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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아/오타쿠] 문화의 탄생과 그 의미

조회 수 2009 추천 수 0 2002.01.13 02:59:00
정말 극렬 서태지 빠돌이었군...;;;; 서태지를 위해 [매니아/오타쿠]문화를 헌정하다니...
결코 노빠들에게 뒤지지 않아....;;;
안티조선 우리모두에 이가엘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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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란 무엇인가



산업혁명이 영국을 전범으로 삼고, 부르주아 혁명과 민족주의가 프랑스를 기본 사례로 삼듯이, [매니아/오타쿠]문화의 출발은 일본으로 잡아야 한다. 물론 "매니아"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다른 선진국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매니아/오타쿠] 문화라는 것은, "오타쿠"의 존재가 있기에 그 아래로 두터운 매니아 층이 형성되는 문화 현상을 의미 한다. [매니아/오타쿠] 문화가 그런 식으로 형성된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그러므로 일본의 사례를 들어 그 탄생의 정치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매니아/오타쿠] 문화를 이해하는 지름길일 것이다.

오타쿠에 대한 서술이 이루어져 있는 국내 서적으로는 김지룡의 [나는 일본문화가 재미있다]와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이 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그들의 서술을 기초로 한다.

먼저 오타쿠는 사전적 의미로는 일본어로 "당신, 댁"이라는 뜻을 가진 이인칭 대명사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타가나로 표기하게 되면 "이상한 것을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 참고로 미국이나 유럽에서 otaku는 "일본 만화나 애니매이션 매니아"를 지칭한다. )

"오타쿠"라는 말의 기원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설은, 한국에서 통신이나 네트로 만난 사람들이 서로를 "님"이라고 부르는 반면, 일본에서는 초창기에 "오타쿠"(당신, 댁) 이라고 칭했고 동호회에서의 이러한 호칭이 "이상한 것을 연구하는 사람"에 대한 일반호칭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김지룡에 의하면 어떤 대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팬]과 [마니아]와 [오타쿠]의 단계로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팬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어떤 대상을 몸서리치게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마니아는 대상을 좋아하지만, "열중은 하되 열광은 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라면의 마니아라면 맛 있는 라면 뿐만이 아니라 맛 없는 라면도 먹어 봐야 한다. 폭넓은 지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지룡은 그들을 "수도승"에 비유한다.

그에 비해 수도승 성격의 마니아를 넘어선 "오타쿠"는 "비학문적인 것을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그들은 자신의 관심분야를 마치 석사과정이나 박사과정을 밟는 사람들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라면 오타쿠는 일본 국민이 라면을 좋아하는 이유, 각 지역마다 라면의 맛이 틀린 이유 혹은 배경, 라면의 경제적 효과, 라면과 경기와의 함수 관계 등을 [학문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게임 오타쿠는 데이터를 읽는 체감 속도의 향상이나 인터페이스의 직관성 등을 언급할 수 있어야 비로소 오타쿠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들은 생산자의 수준에 근접한 소비자이다.


주류에 대한 좌절과 혐오감이 오타쿠를 만든다



그렇다면 오타쿠는 왜 일본에만 생겼을까? 이에 대한 김지룡과 이원복의 해석은 서로 다르면서도 유사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김지룡은 오타쿠가 일본에서만 생긴 이유를 대략 세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는 "직인정신"과 "천하제일주의"라는 일본 문화의 풍토.

둘째는 일본경제의 성장.

셋째는 획일적인 교육.

두번째 이유는, 어느 정도 생활수준이 보장될 때 매니아나 오타쿠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에서 논의의 초점과 어긋난다. 따라서 첫째와 셋째에 포커스를 맞춰보자.

흔히 한국에서 긍정적으로 소개되는 직인정신(장인정신)과 천하제일주의는, 한가지 일만 잘하면 천하제일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을 말한다. 그것은 기술자들이 스스로의 기술 개발에 노력했다는 점에 있어서 일본 수공업의 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고, 결과적으로 일본 자본주의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이삼평 등 유명한 도공을 끌고 가 도자기 기술을 발달시켰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런데 어째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도공의 이름은 남아있는데 원조 기술지인 조선의 도공 이름은 남아 있지 않은가? 그것은 이삼평은 기술자로 존경을 받은 반면 조선의 도공들은 천시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청자와 같은 뛰어난 도자기 기술이 실전된 것 과도 큰 관련이 있다. 기술자들에겐 끌려간 일본이 한국보다 훨씬 살기 좋은 땅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조선이 사농공상의 관념에 얽매여 국민의 7할이 실속없는 "남산골 샌님"으로 스스로를 변신시켜 근대적 역량을 훼손한 것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조선은 사대부 이외의 직업에 가치를 인정하지 않은 사회였기 때문에 기껏 상업을 통해 돈을 벌어서 양반 신분을 샀던 것이다. 조선에 상업행위나 수공업 행위를 열심히 하면 "천하제일"이 될 수 있다는 일본식 관념이 있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고 자본주의도 좀 더 발전했을 것이다.

일본 사회는 한국 사회에 비해 계급 관념을 해체하고, 전문인을 우대하는 풍토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한편 직인정신이나 천하제일주의가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사회의 지도층인 무사 계급으로 진입할 통로는 서민들에게 막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천하제일"을 강조해서 상인이나 장인들을 달래게 된다. 그에 비해 한국 사회는 상인과 장인을 인정하기 보다 신분 이동의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불만을 봉쇄했다. 이론적으로는 농민도 양인이기 때문에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예다. 물론 이것은 거의 실효성이 없었지만, 신분제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는 한국적인 방법이었다.

이러한 일본사회와 한국사회의 특질은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 그것이 일본에서는 [매니아/오타쿠] 문화가 형성되는 동인이 되고, 한국에서는 주류에 들어가기 위한 살인적인 경쟁문화가 형성되는 요인이 되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따라서 오타쿠는 일본 사회의 "제한된 다양성 인정" (과거에는 무사 계급, 현재는 도쿄대 출신 우익과 같은 주류를 지키기 위하여) 에서 연유하고 있다.
거기에는 당연히 주류로 편입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좌절과 분노가 담겨 있다. 혹은 자신의 삶을 최대한 긍정하며 주류적인 삶을 혐오하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 이것은 이원복이 말한 오타쿠의 발생 요인과도 관련된다.

이원복은 오타쿠를 지극히 일본적인 "위치 문화", 자신을 어딘가의 위치에 자리매길 것과 그 위치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말것을 강요하는 문화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문화에서 개인은 평생동안 규정된 것 이외의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다. 따라서 방구석에서 할 수 있는 취미활동의 질을 높여서 자아실현을 하는 것이 인생을 가치있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만족스러운 사람은 주류를 혐오할 것이고, 그것이 만족스럽지 못한 사람은 주류에 분노할 것이다.


사회의 획일성과 줄세우기가 오타쿠를 만든다



여기에는 아주 미묘한 긴장관계가 있다. 오타쿠는 주류에 관심없으나, 근본적으로 "안티-자이언츠" (일본 대중문화계의, 주류를 싫어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일본의 회사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야구 구단이다.)다. 그것은 "제한된 다양성 인정"이라는 말장난에서도 드러난다. 직인정신, 천하제일은 인정이 되는데, 그들은 무사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사회는 무사가 지도한다. 마찬가지로 오타쿠들은 일본에서 탄생하고, 인정받을 수 있으나 결코 비주류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 주류-비주류의 편협한 구분은 일본사회에서 아직 유효하다.

그것은 일본사회에도 직인정신과 천하제일주의, [매니아/오타쿠] 현상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획일적인 줄세우기]로 사람을 평가하는 문화가 거대한 실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모순적인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 매니아와 오타쿠 이해의 포인트다.

그리고 그것은 극우적인 일본 사회의 정서와, 다양성 넘치는 일본대중문화라는 모순적인 구조를 받아들이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김지룡이 말하는 오타쿠 발생의 세번째 이유, "획일적인 학교교육"은 이런 의미다.

일본 사회 역시 학벌체제를 정점으로 한 줄세우기 사회다. (물론 현재 붕괴하는 중이다. 최소한 한국보다는 빠른 속도로.) 그리고 그 "계급"을 판정하는 학교교육은 동일한 커리큘럼으로 모든 과목에 능통한 올라운드 플레이어를 만들어내는 교육이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잘하는 것을 더 시키지 않고, 못하는 것을 보충해 주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능하지 않은 것을 싫어하며 그것을 강요당하면 고통을 느낀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학교라는 것은 학문적인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있다기보다는, 오랜 기간 고통과 굴욕을 견디는 참을성과 협조성을 기르는 것을 최대의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오타쿠는 일차적으로 획일화된 학교 교육을 견뎌내기 위한 학생들의 자기 방어 노력에서 연유한다. 단점을 자꾸 주지시키는 지겨운 교육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어 연구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니아나 오타쿠의 관심 중에 학교교육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학교에서 가르치려 했던 "지겨운 것"들에 대해선 취미를 붙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락 매니아, 락 오타쿠는 존재할 수 있어도 클래식 오타쿠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 (그럴 땐 그저 "클래식에 조예가 깊다"고 말한다고 한다.)

김지룡의 분석은 여기까지 나아가지만, 우리는 이 반항적인 학생들의 행동을 좀 더 사회적인 의미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함으로써 일차적으로 학교교육의 획일화된 커리큘럼에 저항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단 한가지 기준으로 그들의 삶을 재단하는 사회 전체를 조소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도쿄대를 나와 대기업이나 관료가 되는 것이 주류와 부모와 사회가 원하는 삶이라면, 그리고 이것을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이 사회가 선택을 강요하는 인생이라면, 오타쿠는 그것을 벗어나 자신의 취미에 몰두함으로써 그러한 관념에 총체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번듯한 직장없이 파트 타임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집을 사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수입의 7할 이상은 자기 취미를 위해 쓴다.....오타쿠가 보여주는 이러한 특질들이야말로 "획일적인 삶"에 대한 반동이다. 도쿄대를 나와 관료가 된 청년은, 도쿄대를 위해 노력한 수많은 젊은이들에겐 우월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자신과 전혀 다른 궤의 삶을 사는 오타쿠들에겐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당혹스러운 감정을 "경멸"로 치환하며 자신의 자존심을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오타쿠들 역시 그 청년을 "경멸"할 것이다.

이는 "일본 대중 문화의 총체적 마니아" 임을 자부하는 김지룡이 [나는 일본문화가 재미있다]를 펴낸 이후 쓴 책이 [재미있게 사는 사람이 성공한다]라는 것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오타쿠는 삶의 철학까지 비주류의 그것으로 바꾸게 된다.


한국사회의 매니아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매니아/오타쿠] 문화를 탄생시킨 일본사회의 문제점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일본사회의 문제점까지 카피해오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획일적인 줄세우기를 강요하는 사회에 살고 있고, 또한 안타깝게도 [제한된 다양성]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일본 대중문화의 놀라운 발전과 세계시장에서의 성공은 (주로 만화와 애니매이션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학교와 사회를 싫어하는 이 특이한 아이들이 대중문화 시장의 헤게모니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근 할리우드를 몰아낸 한국 영화의 눈부신 발전은 사회 전체의 극우적이고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문화에 갇혀있다.

일본의 주류는 극우적이고 조폭적이나, 일본의 대중문화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한국은 모든 사회 분야가 동일하다. 이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대중문화계에 만연한 전근대적인 도제 제도(?), 음반시장에서의 기획사와 방송사의 횡포, 그리고 그 유착 등을 따져보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아이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우상을 [배타적/폭력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우상을 최고라고 말하며,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화를 낸다. 그것은 그들의 학교가 성적을 유일한 가치기준으로 학생들에게 들이미는 바로 그 방식이다. 그들은 대단히 집단적으로 움직이며, 그 매커니즘을 제대로 이해하고 긴밀하게 이용한다. 한국에서 하나의 가수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가수를 만들어낸 기획사까지도 지지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기획사와 방송사는 팬클럽간의 경쟁심리를 유발하여 돈을 번다. 팬클럽끼리 서로 싸우는 나라가 한국 이외에 또 있을까?

한편 영화계 역시 블록버스터의 개봉관 물량 공세에 작가주의 영화들은 상영해줄 극장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모 아니면 도, 소품종 대량생산의 이 사고방식 역시 주류의 그것과 빼닮았다. 조폭 영화의 득세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차라리 애교스럽다. 사람들은 대중문화에서도 주류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한국의 대중문화는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한국 주류문화의 반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구원의 조짐을 얻지 못한 평론가들이 좌절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닌 듯 싶다.

이런 사회에서 [매니아] 문화의 선언은 일정한 정치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지 않을까? 앞서 우리가 살펴봤듯이, 매니아/오타쿠는 튀는 아이들의 단순한 행동양식일 뿐만 아니라 주류를 거부하는 단호한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화적 차원에서의 다양성에 대한 강력한 옹호다.

매니아 문화는 문화가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자살하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한 이후로, 그렇게 믿는 것은 이미 구식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매니아 문화는 문화 영역에서만큼은 다양성과 공존의 사고방식을 구축해야 한다고는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사회 내에서 진보적인 하나의 발걸음으로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론가들은 "문화의 정치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에만 골몰한 나머지, "문화 자체의 정치성"을 무시하고 지나가고 있는 게 아닌가?

문화가 정치를 바꾸어야 하는가? 그렇게 만은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문화가 바뀌면 사고방식이 바뀐다. 그리고 사고방식이 바뀌면 정치가 뭐가 잘못되었는 지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분야가 조폭적인 질서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세상이 온다면, 정치계의 조폭적 관행을 용납할 수 있을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므로. 문화가 정치를 바꾸는 매커니즘은 굳이 필요하다면 그런 식으로 나타나야 한다. 반드시 문화가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을 때에만 정치적이고,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논의는 올바르지 않다.

그래서 나는 서태지의 [울트라 매니아]가 한국 사회에서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울트라 매니아]에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함의가 깃들어 있다. 하위 문화인 청소년 문화를 "주류 대중문화"로 만들었으나, 그 내용의 "주류적 요소"를 타파하지 못하고 떠났던 서태지는 이제 문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말한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도 문화는 ARS 전화를 수십번 넣어 좋아하는 가수를 "일등"에 등극시키라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징그러운 "일등 이데올로기"에 문화를 종속시키는 일이다. 만일 그가 매니아라면 자신의 취향을 탓하는 사람에게 "아니야! 우리 오빠가 일등이야"라고 말하는 대신 그저 "그래 맞어 난 더 미치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서태지가 매니아 문화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 지, 그리고 끼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전에 쓰이던 용어 "마니아" 대신 "매니아"가 대체되었다는 것, (이전에 마니아를 칭하던 사람들도 전부 스스로를 매니아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단어가 대단히 빈번히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울트라맨"이라는 어휘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의 "매니아"가 지극히 일본적인 성격의 "매니아"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많은 경우 서태지가 일본 문화와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비판의 요소가 된다. 왜 그렇게 사는가?? )

무엇보다 서태지는 대중음악계 주류의 스타 시스템을 거부하는 모습을 이번에 보여주었다. TV 와의 선택적 제휴, 사전녹화라는 참신한 시도, 쇼프로 출연 거부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서태지 스스로가 "뮤직 매니아" 혹은 "뮤직 오타쿠"라 불릴 기질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음악만을 열심히 하고 싶어하고 모든 계획을 거기에 맞춘다. 그가 정치에 관심없고 음악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비판하기보다는, 한국의 상황이 음악만을 열심히 할려는 시도가 쉽게 통용될 수 있는 상황인가를 따지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크라잉 넛"처럼 마케팅 자체를 거부하고 인디에 머무르는 가수 이외의 누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매니아/오타쿠] 문화가 한국에 효과적으로 전파될 경우 대중문화 시장 안에서라도 획일적인 줄세우기가 아닌 진정한 문화의 다양성이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지면 한국 대중문화는 사회 전반적인 극우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높은 수준의 경쟁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정치의식"은 그러한 경우에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대중문화의 필요조건일까? 거듭 말하지만 문화에게 정치를 말하도록 강요하기 보다는, 문화 자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매니아/오타쿠] 문화의 수용은 정치적이며, 그것에 앞장서는 서태지 역시 충분히 정치적이다. 그의 정치는 "거세"된 적이 없다.


매니아 문화를 길들이자!



[매니아/오타쿠] 문화는 한국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소비될 가능성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 자체가 일본 사회의 한계의 산물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일본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매니아/오타쿠] 문화를 보다 긍정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노력이 요구된다.

첫째로 매니아/오타쿠 문화 수용의 결과가 일본에서처럼 사회전체와 대중문화의 성향이 전혀 다른 이중적 구조를 가지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을 막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정치 혐오의식은 널리 퍼져 있어도 정치의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 일본 사회의 고민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 혐오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지역정서에 따라 투표하는 분위기가 아직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그것이 정치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로 빠지면 일본처럼 무소속이면 무조건 표를 밀어주는 (코메디언 출신의 무식쟁이라 할지라도) 탈주 분위기로 갈 가능성도 높다. 그러므로 매니아들의 탈정치적 성향을 어떻게 반주류적인 정치적 성향으로 끌어들일 것인가, 그리고 주류의 삶에 거부하는 매니아의 층을 어떻게 두텁게 만들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해볼 필욘성이 요구된다.

둘째는 매니아/오타쿠 문화의 지적인 탐구욕이 학문적인 분야에도 번지게 하기 위한 노력이다. 현재의 한국 교육은 일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에게 학문적인 흥미를 전혀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매니아/오타쿠 들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을 깊숙히 탐구하여 체계를 잡고 서로 토론하며 토론능력을 키운다. ( 그것은 토론과 탐구에 대한 그들의 욕구가 억눌러져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 이러한 오타쿠들의 실력향상이 일본 대중문화의 질의 향상으로 귀결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보다 긍정적인 것은 일본에서와 달리 학문적인 측면에서도 매니아가 나타나는 것일 것이다. "철학 매니아" "경제학 매니아" "토론 오타쿠"의 존재는 있을 수 없는가?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학문적 오타쿠의 형성을 우리는 마땅히 기대하고 유도해야 한다.

[매니아/오타쿠] 문화를 최대한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체질을 개선하는 작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매니아와 오타쿠를 기대한다.

이가엘


Clay

2007.10.21 11:00:55
*.215.30.198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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