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법을 보는 법 - 10점
김욱 지음/개마고원


말 그대로 훌륭한 교양도서이면서 훌륭한 에세이다. 나 자신이 법철학이나 정치철학을 잘 알지 못하므로 얼마나 풍부한 내용을 얼마나 적절하게 기술했는지에 대해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법치주의에 관해서, 정치 문제와도 연결지어 생각해봄직한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어렵지 않은 책을 발견한 것은 매우 기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법공부, 특히 한국의 법공부라는 것은 공부하는 이의 문체를 극악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어서, 법문제에 대해 문외한인 이들에게도 깔끔하게 설명하는 텍스트를 만나는 것은 출판물에서는 물론 블로고스피어에서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령 <헌법의 풍경>의 김두식과 같은 필자를 좋아한 것이겠지만, 김두식의 경우 책제목과는 달리 헌법에 대해서 심도있게 논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최근의 작품인 <불멸의 신성가족>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법문제에 대해서보다는 법조인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반면 저자인 김욱은 법학 박사 학위 취득 후 대학에서 헌법학과 법철학을 가르치는 학자라고 하는데, 덕분에 이 두껍지 않은 책에서 우리는 법철학적 논의와 헌법학적 논의의 일부를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우연히 들춰본 그의 전작인  <영남민국 잔혹사>가 내용은 물론 구성과 문체에서도 전혀 취향이 아니라서 이 책을 집어드는 데에도 망설임이 있었는데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어쩌다 학생들에게 논술을 가르치게 되었을 때 기껏 국가권위의 정당성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데 "아, 그 문제요? 저항권이 있잖아요!" 따위의 반문을 받으면 당황하게 된다. 사회계약론 - 로크 - 저항권! 뭐 이런 식으로 암기를 하면 점수를 얻는 교육체제에서 살다 보니 문제에 대한 고민없이 즉자적으로 '주어진 답'(?)을 내뱉어 버리는 습관이 든 것이다. 지난 몇 년간 구체적인 상황에서 겪어 왔던 문제들, 가령 우리가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나, 주어진 법에 대해 우리가 동의했다고 가정해야 하는지의 문제, 그리고 시위대의 권리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라는 문제 등은 그 자체로 쉽지 않은 고민거리들이다. 그런 것들에 대해 손쉬운 답을 내려놓고 그 답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수구꼴통으로 치환하는 태도는 장기적으로 볼 때는 결코 설득력을 발휘할 수 없다. 저자가 말했듯 법만능주의와 법회의주의의 양극단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법문제를 법 바깥의 맥락과 연결지어 파악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특히 정치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겐 이 책의 논의가 더 중요하다. 정치와 법이라는 것 사이엔 일종의 긴장관계가 있어서, 정치학도들은 왕왕 법의 역할을 한정지우는 데에만 자신의 논의를 소비하곤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법치주의, 혹은 법철학의 논제들을 경시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 체제 내부에 존재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은 정치 본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법치주의와 인민주권의 대립으로 살펴볼 때 그것은 법적인 문제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법에 대한 관점으로 이성법론, 법실증주의, 마르크스주의적 법 이론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부르주아 계급이 만들어낸 자본주의 법의 역사성을 파헤치면서도 그 법적 제약이 강자들에게 끼치는 영향까지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내용들이 사회계약론, 국가의 정당성, 사회통합의 방법 등 정치적인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거나 사실상 바로 그 문제라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 법전에 머리싸매지 않고도 정치철학자나 정치학자들이 언급하는 법적인 내용들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는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모저모 따져봐도 남는 장사다.  


글쓰기 자체의 문제로 봐도 이 책은 흥미롭다. 대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간단한 사례 인용 뿐만 아니라, 머리말과 맺음말을 포함해서 도처에서 나타나는 영화인용들의 적절함이 책의 흥미를 높여준다. 전자가 대중을 만나기 위한 저자의 노력이라면, 후자는 저자의 글쓰기의 힘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은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저자의 논지를 강화해 주고 있는 바, 흡사 서구 이론가들의 이론서를 보는 느낌마저 준다. 비록 인문학자들의 평론에 비해 저자의 글쓰기가 문체의 차원에서 부족한 면은 있겠으나 이런 식의 글쓰기가 더 많은 독자들에게 평가받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tick

2009.08.26 18:27:07
*.10.224.145

이책 좋죠.ㅋㅋ 법대생이라면 필독해야된다고 봄

outsider

2009.08.26 23:40:04
*.230.50.19

예전에 김욱 교수의 <교양으로 읽는 법 이야기>를 봤었는데 그 책도 읽을만하더군요. <법을 보는 법>도 기회가 닿으면 꼭 읽어봐야겠네요.

2009.11.06 20:28:52
*.137.230.141

ㅇㅇㅇ <교양으로 읽는 법이야기> 저도 재미있게 봤습니다.

개미먹이

2009.08.27 12:36:34
*.130.8.223

법치주의의 내용인가 보군요. 위에서 언급한 고민하신 부분들의 답은 내리셨는지 궁금합니다.

어우르기

2009.08.29 10:23:13
*.44.173.104

굉장히 반가운 포스팅이에요. '법'에 대한 입문서로서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사실 (교수를 포함한) 대부분의 법학 전공자들은 법 자체에 대해 '맹목적'으로 접근하게 되고, 이 때문에 법에 대한 여러 논의들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 것 같아요. 법철학이나 법사회학 역시 법학에서 굉장히 주변적인 위치에 놓여있구요. (그러고 보니 이 책은 오히려 비전공자 보다는 전공자들에게 필요한 책인 것 같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이곳에 들렀는데, 법을 보는 법 뿐만 아니라 대문 서가(?)에 비롤리의 공화주의 책도 놓여있는 걸 보고 굉장히 반가웠습니다. 혹시 이 책들을 특별히 대문에 전시해놓으신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저도 요즘 공화주의를 읽고 있는데, 마치 지금 상황에 대한 시국선언(?)같기도 해서 좀 놀랐습니다. 어쨌든 이 책이 헌법 제1조에 대한 해석에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혹시 이 책과 함께 읽기를 권하시고픈 책이 있는지요?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도 같이 읽고 있는데, 괜찮을런지요?)

길게 글 남겨서 좀 죄송스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문제의식이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반가운 마음에 그런 것이나 양해해 주시길. ^^; 그럼 주말 잘 보내세요!

하뉴녕

2009.08.31 15:35:36
*.49.65.16

법공부하신다고 들은 것 같은데 법에 대한 입문서로서 권하고 싶은 책이었다니 저도 반갑네요. 법 전공자도 그렇지만, 정치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서도 읽어야 할 책인듯.

대문에 올려놓은 책들은 요즘 읽은 것들 중에서 같이 읽고 싶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 책이 들어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구요. ㅠㅠ 근데 정작 저는 공화주의 아직 다 못 읽었다는.

무페 책은 저도 대문에 올려놓은 "민주주의의 역설" 밖에 안 읽었는데, 좋은 것 같습니다. 부지런히 공부를 더 해야겠지요. ㅋ (말로만 ㄷㄷ)

nassol

2009.11.06 20:11:45
*.228.151.13

안녕하세요.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책을 이미 읽어본 것은 것은 아니지만 이 포스트를 읽으니 좋은 책일 거라고 생각하고 저에게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권위의 정당성에 대한 복잡한 문제에 대해 '저항권'이고 간단하게 대답해도 살아남는 교육, 그 교육을 받고 그 결과인 무지함 - 물론 따로 노력하지 않은 제 잘못도 있겠지만 - 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다시 배우고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한 사람 역할이라도 하려면요. 그럼 안녕히계세요.

blackflag

2010.02.03 00:42:32
*.11.247.220

저도 법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정말 이거다! 생각하고 봤던 책이였죠. 사실 교양으로 읽는 법이야기를 먼저 읽고 좋아서 김욱 교수님의 법관련 책(영남민국잔혹사는 땡기지가 않아서)은 다 보게 됐네요. 이 외에도 영화와 법에 관한 책도 있는데 편집이 좀 구려서 그렇지 내용은 정말 좋습니다. 이데올로기에 관한 부분에 집중한 영화비평이라고 할까요. 한때 법학과 운동권 출신들이 너도 나도 마르크스주의법에 대해 연구한답시고 하다가 폐기해 버린 지금까지도 이런 연구를 계속하시는 것도 존경스럽구요. 마키아벨리즘으로 읽는 헌정사에서도 대한민국 헌법의 헌법제정권력이 누구인지를 논하는 장면에서 누구나 한번쯤 가져야할 문제제기를 내가 왜 몰랐을까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뉴녕

2010.02.03 13:13:53
*.49.65.16

아이구 그런 책들도 있는 줄은 몰랐네요. 언제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51 이택광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21] [1] 하뉴녕 2009-09-14 1846
50 강준만의 논리기계 분석 하뉴녕 2002-05-20 1831
49 우생학, 진화생물학, 그리고 대중적 진보담론 [24] [2] 하뉴녕 2009-07-07 1708
48 헐뜯기, 비판, 그리고 대중성 [21] [1] 하뉴녕 2010-01-07 1633
» 법을 보는 법 : 훌륭한 교양도서이면서 훌륭한 에세이 [9] [1] 하뉴녕 2009-08-26 1633
46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를 검증(?)해 보자. [28] 하뉴녕 2010-04-02 1617
45 민주노동당과 나 [15] 하뉴녕 2008-02-16 1613
44 [펌] 선빵의 사실관계, 그리고 <디 워>의 마케팅에 대해서 한 말씀... / tango님 [91] [2] 하뉴녕 2007-09-06 1581
43 노혜경 님의 허수아비 논증에 대해. 하뉴녕 2003-07-25 1536
42 김창현 비판, 어디까지 정당한가? 하뉴녕 2004-05-12 1385
41 언론의 당파성, 이념성, 공정성 -강준만과 진중권의 글을 보고 하뉴녕 2003-03-08 1358
40 리처드 로티 : 책에 관한 몇가지 이야기들 하뉴녕 2004-12-02 1351
39 준마니즘 분석 - 준마니즘의 진화와 속류 준마니즘의 탄생. 하뉴녕 2003-03-20 1350
38 저는 그냥 생중계하겠습니다. [58] 하뉴녕 2010-04-03 1338
37 냉소주의 [9] 하뉴녕 2007-09-13 1309
36 다큐멘터리 “개청춘” : 20대적인, 너무나 20대적인 [4] 하뉴녕 2009-09-04 1265
35 상상마당 포럼 6회 대중비평 시대의 글쓰기 09. 4. 18 file [3] 하뉴녕 2009-04-25 1223
34 “돌출 행동을 수습하는 방법에 대하여” 비평 [69] [4] 하뉴녕 2009-04-09 1198
33 정말로 미네르바 밖에 없는가? [19] [2] 하뉴녕 2008-11-21 1195
32 그래프 오타쿠의 정치평론 [18] 하뉴녕 2008-04-19 1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