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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폴라니, 그리고 인문학의 개입
anoxia : 이택광 비판 1


한 명의 인문학 전공자가 현실참여를, 그것도 사회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서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인문학이 무력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 설명은 그럭저럭 진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문학 담론이 유통될 만한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지적도 가능할 것이다. 칼 폴라니 붐에 대한 이택광의 지적은 바로 그 환경을 비판하는 것이라 하겠는데, 그의 글이 이해되는 방식 역시 이 ‘환경’이란 것이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모든 인문학자들이 진중권처럼 모든 종류의 대중적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좀 더 적극적으로 고쳐 말하면 그것은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불가능함을 가능하게 하는 진중권의 능력은, 그를 자유롭게 하고 동시에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진중권이 있지 않은가?”라는 핑계로 사람들이 다른 인문학자의 비평적 글쓰기를 읽으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은 결코 진중권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에서, 진중권의 대중성을 따라잡고 싶어 한 지식인들과, 진중권이 학적으로는 별거 아니라 생각하여 그의 영향력을 초월하고 싶어 한 인터넷 글쟁이들의 열폭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이 역시 그의 책임은 아니지만, 그를 적절한 방식으로 응대해야 할 이유가 이로부터 설명된다. 그리고 진중권을 좋아하는 나는 또한 스스로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는 이택광과 같은 문화평론가의 매개자가 되려는 것이다. 힘이 닿는다면, 앞으로 내가 ‘커버’할 사람들의 범위가 더 넓어지길 기대한다.


각설하고 이택광의 문제의식을 요약해보자. “칼 폴라니를 통해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려는 일련의 시도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선 논점을 몇 가지로 나눠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 칼 폴라니는 실제로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했는가?
2) 칼 폴라니를 활용한 한국의 몇몇 논자들의 제안은 현재의 정세에 정합적인가?
3) (좌파) 지식인의 역할이 ‘대안’을 만드는 것인가?


이택광이 이 모든 것을 말한 것은 아니지만 이 질문에 대한 비판적인 대답은 대충 다음과 같이 연결된다. 첫째, 칼 폴라니는 자신의 글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적 체제를 모색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내 블로그 덧글에서 꽤 상세한 논쟁이 있었다.) 둘째, 칼 폴라니의 말이 아니라 칼 폴라니의 논의를 원용한 ‘대안’을 말한다 해도, 그게 현재 정세에 정합적인 것 같지는 않다. G20 회의에서 오바마가 유럽에게 통 큰 양보를 하고 개도국 투자에 전격합의 한 지금의 상황은 자본주의가 파국을 맞을 상황이 아니다. 대공황이 와서는 안 된다는 사실엔 모두가 동의했다는 뜻이다. 지금의 상황은 칼 폴라니가 아니라 장하준이 떠오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닐까? 셋째, 지식인의 역할은 대안 체제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인은 현존하는 체제를 정확하게 분석하여 그것을 대중들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대안 체제는 몇몇 지식인이 완결된 형태로 조립하여 대중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중들이 자신들의 삶을 둘러싸는 조건들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꿔야 한다고 인식하고, 운동을 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비로소 대안은 나오는 것이다.


“폴라니, 그리고 인문학의 개입”이란 글은 그러한 대답의 일부를 좀 더 큰 틀에서 정리한 것이다. 이택광은 칼 폴라니 이론에 대한 평가에 관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류학에서 많이 활용되고 경제학에선 별로 쓰이지 않는 칼 폴라니를 경제학의 문맥으로 애써 끌어들이는 지식인들의 행동에서 그는 (경제학적?) ‘대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을 읽는 듯하다. 인문학적 접근이 소외되는 이유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인문학적 접근이다.


내적 요인에 대해서도 그는 설명하고 있지만, 외적 요인에 대해서만 서술해 보자면 이렇다. 한국 사회의 진보담론에는 진화심리학적인 것과 경제학적인 것이 있다. 이것은 각기 박정희 시기의 우생학과 경제성장 담론에 대한 비판의 지형에서 나온 것 같다. 즉 한국 사회의 문화지형은 여지껏 박정희를 극복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도 박정희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거다. 이런 상황에서 주체나 윤리, 또는 욕망에 관심을 가지는 인문학의 분석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이 이택광의 분석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정치의 부재’라고도 볼 수 있겠다. 정치의 문제는 “어떤 제도가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가?”라는 과학적인(?) 물음의 대상으로 환원된다. ‘중립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경제의 문제는 “어떤 제도를 만들어야 우리의 생활수준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환원된다. 역시 ‘중립적인’ 문제가 된다. 논쟁이 이렇게 ‘중립적으로’ 전개되면 최신이론이 요즘 새로 밝힌 사실에 의하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이론-레이싱 경쟁을 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이런 비판은 꽤나 근본적이다. 그러므로 이택광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법은, 역시 근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당신이 말하는 인문학의 개입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체, 윤리, 욕망? 그런 것으로 무슨 사회를 분석할 수 있단 말이냐. 나는 진화심리학이 사회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뭐라고? 서구에는 진화심리학 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비평도 있다고? 그렇게 얘기하면 당신도 서구중심주의지. 서구가 잘 먹고 잘 사는 건 과학 때문이지 인문학이 있어서는 아냐. 왠지 서양애들은 그렇게 안 믿는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대충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정석이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이택광의 논지를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논지를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대표적으로 트랙백을 건 anoxia 님의 글을 살펴보자. 그의 반론은 1) 우생학이 박정희의 담론이라 인정하기 힘들다. 2) 그렇더라도, 진화심리학이 우생학과 같은 패러다임에 있다는 사실은 기각된다. 3) 진화심리학이나 경제학이 주체, 윤리, 욕망의 문제를 안 다룬다고는 볼 수 없다. 로 요약될 수 있다.


1)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자. 우생학은 요즘의 상식인들이 느끼듯이 파시즘이라는 특별한 체제에서만 특이하게 자라난 괴물이 아니다. 현재의 진화심리학이 그런 것처럼, 우생학은 19세기 과학의 주류였다. 그 문화적 영향은 20세기에도 미쳤다. 아도르노가 미국에서 절망한 것도 우생학 때문이었고, 콘돔 또한 우생학의 도구로 선전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우생학의 영향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 가령 유전자 연구를 통한 인간종의 발전을 위한 노력도 우생학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더구나 우리 같은 후발 주자들에겐 그것이 하나의 신념처럼 박혔다. 싱가포르 수상 리콴유처럼 머리 좋은 남녀들을 짝짓기 해야만 ‘우생학’ 담론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민을 개조하여 이미 진화한 서구 국가들을 따라잡자는 것이 박정희 체제의 욕망이었다면, 그것을 우생학이라 부르는 것엔 큰 무리가 없다.


(‘국민 만들기’와 ‘인종주의’ 사이에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적당한 인용문이 있다. 김동춘의 <근대의 그늘 : 한국의 근대성과 민족주의>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좌익은 씨를 말려야 한다’는 혈통주의적인 사상과 실천이 분단국가 건설을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분단국가의 형성은 통상 국가 형성의 기반으로서 같은 종족, 동일한 민족이라는 공통성이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규정에 의해 무시·압도당한 데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한의 아들딸’이라는 한국에서의 국민 개념은 좌익을 다른 인종 혹은 인간 이하로 취급했고 그것이 ‘좌익사냥’을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인종주의 혹은 혈통주의에 기초해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2)에 대해선 어떨까? anoxia 님은 진화심리학의 대략을 말하면서 그게 우생학과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을 말한다. 그래서 같은 패러다임에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이 우생학과 접점을 이루는 부분에선 당연히 그의 말이 옳다. 그런데 이택광은 그 전선에서 나와서 얘기를 한 것이다. 앞서의 내 식으로 요약하자면, 정치의 문제를 “어떤 제도가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가?”라는 과학적인(?) 물음의 대상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같은 패러다임에 있다고 보여진다는 것이다. 물론 진화심리학은 우생학과 정면대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생학은 옛날의 것이고, 진화심리학은 요즘의 것이다. 진화심리학이 비판하고자 하는 우생학적 편견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계몽의 대상이다. 그런데 정치 문제를 바로 이렇게 계몽의 문제로 치환하는 엘리트주의-계몽주의적 태도야말로 이택광이 문제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칼 폴라니라는 대안을 대중에게 ‘공급’하려는 이들에게 그가 느낀 위화감도 그런 것이겠고.


그리고 그가 문제삼은 것은 진화심리학이라는 학문 일반이 아니라 진화심리학을 활용한 사회비평이라는 점도 이해되어야한다. 여기에서 자연히 3)에 대한 답변도 도출된다. 나는 최재천 교수의 진화심리학적 사회비평을 거의 보지는 못했는데, 하나 인상깊게 본 것이 있다. 유전자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는 논변이었다. 유전자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논의를 활용해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면 그건 ‘과학적인 사회비평’이 되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흔히 이런 문제를 ‘사실 명제와 당위 명제의 구분’이라 부른다. 물론 자연주의자들은 이 구분을 마뜩치 않아 한다.) 그러면 다른 논의를 활용해 호주제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과, 진화심리학을 활용한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설득력’의 문제로 들어간다면 유전자 특성과 호주제 사이에 연관관계가 있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는데 말이다. 


 anoxia 님은 이택광의 글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 문단만을 정교하게 독해하고 거기에서 잘못된 용어 사용과 잘못된 판단을 발견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대중적 담론의 지평에서 점점 인문학이 밀려나는 것처럼 보이는 대개의 이유는 인문학이 설득력 없는, 형이상학적 현학에 그치기 때문이다. 마치 이택광의 이 글과 같은 이유다.”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사람들이 인문학적인 글에서 설득력을 느끼지 못하는 대개의 이유는 그것이 ‘형이상학적 현학’에 그치기 때문이 아니라 평소에 그런 글을 많이 접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독해해야 하는지를 몰라서가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나같은 사람의 이러한 글도 다소 쓸모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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