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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미네르바 이야기

조회 수 2303 추천 수 0 2009.01.20 09:43:59

1. 여는글


이른바 ‘미네르바 사태’에는 이중삼중으로 덫이 설치되어 있다. 하나의 덫은 1) 미네르바의 글쓰기는 적절했는가? 라는 문제, 2) 미네르바의 문제의 게시물은 법적 처벌의 대상인가? 라는 문제, 그리고 3) 미네르바의 구속은 적절한 일이었나? 라는 문제가 서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네르바의 글쓰기를 비판하는 이들을 ‘미네르바의 처벌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명목으로 옹호하는 ‘잘못된 옹호’도 생기고, 미네르바의 처벌이나 구속을 비판하는 이들을 ‘미네르바의 글쓰기는 허접하다.’는 근거로 비판하는 ‘잘못된 비판’도 생긴다. 심지어 얼마 전에 이글루스를 달구었던 “우리 편 전문가” 논쟁에서도 이 논점들은 구별되지 않고 섞여서 논의되곤 했다.


다른 하나의 덫은 1)에 대해선 판단중지를 내리고 2)와 3)의 문제에 대해서만 미네르바를 ‘표현의 자유’로 옹호하려는 시민사회세력의 행동에 숨어 있는 함정이다. ‘표현의 자유’의 대표적인 옹호자로 진중권을 들 수 있겠는데, 그의 주장은 특히 토론에서는 법리적인 문제를 다소 거칠게 건드리는 부분이 있으나, 그 자체로는 수긍할 만하다. 문제는 진중권을 포함해서 미네르바를 표현의 자유로 옹호하려는 이들은 미네르바의 글의 열렬한 독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진중권이 말했듯, 사실 그들은 미네르바가 구체적으로 무슨 글을 어떤 식으로 썼는지도 모른다. 반면 미네르바의 글의 열렬한 독자였던 이들은 이 사태를 둘러싼 ‘합리적인’ 논의에는 거의 참여하지 못하고 있고 다만 지금 구속수감되어 있는 피의자 박씨가 진짜냐 가짜냐를 두고 갑론을박할 뿐이다.


물론 ‘표현의 자유’라는 것은 그 사람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러니까 그 사람의 견해에 무관심한 상태에서라도 옹호할 수 있는 가치다. 그러므로 진중권의 주장은 ‘상식적’이다. 다만 미네르바의 문제의 글이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하며 국가에 손해를 끼쳤다는 법리적인 견해와 대립해야 할 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진중권의 시점에서 멈추어버린다면, 우리는 도대체 이 사태가 어떻게, 그리고 어째서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이때에 채택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단순화된 음모론이다. 청와대 지하벙커에서 이명박이 미네르바의 체포를 지시했다거나, 사법부가 정권의 개라서 왈왈 짖고 있다는 식의 얘기 밖에는 할 것이 없다. 그리고 실상은 인터넷 담론의 주류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미네르바를 구속하고 수사를 하고 있는 사법부는, 그들을 비판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 자신의 착각에도 불구하고 이 사태의 종속변수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법부의 결정에 대한 추정으로는 노지아 님의 글
http://mini9.pe.kr/1343 이 흥미롭다고 생각되지만,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별로 코멘트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 문제의 핵심은 ‘미네르바 신드롬’을 만들어낸 주체들이 어떤 환상 속에서 그를 외신에까지 인용되는 국가적인 인물로 키웠느냐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은 없지만, 간략하게라도 짚어보기 위해 먼저 지지자들의 시점에서 미네르바의 환상을 분석한 후, 정부나 언론이 그 환상에 어떻게 부화뇌동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겠다.



2. 지지자들의 시점 (노빠?)


나는 기본적으로 (법리적인 문제와는 별도로) 미네르바의 글쓰기 자체가 매우 부적절했다고 본다. 진중권은 인터넷이 가면무도회의 장이며, 미네르바 역시 가면을 썼을 뿐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가면을 쓴 그의 연극이 어떤 것이었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슘페터가 마르크스를 분석하듯이 1) 예언가의 성격 2) 경제분석가의 성격 3) ‘민중의 친구’로서의 성격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에 대해서는 이글루스의 2071 님이 그가 체포되기 전부터 선도적인 작업으로 비판해 온 바가 있다. (글이 좀 많고 내가 거의 이해를 못하는 문제라서 적절한 포스트를 링크하지를 못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미네르바를 옹호하거나, 옹호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그가 1)의 측면에서 (적어도 한때는) 유능했고, 그 글쓰기의 성격이 3)에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글루스의 자그니 님이 만들어낸 “우리편 전문가”라는 레토릭은 아마도 그 점을 지적하고 있을 것이다.

(자그니 님의 글 http://news.egloos.com/tb/1858168 )

이글루스의 sonnet 님은 미네르바의 조언이 공론의 영역에서 통용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그가 “우리편 전문가”라는 사실을 부정했다. 한편 이글루스의 노정태 님은 ‘전문가’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지를 주목하면서, 미네르바에 대한 열광은 개인 투자자들에 대한 사적인 조언에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미네르바를 ‘전문가’라고 칭할 때 그는 펀드회사 직원과 비교되어야지 경제학자나 관료와 비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지적은 올바르지만 한 가지 의문을 남긴다. 그렇다면 정말로 소액투자자들이 재태크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미네르바에 열광했던 것일까? 어느 정도는 그렇기는 하겠으나 그것만이라면 미네르바에 대한 광적인 열광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미네르바는 분명 ‘경제대통령’으로 불렸고, 그것은 사적인 조언이 공적으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한 대중들의 지지에 기초해 있었다. 나 역시 미네르바가 구속되기 전, 미네르바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의 요인을 분석하면서, 대중들이 펀드회사 직원과 비교되어야 할 미네르바를 경제학자와 비교하는 것은 일종의 범주오류라고 말했다.

(sonnet 님의 글 http://sonnet.egloos.com/4035234 )
(이전의 내 글 정말로 미네르바 밖에 없는가? )


이런 범주오류가 없이는 미네르바에 대한 열광은 절대로 이해될 수 없다. 따라서 sonnet 님처럼 미네르바의 조언의 성격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노정태 님처럼 그의 조언을 사적인 영역의 것으로 한정하고 그를 구원하려는 시도는 어불성설이다. 미네르바를 경제학자나 관료와 비교한 것은 비판자들 이전에 그의 열성적인 지지자들이었다. 이 범주오류는, 자수성가한 대통령을 뽑으면 당연히 경제가 살아 날거라는 대중의 믿음과도 비슷한 것이다. 따라서 미네르바에 붙여진 ‘경제대통령’의 수식어에 담긴 환상이 사람들이 이명박에게 기대했던 바로 그것이라는 이택광 님의 분석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택광 님의 글 http://wallflower.egloos.com/1860344 )

즉, sonnet 님이나 노정태 님이 밝혔듯이 미네르바의 조언은 철저하게 개인투자자들의 사적인 경제활동을 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에게 공적인 차원에서 열광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이 신드롬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질문이다. 진중권은 그 원인을 리만브라더스의 파산에 대한 그의 예언에서 찾는다. 조선일보 등이 산업은행의 리만 인수를 주장할 때 그 파산을 예언한 미네르바의 말이 적중하자 사람들은 그를 정부나 보수세력보다 유능하다고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적절한 지적이긴 하지만 그의 지지자들이 생각하기에 리만브라더스의 파산에 대한 그의 예언이 그의 다른 예언들(가령 주가나 환율에 관한 예언들)과 다른 종류의 예언으로 받아들여졌을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그의 사적인 조언을 공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게끔 하는 지지자들의 공통적인 환상을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조금 대담하게 얘기하자면, 나는 그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는 다음과 같은 환상에 기초해 있다고 생각한다.


1) 이명박 정부는 대한민국을 붕괴시키고 있다.

2) 대한민국이 붕괴하는 시나리오가 차근차근 진행 중에 있다.
3) 상위 1%, 혹은 0.1%에 해당하는, 국가 정책과 시장의 자금흐름의 동향에 기민한 (그러니까 ‘고급정보’를 얻을 수 있는) 어떤 사람은 그 시나리오를 일목요연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4) 그것이 바로 미네르바다.


이렇게 본다면 어떤 사실들이 설명되는가?


첫째, 미네르바가 어째서 자신의 신원을 거짓으로 기술해야 했는지가 설명된다. 미네르바가 처음부터 자신의 신원을 ‘상위 1%’로 세팅한 것 같지는 않다. 그에 대한 열광이, 환상의 틀이, 그를 그곳으로 몰고 간 것이다. 이를테면 환상이 먼저 있었고 미네르바의 예언이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졌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미네르바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었을까? 만일 미네르바 본인조차도 그 환상을 공유하고 있었다면, 그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환상 속에서, 그가 하는 말은 명백하게 진실이었다. 문제는 실제의 ‘상위 1%’ 멤버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매국노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폭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환상의 공유자들에겐 거짓말하는 이는 사회의 부유층이지 자신들은 아니다. 가령 어떤 이가 검찰에 구속된 미네르바가 가짜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인터넷에 “나는 진짜 미네르바를 알고 있다.”는 게시물을 올렸다고 치자. 그가 실제로 미네르바는커녕 부엉이나 올빼미도 만난 적이 없다 하더라도, 그의 생각에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거짓말쟁이는 이명박 정부와 법원일 것이다. 진중권은 미네르바가 가장 무도회의 도중에 자신이 30대 초반의 아마추어라는 사실을 밝혔다면 더 쿨했을 거라는 식으로 얘기했다. 하지만 도대체 미네르바에게 그럴 권리가 있기는 했을까? 진중권은 미네르바를 자율적인 글쓰기의 주체로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거대한 환상의 거미줄에 포박된 가련한 곤충일 뿐이다.


둘째, 그의 글쓰기가 어째서 기존의 정보들을 가공한 것임에도, 비슷한 정보를 담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파괴력을 담을 수 있었는지가 설명된다. 미네르바가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했건, 아니면 사람들의 환상이 그를 그쪽으로 내몰았건, 그가 언급하는 모든 ‘정보’들은 (이미 공개된 것이라도) 비밀스러운 지식으로 여겨졌다. 이명박 정부는 세상을 몰락시키고 있고, 어느 예언자는 극소수의 이너서클 멤버들만이 볼 수 있는 그 사실을 민중들 앞에 폭로한다. - 이것이 미네르바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다. 그러므로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법리적인 판단과는 별도로, 미네르바가 썼던 글을 ‘예측’이나 ‘기존의 정보를 재가공한 정부 정책 비판’으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가 사람들에게 충족시켜준 것은, 개인투자자들의 손실 복구에 대한 욕망이나,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욕망이 아니다. 그가 충족시킨 것은 이명박 정부는 매국노라는 단순명쾌한 진리를 가상의 전문가로부터 확인받고 싶었던 사람들의 욕망이었다. 그것은 전문가가 대중에게 전해주는 비밀스러운 지식의 형태로 전해졌다. 그노시즘이나 음모론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미네르바의 연극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기를 거부한다. 이 연극은 공론 형성에 무익한 정도가 아니라 지대한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다. 구별해야 할 것은 이명박 정부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과 미네르바의 연극을 비판하는 것은 전혀 모순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 이명박 정부는 경제를 잘못 운용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대가를 우리는 멀지 않은 미래에 치르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경제위기의 원인을 ‘리만 브라더스’로 의인화하고, 그들만 몰아내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면서, 실제로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이 어째서 문제인지를 짚고 있는 경제학자들의 글에는 무관심하면서도 미네르바를 예찬하며 “참 경제학자는 그밖에 없다.”고 말하는 세태는 시민들의 ‘이명박 비판’이 국가의 방향을 올바르게 수정하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울한 진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들이 경제를 잘 몰라서, 이명박 같은 이가 경제를 살려줄 거라고 믿게 되었고, 따라서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국개’들을 비난하는 이 진술에선, 따라서 마땅히 사람들이 경제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한다는 당위적 판단이 도출된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말하면서 ‘국개’를 비난하는 이들이, 경제에 대해 더 알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미네르바와 같은 이가 이명박과 강만수를 비난할 때 환호작약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현실은 뭐란 말인가? 시민들이 경제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학자와 시민, 그리고 그 중간의 저널리스트 사이에 지식의 올바른 교통관계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미네르바에 대한 환호는 그 교통관계를 확립하는데 기여하는가? 그러기는커녕, 학자와 지식인들을 ‘부당하게’ 비난하는 수사만 가중시킬 뿐이다. 


신비주의적인 수사들이 흔히 그렇듯 미네르바의 글은 심지어 민주주의적이지도 않다. 그의 글은 오히려 아는 이들이 보기에는 맥락에 맞지도 않는 전문용어(?)의 범벅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긴 펀드회사 직원들이 주식투자 권유할 때 하는 말도 좀 그런 구석이 있다.) 그는 그처럼 자신이 업계사람임을 과시하는 용어 사용에 인터넷의 문체를 결합하여, 기존의 지식인들에 대항하는 ‘민중적 지식인’의 권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민중주의적 욕망이 스스로를 고양시키지 않고, 반-지식인 전선을 말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쌓는 특정한 지식인에 대한 추종으로 결합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반지성주의적 현상일뿐더러 민주주의적 담론형성과 의사결정에도 심각한 해악으로 작용한다.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추구하는 이야말로 포퓰리스트로 화할 가능성이 높으며, 장기적으로는 ‘민중의 열망’과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쟁가 님의 건조한 글
http://xenga.tistory.com/102 은 그러한 우려를 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미네르바의 글쓰기를 옹호해야 하는 것일까?


3. 정부 당국자의 시점 (강만수?)


미네르바가 환호받은 원인을 이렇게 추정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네르바를 키운 것은 네티즌들의 환호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익명의 네티즌의 표현의 자유를 논거로 미네르바의 모든 행위를 옹호하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2008년 12월 29일의 시점에서 미네르바의 영향력은 익명의 네티즌의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영향력은 네티즌이 키운 것은 아니다. 네티즌들의 스타는 수없이 많지만 현실세계에서 미네르바와 같은 영향력을 지니지는 않는다. 가령 주갤의 둥신이 한국 주식시장을 좌지우지한다고는 믿을 수 없다. 미네르바의 영향력이 검찰의 수사대상이 될 정도로 커진 이유는 명백하게 현 정부와 집권여당의 대응 때문이었다.


기획재정부는 미네르바의 글이 올라올 때마다 일일이 반박했고, 미네르바에게 정보 브리핑을 해주겠다는 제의까지 했다. 그것은 그들이 볼 때 미네르바의 글이 굉장히 위협적이었다는 뜻이다.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느꼈을까?


촛불시위나 아고라 탄압과 관련지어 생각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명박 정부는 촛불시위대, 광장에 모인 100만의 군중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두려워 한 건 광장에 모인 군중이라기보다는 그 시위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째서 미네르바의 글에 꼬박꼬박 대응하여, 그를 검찰발표대로라면 20억불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거물로 만든 것이었을까?


간단하게 얘기하면, 지지자의 시점에서 분석했던 그 환상과도 결부되는 것인데, 나는 이명박 정부가 미네르바의 뻥카를 그만 믿어버렸던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본다. 즉,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부르주아의 이탈이다. 지금의 이명박 정부는 순탄하지 못한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당장에 두려워하는 것은 광장의 100만 시위대로 상징되는 시민들의 이탈이 아니라, 부르주아들의 이탈이다. 부르주아들이 이탈하여 가령 박근혜를 구심점으로 삼는 상황을 그들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엔 오직 그것만이 그들이 권력을 상실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명한 판단인 것 같다. 대안정치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정권에 실망한 다수의 시민들의 존재는 정권에 그다지 위협이 되지 못한다. 기업이라면 소비자의 숫자를 되도록 늘려 그들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겠지만,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이라면 상황은 다르다. 그들은 되도록 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야 할 필요는 없고, 단지 상대편보다 더 많은 유권자의 지지만 얻으면 된다. 정치에 실망하여 기권자가 되는 시민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은 타격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명박 정부가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부르주아의 이탈이라는 점은 이 시점에서 분명한 사실이다.


요약하자면 이명박 정부는, 미네르바가 정말로 상위 0.1%에 해당하는 줄 알고 겁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대응, 혹은 설득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외신에도 인용되는 슈퍼스타인 미네르바의 탄생이었다. 이 추정은 현재의 이명박 정부가 처한 위치를 그대로 드러내준다. 그리고 이 추정은, 이명박 정부를 욕하는 현재의 시민들의 움직임만으론 정권에 대해 전혀 압박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 하나의 시사점은, ‘인터넷’이란 공간을 하나의 균질화된 공간으로 설정하여 환상화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서민들의 게시물은 겁내지 않는다. 다만 부르주아의 게시물을 겁낼 뿐이다.


미네르바를 추앙한 네티즌의 환상, 상위 0.1%인 그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아고라 유저의 증언 등은 이명박 정부를 유일하게 위협할 수 있는 그 지점을 ‘환상적으로’ 취하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미네르바에 대한 환상이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발전적이기는 커녕 퇴행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시민이 자신의 힘으로 권력을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상위 0.1%의 신들의 세계에서 어느 영웅이 내려와 그들을 대변해서 싸워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정부당국자라면, 다시는 안 속을 것 같긴 한데, 여기는 대한민국이니까 아무것도 속단할 수는 없다.


4. 언론의 시점 (신동아?)


이번 사건을 가장 희극적으로 만든 것은 조중동이었다. 한때는 미네르바를 전문가로 묘사했던 그들이 그를 30대 백수 히키코모리로 묘사하며 ‘가짜에 속은 대한민국’이라고 난리쳤다. 이를 학력차별이라는 시각에서 보는 사람도 있고, 일정부분은 타당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핵심은 조중동이 가장 크게 속았다는 것이고, 그 쪽팔림을 덮기 위해 선정적인 보도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들 역시 미네르바의 지지자들이 만들어내고 정부가 깜빡 속아 넘어간 그 환상의 구도에 경도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조중동이 사람의 말을 검증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논증의 타당성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용하는 용어를 보고 미네르바를 ‘전문가’라고 검증했다. 그 말인즉슨 한국의 전문가들, 특히 조중동에 나와서 떠드는 사람들은 논증의 타당성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다. 미네르바의 글쓰기는 어쩌면 한국의 4-50대 남성들에게 가장 ‘먹히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논점이나 논거, 주장의 선후야 어떻든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고 얼마나 많이 아는지를 자랑하고 상대방을 까내리는 것이 한국적인 논쟁의 방식이니 말이다. 전문용어의 상당수가 공개되는 이 인터넷의 시대에, 그런 방식으로 얼마나 자신들의 ‘권위’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도 썼지만 조중동은 MBC 비판하기 전에 제발 자신들의 경쟁력이나 길렀으면 좋겠다. 미네르바의 논변을 검증한 곳이 기존의 언론이 아니라 오히려 인터넷이었다는 사실은 정말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을 조소하기 위해 누가 일부러 짠 각본 같다. 


특히 신동아의 경우엔,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관심이 없는 이는 모르겠지만 신동아는 21세기 초반까지도 월간조선에 맞서는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월간지였다. 2001년 이후 동아일보의 보도가 급격하게 수구화하면서 신동아의 논조와 균열이 생기자, 동아일보가 일간지를 통해선 보수층을 공략하고 월간지를 통해선 진보층을 공략하는 이중 마케팅을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미네르바 특종 보도가 그런 신동아의 ‘전통’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단지 ‘황색저널리즘’ 때문인지는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하지만 신동아가 나서서 미네르바에 대한 진위논란으로 문제를 확대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정론지의 태도는 아니다.


나는 지금 구속된 피의자 외에 다른 미네르바가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딱히 그렇게 추정해야할 만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추정한다 하더라도, 이 상황의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검찰이 명명백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진짜 미네르바를 회피하고 미네르바 추종자들을 능멸하기 위해 지금의 피의자를 일부러 잡았다는 견해는 지나친 음모론이다. 이런 음모론을 통해 미네르바의 열광적인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환상에 도취되어, ‘진짜 미네르바’를 능멸하고 탄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법리적 차원에서 문제는 12월 29일에 올린 글의 작성자가 누구였느냐는 것이고, 피의자 이외에 그 누구도 자신이 그 글을 썼다고 말한 이가 없다. ‘신동아 미네르바’ 문제는 확실히 흥미진진하고 나 역시 계속해서 ‘구경’할 것 같긴 하지만, 이런 식의 ‘팩트’에 이 사태의 핵심이 있다고 본다면 ‘미네르바 사태’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의 신동아는 시간을 끌면서 잡지 발행부수나 올리는 일에 골몰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보도 속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사실이 발견될 거라고는 믿기 힘들다.  


5. 닫는글


미네르바 사건은 한마디로 말해 대한민국의 ‘국격’이 땅에 떨어진 사건이다. 1) 그가 네티즌들의 호응을 받았던 것, 2) 그에게 정부가 몸소 대응한 것, 3) 반정부 성향의 정치인, 학자, 매체가 그에게 찬사를 보낸 것, 4) 주류언론이 그에 대해 추측보도를 한 것, 5) 그가 구속된 것, 6) 주류언론이 그를 비난한 것, 7) 여전히 그에 대한 진위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을 통틀어 그렇다. 하지만 국격을 땅에 떨어뜨린 건 미네르바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대한민국의 상황 그 전체다. 대한민국의 수준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폭로되어 버린 것이 현 상황이며, 정부와 언론과 네티즌들은 졸지에 발가벗겨진 자신의 몸을 가리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나는 미네르바로 알려진 피의자를 동정한다. 그가 당하고 있는 고난은, 그가 의도치 않게 대한민국을 발가벗겼기 때문에 온 것이다. 게다가 이 사건은 현재진행형인지라 그가 당할 고난이 이게 끝인 것 같지도 않다. 지못미, 미네르바! 하지만 그를 위해서도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발가벗겨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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