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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레포트임다 -_-;; 그 세시간 만에 썼다는... 그저께 냈으니 이젠 올려도 되겠지 ;;;

그나저나 A4 3매 넘는 글이 이 정도 길이라니, 평소에 제가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이 꽤 기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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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해상시계 발명이야기 상세보기
데이바 소벨 외 지음 | 생각의나무 펴냄
경도를 안다는 건 현재 있는 위치와 자신의 목적지를 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확한 시간을 알면 정확한 경도를 알 수 있다. 시계가 없던 때 ,배가 가라앉고 바다의 군대가 몰살당했으며, 더 나아가 국가가 멸망하거나 번창했다. 경도라는 괴물을 굴복시키고 인류에게 길을 열어준 전대미문의 '사건'은 오차가 거의 없는 해상시계의 발명으로부터 비롯되었다.시계덕분에 사람들은 비로소 눈을 뜨고 시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




  모두 알다시피 지구는 위도와 경도로 구획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종류의 선 사이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위도의 0도 평행선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고정되어 있지만 경도의 0도 자오선은 시간의 모래와 같이 변화한다는 점”(p12)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본초 자오선의 위치는 순전히 정치적 결정”(같은 쪽)이었으며, 항해 중인 사람들은 육지가 보이지 않을 경우엔 바다에서 정확한 경도의 위치를 알아낼 길이 없었다.


  경험으로 축적된 감각과 운명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용감한 항해자들이 열어 나간 ‘대항해 시대’가 몇 번의 참극으로 벽에 부딪친 뒤에야, 각국 정부와 관료, 그리고 과학자들은 해상에서 경도를 파악하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경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몇 시에 배를 탔는지 알아야 하며 이미 경도가 알려진 국내항이나 다른 항구의 시간을 동시에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p13) 이것을 위해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제시되었다. 하나는 달이나 내행성, 별 등 천체들을 관측함으로써 시간을 파악하고 경도를 측정하는 것, 다른 하나는 해상에서 오랫동안 항해해도 오차가 적은 정교한 시계를 만드는 것이다.


  갈릴레이의 경우는 두 방법 모두에 대해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목성의 위성을 관측함으로써 경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한 추의 원리를 이용해 굉장히 정확한 추시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완전하지 못했다. 목성의 위성은 일정 시기에만 정확한 시간을 알려줄 수 있었고, 따라서 육지의 경도 문제는 많이 해결했으나 해상에서는 별 쓸모가 없었다. 추시계 역시 사후에 그의 제자들의 실험결과 날씨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폭풍으로 배가 흔들리면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영국에서 ‘경도 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에게 거액의 상금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지구원의 1/2도까지 정확하게 경도를 측정하는 방법에 대하여 2만 파운드(오늘날의 1백만 파운드에 해당).


  2/3도 내의 정확한 방법에 1만 5천 파운드.


  1도 내의 정확한 방법에 1만 파운드.


  경도 1도는 적도상에서 보았을 때 거리상으로 108.8km에 달하기 때문에, 비록 1도 차이라 할지라도 거리상으로 큰 차이를 보이며 배의 위치를 결정하려 할 때 목적지와 비교해서 큰 실수를 초래한다. 작은 차이로도 많은 거리가 어긋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그런 엄청난 상금을 수여하려 했다는 사실은, 그 당시 열악한 항해 수준에 대해 국가가 얼마나 절망하고 있었는지를 나타낸다.(p62-63)


  말년에 경도위원회의 초기 맴버로 참여했던 뉴턴은 좀더 많은 관측자료만 확보된다면 천체 관측만이 경도문제의 해결이라고 믿었다. “배의 움직임, 온도와 습도의 상이한 변화 그리고 위도의 변화에 따라 상이한 인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그런 정확한 시계”(p61)는 만들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한 명의 무명의 목수가 뉴턴이 죽은 지 삼년 뒤에 런던에 나타나 경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계를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쳤으니 그가 바로 존 해리슨이었다. 그는 스무살이 되기 전에 정확한 시계를 제작한 재능이 있었고, 윤활유가 필요없는 톱니바퀴와 마찰없는 기계를 이미 고안했으며, 육상에서처럼 추를 사용하는 대신 상하 운동을 하는 용수철 세트로 ‘해상시계’를 만들겠다는 구상이 있었기에 그 자신감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뉴턴을 이어 두 번째 왕립 천문학자가 된 핼리는 잘 알려진 시계 제조업자인 조지 그라함을 통해 그를 지원했고, 그 결과 5년 후 존 해리슨은 통상 H-1이라 불리는 그의 시계를 들고 나타났다.


  H-1은 이에 관한 오랜 연구가 시작될 때조차 예전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것은 그 시대의 산물이지만 그 시대를 앞서 가는 것이었다. 그것이 도착했을 때, 세상은 그것을 기다리느라고 지쳐 있었다. 비록 H-1에 처음 착수했을 때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것은 너무 이상해서 사람들은 그 성공에 당황했다.(p89)


  하지만 해리슨은 만족하지 않았다. 어떤 경도위원도 H-1의 성능을 의심하지 않았건만, 그는 상금을 위한 최종시험을 거부하고 다시 4년 후에 H-2를 만들어 왔다. 최종시험을 보고 떨어진 후 새로운 시계에 착수해도 좋았을 것을, 그는 다시 거부하고 H-3를 만들기 위해 사라졌다. 이쯤이면 단지 돈 때문에 하는 일은 아니었다. 아마 이 시기가 존 해리슨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 게다. 결국 H-3를 만드는 데엔 19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그 장구한 시간 동안 다른 이들도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달 거리 측정법’을 통해 경도를 측정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수세기 동안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던 경도 측정에 갑자기 우수한 두 가지 방법이 나타났다. 이 두 방법은 1730년부터 1760년까지 쌍벽을 이루며 진보하였다. 천문학 교수와 수학자가 상인, 항해자, 의회에 달을 약속하는 동안, 해리슨은 외로이 시계의 미로 속에서 조용히 그의 길을 추구하고 있었다.(p101)


  1759년, 마침내 존 해리슨은 주머니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휴대용 시계인 H-4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에겐 시련이 닥쳐왔다. 달 거리 측정법의 옹호자들이 사사건건 그의 성과를 폄하하고 정당한 평가를 방해했던 것이다. 세 번째 왕립 천문학자인 브래들리, 네 번째인 블리스, 그리고 다섯 번째인 매스컬린 모두 달 거리 측정법의 옹호자였다. 특히 매스컬린은 해리슨 일가의 필생의 적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브래들리 등의 경도위원회 천문학자들이 존 해리슨에게 ‘경도 상금’을 주는데 인색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들 자신이 상금에 욕심이 있었고, 그것을 시골 촌뜨기 출신인 해리슨에게 뺏기기 싫어서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들 중 특정한 이가 상금을 원했던 것은 아닐지라도, 출신성분과 문화적 소양이 비슷한 그네들 집단 중 누군가가 ‘경도 상금’을 탈 자격이 있었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존 해리슨을 핍박받는 고독한 영웅으로 극화시키기엔 좋은 관점일지 몰라도, 과학의 발전을 이해하기에 적합한 방식은 아니다. 설령 왕립 천문학자들에게 그런 욕망이 있었을지라도, 그들이 아무런 정당성도 없이 그런 일을 했을 리는 만무하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에 반대했던 수많은 이들이 나름의 논변을 가지고 있었듯이, 해리슨에게 의구심을 품은 천문학자들도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경도 위원회에 소속된 해군 제독과 천문학자는 달거리 측정 방법의 효시 단계에서부터 그 방법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였다. 이는 또한 그들이 실제 겪었던 바다와 하늘에 대한 경험에서 나온 논리적으로 성숙한 태도였다. 대규모의 국제적 과제에 대한 수많은 과학적․실험적 노력 덕분에, 달 거리 측정법은 1750년대 말에 이르러 마침내 실현 가능성을 보였다.


  반면에 존 해리슨은 케이스 안에 담긴 자그마한 시계를 세상에 공개했다. 얼마나 비교되는가!


  더욱이 해리슨의 고안품은 경도와 관련된 모든 복잡한 문제를 그의 작품 안에서 해결하도록 제작되었다. 시계는 수학이나 천문학에 관한 조예가 전혀 없어도 사용할 수 있으며, 시계를 작동시키기 위해 어떠한 경험도 축적할 필요가 없었다. 과학자나 천체에 의존한 항해사의 눈에는 해리슨의 해상 시계에 뭔가 시시하거나 엉터리 같은 점이 있는 것처럼 비쳤다.(p111-112)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달 거리 측정법의 옹호자들은 그들의 방식을 공유할 수 있었지만, 해리슨이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만일 해리슨이 저만큼이나 시대를 앞서간 천재가 아니었고, 많은 발명이 그랬던 것처럼 경쟁자들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제품을 선보였다면, 경도 위원회도 더 쉽게 납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해리슨은 오직 혼자서 자신의 시계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하는 처지였다.


  이런 상황은 해리슨의 시계의 정확도와는 무관하게 다른 의심을 낳았다. “그는 소위 시계의 정확성이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고, 또한 다음 시험 항해에서도 정확하게 작동할지 예측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p138) 말하자면 그들은 기계적인 장치가 반복적인 정확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해리슨이 작업하는 방식은 확실히 장인이나 예술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정교한 H-4는 분명 잘 관리만 해준다면 “다음 시험 항해에서도 정확하게 작동할” 물건이었을 게다. 그러나 만일 그런 시계가 예술적인 명작처럼 이번에만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면? 혹은, 비록 해리슨은 반복해서 그것을 만들 수 있다 해도, 오직 그만이 만들 수 있는 물건이었다면? 그 기술은 그의 죽음으로 묻힐 것이며 그것으로 경도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해리슨에게 시계의 모든 작동원리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고, H-4의 복제품을 만들게 한 경도 위원회의 처사가 전적으로 잘못 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에 대한 탐구를 중시하고 실험이나 장인의 작업을 경시했던 것도 비슷한 종류의 편견에서 나온 것이다. 즉 이성적인 논변은, 인간은 누구나 이성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주의깊게 전달된다면 언제나 비슷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반면 장인의 기술은, 매우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이라 재능이 있는 몇몇 이들에게만, 그것도 불완전하게 전달된다. 경도 위원회의 천문학자들은 달 거리 측정법이 전자와 같은 것이라고, 그리고 해상시계 제작이 후자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결과는 그와 같지 않았다. 오히려 달 거리 측정법은 배운 사람의 기량과 상황에 따라 실행과정에서 많은 오차를 드러냈다. 반면 해상시계는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누구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였다.


  수백 번 해리슨의 시계를 분해해본 당대의 시계 제조업자들은 해리슨 사후에도 결국 해상시계를 복제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들은 경도 위원회의 지원을 받아가며 비용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시계를 만들었던 해리슨의 ‘장인 정신’을 벗어나, 적당한 가격에 해리슨의 것과 비슷한 종류의 정밀함을 갖춘 시계를 생산하는 데에 진력하기 시작했다.


  아널드는 다른 장인들에게 시계 제조의 하청을 주고 자신은 특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조립만 맡아 함으로써 빠른 시간 내에 시계를 만들어 내곤 했다.(p175)


  해상시계를 소수만 사용하는 특별 주문 상품에서 대량 생산 체제로 바꾼 사람은 바로 언쇼였다. (중략) 언쇼는 하나의 기본 형태로 거의 두 달만에 언쇼 크로노미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그것들을 바로 팔았다.(p178)


  이런 식의 대량생산이야말로 기술문명이 모든 것을 앞서는 힘이 되게 하는 원동력이다. 해리슨의 후계자들은 복잡한 기계장치가 인간 두뇌의 이성보다도 차라리 더 보편적인 기계론적 합리성을 통해 무한복제될 수 있음을, 그리하여 인간 생활에 크나큰 도움을 보여줄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총체적인 변화의 한 단면일 것이다. 그러나 해상시계라는 분야에서 만큼은, 그 변화를 포착한 것은 한 남자의 집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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