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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뮤지션 서태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조회 수 2651 추천 수 0 2001.09.11 00:21:00
아웃사이더 5호에 실린, 원고지 100매 분량의 글이다. 원고료가 50만원이나 나와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서태지 팬덤에서 활동 중이었고 그 팬덤 단체는 대중문화개혁연대라는 연합 단체에 들어가 가요순위프로그램 폐지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문화평론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글이지만, 서태지 팬들 사이에서 약간은(응?) 사랑을 받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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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형(아흐리만)님은 서태지 매니아입니다. 음악과 음악 외적인 문화현상들이 얽히고 설켜 서태지에 대한 다양하게 왜곡된 담론들을 낳고 있다고 보는 그는, " '뮤지션 서태지'를 음악 외적(外的)인 측면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라는 회두를 중심으로 복잡한 서태지 담론들을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서태지는 어쩌면 80년대와 90년대를 갈라놓는 경계선이 아닐까요?
  대중문화 자본이 자기 증식을 위해 이용하고 버리는 생각의 사각지대가 되지 않기 위하여, 뮤지션이고자 하는 이 젊은이의 행보가 저 역시 흥미롭습니다... (아웃사이더 5호 머릿말 중, 편집위원 노혜경)



"뮤지션 서태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


Intro


  음악을 모르는 이가 아티스트를 논해야 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어차피 비극이 무더기로 생산되는 나라라면, 그 무수한 레퍼토리에 하나쯤 더 추가한다고 해도 갑자기 눈물이 더 나오거나 하진 않을 게다. 뭐, 비극이라고 해피앤딩 안 되라는 법도 없다.  
  
  이제부터 나는 서태지를 말하려고 한다. 시끌벅적하게 컴백한 그는 국내 활동을 끝내고 돌아갔고, 여전히 말들은 많은데 하나도 정리는 안 되어 있다. 이 꼬이고 꼬인 '서태지 담론'을 정리해야 하는 이유는 물론 그 스케일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서태지는 이제 대중음악계에서만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그를 둘러싼 담론의 영향력은 문화와 정치를 넘나든다. 그는 과대평가 아니면 과소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그의 상(像)을 올바르게 그리기가 힘들다.

  만약 과대평가라면, 지금처럼 그의 이름이 들어간 텍스트가 지금처럼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브레이크를 걸어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정리가 필요하다. 또 만약 과소평가라면, 그 과소평가의 원인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탐구과정에서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권력구조까지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서태지는 그만큼 덩치가 크다. 대중음악개혁을 원하는 사람, 대중문화 연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서태지에 일정 부분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과소평가도, 과대평가도 거부하고 그의 정당한 몫을 찾아주는 올바른 지점은 어디쯤 있을까? 그것은 그가 뭘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인지를 상기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나는 내가 쓰는 이런 류의 글이 더 이상 나올 필요가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실 대한민국은 "음반리뷰"라고 이름붙일 만한 텍스트가 생산이 안 되는 나라다. 그러니까 "서태지론"에서 아티스트가 실종되어 있다는 것도 큰 문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다른 데서 발생한다. 온갖 사회과학 이론 비빔밥의  프리즘을 거쳐 형체를 잃고 붕붕 떠 다니는 "서태지"를 본래의 위치로 돌려주기 위해서는 나 역시 "음악 외(外)적"인 서태지론을 써야 한다는 것. 짜증난다. 조국엔 음반리뷰가 없는데, 쓸다리 없이 이 짓이나 하고 있다니.

  따라서 나는 "뮤지션 서태지"를 둘러싼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 글은 그의 "음악"을 말하지는 않지만, 그의 담론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그가 "음악가"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킬 것이다.
 
 

서태지 담론-1. 알 수 없는 혐의

   날 좀 가만히 놔 둬 줘 널 배신 못할 나여도 가혹하게 찢긴 상처를 핥았지 가만히 난 착하게 두눈을 깔고 넌 내 고통을 엿보고 난 또 감추려 애썼어 꽤 뚫린 난 저항 할 순 없었지
(서태지6집/ㄱ나니 中)
◆서태지 신보 중 사도-매저키즘 적인 인간관계를 암시하는 것으로 알려진 노래-필자 주-


-변절인가, 실체인가

  서태지를 말할 때 중요한 점은 그에 대해 일관된 관점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6집(원래는 '솔로 2집'이라고 말해야 하나, 그 스스로 6집이라고 말하고 있고 예전의 '아이들'인 양현석과 이주노가 반발한 바도 없으므로 그대로 칭한다.) 컴백 후 그의 행보를 이해할 수 없었던 지식인들은 그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써야 했다.

(1) 서태지는 변절했다 : 이 버전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것이 지난해 <월간 말지> 10월 호에 실렸던 기획기사 제목이다. <투항자로 돌아온 저항군>이란 활자 아래 빨간 레게머리의 서태지는 진보적인 잡지의 표지 모델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서태지가 누구에게 투항을 했느냐이다. 보통은 "여의도 권력"이라고 이름붙여진 공중파 방송, 그리고 상업 자본 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서태지 역시 방송을 이용한 바 있고, 뛰어난 매니지먼트 감각으로 모 재벌의 벤처마킹 대상이 된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투항을 말하는 것은 근거가 있다기보다는 "심증"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예전보다 더 상업적으로 보인다.", "TV에 출연하며 검열을 수용한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2) 서태지는 원래 그랬다 : 최유준 씨의 주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원래(原來)'가 어떤 상태였냐는 것이 될 것이다. 최유준 씨에 의하면 서태지의 음악성은 '탈의미'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애초에 어떤 의미도 담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가 지니고 있는 저항적 카리스마는 시대적 요구(?)에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게 된 한 예술가의 불행을 상징한다.


  어디서부터가 진실일까? 사실 '서태지 카리스마'는 그의 탁월한 이미지 관리 능력에서 연유한다. <서태지 담론>의 김현섭 씨는 서태지의 이미지를 (1) '작고 여린', 소녀적 감성에 부합하는 모습 (2) 팬에게 친구로 다가서는 즐겁고도 친밀한 모습 (3) 작위적일 만큼 선동가적이고 투사적인 모습 (4) 허무주의적·냉소적·무정부주의적인 모습 (5) '음악에 미친' 뮤직 매니아의 모습 등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 중에서 서태지 본연의 모습이 (5)에 가까울 것이라는 것은 여러 사람의 공통된 추측이다. 그러나 한가지 모습에 포커스를 맞춰서 그를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여러 가지 이미지를 가진 서태지는 그 이미지에 걸맞는 노래들을 만들었고, 그 중 어느 것의 음악성이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예컨대, (1)에 해당하는 <너에게>, (2)에 해당하는 <마지막 축제>, (3)에 해당하는 <교실이데아>, (4)에 해당하는 <시대유감>, (5)에 해당하는 <필승>의 음악성을 비교해 본다면 어떨까? 서태지는 자신이 관리하는 이미지에 따라 훌륭한 곡을 조립해 냈다.


  <교실 이데아> <발해를 꿈꾸며> <컴백홈>이 치열한 기획의 산물이라는 건, 서태지로서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는 언제나 그러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그의 탁월한 매니지먼트 감각을 생각해 볼 것을 요청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른 쪽으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서태지는 대중음악인이다. 그는 '장사'를 할 권리가 있다. 문제는 그가 '상업적'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도덕이 올바른 가 하는 것이다.


-'장사꾼 서태지'의 도덕성


  나는 그를 평가할 때 그의 직업을 잊지 말자고 말했다.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자신을 뮤지션으로 봐달라."는 서태지의 말을 "자신을 의지하는 팬들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보는 평론가가 있다는 데에서 분명해진다. "뮤지션"이라는 말에서 "책임 회피"를 읽어낸다는 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뮤지션이 "딴따라"에 불가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그런 류의 편견은 대중음악계에 음악적 자의식을 가졌다고 판단할 수 있는 뮤지션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현실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뮤지션"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텍스트가 소비되는 한 "생산자 서태지"는 그것에 대한 평가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의 말대로 "메시지는 곡의 5%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반대로 "뮤지션"이라는 잣대를 뛰어넘는 버거운 논의가 그를 향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게 어떻게 서태지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서태지 텍스트"가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연장선상이 아닌, 미국 대중가요의 텍스트 진화에 기대고 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마땅히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학문과 전반적인 문화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서태지"라는 실례를 들어 지적한 논의여야 한다. 그런데 종종 그것이 서태지를 비난하는데 활용된다. 까놓고 말하자면, 서태지가 거기에 책임을 느끼거나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따라서 나는, "음악"을 창조하는 "생산자" 서태지가 "대중음악계"에서 "장사"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거기에 대해서만 도덕성을 판별해 보도록 하겠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다음의 기준을 적용시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째, '기획자' 서태지는 자신의 기획물에 대해 진실한가. (지식인으로 따지면, 언행일치를 묻는 것일 게다.)


둘째, 서태지의 '기획'이 완전한 '사기'라고 말할 수 없는 자의식이 존재하는가.


  첫째가 성립한다면, '장사꾼 서태지'를 비판할 수는 없다. 둘째가 성립한다면, '음악인 서태지'는 일단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자의식' 바깥의 해석은 '과대평가'가 되고, 그의 자의식을 부정하는 것은 '과소평가'가 될 수 있다. (최유준 씨의 글은 그것에 대한 공공연한 부정이다.)


  첫째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진실한 편이다.'라고 답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고교 중퇴의 학력을 가진 서태지는 성공 이후에도 제도권 학교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다.

(2) 서태지는 북한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보이는 편이다. 은퇴전의 그는 한 라디오 방송에서 '북한에서 콘서트를 하고 싶다.'라는 의사표명과 함께 '김일성 주석도 초대하고'라는 말이 문제가 되어 방송사의 사과 요구를 받은 적이 있으나 '잘못 한 게 없다'고 잘라 말한 적이 있다.(연예뉴스 00' 11.10) 컴백 이후에도 '평화 통일 콘서트'에 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솔직히, 북한이 빨간 머리를 받아주겠는가. -_-;;) <동아닷컴>과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는 현재 북한 어린이를 돕는 '어깨동무' 활동을 하고 있는 듯(?) 하나, '좋은 일은 남모르게 하는 것'이라며, '그냥 모른 척 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래서인지 <동아일보>에 게재된 인터뷰엔 나오지 않는다.)

(3) <컴백홈>이 <교실이데아>와 양립할 수 없다는 최유준 씨의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없다. 서태지는 <컴백홈>에서도 역시 제도권으로 회귀하지 않고 있다. '부모의 제압'(이 부분은 공륜의 재심의에 걸려 '삐~'소리로 가려졌다.)을 문제삼는 그가 가출 청소년들에게 돌아오라는 이유는 '괜찮은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좋아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래 이젠 그만 됐어.'라고 충고를 거절하는 이 노래를 '부모' 앞에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뮤지션 서태지'의 도덕성

  둘째를 말해보자.

   칼과 바다를 착각한 것만큼 재촉했던 내게 넌 알 수 없는 혐의를 남기고 난 괴기한 춤을 남겼지. (서태지6집/탱크 中)


  '알 수 없는 혐의'는 콘서트 장에서도 반복된다. Intro가 끝나고, 감옥 안에 갇혀있는 서태지가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내면, 스크린 위로 자막이 말려 올려간다. '알 수 없는 혐의를 남기고'는 다른 글자보다 유난히 크다. '괴기한'? 스스로 <시대유감>을 '괴기한 노래'라고 칭한 서태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알 수 없는 혐의. 내게 죄(=혐의)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혐의를 반성하기는커녕, 자신에게 혐의를 부여한 상대방의 언어를 사투리로 규정하고 있다. (내 사투리로 내가 늘어놓을래.<교실이데아>中) 그는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적어도 상대방에 대해서 대결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의 표현은 쓰지 않는다. 그 경우 대립(對立)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태지는 누군가를 건드릴 생각이 없다. (5)번! 뮤직매니아!! 그런데도 그에겐 '혐의'가 남겨진다.


  가장 답답할 때가 외국의 음악 동료들이 이런 제반 규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나라를 히틀러 소굴 정도로 인식할 때이다./초상권 및 저작권 문제 그리고 명예훼손 같은 인권침해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한국의 상황에서 성공한 뒤에 매니저와 갈라선 다는 것은..... 욕 많이 먹었다./한마디로 이 파문은 무지에서 오는 호들갑이다....록음악 자체가 악마 숭배의 음악이라는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모든 록 음악을 뒤집어 추적하는 기독교 단체에서 먼저 이 사실을 유포하고 나를 마녀사냥 하려고 하고 있다.


  문제의 <리뷰> 창간호, 강헌과 서태지의 대담에서 주워 모은 서태지의 말들이다. '록은 부조리한 현실과의 끝없는 긴장이며 그것에 대한 음악적 반동'이라고 말하는 강헌이 서태지와 동상이몽을 하고 있다는 최유준 씨의 진단은 적확하다. 서태지는 기껏해야(?) '알 수 없는 혐의'에 반항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현실'과 별로 '긴장'을 가질 생각이 없는 듯 하나, 사실상 그것이 실현된 적은 없다.


  서태지는 뮤지션이기도 하지만 뛰어난 엔터테이너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의 모든 것을 기획한다. 이미지 관리, 스케줄 관리, 콘서트 장 음향 체크, 심지어 영상물 편집까지......그것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이다. (그러나 가치평가와는 관련없이 한국적 상황에서 "뮤지션"이 되기 위해서 대단히 유효한 능력이다. 그가 음향 기기를 방송국의 전문가보다 잘 다루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TV와 대결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그가 스스로를 기획하기를 원할 때, 그것이 실현이 안 되는 상황이라면 그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이 아니다. 명백히 '부조리한' 상황이다. 서태지에게 '저항성'이 있다면 단지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는 그다지 참을성이 좋은 편은 아니다. 레게머리를 규제한 방송사에게 숙이고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쇼프로에 출연해야 순위프로그램에 올려주겠다는 방송사의 제의를 거절하기도 했다. 데뷔 직후 매니저와 법정 공방을 벌이며 결별하고, 초상권을 침해하는 기업과 투쟁을 벌인다. 그런데 이 '저항'이 강헌의 그것과 어긋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저항성'을 드러냈다고 평가받는 3집 활동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알 수 없는 혐의'에 대해서만큼은 서태지의 '저항'이 상술이 아닌 체질이라고 봐야 한다. 어쨌거나 그러한 연유로 서태지는 별로 현실에 관심이 없으면서도 저항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3집과 4집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고 보는 게 더 옳다. <교실 이데아>나 <컴백홈>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가 주변 상황에 눈을 돌릴 때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수준의 것이다. (멀리 나가지 않고 '학교'와 '집'을 문제삼은 것은 오히려 진솔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리고 4집 때의 공륜과의 투쟁은 '알 수 없는 혐의'를 '무혐의'로 만들려는 노력의 절정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기에도 그것을 읽어낸 사람은 있었다. 예를 들어 평론가 이영미 씨는 '서태지와 아이들' 3집에서 진정으로 주목해야 할 곡으로 <내맘이야>와 <재킬 박사와 하이드>를 꼽았다. 그것이 그녀가 나름대로 서태지의 텍스트에서 뽑아낸 대표적인 두가지 의미, 즉 '즉자적인 자유의 추구'와 '자아분열'을 가장 잘 설명한 다는 것이다. <교실이데아>와 <발해를 꿈꾸며>의 쇼크는 필요 이상 과장되어 있다.


  이상의 논의로 보자면, 서태지는 '변절'하지는 않았으며, 일관되게 기술하기 힘든 여러 가지 특성들을 가지고 있으나, 그 각각의 역할에 나름대로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서태지가 당시 X세대-일단 우리나라에서 당시에 그렇게 불려졌다.-의 대변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세대의 요구를 모두 대변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천의 얼굴' 속에 숨겨진 진실 속엔, '뮤직 매니아'로서의 모습 뿐 만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엔 저항할 줄도 아는 자주적 뮤지션(동음이의어인 것 같다. 뮤지션이 자주적이지 않을 수도 있단 말인가!)의 얼굴도 숨어 있다는 것에 그럭저럭 동의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성격이 가만히 있어도 간섭하는 사람이 많은 한국적 상황과 맞물려 그의 저항적 카리스마가 탄생했다면, 그것을 무조건 사기라고 매도하기도 힘들다.

 
서태지 담론-2. 돌아온 대경성에서


여지껏 힘겹게 버틴 여긴 곧 파멸적인 온 도시 주위를 큰 권위로 감싼 것 같지 미리 예측 못했던 일이 아니란 말이 쉽게 들렸던 거리 급격한 발전 다 해냈다 믿는 건 막막한 재도전 기권했던 넌 절대 안돼 그건 미친 건배 이젠 또 다신 절대 (서태지6집/대경성 中)


-왜 과소평가인가?

90년대 문화계 엘리트들이란 80년대의 정치적 관심이 좌절됐음을 인정한 뒤 발빠르게 문화 영역으로 관심을 돌린 사람들이다.
(최유준<음악을 신앙하는 이들에게>아웃사이더 3호 p115)


  어째서 서태지는 "저항의 상징"에서 "저항의 대상"으로 전락했을까? 그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대중음악계'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사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활동의 그는 철저하게 음악인으로서만 활동했다. 그의 '투쟁'은 철저히 '대중음악계' 안에서만 이루어졌다.


  다음의 사실을 상기하자. 우리가 앞서 본 '알 수 없는 혐의'에 대한 서태지의 투쟁은 그의 데뷔 시절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그런데 그가 <교실이데아>와 <발해를 꿈꾸며>를 부르기 전에는 별로 그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는 것. 왜? 기자들이 '대중음악계' 안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세력의 신경을 거스르며 기사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서태지가 무슨 일을 하는 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의 '투쟁리포트'가 공개된 것은 그가 '정치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었을 때다.


  적어도 '음악 평론가'라는 직함을 달고 다닌다면, 대중음악계 안에서의 진보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메시지를 전파하는 뮤지션이 나오는 것은 물론 소망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다양한 음악이 존재할 수 있는 '대중음악계'가 존재할 때 더 가능성이 커지지 않겠는가? 음악 대중이 한가지 음악에 길들여져 있는 상태에서 '저항'하는 뮤지션을 고대하는 것은 너무 사치스럽다.


  나는 감히 서태지가 지금도 '진보적' 뮤지션이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의 근거는, 그의 존재가 대중음악계의 변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첫째로, 서태지는 대중음악계를 지배하는 권력들과 직접적으로 싸우는 유일한 뮤지션이다. 이것은 그가 TV, 신문, 기획사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드러날 것이다. 둘째로, 그의 사상과 행동은 대중음악계의 다양성을 옹호하고 있으며,(6집 타이틀 곡 <울트라맨이야>) 그 결과로 그의 팬들이 주체적인 대중음악계 개혁 운동에 나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 연대"가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발생한 "가요순위프로그램 폐지운동"이 4 만명에 이르는 서명을 받고, 많은 단체가 참여한 "대중음악개혁연대"를 출범시키게 된 데에는 "서태지 팬덤"의 열성적인 역할이 큰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시스템의 딜레마


  한국 가요 산업은‘스타 제조 시스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도 엄연히 스타는 존재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문제는, ‘스타’가 가요 시장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데에 있다. 이 시스템에는 크게 두 가지 권력이 존재한다. 하나는 기획사이고, 하나는 방송사이다. 전자는 스타 예비군을 생산하고, 후자는 스타를 탄생시킨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가수는 TV에 가장 많이 나오는 가수이다. 이 도식은 다른 나라에선 성립하지 않는 도식이다. 스타는 음악성보다는 TV에서 쌓은 이미지로 앨범을 판다. 이미지를 쌓는다는데 굳이 가요 프로그램 출연만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수들은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고, 그들의 이미지는 대중에게 더욱 친근한 것으로 다가간다. 방송사는 텔런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그들을 부려먹을 수 있다. 서로 이득인 것이다. 이 상황에서 방송사의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를 원치 않는 가수는 인기가수가 되기가 어렵다. 그것은 아직 우리나라의 대중이 ‘취미로서의 음악’에 익숙치 않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 스타는 '주류'고, 한국인은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게 아니라 '주류'를 소비하기를 원한다.


  이 기득권 중 한 축인 TV의 가요 지배는 조용필의 시대로부터 시작되었고, 다른 한 축인 기획사의 가요 지배는 서태지 데뷔 이후 형성되기 시작하여 그의 은퇴 이후에 확실히 다져진다.


그를 게릴라라 칭한다. 게릴라는 어딘가에 침투된다. 주로 침투의 대상이 되는 곳은 적진이다. 아니면 적진의 후방이거나. 그는 자기 본심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활동하지 않는다. … 서태지는 문화의 가장 상업적인 시스템인 대중가요 시스템 속에서 활동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의 본 무대가 아니다. 그는 침투해 들어간 것이다(라고 믿어진다). … 그런데 스타 시스템이 이상한 방향으로 그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 시스템은 말한다; 좀더 나를 때려줘! … 서태지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게릴라이므로 계속해서 반항적인 몸짓을 해야 하고 반항적으로 시스템을 거부하면서, 시스템에 흠집을 내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더 원하고 그는 더 많은 이윤을 남긴다. 서태지가… 반시스템적인 활동을 하면 할수록 시스템은 더욱 그를 원하고 그는 더욱 공고히 시스템에 얽혀든다. 급기야 게릴라는 자신이 적군의 게릴라였다는 것을 밝히고 자폭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는 정말 게릴라였을까? … 그는 자기 존재의 내용을 텅 비움으로써 자신을 역규정한 한국 최초의 가수였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에게는 존재하는 바로 그 ‘현재’만이 있다. 그의 ‘현재’는 시시각각 그의 표면에 등치되고, 그 시시각각의 모든 것이 그의 텅 빔을 구성한다.
(성기완, <문학과 사회>, 1996년 가을호, p.1410~1411)


  성기완 씨는 그의 '텅빔'이 더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서태지의 딜레마'는 서태지의 존재감이 희미해져 감에 따라 해소된 것이 된다. 갈등을 느끼던 '게릴라 서태지'가 시스템 안에 녹아들면서 상황이 끝난 것이다. 정말 그렇게 봐야 할까?


  필자는 오히려 시스템과 서태지의 투쟁은 컴백 활동 이후에 더 눈에 띄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서태지와 공륜과의 투쟁은 대단히 극적이고 흥미진진하지만, 이미 공륜은 사라져가는 낡아빠진 권력이었고, 마지막으로 휘두른 심술 나쁜 철퇴에 졸지에 피해자(?)가 된 서태지에 의해서, 불명예스럽게 퇴장할 운명이었다. 당시엔 국회에서도, 언론에서도 서태지를 지지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태지의 '저항'을 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태지가 딜레마를 가진다면, 서태지를 다루는 시스템에서도 똑같이 딜레마를 가진다. 이번 컴백에 있어서, 서태지에게 딜레마를 느낀 '시스템'은 TV다. 서태지가 주류 기획사를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TV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몇 사람의 말을 빌리면, '여의도 권력과 결탁'했다. 자, 여기서 TV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서태지는 돈 덩어리다. 그런데, 그의 말에 따르다 보면 시스템은 권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주판알을 굴린다. 시스템의 일부는 그를 거부하고, 시스템의 일부는 그를 받아들인다. 거부한 쪽을 보자. 그들은 그들에게 비협조적인 몇 명의 가수에게 그랬듯 서태지를 단순히 왕따를 시키지는 못한다. 돈 냄새가 술술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무리한 공격을 가한다. 'SBS 한밤의 TV 연예'가 서태지에게 가한 조잡한 인신공격을 상기하라. (모 가수 팬이 서태지를 욕한 것을 무삭제로 자막까지 곁들여 방송하고, 소위 "신비주의"를 대중을 무시한 상업적 전략으로 치부하는 등, SBS 출연을 거부했던 서태지를 폄하하기 위해 잔머리를 많이 굴렸다.) 받아들인 쪽은?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최대한 지키면서 서태지에게서 돈을 뜯을 방안에 골몰하게 된다. MBC와 서태지의 줄다리기 협상, KBS가 서태지를 평화콘서트에 출현시키기 위해 취한 '염색금지 해제 조치'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서태지는 이번에 TV를 '선택'했다.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그곳에 들어가지 않겠다.' 이 상황에서, 딜레마를 느끼는 것은 서태지가 아니라 TV다. 그들은 항상 고민했다.

  
  신문의 경우, 전혀 고민할 필요 없다. 서태지가 아무리 설쳐도 그들의 기득권엔 도전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경우, 고민 하나도 하지 않고 (돈 가는 대로) 행동한 흔적이 역력하다. 살펴보도록 하자.


-서태지 vs TV


깡통같은 자식들 내가 아무래도 그렇게 멍청할 것 같냐 내 마이크에 누가 껌을 붙여놨어 진짜 좀 더럽게 좀 굴지마 너의 맘대로 살아가도 돼 상관없어 그대로 썩어가도 널 누가 왜 너는 그냥 맞기만 해 다들 왜 그냥 멋대로 돼 TV TV TV (서태지5집/Take Two 中)

퀴즈 하나 풀어보자. TV는 가수를 어떻게 통제할까?

정답: (1) 가요 순위프로그램의 순위 (2) 연예·쇼 프로그램 출연


  가요 순위프로그램의 순위 집계 방식은 방송사마다 차이가 있다. 음반 판매량, 매체 출연빈도, ARS 전화 투표, 사내 음악 PD들의 투표까지. 그런데 순위의 기본이 되어야 할 음반 판매량은 정작 우리나라에서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방송사가 작위적으로 뺄 수 있다.


  대부분 다 어떻게든 TV에 나오기를 원하지만 간혹 (2)번을 거부하는 가수도 있다. 굳이 읊자면 서태지, 이소라, 이승환, 김현철 등이다. 그런데 (2)번을 거부하면 (1)번을 활용한 탄압이 가해진다. (순위에서 삭제된다!) '서태지와 아이들' 당시에 서태지는 워낙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외성을 인정받았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순위에서 '안 삭제' 되고 지나갈 수 있었을 런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요구한 것이 있었다.


이런 방송사와 가수들 사이에 헤게모니의 전복을 가져온 것이 서태지였다. 그는 새롭게 활동을 시작하며 무슨 이유에서인지 MBC <음악캠프>에만 스페셜 형식으로 자신의 무대를 허용했다. 그리고 100만장의 음반판매고를 올린 서태지는 MBC를 제외한 두 방송사의 순위에서 아예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현재 KBS <뮤직뱅크>의 CP이자 <이소라의 프로포즈>를 만들었던 박해선PD는 서태지를 방송 쪽에서 배제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서태지 매니지먼트쪽에서 컴백하고 방송 출연하는데 10억원을 내라고 했다. 그러자고 했다. 우리 프로그램에서 (다른 가수들은) 보통 1곡을 부르는데 3곡을 하자고 하더라. 그래서 또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서태지 쪽에서 방송사 장비로 내 사운드를 잡아내려면 10시간도 넘게 걸리 거다. 그러니 사전녹화를 해서 편집도 직접 해서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는 못한다고 했다. 그러자 서태지 쪽에서는 그렇다면 순위프로에서 빼달라고 해서 뺴게 되었다." 서태지 팬클럽관계자는 출연료와 관련해 "이번 매니지먼트를 담당한 양군기획에서 이미 사실과 다르다는 해명을 들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출연료 액수를 떠나 박 PD의 발언에는 순위프로그램 자체의 모순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음악평론가 신현준씨는 "내가 빼 주시오 하면 빼 준다는 건 순위프로그램의 순위가 이미 그 공정성을 잃었다는 얘기다. 서태지같이 방송사의 파시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가수가 나와 방송사를 선택하는 식으로 헤게모니가 이동한 것도 어쩌면 순위프로그램이 자승자박한 꼴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씨네 21 289호 '가요순위프로그램 폐지 운동이 일어나는가?' 中)


  서태지의 컴백 무대에서의 립싱크가 비판받으면서도 '사전녹화'의 의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립싱크는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구태의 연한 립싱크와 앞으로의 라이브를 목표로 한 일시적 립싱크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도 사실 이다. 평론가들은 그 구별을 친절하게 생략함에 뒤이어 그의 사전녹화에 연관된 논쟁에 침묵하는 불친절을 보였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우승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이 있다. 모든 경기를 진흙 구장에서 치르는 것이다. 그 누가 태극전사들을 진흙 구장에서 당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현재 '가요를 지배하는' TV의 성채인 가요순위프로그램 공연장은 '진흙 구장' 이다. 그래서 외국의 유명한 가수들이 나와도 안 하던 립싱크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번에 리키 마틴이 한국에 와서 립싱크를 하는 모습을 봤다. '한국의 리키 마틴' 홍경민이 그 앞에서 라이브 무대를 선보였다고 뿌듯해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무대를 '진흙 구장'에서 '잔디 구장'으로 옮기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한국 축구가 프랑스에게 박살 나듯이. 사실상 밴드 음악을 추구하는 가수 는 순위프로그램에 나와 라이브를 한다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손으로 악기 를 연주하는 시늉만 하는 밴드 음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도 TV가 가요를 지배하 는 현 상황에서는 그런 수모를 감수해야 한다.


  사전 녹화란 무엇인가. 스스로 '잔디구장'을 만드는 것이다. 서태지는 매회당 1억원 정도의 자비를 투자해서 무대를 만들었다. 그것은 총 6회에 걸쳐 서울시내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공연장, 수영장, boxing장, 고압전선 철조망 등 매번 다른 모양의 무대가 연출되었고, 최소 700명에서 3.000명까지 수용인원도 다양했다. 이를 통해 서태지는 1만 5천명의 팬과 직접 만날 수 있었고, 팬들은 '공짜 콘서트'를 통해 락 콘서트를 즐기는 법을 배웠다. 언제 어디서 공연이 열리는지 신발 끈 매고 뛰어갈 준비를 하고 사서함을 기다리던 '서태지 매니아'들은 게릴라 콘서트를 비웃으며, '우리야말로 진짜 게릴라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상 서태지 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방송과 트러블을 일으키는 중에서도 사전녹화를 실행할 재력을 가지고, 그것을 멋지게 성공시킬 관객 동원력을 갖춘 사람은 대한민국엔 서태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서태지 한 사람의 돌출적인 행동으로만 치부될 성질의 사건이 아니었다. 서태지는 KBS와 SBS의 가요순위프로그램에서 제외됨으로써 이미 가요순위프로그램의 공신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MBC에서 버젓이 1위를 하는 서태지가 다른 방송사엔 등장하지 않는 것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녹화는 그것을 넘어서 TV 가요프로그램에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었다. 순위프로그램 안에 포함되는 형식이더 라도 좋다. 순위프로그램에서 쇼의 요소는 약화되고, 가요 무대로서의 역할이 강화될 것이 다. 그것은 사실상 공중파 방송이 가요에 대한 지배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대중음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질 높은 라이브 무대는 오직 사전녹화를 통해 서만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런데 필연적으로, 이런 변화의 조짐에 대한 반동적인 움직임이 나타난다. 선정적인 스포츠 신문들이 '조성모 반란'이라고 이름 붙인 그 사건이다. 막강한 기획사 GM을 등에 업고, 조성모는 MBC에 '출연 거부' 선언을 한다. 서태지에 대한 '특혜'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MBC 고재형 PD는 '특혜라는 점은 옳으나, 서태지에게는 특혜를 베풀 자격이 있다.'는 논리(!)로 맞섰다. 스포츠 신문들은 '특혜론'으로 받아쓰고, '조성모와 서태지의 자존심 싸움'으로 흥미진진하게 사건을 묘사했다. 사전녹화의 의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서태지의 립싱크를 비판하던 평론가들조차도. MBC는 굴복했고, 사전녹화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스포츠 신문의 어줍잖은 '특혜론' 속에서도 한가지 드러난 것이 있다. 그것은 가요순위프로그램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가수와 방송 간의 권력 관계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가요 톱 10'에 길들여져 있는 소비자들이 전혀 느끼지 못했던 그 사실이 이제 와서야 비로소 부각된 것이다. '가요순위프로그램'의 체제 내 개혁을 일으킬 수도 있었던 '사전녹화'는 이렇게 KBS와 SBS에서는 원천적으로 거부되었고, MBC에서는 의의에 대한 이해 없이 '서태지에 대한 특혜'정도로 받아들여지다가, 시스템에 호혜적인 가수와 기획사의 반동으로 수지타산이 적자로 돌아서자 간단히 포기되었다. 따라서, 자발적 인 개혁을 거부한 이들 방송 3사의 행동은 이때부터 필연적으로 그들의 영향력을 타도하는 '가요순위프로그램 폐지 운동'을 예고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사전녹화는 서태지에게 만족스러웠을 리가 없다. 제대로 된 나라였다면, 스스로 편집까지 해서 납품하는 사전녹화 방영분에 대해서 MBC가 응당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었는지, 그는 콘서트 방영분에 대해서는 MBC에게 돈을 낼 것을 요구 한다. 스포츠 신문들은 '돈 밝히는 서태지'의 모습을 조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MBC와 서태지 측은 한참 줄다리기를 했고, 결국은 모 기업에서 대신 서태지에게 돈을 지불하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이렇듯 서태지는 TV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그랬다면 그저 웃고 지나칠 일일 수도 있으나, 이번 활동의 경우 TV를 통한 라이브 & 락 문화 저변확대와 뮤지션의 권리 쟁취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도 사실이다. 서태지 본인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문화일보] 우승현 기자의 인터뷰에서 "저항적 로커임에도 검열을 당하며 방송에 출연했다. 이 점을 비판받았는데,‘여의도 권력과의 결탁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서태지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사전 제작한 공연실황을 내보냈으니깐 이번엔 방송에 이용당한게 아니라 내가 방송을 통제하며 이용한 거라 봐야한다. 힘들긴 했지만 콘서트 실황을 방송할 땐 3억을 받았으니 대우를 제대로 받으면서 이용한 것이다. 내 방식대로 할 수 있는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보는 매체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한 사람의 열외자의 행동은 분명히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고, 다른 이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 균열의 증거들을 인용한다.

인기그룹 god의 ‘거짓말’뮤직비디오가 KBS방송심의에서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죠? 그런데 불가의 이유가 멤버들이 뮤직비디오에서 착용한 귀고리 때문이랍니다.최근 서태지의 영향으로 연예인들의 두발·복장에 대한 공영방 송 KBS의 규제는 다소 완화된 듯 했는 데요. (KBS는 평화콘서트의 서태지 출연을 위해 급히 두발규제를 없앴다.-필자 주-)그러나 현재 가이드 라인 상 서태지 와 같은 빨강머리는 용서해도 남자 연예인의 귀고리는 절대 불가라고 합니다 .KBS의 규제에 답답증을 호소하는 가수들 사이에서는 ‘서태지여, 귀걸이를 해다오라는 자조 섞인 말이 오간답니다.
([스포츠서울][연예팀방담] ‘서태지여,귀걸이를 해다오')

싸이의 음악은 다분히 안티적이고 언더적이다. 그런데도 그는 공중파 방송의 주말 저녁 오락 프로그램에 빠지지 않는 게스트다. 저항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방송 출연이 너무 잦은 것 아니냐고 슬쩍 떠보았다.
"방송국을 이길수 있는 가수는 서태지씨 밖에 없어요. 저같이 인지도 없는 가수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방송국에 기본적으로 해줘야 할 부분이 있어요. 그리고 홍보도 되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죠"
([마리끌레르 5월호] 싸이 인터뷰 中)


-서태지 vs 스포츠 신문


난 신문을 오래 보면 눈이 뒤로 돌아가 내가 이루려던 꿈에 니가 깔리진 마 날 행복하게 만들거라면 (서태지와 아이들 3집/내맘이야 中)


  콘서트 분위기가 절정에 달한 <시대유감>. 간주가 나올 때 공중에서 가상의 연예 스포츠 신문이 내려온다. <서태지 핌프락 표절>이라는 커다란 표제가 눈에 띄는 그 신문. '컴백홈 표절로 은퇴했던 서태지, 다시 표절'이라는 부제도 보인다. '한을 풀 수 있기를...'이라는 가사를 읊은 서태지는 '한이 풀렸어요?'라고 팬들에게 묻고, '아니오'라는 대답을 들은 후 신문을 찢어서 팬들에게 뿌린다.


  나는 아까 "기자들이 '대중음악계' 안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세력의 신경을 거스르며 기사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을 사용했다. 이 말이 '오버'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하나의 실례를 제시하겠다. 서태지는 3월 11일 밤 가요계의 주류 음반사인 예당 엔터테인먼트와 라이브 앨범 및 영상물에 대해 계약을 체결했다. 라이브 앨범은 4월 11일에 출시되었다.


[스포츠조선] 서태지 CD에 담은 '석별의 정' 2001/04/18
[스포츠서울] 서태지, 음악계 '도전과 자유'의 수호신 2001/04/16
[일간 스포츠] "우리 또다시 서태지를 기다려" 2001/04/13
[스포츠투데이] “우린 알아요! ‘태지의 화’ 비밀을∼” 2001/04/13


  제목만 봐도 닭살이 돋는다. 본문 내용은 더 심각해서, 심지어 ET와 예수에까지 비교한다. 난리도 아니다. 원래 이런 뻥튀기가 스포츠 신문들의 관행이었다면 또 말이 다르겠지만, 이 신문들은 그간 줄곧 서태지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를-가끔은 '소설' 쓰듯이
-쓰던 신문들이다. (TV와 대결하는 서태지를 그들이 어떻게 묘사했는 지는 위에서 말했다.) 그들이 정규앨범도 아닌 라이브 앨범에 이렇게 난리 부르스를 추는 이유가 뭘까? 예당 측에서 돌린 '보도자료+α'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서태지가 스스로 만든 인디 레이블인 '괴수대백과사전'에서 앨범이 나왔을 때에는 이런 반응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기야, 여전히 똑같은 점이 있다. 그것은 저들의 기사가 '앨범 리뷰'를 쓰기 위한 노력조차도 기울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스포츠 신문들은 서태지를 이용해서 재미를 많이 봤다. 사실 서태지를 씹는 것이 옹호하는 것보다 이득이 된다. 서태지를 옹호하면 팬이나 신문을 사보겠지만, 서태지를 씹으면 팬과 안티 세력이 모두 사 보지 않은가. (서태지 팬보다 서태지를 더 사랑하는 사람 들이 "서태지 안티"다. 행여나 해외 음악 웹진에서 서태지를 호평하는 리뷰가 나오면 안 되는 영어실력으로 그곳 토론방에 쳐들어 가고, 일본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공연 주최측 홈페이지에 들어가 그를 비난한다. "서태지"를 추적하다보면 외국 사이트 여기 저기 서 한국인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태지가 그렇다고 손해를 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 덕분에 일반인들은 사전녹화니 뭐니 하는 일은 전혀 모르고 돈 밝히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건방진 서태지의 이미지만 상상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서태지의 팬들 사이에서 '언론'은 더 이상 공신력이 없다. 그것은 방송 출연을 자제하며 인터넷 방송 등의 팬과 만나기 위한 다른 대안을 모색하던 서태지의 의도와도 맞닥뜨려지는 것일 것이다. 할 일 없는 스포츠 신문들은 매번 콘서트마다 오프닝 밴드의 이름도 오기(誤記)하며 서태지를 도왔다. 이제 서태지 매니아들이 스포츠 신문의 기사에 일회일비하는 일은 없을 듯 하다.


-'서태지의 싸움' 어떻게 볼 것인가


  서태지에게서 '저항'을 기대한 사람의 대다수는 그의 이러한 싸움이 별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 번 강조하듯이, 그는 음악인이다. 음악인이 자기 바깥의 현실을 돌볼 때, 그 우선 순위가 음악계가 되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대중음악계의 양대 지탱 축은 매체와 엔터테인먼트 업체라고 할 수 있는데, 서태지는 그 중 매체에 더 관심이 많은 듯 하다. 이번 앨범의 <탱크>와 <인터넷 전쟁>의 가사가 그것 을 증명한다. <탱크>는 서태지 5집의 에서 나타난 TV에 대한 비판 의식을 그대로 가져간다. 전자음으로 뭉개버린 히든 가사는 좀더 직설적인 내용을 담는다.


Video alters quickeared auditors.
Only pick on video or internet.
◆해석: TV는 제대로 된 귀를 가진 음악청취자들을 변질시킨다.
오직 TV 아니면 인터넷 중 하나만 골라라.


  <인터넷 전쟁>은 인터넷의 익명성, 개방성에서 유래하는 부작용을 지적한 노래이다. 겉으 로 드러나는 인터넷의 나쁜 점만 부각시킨다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인터넷 방송, 서태지닷컴 등을 통해 팬과 접촉하려는 그의 시도를 볼 때, 그리고 <탱크>의 히든가사를 통해서 볼 때, 서태지는 오히려 인터넷에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에 그 폐해를 지적하고 넘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서태지의 시선은 뚜렷이 매체를 향해 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혐의'에 대한 저항 이기도 하고, 그 스스로 가지고 있는 대중음악계에 대한 책임의식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에 대한 기대가 부담스럽기는 하나, 무언가 하긴 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 시도의 성패에 상관없이, 그와 같은 '열외자'가 하나 있다는 건 대중음악계 발전 에 플러스 요인임에 틀림이 없다. 십 년이 넘게 서태지만이 열외자로 남아있는 건 한국 가요계의 비극이다. 하지만 그조차 없었다면 그것은 더 참담한 일이 아닐까.





정리하며


  지금까지 "뮤지션 서태지"를 음악 외적(外的)인 측면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를 해보았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그가 "뮤지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여러차례 강조했다. "음반리뷰"가 없다고 한탄하면서도, 그래서 "짜증"을 내면서도 이런 글을 써야만 했던 건 대중음악에 관련된 논의에 내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HOT 해체"라는 사건에 음악 평론가들이 코멘트를 거부하는 것을 보라. 음악을 말하려면 아이돌 가수에게 냉정한 평가를 내려야 하고, 음악이 아닌 것을 말하려면 그들의 영향력이 대중음악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그 안에서 발전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나는 HOT와 젝스키스의 해체가 가요계 주류 시스템을 자신들의 우상과 동일시하던 십대 소녀팬들의 굳건한 믿음을 깨뜨렸으리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많은 음악 평론가들에게 그 사건은 딴따라계 내부에서 벌어진 코멘트할 가치가 없는 사건일 뿐이다. 나는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기에 그들을 비판하지는 않겠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건 그들과 다른 형태로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누리는 문화를, 보다 풍요롭게 하기 위한 "분석". 서태지를 말하면서, 서태지의 활동을 지지하면서 내가 생각하던 것은 오직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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