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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스타리그

조회 수 1145 추천 수 0 2004.09.13 22:42:00
내가 '스타리그'를 소재로 쓴 첫번째 글. 미디어몹 블로그에 아흐리만이란 아이디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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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크래프트가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은 내가 고등학교 때였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거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피시방에서 다른 일(?)들을 주로 할 때였으니 투자할 시간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타가 대유행한지 몇 년이나 흐른 지난 겨울에 스타크래프트에 입문했을 때, 나는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내 귀청을 괴롭히던 중후한 음성의 주인공이 질럿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시방에 있으면 그 소리밖에 안 들려서 난 사령관쯤 되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프로토스의 기본 유닛이었다니, 쩝.

늦깍이로 스타를 배우는 건 무척이나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나와 비슷한 실력의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교양 스타'에서 '사교 스타'로의 진입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가장 최근의 시도를 저지한 것은 룸메가 분양받은 고양이 와 이영훈 사건이었다. 어쨌든 게임에 재능도 없는 내가 그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생각한다면, 합당한 선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미 맛들린 스타리그 중계관람에 대한 재미는 포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유행에 맞춰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스타를 배웠더라면, 스타리그가 충분히 숙성되지 않았을 때에 접했을 것이고, 금세 싫증을 내고 왕년에 스타천자문을 떼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스타리그는 미디어몹에 누가 퍼온 승리멘트와 패배멘트처럼, 이미 기십명의 특색 있는 게이머들이 활약하는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가 되었다. 일대일 스포츠 중에서 이토록 흥행한 것이 있었던 것 같지가 않다. 그것은 스타리그가 한국 남성들에게 익숙한 감성, 즉 무협지적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보고 있으면 대회 주최측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기존 스포츠의 감성을 모방하려고 노력하는지가 보인다. 그 중에는 성공하는 것도 있고 실패하는 것도 있다. 최근 에버배 스타리그에서는 그 실패가 두드러지는데, 중계 시작화면에서 게이머들이 갖가지 스포츠 모션을 따라하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 어설퍼 보인다. 그러나 중계 문화의 모방은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아야 할 것이다. 캐스터 한명과 해설자 두명으로 이루어진 중계진은 게임의 박진감을 높여주며, (대부분의 여성들이 스타리그 중계를 싫어하는 이유는 이들이 너무 시끄럽기 때문이다.) 이들이 구사하는 수사의 현란함은 축구중계를 넘어선다. 스타리그는 일대일 대전게임이며 한 게임당 평균적으로 20여분 밖에 안 걸리기 때문에 그러한 박진감이 생긴 것 같다. 특히 온게임넷 스타리그의 캐스터 전용준과 두 게임해설가 김도형, 엄재경의 콤비플레이는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왜 이렇게 스타리그가 성공했을까. 기존 스포츠를 충실히 모방하며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하는 '짝퉁'이, 어떻게 기존 스포츠들의 지위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물론 상식적으로 몇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의 대중적인 인기와, 앞서 말했듯 일대일 대전게임이며 플레이 시간이 짧아서 박진감이 넘친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요소도 고려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들이 "하층민의 로망"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인지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간략히 설명드리자면 다음과 같다. 가령 미국을 생각해보라. 흑인들이 스포츠 선수나 랩퍼가 되는 이유는 정말이지 그 동네에서 다른 건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미래가 없는 인생의 수직상승 성공담은 비슷한 처지의 청소년들을 열광시킬 것이며, 그것이 미국에서 운동선수나 랩퍼들이 우상이 되는 이유다. 그러나 우리의 스포츠는 출발부터 하층민의 로망을 담지는 못했다. 한국의 스포츠는 경제분야의 국가주도형 수출지향적 정책과 마찬가지로 세계시장(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 등)에서 외국을 꺾고 성공을 거둔다는 국가주의적 목적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국가가 작정하고 어린 학생들을 데리고 조련하는 시스템이 정립되었고, 운동은 흔히 하는 말로 생활체육이 아니라 엘리트체육이 되었으며, 육상과 수영을 외면하고 투기종목에만 치중하여 한때 올림픽 금메달 숫자에서 끗발 날리다가 오늘날 중국과 일본에 그 금메달 숫자로도 밀리게 되는 기본기 없는 체육이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운동선수가 될 수 있는 이는 하층민이 아니라 오히려 중산층 이상 가정의 운동 잘 하는 자제들이었다. 어느 정도의 투자와, 뇌물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한국의 모든 스포츠는 국가대항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축구의 인기는 그 국가대항의 대표격인 것이지 특별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몇몇 예외로 야구와 농구를 들 수 있다. 야구의 경우는 정치적으로 지역(특히 호남)이 억눌렸던 시절에 지역대항의 형식을 취하여 인기를 끈 스포츠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야구의 인기가 쇠퇴하는 것은 야구계 내부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런 문제는 이전부터 있었다.) 이제는 지역의 정치성향이 정당지지로 표출될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성숙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농구의 경우는 대학대항의 형식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대학농구가 농구의 중심에서 사라지고 프로농구가 개막됨으로써 농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더 줄어들었다.

모든 스포츠는 스포츠 내적인 아름다움만으로 인기를 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투사하는 모종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성공한다. 한국에서 스포츠는 국가대항, 혹은 지역대항, 아주 특수한 경우엔 대학대항의 가치에 투사된 사람들의 심성으로 인기를 끌어왔다. 그러나 이 모든 대항전보다 강력한 투사를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은, '하층민의 로망'이다. 이것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실현된 종목이 바로 스타크래프트인 것이다.

임요환의 카리스마는 잘 생긴 얼굴을 물론 기본값으로 수반하고 있기는 하지만, 컵라면 먹으며 피시방 전전했다는 그 '신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신화'의 이미지가 얼마나 탄탄했으며 또 얼마나 현실적이었으면 임요한을 보고 프로게이머가 되기로 결심한 모든 게이머들이 증언하는 '신화'와 정확히 일치하겠는가.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들이 하층민의 자제라는 사실은 굳이 통계로 살필 필요도 이유도 없다. 한국에서 자기 자녀가 하루에 열 몇시간 씩 피시방에서 컵라면 먹으며 연습하도록 놔둘 부모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겠는가. 게이머 연봉이 높다하나 서브컬쳐의 뫼이로다. 게다가 나에게 얼굴이 익을 정도의 몇몇 챌린지리거들도 아직 연봉을 받지 않는다고 하던데. 저런 실낱같은 대박신화를 믿을 이들은, 그리고 그 믿음을 제어받지 못한 이들은 하층민의 자제일 수밖에.

프로게임의 시초, 그러니까 할 일없는 피시방 주인들이 단골손님들로 팀을 조직해 서로 라이벌전을 펼쳤더라는 '서울하층민 신화'는 급격하게 지방으로 유입되어 신탄진 소년 홍진호와 부산의 영웅 박정석을 낳는다. 그리하여 다른 일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패배자들의 성공담이 줄지어 생겨난다. 이 로망과 판타지가 가져오는 화학반응은 상상 이상이다. 온게임넷에서 자신들의 성공을 자축하며 내놓은 시리즈가 "전장영웅 30"이다. 세상에, 자기들끼리 만든 영웅이 30명이란다. 하층민 청소년 남성들의 유치하고 촌스러운 감성이 드디어 모이고 불붙어 영웅을 만들고 자본을 굴리는 것이다. 원래, 스포츠라는 건 이렇게 놀라고 있는 것이다.

스타리그에 굳게 굳게 박힌 남성성을 굳이 부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런 건 남성게이머들에게 환호하는 여성팬의 숫자를 들이댄다고 반박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니까. 핵심은, 그들의 감성도 이런 식으로 표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들의 감성이 그들보다 약한 이들을 탄압할 때에 우리가 비판은 할 수 있을 지라도, 그들의 감성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므로. 그러나 프로게이머 팀들이 마치 운동부 팀 문화처럼 매질의 훈육이 보편화되어 있더라는 정보를 얼핏얼핏 들으면, "아, 여긴 그래도 한국이구나."라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스타리그를 본다. 아주 재미있게 본다. 북두신권을 볼 때처럼 웃다가 기막혀하다가 까무러치다가 본다. 유치한 짓 같이 하다가 "저거 왜 저렇게 유치해?"라고 가끔 놀리면 즐겁지 아니한가. TV도 없는 자취생이 온게임넷 현금결제, MBC게임 현금결제 모두 하고 원없이 VOD를 본다. 나보다 어린놈들이 왜 이렇게 많나, 서글퍼하며 본다. (박정석이 나랑 동갑이다.) 아직은 로망에 감정이입이 되는 나이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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