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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진보누리에 실명으로 올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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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의 변화

본인이 '세계의 변화'를 언급했으면 거기에서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한국의 변화'를 서술할 만도 한데, 김석수씨의 잣대는 오락가락이다. 가령 그는


"혹여 이 같은 홍세화님의 시대에 뒤떨어지는 인식이 유럽에서 살고 온 지 오래되어서 과거 유럽의 잔상만 가지고 오늘 한국현실을 논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라고 말한다. 이 말은 1) 유럽이 시대변화에 뒤떨어졌는 의미인가, 2) 홍세화님은 '현재 유럽'을 살아도 '과거 유럽'밖에 못 보는 멍충이라는 의미인가, (홍세화님은 90년대 후반까지 프랑스에 거주했다.), 아니면 3) 한국현실은 '무지하게' 특별하다. 는 말인가? 독해불능이다.


나는 과거 홍세화님의 칼럼에서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저항하는 프랑스 노동자들의 투쟁과 그들의 투쟁을 지지한 프랑스 '시민'의 일화를 본 기억이 난다. 김석수씨의 관점에 백번쯤 양보해봐도 두 사람은 '동일한 현실'에 대해 '다른 관점'의 대응을 주장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한쪽이 한쪽을 두고 '현실'을 모른다느니 하는 말을 할 계제가 아닐진대, 한국의 우파들은 '현실'이 자기네 주머니 속의 장난감인 줄로 야무지게 착각한다. 한나라당 지지자나 열린우리당 지지자나 그 점에선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렇다면 그는 '현실'을 어느 정도나 잘 알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뿐만 아니라 과거 권위주의정권시절, 언론과 집회와 결사와 표현의 자유가 배제된 상황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확보하기 위한 법외노조 전교조나 민노총의 불법파업과 이번 전공노 불법행동은 전혀 다른 행동이다. 전자가 기본권회복을 위해 국가권력에 대항한 정당행위인 반면 이번 불법행동은 정통성에 흠없이 들어선 민주적 질서에 위해를 가하는 범죄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전공노는 자신의 의사표현을 합법적으로 했어야 했다. 지금이 전두환군사정권과 같은 시기는 아니지 않는가. 언론과 집회 및 표현의 자유가 지나칠 정도로 보장된 사회가 아닌가."


그렇다면 '쥐뿔도 모른다'는 게 내 대답이다. 대개 '불법'이 되는 '파업' 문제는 일단 뒤로 넘기자. 김석수씨는 열린우리당이 집시법을 '개악'했다가 탄핵 이후 자신들에게 유리한 촛불시위마저 불법이 되는 것을 보고 부랴부랴 다시 법을 개정하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 시각 최옥란 열사 기일을 맞춰 모인 좌파들과 장애인단체 회원들은 경찰들의 제지를 받고 원만한 집회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중동이 대통령에게 마음껏 까불 수 있다고,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집회가 성대하게 열릴 수 있다고, "언론과 집회 및 표현의 자유가 지나칠 정도로 보장된 사회"인가? 그건 '내가 욕먹고 있으니, 누구나 다 욕을 할 수 있는 거야.'라고 믿는 유아론(唯我論)적 이기주의의 반영일 뿐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이번 전공노의 파업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의 사람은 아니다. 나는 그들이 이른 집단행동으로 결과적으로 조직역량을 훼손시킨 사실이 안타깝고, 이왕 힘든 투쟁에 돌입했을 때 그들이 '정당한 권리인 노동3권'을 쟁취하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대신에 전공노가 '국민들'에게 줄 수 있는 '이익'을 설명하는 자세를 보였다는 점이 마뜩치 않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나는 전공노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에서 "나는 전공노에 대한 탄압이 정당하다고 본다."로 비약하는 사이비자유주의자들의 논리다. 그리고 그 비약의 논거들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거나 매우 부실함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가 전공노와 노동계를 비판하는 근거는 위와 같은 1) 자유로운 시대에 왜 불법행위냐. 이외에도 2) 공익에 보탬이 안 되는 사익추구세력이다.가 있다. 물론 3) 공무원들(혹은 대기업 노조원들)은 살만하다.와 4) 국민들이 너희들을 싫어하니까 자중해라. 도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것들은 논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과거의 노조는 공익에 도움이 되었는데, 오늘날의 노조는 사익추구세력이다.'는 논변은 노조를 비판하는 논거로 얼마나 타당한지를 따져보도록 하자. 아담 스미스는 각 경제주체가 사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공익을 산출할 수 있다고 했으며, 이것이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 후의 경제학들은 이 사익->공익의 함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부분을 고쳐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볼 경우 '공익 vs 사익'의 확정적이고 엄밀한 구분은 사회주의적인 것이기는커녕 자본주의적인 것으로도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 교과서에서는 '지역이기주의'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 경우 국가의 정책은 '공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지역민들의 시위는 '사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서술된다. 그런데 이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오류다. 가령 부안 군민과 정부의 대립에 대해 생각해보자. 정부의 행위는 국가 차원에서 방폐장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적'인 행위다. 반면 부안 군민의 행동은 그 과정에서 마땅히 부안군민이 받아야 할 몫 (반드시 경제적인 부분이 아니라 의사결정에 대한 참여의 몫까지 포함해서)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적'인 행위다. 말하자면 양자 모두 공익과 사익이 혼합된 차원에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올바른 합의점은 양자의 '공익'을 접근시키고 양자의 '사익'을 절충시키는 관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지역이기주의'를 개탄하는 대신에 말이다.


정리하자면 공공정책과 사적 개인이 대립할 때에는 공익을 대변하는 세력과 사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이익의 극대화'와 '특정 국민의 손실의 극소화'라는 두 개의 공익적 가치가 절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중 후자를 무시하는 것은 박정희나 이명박식의 '불도저로 밀어붙이는' 개발논리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공익을 '전체 국민'이 아니라 '국가'라는 특수한 허상에 결부시키는 사고방식으로, 본질적으로 전체주의적인 것이다. 언필칭 자유주의자라면 이런 인식에 대해 대항해야 할진대, 우리 사회의 자유주의자들은 기껏해야 이명박의 '버스노선 개편'에 반대할 때나 '개념'을 가진다. 한심한 일이다.


"일례로 김대중 정권시기의 양대 노총이 얼마나 수구적이었는가를 보자. 당시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IMF의 각종 제시조건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으며(일부에서는 말레이시아 마하티르처럼 모라토리움 선언을 주장하나 말레이시아와 한국의 경제구조를 몰라도 너무 모른 한심한 발상이다), 또 우리의 경제회복이란 필요에 의해서도 각 부문의 도덕적 해이를 구조조정으로 극복해야할 시기였다. 특히 정부와 산하기관 및 국영기업체등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은 어느 부문보다 시급히 개혁되고 구조조정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이 때 양대 노총은 정리해고반대, 구조조정반대를 외치며 엄청난 부실덩어리로 국민경제에 암적인 존재였던 공공부문의 구조조정과 개혁을 오히려 저지하는 행태를 보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진보와 개혁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노동단체들의 수구성, 적어도 생산성증대와 관련한 이 같은 수구적 행태가 얼마나 대한민국을 어렵게 만드는 지 따위는 전혀 아랑곳 않고 단지 눈앞의 조직보존주의, 혹은 조직이기주의에 눈이 멀어 스스로의 부도덕함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국민의 혈세로 운영하거나, 혹은 배타적 독점시장에서 땅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흑자를 내도 시원찮은 공기업 등의 비효율덩어리를 노조조직보존을 위해, 혹은 노조의 조직역량보존을 위해 구조조정 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것이다."



일례로 김석수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도덕적 해이'라는 용어를 일반적인 오류의 맥락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일단 뒤로 제끼더라도,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당시의 정책적 방책이 올바르다 하더라도, '전체 국민의 이익의 극대화'와 '특정 국민의 손실의 극소화' 중에서 전자만을 '공익'으로 인식하고 후자는 '밥그릇 챙기기'로 폄하하는 행태는 개발독재론자들의 논리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내가 그의 입장이라면 그 사건을 '특정 사건에서 노조가 가장 올바른 집단이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했지, 그 이상의 가치평가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상되는 이익집단의 반발을 조정하는 것도 국가의 임무의 일부다. 학생에게 욕을 먹는 것도 교육자의 임무 중 일부이듯 말이다. 반면 김석수씨가 바라는 '정부'는 그런 식의 조정활동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노조'를 짓밟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드는데, 이런 정부에게 홍세화님이 '탄압세력'이라는 호칭을 부여한다 한들 그게 무슨 문제인지 모르겠다. 맞는 말 아닌가?  


김석수씨도 언급했듯이 현재 한국경제의 문제는 '수출'이 아니라 '내수'이기 때문에, 굳이 그가 좋아하는 '국가경쟁력'이라는 것을 따진다면 한국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내수경기가 좋지 않기 때문에 현재 한국경제가 불황인 것인데, 김석수씨는 그렇기 때문에 노무현 정권이 기업가들에게 좀 알랑방귀를 뀌어서라도 기업의 돈을 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짓을 '노동계'의 투쟁이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김석수씨가 봐야할 문제점은 '노동계의 노무현 아부 방해사건'이 아니라 국내 내수경기의 침체에도 영향받지 않는 한국 대기업들의 특성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대기업들은 수출로 큰 기업들이기 때문에, 내수침체에 상관없이 자신들의 자본을 축적하며 기회를 노릴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그들이 투자를 거부한다면 수출기업 노동자들(대기업이다.)의 임금을 인상시켜서 그들의 소비를 통해 내수를 진작시키는 것이 차라리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는데, 그는 이런 식의 내수경제의 순환에 대해서는 전혀 안목이 없는 듯하다. "성장과 분배는 대립되는 가치가 아니다."는 말은 김석수씨가 '좌파꼴통'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말이 아니다. 나는 그 말을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 선거 토론회에서 민주노총(김석수씨가 그렇게 싫어할 민주노총 말이다.) 출신의 허영구님에게서 이미 들은 적이 있다.


요약하고 부연하자면, 사실관계나, 논거의 엄밀성이나, 경제학적 지식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현실'을 점유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정말이지 한국 '우파'의 고질적인 폐습이 아닐 수 없다.


4.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 

2와 3이 사실관계와 기본논리의 문제라면, 4는 그래도 관점의 문제다. 이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2와 3만으로도 김석수씨 비평의 대부분이 무효화된다고 본다. 비록 그의 주장 중 일부가 실천적으로 옳을 수도 있겠지만, 여하간 자신이 왜 옳은 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지는 못하니 그것을 '한 시사평론가의 성공한 글쓰기'로 칭하기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이 비평은 김석수씨의 의견을 무력화하는 데에만 그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그의 민주주의 관에 대해서도 좀 이론을 제기해야겠다.


그는 법치주의를 매우 신봉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조들의 '불법' 파업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고, 권영길 의원의 지역구 사무실에 경찰이 난입한 것도 범법자를 붙잡기 위한 것이므로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과거'에는 불법 투쟁도 용인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데, 그 근거는 과거의 체제는 권위주의 독재체제이며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한국사회가 "언론과 집회 및 표현의 자유가 지나치게 보장된 사회"라고 주장했다가 나에게 쫑코를 먹은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 드는 의문은 이거다. 집시법이 개선된다고 해서, '언론과 집회 및 표현의 자유가 지나치게 보장된 사회'는 도래할 수 있는 것일까?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와 같은 서구의 급진적 민주주의자들은 (알렉스 켈리니코스와 같은 좌파는 이들을 '자유주의 개량'으로 보니 김석수씨는 안심하시라. 물론 알렉스 켈리니코스도 김석수씨보다는 백만배쯤 더 "변증법적 세계현실"에 능통한 좌파다.) 민주주의 체제의 긍정성은 그것의 완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불완전성에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지나치게 보장된 사회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며 오히려 그 한계를 적절하게 인정하는 데에 민주주의의 힘이 있다는 것이다.


가령 '언론의 자유'를 생각해 보자. 90년대 초반에도 언론의 자유는 있었지만, 민주당 지지자들은 그것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언론시장의 7할 정도가 '부당하게'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신문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상식적인 언론운동들과 민주당/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의 인터넷 매체에 대한 투자 덕분에 이러한 '비정상성'은 그럭저럭 '정상성'으로 변화되었다. (여전히 신문시장의 7할은 조중동이지만, 지금은 신문시장의 역할 자체가 축소되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에는 언론의 자유가 충분한 것인가? 또 그렇게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과제는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소수자'들의 불법투쟁을 "이제는 자유가 충분한데."라는 말로 존재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논리가 아니다. 서구사회의 역사적 경험에 의하면 그것은 언제나 전체주의적인 욕망과 함께 나타났다.  


김석수씨의 좌파들의 '비합법주의'에 대한 비평은 너무 나가긴 했지만 일부 일리가 있다. 나의 같은 경우는 법이라는 것도 하나의 가치이며, 가령 도로교통법을 어길 경우에는 그 법적 가치보다 상위에 있는 어떤 가치를 옹호하는 시위일 경우에만 정당화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저 '모든 집회는 도로교통법을 무시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인도에서 해도 충분할 정도로 인원이 적은 이들의 시위가 대로를 막고 벌어질 때면,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민주주의 힘이 체제(법)의 영역 바깥에 비-체제를 인정해주는 그 불완전성에 있다는 것이다. '비합법투쟁'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좌파들은 언제나 '서구'에서 무죄 판결 난 폭력투쟁의 사례를 들고 온다. 물론 나의 경우는 폭력투쟁을 하려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 불법성에 대한 처벌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투쟁에 참가하는 개인의 입장이며, 국가의 입장에서는 체제를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않는 수준의 '비일상성'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푸는 것이 오히려 국가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보수파들의 이상과는 다르게, 시위나 파업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의 실례를 발견하려면 민주주의 선진국이 아니라 후진국으로 달려가야 한다. 이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이 참고해야 할 '실례'다.


결미

김석수씨의 14편의 칼럼의 내용을 구조적으로 논박하다보니 지나치게 길어진 감이 있다. 그의 칼럼들은 하나하나가 매우 황망하고 그래서 재미있는데, 많이 인용하지 못해 아쉽기도 하다. 가령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프랑스대혁명당시의 부르주아가 진보적이었다는 사실도 망각하고 그저 모든 시대를 통털어 노동자와 농민은 무조건 진보적이고 위대하다는 교조적 관점에 매우 투철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부르주아가 그랬듯이 노동자가 진보적일 때도 있고 수구적 일때도 있을 수 있다는 시대변화의 개연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로 말하면 나는 '노동자와 농민이 무조건 진보적'이라는 일부 좌파의 관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경우라도 그들의 관점엔 '자본주의 사회에서'라는 단서조항이 붙어있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대립하는 시대인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모든 시대를 통털어" 그렇게 생각한다는 김석수씨의 주장은 초보적 오류도 아니고 그저 문맹수준이다. 맑스의 5단계 역사발전론도 안 들어보셨나? 그럼 근대인인 맑스가 프랑스 혁명 당대 부르주아가 '진보적'이지 않다고 했을까봐?


나는 여기서 사소한 실수가 아닌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의 스크린을 발견하게 되어 안타깝다. 그들은 여전히 왕정시대의 부르주아이고 싶다. 그러니까 우리를 '보수' 취급하지 말란 소리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공통된 특징은 한국의 시계를 87년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다시 왕조를 부활하고 싶고, 열린우리당은 그 왕조와 투쟁하는 부르주아이고 싶다. 욕망은 자유일 것이나, 그들의 욕망이 투영된 스크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회문제는 어찌할 것인가.


나 역시 한나라당이 왕당파라고 생각한다. 그런 견지에서 글을 쓴 적도 있다. 그러나 왕당파의 존재가 그 시대가 왕조시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왕당파는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과 싸우면서 자신의 진보성을 과시한 한심한 자유주의자들도 존재했다. 그들의 '말로'를 떠올린다면, 김석수씨는 지금 '진보'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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