나 진중권에 대한 콤플렉스, 혹은 증오를 분출하기 위해 글을 쓸 뿐이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진지하다. 또 변이나 김의 텍스트가 개념어와 상식 수준의 편견이 짬뽕된 것에 불과하다면, 레비나스의 견해나 용어 사용은 나름의 일관성과 정합성이 있다. 말하자면 적어도 그는 책에 근거해서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변이나 김은 그것도 안 되는 친구들이고. 레비나스는 포스트-구조주의 좌파의 포지션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문제는 레비나스의 글이 진지하게, 그것도 현학적으로 ‘놀고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구별했듯이, 모든 글은 일하고 있거나 놀고 있다. 그리고 그의 글은 분명 놀고 있다. 포스트-구조주의 좌파로서의 그의 포지션은 지젝의 언어에 크게 영향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별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이순간 한국 땅에서 포스트 구조주의 좌파를 하려면 제일 찾아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것이 지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는 변희재나 김휘영 따위보다는 이십배쯤 부지런하지만, 그 이상으로 부지런하지는 않은 것이다. 지젝밖에 안 읽었다고 해서 그가 폄하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나도 읽은 텍스트만 두고 본다면 그보다 더 부지런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는 포스트-구조주의가 다른 사조와 어떤 식으로 투쟁을 벌이고 있는지에 대해서 별다른 성찰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언어만 받아들여 사태를 재단하는 것이고, 결국 글을 ‘놀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3.

한국 사회의 비합리성은 서구적 합리성의 이면이며, 그림자이며, 배설물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근대적 이성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이 한국인들의 비합리성에게 합리성을 요구하는 ‘기획’을 반대하지는 못한다. 영국이 차도르를 금지하든, 프랑스가 외국인 노동자를 억압하든, 그런 나라들에선 황우석이나 심형래와 같은 사기꾼이 나타났을 때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지는 않는다. 진중권은 지금 서구적 근대성 전체를 조망하는 철학자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이런 일 안 생기게 하려면 저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레비나스의 발화는 ‘진중권 선생님’이라는 개인을 향할 수가 없다. 양자는 다른 층위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고 따라서 대화의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논문을 쓰든, 자기 블로그에서 글을 쓰든) 전 문명에 대해서 발언하거나 전 인류를 향해서 발언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역할은, 되도록 전문적인 철학자들에게 맡기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4.

포스트-구조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는 “진중권 선생님의 비판은 기실 그 자신의 논리와는 다르게 매우 보수적입니다. 그래서 비판받아야하는건 아니지만 말입니다.”는 레비나스의 말이 정답이다. 포스트-구조주의는 진중권을 보수적이라고는 말할 수 있어도, 그 사실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레비나스 글의 후반부는 자신이 등대로 삼은 사조를 이탈한다. “진중권 선생님의 주장은 무효가 됩니다.” “그런면에서 진중권 선생님의 모든 포지션은 명백하게 가식적입니다.” “저는 그러므로 디빠들에게 명백하게 뒤틀린 진중권적 주체라고 주장합니다.” 다 틀렸다. 지젝의 입장에서 진중권이 ‘환상을 횡단’하는 차원에 이르지 못했다고 해도, 그가 강요하는 윤리의 효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발짝 더 물러나 그의 단어사용을 인용한다면, 진중권의 포지션은 가식적일지라도, 효력을 지닌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 ‘진리는 오인을 통해 구성된다.’는 헤겔의 말이 인용된 건 못 보았던가?


주체가 가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가상의 규제는 나름의 효과를 지닌다. 지젝은 칸트나 헤겔을 뒤집어 읽으면서 결국 그런 말을 하고 있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결국 ‘진리’를 ‘오인’으로 단어만 바꾸었지 그 효과는 부정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칸트의 윤리학은 그것이 사드의 것과 같은 욕망에 기초했다고 분석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런 윤리학이 쓸모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5.

4번 논의에 입각한 구체적인 실례 하나.

“내가 진중권 선생님의 말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비판은 날카롭지만 저들의 환상과 이데올로기를 횡단하지 못합니다. 진중권 선생님의 해결책과 주장은 그와 같은 논리로 비판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컨데 디빠들이 똘레랑스를 들면서 국가주의든 파시즘이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했을때, 또는 폭력을 담보하지 않는 방식으로 파시즘을 지키려고 했을때 진중권 선생님의 주장은 무효가 됩니다.”
무효 안 된다. 앵똘레랑스 세력에겐 똘레랑스할 수 없다고 똘레랑스 전파자 홍세화가 말했고, 그 얘긴 서구 정치학계의 견해를 대변한다. 물론 이 견해를 자세히 뜯어보면 일관성이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무효가 되는 건 ‘자유주의의 일관성’이지 파시즘 억제의 효과가 아니다. 라캉은 일관성 있는 담론이란 존재할 수 없고 사실 그 담론의 비일관성이야말로 담론의 중핵이며, 실재가 틈입한 흔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모든 담론에 걸쳐서 나타나는 일. 여기서 레비나스는 자유주의의 비일관성을 공격하면서 무슨 자신이 이 상징계의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이나 있는 것처럼 까불고 있다. 용가리 통뼈인가? 


6.

진짜 포스트-구조주의자라면, 진중권은 진중권 하는 대로 냅둬야 한다. 그리고 레비나스 본인이 가능하다면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심빠들의 난동을 비판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이들에게 횡단의 조건을 귀뜸해 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궁금하다. “명백히 다른 주체가 탄생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어떻게 탄생시키겠다는 것인지가 매우 궁금하다. 그런데 그의 글엔 정작 중요한 이런 내용들에 대한 얘기는 빠져 있다. 대신 그가 하고 싶은 말들은 이런 얘기다. “네그리는 틀렸고, 지젝은 옳다.” “진중권은 틀렸고, 레비나스는 옳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것인지?


7.

지젝의 모든 글들은 모종의 행위다. 그래서 지젝의 글이 재미있는 것이다. 나는 지젝이 대상 a를 어느 사물에나 지정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분석은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다는 어느 일본 평론가의 지적이 꽤나 그럴 듯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젝의 글이 재미있는 건, 그가 취하는 구체적인 정치적 포지션 때문이다. 지젝이 한국인이었다면 먼저 자신이 현상 자체를 분석했지 현상을 분석하는 남에게 ‘틀렸다’는 소리나 하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진중권은 옳다. 설령 그가 신봉하는 이론이 틀렸다 하더라도, 이 경우 그의 행위가 옳다는 건 논증도 변명도 필요없는 사실이다. 고작 수사 몇 개에 흥분하여 “니가 막말(?)했으니 너에 대한 사이버테러는 정당하다.”고 방방뛰는 대중들 틈에 끼기 싫다면, 내 말에 동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디 워>가 평론할 가치가 없는 영화고, 디빠들의 사이버테러를 보면 꼭지가 돈다는 말이 막말이라면, 나 역시 그런 막말은 하루에 한다스씩 내뱉어줄 수 있다. 레비나스의 글이 ‘놀고 있다’는 말도 마찬가지. 그의 글은 실제로 ‘놀고 있’으니, 이 수사를 양보할 수가 없다. 



P.S 언젠가 노정태와 술을 먹다가 "NL은 자신들의 무지함을 활동력으로 커버하려 들고, PD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지적 유행에 편승하면서 커버하려 든다."고 내뱉은 적이 있었는데, 정말 위 텍스트는 '지적 유행에 편승한 무력한 PD'의 글로 기념해야 할 듯싶다. 이왕 유행에 편승했으면 그걸 좀 실천적으로 써먹으면 어디가 덧나나?



지나가다가

2007.09.21 19:28:51
*.141.63.244

"지젝이 한국인이었다면 먼저 자신이 현상 자체를 분석했지 현상을 분석하는 남에게 ‘틀렸다’는 소리나 하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진중권은 옳다. 설령 그가 신봉하는 이론이 틀렸다 하더라도, 이 경우 그의 행위가 옳다는 건 논증도 변명도 필요없는 사실이다." 이 부분에 공감합니다. 그리고 부연 하나. 나름 지젝을 꽤 읽은 편인 제가 보기에 레비나스는 지젝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 듯 싶군요...

하뉴녕

2007.09.22 09:59:59
*.176.49.134

언젠가 진중권이 자기 강의에서 "용어에 익숙해지는 것을 이해한 것이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경청해야 할 말입니다. ;;

이상한 모자

2007.09.21 19:33:37
*.136.138.83

작년 정도에 'JWalker'와 함께 지젝을 신으로 받들어 모셨던 제 입장에서 보자면, 이 분은 최근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를 읽으셨군요. (제목 맞나?)

그 책만 읽고 '레닌'을 읽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초래되는 것입니다...

하뉴녕

2007.09.22 09:59:06
*.176.49.134

....그런 책도 있었소? (군대 갔을 때 나왔겠지.)

나도 레닌은 안 읽었으니 님하 논증은 무효-.

이상한 모자

2007.09.21 19:36:11
*.136.138.83

글고... PD를 아무데다 갖다 붙여주면 안되는데...

하뉴녕

2007.09.22 09:58:27
*.176.49.134

님하 대학의 PD들이 나보다 한 4년은 늦게 지젝을 읽고 있다는 건 명백한 팩트에요. ㅋㅋㅋ

평범한

2007.09.21 23:57:41
*.247.200.59

이번 디워 사태의 핵심은 대중의 폭력성으로, 황우석 사태와 유사하다고 생각하기에 아무래도 진중권의 위치가 유리한 듯합니다. 다만.. 둘 다 좌파임에도, 약간 더 왼쪽인 김규항은 시종 계급적인 관점에서 그런 대중의 폭력성에 애써 눈을 감고, 상대적으로 자유주의 성향이 더 강한 진중권은 먹물들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김규항의 지적에 애써 귀를 닫는 것 같군요..

하뉴녕

2007.09.22 10:01:27
*.176.49.134

N님을 포함한 몇몇분들이 지적했지만, 영화판에 '먹물들의 엘리트주의'라는 게 존재하는지가 의문입니다. 누구 말마따나 김규항은 키노 때 시간에 살고 있나요?

tango

2007.09.22 23:23:44
*.106.65.224

제가 보기에 영화판에 '먹물'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화판에는 판을 지배하는 대기업자본과, 대기업 인프라에 돈 대주는 금융자본과, '직함'은 사장이지만 사실은 소생산자에 불과한 다수의 제작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가장 다수를 점하는 노동자들이 있지요. 이들 노동자들은 일이 있을 경우 하루 평균 18시간 여의 노동을 하고, 일이 없을 때는 마냥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인 존재들입니다.

실제로, 90년대 초중반 이래 현재까지의 한국영화 중흥기는 정치판의 이른바 '개혁적 386'들과 출신성분부터 거의 유사한 소부르조아 제작자들이 주도해왔습니다. 재능이 돋보여 발탁된, 그리고 지금은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감독들로 성장한 스타감독들과 함께. 이제 변화되는 시장환경 속에서 이들 소부르조아 제작자들과 역시 전형적인 소부르조아인 감독들이 어느 쪽으로 계급이동을 할 것이냐는 뭐 지켜볼 만한 상황이긴 한데, 자신들의 열망과는 상관 없이 그닥 미래가 밝지 않습니다. 스크린쿼터 축소로 더욱 거세진 헐리우드와의 싸움과 맞닥뜨리게 됐으니까요. 물론 그 중에도 앞으로 메이져를 중심으로 개척해 나갈 중국시장과 미국시장에서 승자가 될 수 있는 이들은 영화를 누리겠지만 뭐 대다수 나머지들은 그나마 '사장'자리, '감독'자리 잃게 될 것이 뻔해 보입니다.

영화판에 '먹물'이 없다는 건, '권력화된 유일담론'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은 '담론' 수준의 무언가가 생산될 만큼 영화판이 지적인 생태계가 아직 아니라는 얘깁니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카이에르 뒤 시네마> 같은 비평적 권위도, 미국에서 아카데미상을 수여하는 단체인 '예술과 과학을 위한 아카데미'처럼 지성적이지는 않지만 산업계에 막강한 권력으로 작용하는 '지성을 가장한 정치조직' 조차도 없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개인적 의견이지만 구성원 개인들이 내놓는 작품들의 경향으로 볼 때에도, 독립영화 혹은 예술영화라고 일컬어지는 작품들까지도, 그리 넓고 깊은 인문학적 소양과 통찰력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키노' 시절, 정성일과 키노 사람들의 다소 일관된 경향성도 어떤 영향력있는 담론으로 자리잡지는 못했고 그 독특한 존재가치만 인정 받은 정도였지요. 사실 정성일의 난해무쌍한 글은 제게는 퍽 '재미있게' 읽혔는데, 그가 만약 자신의 고유한 담론으로 창작자들을 재단하고, 억압하고, 권력을 취하고자했다면 저는 그와 싸웠겠지만(저는 그가 좋아하는 류의 영화들을 매우 싫어하는 편이라^^;;;) 그가 권력을 누린 적은 없지요^^
대한민국의 척박한 영화 감상 문화에 속에서 특이하게도 가장 먼저 유럽영화의 전통에 천착했던 존재로서 정성일은 마이너리티일 수 밖에 없고, 그의 생경한 주장이나 난해한 문맥은 마이너리티의 고독한 항변으로, 그래도 영화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어떤 이의 꾸준한 목소리로 읽혔더랬습니다.

사실 정성일 보다 영화적 열정에 있어서나 평론가로서의 충실성에 있어서나 훨씬 못한 사람들이, 부산영화제며 영화진흥위원회며 온갖 곳에서 적은 권력이나마 손에 쥐었던 것에 비하면 야인이지요 정성일은.

대한민국의 영화판은 아직 진화의 초기에 있습니다. 이 생태계를 꼼꼼하게 연구하는 연구자도, 그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이론화하고, 선진적 이론을 중심으로 어떤 거대 담론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기미도 아직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영화판은, 아직 초창기 적인 산업 성장의 역군들만 있을 뿐, 인텔리는 없습니다. 이러니, 평론 권력 어쩌고 하는 얘기는, 저로서는 글쎄, 걍 허탈하게 웃고 말하야하는 얘기인거죠. 따라서 김규항은 키노의 시간에 살고있는 것 조차 아니고, 그냥 없는 시공간을 공상한 거죠 ㅎㅎ

노지아

2007.09.22 01:05:34
*.40.203.52

이상한 모자 동지, 혁명은 아직도 멀었습니까?

김수민

2007.09.22 01:56:20
*.208.42.34

레비나스의 허무한 글을 읽고 떠오르는 생각

1. 죽쒀서 개준다.
2. 배움의 질곡.
3. 주여, 저자는 자기가 무슨말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4. 저런 자식들 때문에 인문학의 위기가 온다. 아니, 왔다.

이상한 모자

2007.09.22 12:09:54
*.79.125.199

이, 이젠 대학에 PD는 없다능.. 마, 말이란게 원래 변하는 것이라고 하면 할 말 없다능... 하, 하지만...

그리고 나도 지젝 2003년에 읽었다능.. (하하, 하하핫)

jiva

2007.09.22 17:05:04
*.10.53.204

푸코,라깡,들뢰즈 등 후기구조주의들의 유행이 끊긴 이후에, 과연 지금 시대를 적절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사상가는 누구일까. 뭐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글이군요. 확실히 한 꼭지에서는 지젝이 많이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네그리에게서 꽤나 좋은 이론적 틀을 많이 읽어내는 편인데요.

확실히 재미있네요. 지나치게 지적현학으로 흐르지 않는다면, 좀 키워볼만한 논쟁 같습니다. 이번 추석 연휴기간 내내 눈이 즐거워질 거라는 기대. ^^

tango

2007.09.22 23:33:00
*.106.65.224

레비나스 님이 '합리성이라는 무시무시한 남근'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볼 때, 일단 '합리적'이라는 것, 합리성의 판단기준이 될 어떤 '담론'이라는 것 자체를 매우 경계하시는 군요.

"예컨데 디빠들이 똘레랑스를 들면서 국가주의든 파시즘이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했을때, 또는 폭력을 담보하지 않는 방식으로 파시즘을 지키려고 했을때 진중권 선생님의 주장은 무효가 됩니다."라고 하는데, 디빠들은 '폭력을 수반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수호해오지 않았나요? 왜 저런 식의 가정이 필요한걸까요? 생각이 너무 많아서? 너무 자주 '횡단'을 하다보면 저런식으로 생각하게 되나요? '근대적 합리성은 허구다'라는 탈구조주의의 도그망서 벗어나 조금만 팩트를 들여다 봐도 저런 생각은 안할텐데, 참 놀고있군요. 그러게, 횡단, 탈주, 유목은 좀 적당히...난 루카치적인 리얼리즘이 다시 복귀해야되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랍니다^^ 공부가 짧아서 잘 모르겠지만, 요즘은 결국 이진경식 탈주냐 강유원식의 고전 다시 읽기냐가 대세인 모양인데 어느 쪽으로 공부를 해야 똑독한 사람이 될가요? 누가 좀 알려주세여^^~

이상한 모자

2007.09.23 03:52:56
*.79.125.199

OTL 또 지워졌네...

plath

2007.09.23 16:04:11
*.52.184.184

"비밀글입니다."

:

하뉴녕

2007.09.23 17:09:31
*.180.10.134

우회적으로 변-김을 까는? ㅋㅋ
저도 오늘 온몸에 알러지 나고 장난아니었음. 집에 왔는데 어머니가 보고 경악하심;; 어제 s군과 저는 둘이서 소주 한잔을 더 했더랬죠.

카방글

2007.09.23 19:22:37
*.199.178.155

정말 지젝이고 라캉대는 글이군요.

레비나스

2007.09.25 01:28:08
*.105.99.235

이런 이런.. 이제와 글을 자세히 읽었음. 몇몇가지에서 귀에 거슬리고 특히 라캉을 포스트 구조주의로 묶는 것에 대해서 데리다와 라캉의 논쟁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지만 뭐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할테니.. 알고 싶다면 국내에서 유일하게 이를 다루고 있는 김상환씨의 논문이나 책을 읽어보시고.

특히 지젝의 글을 오역해 놓고 성실한 지젝의 독자마냥 비판하는건 코메디스러웠음. 그래서 나는 다른거 다 필요없고 지젝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블로거님의 커리를 몇몇 가지 짚고 넘어가겠음.

예를들어 사드와 칸트의 윤리에 대해서 라캉은 후기에 와서 욕망보다는 충동에 그 해결책을 보고 있고, 이는 너무나 명백하다는 말씀. 지젝의 논의도 후기 라캉에 대한거고 프랑스의 정신분석학회의 창시자인 자크 알렝 밀레의 논의도 후기 라캉에 기대고 있고.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의 역자는 상징계의 필요성에 대해서 역설하는 것이었고, 라캉은 전혀 아니었음. 물론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에서 상징계의 역활이 전혀없다는건 아니지만 정신분석에서 가장 필요한 행위는 환자에게 상징계를 부여하는게 아니라 실재를 알게끔 자유연상이나 분석을 통해서 스스로 해석하게 하는 것임. 그래도 라캉은 환자의 증상을 완전히 없엘 수 없음을 역설하고 있고. 이는 부르스 핑크의 실전 정신분석 저작인 '라캉과 정신의학(국내에 출판된지 오래)' 내내 나오는 말임.

간단하게 말해서 지젝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빌어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진중권씨가 행하고 있는 합리적 비판이 낡았다는 것. 그런 행위는 주체가 가지고 있는 증상을 없엘 수 없다는 것. 라캉이 에고 심리학 자아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기존의 정신 분석학과 싸운 이유도 같은것 아닌가. 결국.. 주체가 어떤 병적 증상이 있어서 분석가가 그것에 대해서 자아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라캉과는 완벽히 다른 이야기임. 그런 수준은 그냥 구스타프 융의 주장이고.

게다가 "진리는 오인을 통해 구성된다"는 말을 가져다 붙여놓고 진중권씨 어쩌구 하는건..ㅠㅠ 이건 너무 심한 오역이잖아..

레비나스

2007.09.25 01:03:31
*.105.99.235

이 사람 진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읽은 맞아? 그게 나의 인상임. 그게 맞다면 어째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첫번째 단락인 '마르크스는 어떻게 증상은 고안해냈는가'에 대해 일언반구가 없지? 이 부분은 내가 건들고 있는 지점들에 대해서 아주 폭발적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말야. 내가 어이없는건 바로 그 지젝의 논리를 빌어다가 나의 논의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 블로거 님이. 물론 내가 지젝이나 라캉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건 뭐.. 그런 지적도 아니고.

간단하게 말해 마르크스는 어떻게 증상을 고안했는가 부분에서 지젝이 할애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비판은 기존의 낡은 계몽주의식 비판과 포스트모던식 비판 모두를 빗겨나가고 있음. 그것들이 증상을 없에지 못한다는 전제하에. 그러므로 블로거님이 라캉을 들어서 나를 비판하는건 솔직히 창피한 일임. 나 같으면 모르면 가만히 있겠음.

홍세화? 또는 진중권? 블로거님은 나를 너무나 모른다. 내가 그 사람들을 탐독하지 않을걸로 보이나? 내가 똘레랑스를 비판하는 것은 비일관성이 있다는 것으로 깐게 아니잖아. 난독증이 너무 심하네. 블로거님. 상징계는 필연적으로 비일관적이라는 사실은 그냥 포스트모던 담론에서도 상식아닌가? 외려 비일관적이라거 비판한게 아니라 일관적이라서 비판한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나? 상징계는 실재의 주변으로 구조화된게 지젝의 논의잖아. 즉 비일관성을 덮고 일관적으로 보이려고 하는게 이데올로기의 작용이고 욕망이론이지. 진중권씨의 합리론이 비일관적으로 보이나? 쩝..

간단해 지젝주의가 정치분야 나타나는 순간 이런 파동들이 생기겠지. 지젝주의는 자유주의와도 다르고 포스트모던과도 다름. 그러므로 나의 목표는 충실하게 지젝을 소개하는 것뿐?

레비나스

2007.09.25 01:13:04
*.105.99.235

차라리 이런 잡소리보다 내가 거론한 '냉소주의적 주체'가 뭔지좀 말했음 좋겠음. 디빠를 까는거야 카타르시스가 생기겠지만 고작 이유로 진실을 덮어버리면 쓰겠냐는 것.

여기 계시는 분들 전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자유주의로 환원하지 말길.. 김규항의 논리들 전부 자유주의에 가깝잖아. 결국 결론은 김규항이나 진중권이나 똘레랑스고. 뭐가 달라-- 단지 진중권씨가 정치적 본능이 더 날카로운 것 뿐.

하뉴녕

2007.09.25 17:57:33
*.180.10.134

레비나스/
^^
자자, 저는 님이 언급하신 김상환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를 읽었구요. 이 블로그에 검색해 보시면 서평도 있어요.

또한 님이 언급하신 브루스 핑크의 <라캉과 정신의학>도 읽었습니다. 그것도 이 블로그에서 검색해 보시면 간단한 코멘트가 나올 거에요. 우연히도(?) 님이 언급하는 책들은 제가 다 읽은 거네요. 헛웃음이 나옵니다. 그것들 읽으면 무조건 님 의견에 동의할 것 같은가요?

님이 그 책들에서 이해한 건 틀렸다기 보다는 너무 나이브해요. 님은 지젝의 논의를 무슨 극좌파가 맑스 읽듯이 읽고 있습니다. "아, 노동착취가 문제구나. 그럼 노동해방 하면 되지. 나머지는 즐-." "아, 증상이 문제구나. 그럼 환상을 횡단하면 되지. 나머지 방법은 즐-." 이 수준이에요. 이렇게 독서 할 거면 포스트 구조주의 공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포스트 구조주의' 표현 싫어하시면 별도 분류해서 '후기 라캉과 지젝'이라고 수정하지요. 하여간 저 사람들 이론도, 문제를 저렇게 한방에 해결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의 텍스트에서 오직 하나의 올바른 실천만이 나오고 이게 세계를 구원할 거라는 망상은 지젝이 언급한 전체주의적이라는 유토피아 충동에 해당하지요. 이런 얘기하면서 제가 <이데올로기...>의 1부를 다시 재론해야 할 필요는 없구요.

제가 말씀드린 건 1) 통상적인 비판이 '증상'을 해소할 수 없다. 는 명제와 2) 자유주의적 비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는 명제가 동일한 의미가 아니라는 겁니다. 1)에 동의한다고 해서 2)에 동의해야 할 이유는 없어요. 그게 님의 글에 대한 제 비판의 핵심입니다.

그 비판을 거부하려 한다면, 그래서 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라고 묻고 싶네요. 라캉이 극좌파 대학생들에게 했던 것처럼 디빠들 한명 한명씩 잡아다가 정신상담 하시려구요? 그것도 라캉이 했던 것처럼 면담시간을 분석가 자신이 임의로 정해서, 핑크의 임상학적 원칙에 따라 분석해 보시려구요? 그게 가능해요? 그런 짓 하려면 그 친구들이 자신이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상담장에 자발적으로 나와야 하고, 분석가에게 분석자를 통제할 수 있는 '권위'가 있어야죠. 정신분석학 담론, 전문가의 '권위' 없이는 유지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디빠들은 자기들이 정상이고 진중권이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자, 그럼 지젝을 충실히 소개하려는 레비나스님은 디빠들에게 어찌할 생각이시죠?

님은 '이론적으로는' 실제로 그렇게 나이브한 사람이 아닐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책에서 지젝이 그렇게 나이브하라고 가르치진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님이 진중권에게 보낸 글을 보세요. 그게 어디 진중권의 실천 무엇무엇에 대해 반박하는 글입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글의 어떤 부분, 하다못해 본인이 계열화한 특정한 어떤 행위라도 나와 있어요? 없죠? 그냥 지젝의 용어해설 뿐이죠? 그래서 제가 이 글을 "지젝이 옳다. 네그리는 틀렸다."로 요약한 것이죠. 허무하지 않아요?

님은 탈근대 담론이 필연적으로 근대성 안에서 출현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아요. 자신이 인용하신 김상환의 책을 좀 더 신중하게 읽어보실 것을 권고합니다.

"내가 똘레랑스를 비판하는 것은 비일관성이 있다는 것으로 깐게 아니잖아." "결국 결론은 김규항이나 진중권이나 똘레랑스고. 뭐가 달라-- 단지 진중권씨가 정치적 본능이 더 날카로운 것 뿐."

그렇겠죠. 그러니까 제가 지젝주의자라면, 자유주의 논법에서 출발한 진중권의 정치적 본능이 어떻게 '본능적으로' 이데올로기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거기서 더 나아가려면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를 '분석'하고 있겠네요. 진중권한테 찐따붙어서 '충실하게 지젝을 소개'하겠다구요?

어이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 이게 맞는 소리다 싶은데 아직 정치평론 영역에선 어찌해야 할지 각이 안 나왔다면, 학교로 돌아가 후배들과 세미나나 하세요. 같이 토론하다 보면 지젝적으로 실천하는 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방안이 나올지도 모르죠. 비꼬는 말 아닙니다.


P.S 님이 래디앙에 쓴 덧글은 도저히 길어서 다 읽을 수 없구요. 대자보에 올리셨다는 글은 가서 대략 보고 왔는데, 괜찮습니다. 님은 그렇게 님의 방식으로 비평을 하시면 되요. 하지만 정신분석학에 별 관심이 없고 지젝은 선물받고도 제대로 읽지 않았을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진중권을 '진중권 선생님께'라는 이름으로 지젝의 용어로 비판하면,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잖아요? 그냥 대자보에 썼던 것처럼 별도의 평문을 쓰세요.

도대체가 상대방을 향하는 글이 그 사람과 얘기를 하려고 쓴게 아니면, 정말 웃기는 일 아니에요? 님 말대로 지젝을 전도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쳐도, 적절한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 어떻게 했어요? 각 지방 언어체계에 맞춰서 얘기하지 않았던가요? 아예 남이 대꾸도 하지 않을 얘기를 던져놓는 건 정말이지 '놀고 있는' 일이죠.

이만하면 알아들으셨으리라고 믿고, 접겠습니다.

레비나스

2007.09.27 00:19:58
*.227.72.56

읽은 사람이 저런 말을 하는지 참.. 저는 님이 그 책들을 읽었는지에 대해서 충실한 답변을 듣고 싶었는데 '읽었다 어쩔래' 이게 답니까? 핀트에 벗어나지 마세요. 내가 저 책들을 읽었는가를 문제 삼았던 이유는 지젝에 대한 님의 우스꽝스러운 도식이었지 않았나요? 제가 제 주장에 동의하라고 했습니까? 어짜피 텍스트가 정해져 있다면 누가 충실하게 이해했느냐의 문제일 뿐이지.. 미안하지만 님은 자유주의에 적실성을 이해하고 있는 분이고 저는 아닙니다. 그 차이에 대해서 저는 설파하고 있는 겁니다. 단 위의 제 댓글은 지젝을 오해하지 말라 정도였던 걸로 기업합니다. 그걸 왜 제 생각이라고 하시는지? 간단해요. 님이 그게 틀리다고 생각한다면 지젝의 텍스트 안에서 까는 겁니다. 애초부터 저는 지젝에 대한 커리를 거론한겁니다.

포스트구조주의와 변별점을 주장하는건 내가 아니라 지젝이랍니다. 헛갈리지 마세요. 제가 그걸 거론한건 님이 포스트 구조주의로 지젝을 묶는 것과 자유주의와 지젝이 갖는 틈새들이 님에게 근본적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겁니다. 왜냐 지젝 스스로도 수많은 텍스트에서 자유주의와 합리적 이데올로기 비판과의 구분을 분명하게 짖고있기 때문이지요. 예컨데 님은 아예 통째로 들뢰즈와 지젝을 묶고 있는게 아닙니까? 어떻게 지젝이 수많은 텍스트로 비판했던 똘레랑스같은 것들이 존재하는데 한국에 오면 그것에 동의 할거라고 단정짓나요?

간단해요. 지젝은 진중권씨의 포지션에서 짜증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또 저는 자유주의적 비판에 적실성이 없다고 했다 뿐이지 효과가 없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 차이를 무시하는지 모르겠네요. 부르스 핑크 책 보셨지요? 거기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상징계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이데올로기 비판이 아무런 효과가 없겠습니까? 이 점은 제 설명이 부족했지만, 그건 제 주장의 근본이 아닙니다. 예컨데 진중권씨가 처음에 했던 주장들, 즉 디빠들의 환상에 의심을 눈길을 보내는 그 작업에 대해서 저는 찬성합니다. 상징계의 분열을 확인하는 작업, 그것이 실재를 명중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이죠. 반면 진중권씨가 스스로 똘레랑스적 비판에 머물자말자 이야기는 다소 혼란스러워 집니다. 게다가 합리성의 영역으로 그들을 끌어내리려하고 있지요.

저는 그가 고수하고 있는 포지션과 비판사이에 근본적 분열을 봅니다. 그것을 엔똘레랑스라고 말하기에 부족한게, 지젝의 논의를 보면 기독교는 이슬람과 다르다는 차원에 머무르고 있는게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슬람의 존재를 승인하지 않는 것에서 불관용 그 자체로 부터 기독교가 될 수 있었다는 것. 그러므로 진중권씨의 엔똘레랑스도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측면은 물론, 디빠들의 근원인 취향적 문제까지 건들고 있지 않습니까? 예컨데 진중권씨의 논의도 디빠들을 승인하지 않는 것에서, 그들의 존재를 아예 부정하는 것에서 근본적으로 구조지어져있습니다. 가식떨며 똘레랑스예요라고 말해봤자. 진실은 디빠들이 말하는 비똘레랑스가 진중권씨라는 주장들이 실재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지젝은 똘레랑스가 가능하지도 않고, 더군다나 서로의 취향을 문제삼지 않는 사회는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다라고 역설하는 겁니다. 그런 매끈한 공간은 없으니까.

미안하지만 지젝의 이론 깊이에는 주체를 합리화하는 방식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이 들어있습니다. 주체는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이고 그것으로 증상을 없엘 수 없는건 지젝 이론의 근본적인 부분입니다. 합리성이 아니라 실재의 윤리. 그것이 지젝적 논의입니다. 이런 다름과 외상적 충돌들은 님은 긍정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고작 현실태의 문제들로 환원해서 아직 오지 못할 기획으로, 너무 빠른 기획으로 묶습니까? 그렇게 이 전선들을 무덤에 묻어버리고 싶나요?

제가 냉소주의적 주체를 문제삼는것도 이 때문입니다. 냉소주의적 주체가 이미 인터넷에 만연하고 있는데, 그 주체들에게 똘레랑스적 취향을 거론하는게 이데올로기 돌파에 맞다고 말하는건, 지젝이 진중권식 합리성에 손을 든다고 말하는것 보다 더 기만적입니다.

디빠가 문제입니까? 그렇다면 최초의 진중권씨의 행위에 주목하십시요. 단 그가 유지하고 있는 합리성-똘레랑스같은 것들을 버리고 말입니다. 또한 디빠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르면서 행하는 주체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중권씨의 모든 포지션은 그들을 모르는 주체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몽주의식 담론이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지젝에게 그들은 냉소주의적 주체일테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지젝과 블로거님은 균열지점이 분명합니다.

저는 지젝을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할랍니다. 아직까지 지젝주의는 정치판에 없었으니까. 그러므로 지젝의 주장을 지젝거리는 것을 흠잡을라면 하라는 겁니다. 그게 내 목표였으니까..

캐즘님의 블로그에서 퍼옴

http://blog.jinbo.net/chasm/?pid=34
타자의 폭력

http://blog.jinbo.net/chasm/?pid=22
똘레랑스 유감

하뉴녕

2007.09.26 06:10:30
*.180.10.134

피식-. 그래서 이 논란에서 님의 목표는, 기껏해야 진중권더러 지젝을 읽으라는 건데, 정말 웃기는 목표 아닙니까? 아무리 지젝을 언급한들 레닌주의자에서 벗어나지도 못했군요. 더 이상 말 섞지 않겠습니다. 수고하세요-.

p.s "읽은 사람이 저런 말을 하는지 참.. 저는 님이 그 책들을 읽었는지에 대해서 충실한 답변을 듣고 싶었는데 '읽었다 어쩔래' 이게 답니까?" 님이 질문한 수준을 생각해 보세요. 이외의 답이 있는지... 나참. 님은 구체적인 얘기, 하나도 안 하잖아요? '이 담론은 무효다.' 아니 세상이 그렇게 한가해요? 그럼 한가하지 않은 사람 발목이나 잡지 마요. 그런 거 하시려면 논문이나 쓰시던지. 이건 정말 비꼬는 거 아닌데, 님같은 견해로 논문을 쓰면 그건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구경꾼

2007.09.26 13:21:25
*.254.41.176

레비나스/ 끼어들어서 미안하지만...

"게다가 합리성의 영역으로 그들을 끌어내리려하고 있지요."

미안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높이 올라간 적이 없어요..

구경꾼 2

2007.09.26 14:16:22
*.132.71.10

도중에 잘못 읽었나 하고 다시 올라가서 봤습니다. "지젝은 진중권씨의 포지션에서 짜증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라니. "진중권씨는 지젝의 포지션에서 짜증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면 모를까, 저 말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군요.

수영

2007.09.26 15:52:37
*.171.79.143

레비나스 님 블로그 글들도 훑어보고, 윤형 님이 쓰신 서평도 훑어봤습니다. ("읽어"보기에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과연 제가 죽기 전에 두 분만큼 똑똑해 질 수 있을지 회의가 드네요. ^^; )
막연하게나마 이건 조금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문제를 들고 나오셨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어째 결말이 좀 아쉽네요. 두 분의 관심 영역이 좀 다르다는 건 알겠지만 (레비나스 님은 이론에 -현상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관심이 있는 분, 윤형 님은 실천에 -세상을 바꾸는 데에- 관심이 있는 분... 이렇게 이해해했는데 틀렸나요?) , 좀 우호적으로 자기 생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는 없었을까... 하는 그런 아쉬움이요.

레비나스

2007.09.26 20:11:16
*.227.72.56

위 제 블로그 아닙니다. 설명을 안해놨네요ㅠㅠ 지젝을 읽으면서 아쉬운 점은 이데올로기 비판은 제가 봤을때 가장 폭발력이 있는데 해결책은 다소 모호하다는 겁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국가의 권력을 옹호하는 것이 요즘 지젝의 주장인데 다소 모호하지요.

지젝의 말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건 요즘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몰락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게 더 쉬운일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자본주의가 마치 인간에게 던져진 자연적인 속성인것처럼. 그러므로 그는 이런 시대에도, 탈이데올로기 처럼 보이는 시대에서 여전히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요.

들뢰즈 이후의 거장으로 불리는 지젝을 한국에서는 특히 정치판에서 철저히 읽는 사람이 없어 뵙니다. 학문적으로나 취미로 읽는 사람은 많아도 말입니다. 제가 해석했던건 사실 아주 초보적 범주에 불과하고 그를 철저히 해석한다면 자유주의적 난항들을 넘어설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캐즘

2007.09.26 23:35:25
*.24.218.160

쭉 댓글을 보다가 윗윗 댓글에 레비나스 님이 자신의 글인양 제 블로그의 글 두 개를 링크 걸어놔서 깜짝 놀랐습니다. 나중에라도 해명하신건 다행이지만 정말 화날 뻔 했습니다. 이 글 보시면 원래 댓글을 수정해 주시죠.;;

뭐.. 두 분 논쟁엔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만 원칙적으로 디워에 대한 열광이 '환상'의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진중권 식의 비판이 이들의 '환상'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레비나스님의 지적에는 동의합니다.(하지만 모든 이데올로기가 환상을 가진다는 점에서 논의의 초점은 디워에 대한 열광 속에 어떤 환상이 놓여 있는가에 맞춰져야겠죠.)

그런데 레비나스님 글이 너무 난해하고 개념이 난무해서 잘 이해가 안되네요.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지젝을 좀 읽은 제가 잘 이해가 안 될 정도면, 지젝에 관심이 없는 분들이 보기엔 단지 현학에 불과해보이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이런 부탁이 가능하다면, 앞으로 글을 좀 더 쉽게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제 블로그 홍보는 자제를..ㅎㅎ

하뉴녕

2007.09.27 00:00:39
*.176.49.134

리퍼러로그의 힘으로 여기까지 오신 모양이군요. 반갑습니다. 블로그 종종 들를게요. :)

레비나스

2007.09.27 00:17:28
*.227.72.56

이런이런.. 죄송합니다ㅜㅜ

수영

2007.09.26 23:49:55
*.171.79.143

제가 말도 안되는 착각을 했군요. 찬찬히 생각해 보면, 같은 분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는 거였는데. 면목 없습니다.ㅠㅠ 캐즘 님, 윤형 님, 죄송해요.

노정태

2007.09.27 15:48:55
*.152.129.93

"위 글의 한 문단이 리플 하나씩이다. 물론 시간역순으로 거꾸로 정렬해 있었지만, 보기 좋게 다시 편집하니 위에서 보듯 한편의 글이 나온다."

바로 이겁니다, 이게 바로 한윤형이죠! 라고 이승원이 외치는 것만 같구나...

정통고품격서비스

2007.09.27 23:04:09
*.216.114.61

여기서 언급되는 책들 나도 읽은 거 같은데, 먼 소린지 모르게따.
그래서 누가 이긴거임?

노지아

2007.09.27 23:47:39
*.40.203.52

캐즘님이 킹왕짱임

측천

2007.11.27 11:29:56
*.229.55.212

정말 잘 읽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한윤형님이 논리정연하게 해주셨군요...
이렇게 반박해줄 수 있는 당신이 참 고맙고, 저 정말 시원 합니다....
레비니스가 진중권 이었군요... 저는 진중권이 너무 유아적이라 그의글이나 평에 대해 일말의
관심조차 없습니다만..
아직 많이 발전해가야 하는 학자로서 타성에 웬만큼 젖어 있는, 게으름의 표상으로 그를 보고 있어요,..
그리고 그의 거만속에 숨겨진 어떤 나약함과 불안을 엿봅니다.
전 이번 디워현상이라는 미친 국민성(서울 월드컵이후로 표출할 길 없었던 국가적 붐이 전혀 엉뚱하게도
어떤 하찮은 영화 하나로 무조건적으로 쏠리게된)을 일으킨 주범의 하나로 진중권을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말했듯이 진중권이 디워에 대한 비평을 넘어선, 디워보는사람들을 까는 그의 비난이 뭇 선량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사납게 자극, 아무 여과없이 그저 디워를 맹신하게 하고,
디빠의 주역들-변희재나 김휘영같은 양아치들-로 하여금 잘못만든 영화에 대한 일련의 반성없이
그저 디워를 마구 미화시키는 빌미를 제공하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금번 "디워"라는 대내외적 문화망신의 코드의 원흉은 디빠만이 아니라, 바로 도를 지나친 비평을 해서
역설을 돋보이게 만든 진중권도 크게 한몫 했다고 봅니다.
그건 진중권 자신도 부정할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한윤형님은 "소귀에 경읽기"같은 그의 속좁은 귀에 대고 철학적 논리로 너무 친절하고 신사답게
그를 반박하시는군요...차라리 당신의 논리가 아깝습니다...하하하.
어쨋든 그영화를 철학적으로 평하지 않더래도
디워는 정말 엉뚱했습니다... 너무 엉터리 였어요.
정말 한국인의 기본적인 문화시각에 대해 실망과 아울러 우려를 가지지 않을수 없었어요.
그리고 그위험한 사고의 소유자들-변희재, 김휘영, 진중권..등-이 무지한 사람들을 오도할 우려가 있다고 여기니...
아아, 정말 이 한심함 이여... 도대체 한국의 지성은 어디로 가버렸던 말입니까????????
왜 양아치(양의 탈을 쓴 지적 무식꾼들)들이 판을 치는 상황이 되었는지......
글고 그 양아치들이 왜 서울대는 들먹거려 망신 또 망신, 개망신의 서울대가 되어야 했는지.....
오호, 통재라~!
아무튼 한윤형님의 글을 뒤늦게 보고서야 다소 그때의 분노가 풀립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무조건적 디빠나 무조건적 디까들을 원망하고 싶진 않고, 다만 쓰레기영화를 대단한 것처럼
속여 온국민들을 뒤흔들고 사기친 심형래가 정말 미울뿐 입니다.

한윤형님, 잘읽고 갑니다...
정말 당신글은 솔직 하십니다..이럴수 있는사람이 한국에 단 한사람이라도 있다는것에 안도를 합니다.
고맙습니다.
11/26/2007,월요일 9:25Pm, 뉴욕에서 측천.

하뉴녕

2007.11.27 11:45:07
*.176.49.134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1) 레비나스라는 아이디를 쓰는 네티즌은 진중권이 아니구요. 디워 사태 때의 진중권을 애매하게 비판하는 포지션을 취하고 있죠

2) 그래서 저는 레비나스라는 아이디를 쓰는 네티즌을 비판했던 겁니다. 디워 사태 때 저는 진중권의 열렬한 옹호자 중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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