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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냉소주의

조회 수 1309 추천 수 0 2007.09.13 09:57:24
냉소주의가 슬픈 이유는, 냉소주의의 표명이 냉소적 진리에 대해 적합한 표현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정치가 우리 삶의 문제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강변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의 말이 옳다면, 그는 정치에 대해 냉소할 때마다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88만원 세대>를 읽고 그것이 제안하는 연대성을 비웃으며 토익공부만이 답이라고 믿는 20대를 상상해 보자. 그렇다면 그에겐 그 책을 읽은 시간이 그저 시간낭비일 뿐이다. 냉소주의자가 비-냉소주의자와 토론이라도 하게 된다면 사태는 더욱 난감해진다. 토론에 쓰이는 1분 1초의 시간이 모두 냉소적 진리를 배반한다.

인터넷에서 종종 냉소주의자들을 발견한다. 그들이 인터넷에 그토록 긴 글을 올리는 이유를 냉소주의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짐작은 간다. 냉소적 기질이란 일종의 좌절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세상이 이렇게 생겨먹었다는 것을 긍정할 수 있다면, 냉소는 애초에 필요가 없다. 그들 역시 존재론적 모순의 간극을 끝없는 글쓰기로 메꿀 수밖에 없는 가련한 주체들일 뿐이다.

하도 이 사람 저 사람 그리고 이것 저것을 씹고 다니니까, 나 역시 얼핏 보면 그들과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일 듯도 하다. 그리고 나 역시 냉소적 기질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이고. 하지만 냉소적 기질과 냉소주의의 차이는, 전자의 경우 자신의 냉소를 냉소하지 않아야 할 대상을 발견하기 위한 도구로 추인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내게나 그들에게나 냉소적 기질은 끝없는 냉소의 표현으로 자신의 차가움을 과시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그것을 어떻게 써먹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종종 냉소적 진리를 응시할 지라도, 그리고 냉소적 기질을 떨쳐내지 못할 지라도, 시리도록 차가운 그 감정을 가슴에 품고 냉소주의자가 아닌 삶을 산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치면 그 바깥에 달리 쉬운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는 건 대개 다 어렵다.
  

후라이빵

2007.09.13 16:27:58
*.149.17.204

냉소라도 극한에 도달하면, 아름다움의 극한과 일치하지 않을까요... 냉소는 인식의 시작일 수 있는데, 문제는 얕은 냉소라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뭘 알기나 하고 저러는 걸까?)

하뉴녕

2007.09.13 19:04:21
*.176.49.134

만약 누군가가 '냉소주의'를 하나의 학적 연구과제로 설정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냉소주의와 그 적들>이라도 써내기로 결심한다면, 후라이빵님이 말씀하신 아름다움의 극한을 체험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

MW

2007.09.13 17:10:31
*.177.1.44

윤형님의 뜨거운 냉소적 기질 (오, 이 모순형용!)은 요새도 흔히 목격하는 바라서 새삼스럽지는 않고 저는 그 점이 재미있고 좋은데요.

허나, 윤형님의 논리를 긍정하면 냉소주의자, 혹은 냉소주의자들의 깊이에 대한 대부분의 냉소들도 시간낭비 아니겠습니까. 깊건 얕건 냉소주의자에게 뭔가 보내야 할 게 있다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냉소는 절대 아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냉소적 기질을 가진 자들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같은 특질을 발견할 때의 생경함, 혹은 좌절이 냉소주의를 더 강화하는지도.

(딴 얘기인데 처음 글을 올리려 했을 때 "귀하는 차단되어서......"가 나와서 깜짝? 내가 뭘 잘못했기에 차단까지! 너무하세요.)

하뉴녕

2007.09.13 19:06:57
*.176.49.134

흠, 저는 모든 냉소가 더 쓸모없다고 보는 건 아니구요. 냉소주의라는 입장 하에서 행해지는 냉소는 사실상 냉소주의적 입장을 배반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냉소적 기질과 냉소주의를 구별했던 것이구요. 냉소하려는 경향성 자체는, 만일 그런게 특정한 문화적 맥락에서 이미 개인에게 체화되어 버렸다면, 벗어나기 힘든 것아 아니겠어요? 그러니 모든 냉소를 '시간낭비'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자신의 냉소를 어떤 차원의 행위로 자리매김하느냐가 그 주체들에게 달려 있겠죠.

음;; 전 아이피 차단같은 건 한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가끔 MW님처럼 하소연을 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시스템 오류인가? ;;

sur

2007.09.13 18:30:39
*.117.151.41

좋은 글이군요.

아큐라

2007.09.13 19:30:07
*.208.209.123

냉소주의라는 게 보통 견유학파나 씨니시즘이라고 하지 않나요? 잘못 알고 있나 모르겠는데 맞다면 심리학이나 철학에서 어느 정도 연구된 걸로 알고 있습다.

하뉴녕

2007.09.13 19:57:42
*.176.49.134

네. 저도 지젝이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키니시즘과 시니시즘(냉소주의)을 구별해서 설명한 걸 본 기억이 있네요. 그의 논지는 키니시즘은 이데올로기 뒤에 숨겨진 누군가의 이득을 간파해 내는 기제이며, 시니시즘은 여기에 대한 보수주의자의 대답이라는 것이었죠. 가령 이런 식이겠죠. "이 법안은 사실 대기업만을 위한 거야." "그래서? 다들 자신만을 위해 살잖아."

하지만 한국처럼 냉소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선 좀 위의 정의보단 넓혀서 바라봐야 되지 않을까도 싶어요. 키니시즘과 시니시즘을 과연 그렇게 산뜻하게 나눌 수 있는지도 모르겠구요.

hyun

2007.09.13 20:31:48
*.99.83.104

저는 냉소적 기질은 대단히 중요한 삶의 감각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후라이빵님 의견대로 인식의 출발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얕은 혹은 말초적인 냉소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냉소가 극에 달한 친구가 한 명이 있는데요(걸맞게도 프랑스 인입니다), 저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에게서 지적 자극을 받곤 했습니다.

양녕대군

2007.09.15 11:52:39
*.24.179.119

냉소주의라면 대낮에 시장바닥에서 지나가는 사람들 쳐다보면서 DDR 하던 디오게네스 대인배가 떠오른다는... 냉소주의라면 그 정도 되면 9시 뉴스에 나올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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