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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에서 인문학으로 : 어려운 여정

조회 수 948 추천 수 0 2007.02.13 02:02:43

<욕망과 지혜의 문화사전 몸>이라는 책이 있다. 샤오 춘레이라는 중국인이 쓴 책이고, 푸른숲에서 나왔다. 나는 군대에서 이 책을 심심풀이 땅콩으로 읽었는데, 그럭저럭 읽을만은 했다.

이 책은 몸의 부위별로 거기에 얽힌 문화사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래서 유난히 인용이 많다. 가령 알라딘에서 찾아낼 수 있는 이 책의 일부분은 이렇다.

중국인들은 남자라면 마땅히 입이 커야 한다고 여긴다. <효경수신계(效經授神契)>에 보면 이와 관련하여 "순 임금은 큰 입을 가지고 있었다" "공자의 입은 바다같이 컸다" 등의 기록이 나와 있다. 이외에도 후한의 역사서 <동관한기(東觀漢記)>에서는 한나라 광무제의 관상에 대해 "일각(日角: 왼쪽 이마의 가운데 부분)이 높고 둥글며 입이 컸다"라고 썼으며, <하도(河圖)>에 보면 진시황에 대해 "호랑이 입에 일각이 높고 둥글었다"는 말이 나온다.

(...) 그러나 여자의 입은 다르다. 여자의 입에 대해서는 실용성보다 미를 따지는 게 보통이다. 매력적인 입은 입술의 양 끝이 바깥쪽으로 치켜 올라간 모양이다. 색은 붉어야 하고 촉촉한 느낌에 적당히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야 한다. (...) 최인(崔鱗)의 <칠의(七依)>에 "붉은 입술 흰 이(紫脣素齒)"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한나라 때는 자색 입술 연지가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남북조 시대에는 검은 입술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이 유행은 만당 시절에 다시 찾아와 유행 모드를 뜻하는 '시세장'이란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런 글을 읽을 때의 내 느낌은 그냥 '뭐 그렇구나.' 정도이다. 별로 다른 느낌은 들지 않는다. 문제는 저자인 샤오 춘레이가 자신의 글쓰기를 '전통적인 의미의 인문학적 글쓰기'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반응한다. '그그런가?'

실제로 중국인들이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중국 고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퍽이나 인용을 즐긴다. 어느 시대 어느 왕이 무슨 일을 겪었다고 한다, 또 어느 시대 어느 장군은 무슨 일을 겪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사례를 몇 개 제시한 후 갑자기 우리 시대 어느 정치인은 이런 왕이나 장군과 비슷하기 때문에 나쁜 녀석이라고 말한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솔직히 말하면 좀 당혹스럽다. 그 얘기에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 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키리냐가>라는 연작 단편 SF 소설이 있다. 미래에 소행성에 사람들을 이주하게 하는 일이 가능해져서, 다른 종류의 정치체제를 꿈꾸는 소수자들에게 각자가 원하는 사회를 건설하게 해준다. 주인공은 케냐의 전통문화를 복원시키려는 지식인인데, 케냐의 전통사회를 복원한 후 거기서 주술사 노릇을 한다. 그가 자신의 후계자를 교육할 때 말하는 방법도 그런 식이다. 여러 종류의 우화를 통해 교훈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사실'은 어찌됐든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 후계자는 그런 교육에 반감을 가지고, 나중엔 지구로 돌아가 팩트를 추구하는 역사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 후계자가 충격을 받은 것은, 주술사가 전해 주는 '역사'가 그릇된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좀 오래 전에 유행한 책이지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저자인 김경일의 방식도 저 후계자의 것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그는 공자가 하은주 삼대의 예법을 따르자고 말하고 있지만, 갑골문자를 분석해 보면 하은주 삼대는 이상적인 시대이기는 커녕 참주들이 난무하는 패륜적인 시대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공자의 이념은 헛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법이 성립한다면, 인용의 진실성은 인문학에 본질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공자가 언급하는 하은주의 사례가 사실과 어긋난다면 공자의 사상은 인정될 수 없고, 케냐의 역사를 잘못 전달한 주술사의 세계관은 사기에 불과하다. 또한 샤오 춘레이의 글쓰기가 '인문학적 글쓰기'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데에도 그의 인용의 적절함이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공자가 '옛 것'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옛 것이라해서 무조건 숭상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이런 이유로 수용하고, 저것은 저런 이유로 배격해야 한다는 입장이 분명히 논어에서는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역사주의의 바깥이다. 플라톤이 이상국가를 위해 역사와 상관없는 신화를 날조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는 공자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위치에 서 있다. 말하자면 그는 역사와 독립된 이성의 영역을, 당위적인 이념의 영역을 현시하고 있다. 케냐의 전통문화를 복원하려고 했던 주술사의 시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 주술사가 틀렸을 수는 있지만, 단지 케냐의 역사를 잘못 전달했다는 이유만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아예 자신이 '대담한 오독'을 한다고 공언하고 있기까지 하다.

단지 인용이 많다고 해서, 그의 글쓰기가 사례중심적인 글쓰기에 불과하다고, 권위에 의한 논증의 오류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낙인찍을 수는 없다. 인용을 하면서 그 주장의 논리적 성격에 주목하고 그 주장들과 대화하거나 대결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용문에서 그런 성격을 찾기가 어렵다면, 그런 인용을 '학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학적인 인용'과 '그렇지 않은 인용'을 한눈에 파악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학적인 인용에서는, 이 글이 추구하는 성격에 부합하는 대가들이나 평론가들이 인용된다. 가령 정치적인 글쓰기라면 정치학자나 정치평론가가 인용된다. 미학적인 글쓰기라면 철학자나 미학자, 미술평론가들이 인용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인용'에서는 그런 구별이 없다.

나는 샤오 춘레이의 글에서 그런 마구잡이식 인용이 중국 고사에서 '서양 이야기'까지 확장되었을 뿐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오스카 와일드는 혼자서 여러 명의 사람들을 설득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현대 영국에는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진 이가 없다." '혀'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는 오스카 와일드를 이런 식으로 끌어들인다. 이런 얘기에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다. 단지 '있는지 없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라며 드잡이질을 시도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샤오 춘레이의 책을 '인문학적 글쓰기'로 보지는 않는다. 저 잡다한 사례들의 인문학적 의의를 굳이 언급한다면 서너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지식들은 굳이 저 책을 보지 않고, 저 책의 사례들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빈약하고 평범한 메세지와 풍부한 사례가 결합된 교양도서는 읽는 이들을 즐겁게 만든다. 그는 매우 적은 것을 보면서도 많은 것을 보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앞으로 저런 책이 많이 나올 것이고, 거기에 쾌락을 얻는 이들이 많을 것이며, 나는 남의 쾌락에 별로 상관하는 사람이 아니니, 이런 책을 더욱 편하게 즐기는 방법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오히려 내게도 더 즐거운 일이겠다. 그 충고의 내용은 이런 책을 읽을 때엔 무조건 서문을 먼저 읽고, 오직 서문만 정독하며, 나머지 부분은 심심하고 피곤할 때마다 뽑아들고 눈에 가는 부분부터 읽으라는 것이다. 영 안 읽히는 부분이 있다면 안 읽어도 무방하다. 별로 상관없으니까. 그래도 남들에게 '나 이 책 읽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누가 저 많은 사례를 다 기억하겠는가?

가령 진중권은 2005년에 출판된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저자 스스로가 이 책은 그렇게 보라고 주문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은 일반적인 출반자본의 욕망을 반영하는 것만큼이나, 그에 대한 작가의 저항도 보여준다. 진중권은 우리에게 꼴리는 대로 '사례'를 펴보되, 책이 요구하는 데로 시선을 바꿔가며 보라고 주문한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나는 그 주문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선을 바꿔서 보면, 뭔가 다른 것이 보인다.'는 결론을 이미 알고 있는 터에, 굳이 시선을 바꿔서 볼 필요성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우리 시대의 진정한 인용의 대가인 강준만이 2006년에 쓴 <인간사색>이 마구잡이 인용에서 인문학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보여주는 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난 몇 년간 그의 글을 열심히 읽었고, 따라서 그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빈약한 학적 능력에 대해 익히 알지 못했다면, 초반 80페이지 정도까지는 속았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의 인용은 교묘했다. 샤오 춘레이의 책보다는 훨씬 더 인문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우리가 어머니의 젖가슴을 통해 연인과의 키스를 준비한다고 했다. '세계적인 키스 전문가' 칼럼니스트인 애드리언 블루는 "키스는 인류의 전 역사를 말해준다. 가슴이나 젖병(약간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에서 젖을 받아먹을 때 하는 빨고 핥는 행위는 키스에도 적용된다. 성애적인 키스는 젖을 빨아먹는 것을 흉내낸 것이다."고 했다.

프로이트에서 갑자기 키스 전문가 칼럼니스트로 건너뛰는 저 전복성을 보라. 어쨌든 이 모든 인용이 우리 시대의 키스에 대해 말하기 위해 서술된 것이라면, 그래서 그가 한국 영화 최초의 키스신을 다시금 인용하고 또 다시 "서울 도심 곳곳에 젊은 남녀 연인들을 위한 '키스 구역'이 속속 탄생하고 있다."는 2006년 조선일보 기사를 인용하기 시작한다면, 뭔가 이 인용만으로도 세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지 않겠는가. (사실 나는 강준만이 프로이트에서 칼럼니스트로 건너뛸 수 있는 이유가 전복성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프로이트에게서 칼럼니스트의 글 이상의 감명을 못 받기 때문일 거라는 정당한 추정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아슬아슬한 강준만의 곡예는 '배신'이라는 키워드에서 좌초한다. 멀쩡하게 그 단어에 걸맞는 한국의 사태를 짚어나가던 그는, 갑자기 '배신'이라는 키워드를 접하자마자 민주당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배신을 성토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말미에 그는 어떤 인용을 통해  " '도덕' 개념의 부재가 마르크스주의를 망쳤다"고 말하는데, 이 인용은 이 책의 모든 인용 중에서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단 한번의 인용이다. 다른 모든 인용은 무지하게 단순했고, 그 단순한 인용의 퍼레이드 속에서 의미를 생성했는데, 이 인용에서만은 그는 무언가 뽕을 뽑고 말 작정인 것 같다. 문제는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것. 언제나 강준만의 문제는 그 자신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학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다.

요새 내 고민은 우리가 <폭력과 상스러움>(진중권, 2002)을 능가하는 책을 가질 수 있을까이다. 이 책은 철학자가 아닌 이가 쓴 인문학 도서 가운데 최고 수준이고, 단연코 최고의 정치평론 도서이다. 그리고 이 책의 인용은 '마구잡이 인용'과는 거리가 멀다.  



이택광

2007.02.14 10:15:16
*.132.131.206

에세이집으로서 "폭력과 상스러움"을 정당하게 평가할 시선이 없는 것도 문제겠죠.

이상한 모자

2007.02.14 10:58:44
*.63.208.238

정당하지 않은 시선이란건 인터넷워즈 에피소드 6 : 진빠의 귀환, 뭐 이런건가여..

이택광

2007.02.14 14:17:37
*.207.37.4

이상한모자/ 흠~ 그런 뜻이라기보다, 이 책을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 같은, "에세이"라는 장르의 파괴력을 보여주는 일종의 "글쓰기 철학"으로 봐주는 시선이 없다는 의미랍니다. 사실 진중권이 인문학에 기여한 건 "미학오디세이" 때문이 아니고, "폭력과 상스러움" 때문이라고 봅니다. 한윤형이 이 책을 능가하는 책을 앞으로 우리가 가질 수 있을까 하고 뇌까린 말은 진중권에게 향하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이상한 모자

2007.02.15 09:16:47
*.63.208.236

전 진중권 선생님이 외모로도 인문학에 기여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택광

2007.02.15 13:31:59
*.207.37.4

이상한 모자/ 흠~ 그건 전혀 고려를 못했군요. 이거 정말 새로운 시각입니다. "외모로 읽는 철학사"라는 제목으로 뭘 하나 써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요. 나중에 카피라이트 주장하시면 곤란한데....

태공망

2007.02.23 07:49:45
*.109.202.16

샤오 춘레이의 책을 안읽어봐서 모르겠지만, 그가 말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인문학적 글쓰기'가 무엇인지는 짐작이 가네요. 공자는 자신의 글쓰기 방법을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했죠. 성현의 말씀을 기술할 뿐 자신이 창작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실제로는 '述'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作'한 것이죠. 단장취의도 널리 쓰였는데 타인의 글에서 앞뒤를 잘라내고 자신이 필요한 의미로 갖다 쓰는 방법입니다. 현대 한국에서는 조선일보에서 이 문체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켰죠. 아 그리고 중국인의 이런 글쓰기 방식의 정점을 예전에 제가 [고문진보]에 수록된 어떤 '사륙 변려체'의 글에서 보고 경악한 적이 있는데, 문장에 사용된 단어 하나하나가 다 옛 고사에서 따온 말이었습니다. 고사를 모르면 해석 자체가 불가능한... 여하튼 한윤형님의 글을 보니 이런식의 '중국인의 전통적인 인문학적 글쓰기' 방법이 아직까지 살아 남아 있긴 한가 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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