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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정말로 미네르바 밖에 없는가?

조회 수 1195 추천 수 0 2008.11.21 11:39:06


미네르바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을 바라보면, 군대 시절에 봤던 코미디 프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기상청 아나운서가 고기압이 어쩌고 기압골이 어쩌고 하고 있는데 시청자의 대변자를 자임하는 까칠한 피디가 말을 가로막고 웃는다. "야! 그래서 비가 와? 안와?!" / "안 오는데요." / "그것만 말하면 되잖아?!" 시청자에게 큰 웃음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 후 그 프로는 그 까칠한 피디의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종결된다. "모든 것은 시청자 관점에서!!"


미네르바는 경제학적 식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그것과 현장에서 일을 했던 경험에 의거해 그럴듯한 예측을 내놓을 수 있는 것 같다. 그가 신동아에 썼다는 기고문은 논리정연해 보였다. 말하자면 내가 주변 경제학도들에게 듣던 상황에 대한 설명, 혹은 향후 시나리오와 모순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그가 사이비라거나, 모자라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그의 글쓰기 방식은 비록 그가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는 기상청의 예측과 비슷한 방식을 택했다 하더라도 "내일 비가 오나? 안 오나?"의 단순함의 미덕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학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이다.


물론 미네르바가 학적인 미덕을 갖추지 않았다는 것은 문제가 안된다. 애초에 그가 학문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그의 문제제기나 상황인식에 대해 나는 딴지를 걸 생각이 없으며 사실 매우 공감하고 있다. 만일 딴지를 걸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경제학에 대해 문외한인 처지에 제대로 된 딴지를 걸 수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미네르바가 아니라 미네르바의 지지자인데, 그들은 마치 미네르바에게서 진정한 학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양 떠들고 있다.


정부가 스스로 신뢰받을 수 없는 정책을 내걸고, 이에 대해서 지성계 전체가 반발하지도 않는 시대에, 신뢰받을만한 예측을 하는 학자를 갈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학자의 역할을 운운하려면 적어도 학자들은 "내일 비가 오니, 안 오니?"라는 질문에 한큐로 대답할 수 없는 족속들이라는 사실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추상적인 언어로 현실개입을 거부하는 학자들에게 뿐만이 아니라, 나름대로 현실참여의 길을 걸으려고 하는 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고 본다면, 우리에겐 "미네르바 밖에" 없는 것이 아니다. '전체 경제학자'라는 주어를 쓴다면 한국의 경제현실에 게으르고 무능하다는 평가가 가능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경제학자 개인을 찾는다면 답이 없지는 않다.


학자들의 역할방기를 비판하는 작업은 결국 구체적으로 이러한 '좋은 학자'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작업과 병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오히려 현실에 침묵하는 학자들보다 현실에 어떻게든 개입하려는 학자들에게 계몽주의, 엘리트주의, 탁상공론, etc의 딱지를 붙여 비난한다. 왜냐하면 차라리 그렇게 현실에 개입하려는 학자들만이 그나마 대중과 만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세는 시민들 스스로 학자들의 역할방기를 장려하는 것이지 타파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정말로 미네르바 밖에 없는가? 여당의 국회의원이 그의 예측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지지한 경제학자가 그를 공개적으로 찬양하고, 정권에 친화적이지 않은 거대방송사의 클로징 멘트가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이 시국에선 현상적으로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현상 자체가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정말로 대한민국이 그런 수준의 나라라면 그것은 매우 쪽팔린 일일 것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세계경제규모 10위권의 나라가 그런 수준이란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나라가 아무리 당장 돈이 되는 일에만 골몰하고 학문 따윈 고사해도 신경쓰지 않는 나라라고 할지라도, 그런 수준으로 이런 정도의 경제발전을 이룰 수는 없다. 


학자들은 분명히 있으며,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학자들 본인들의 책임만은 아니다. 물론 나도 현실참여하는 학자들이 대중적인 글쓰기 능력을 갖추면 금상첨화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천부적인 자질이 없을 경우 그것을 갖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거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자질을 갖출 수도 없고, 그런 자질을 갖추지 못한 모든 이들이 그런 노력의 필요성을 절감한다고도 볼 수 없다. 대중적인 글쓰기 능력이라는 것은 하나의 별도의 능력으로, 그것에 노력을 집중한다면 다른 종류의 학적 노력을 게을리하게 된다. 현실참여를 원하는 모든 경제학자들에게 (이 문장의 주어를 다른 전공의 학자들과 바꾸어 써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노력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시민들이 최소한의 학적 언어에 익숙해지지 못할 때, 우리는 '대중적인 글쓰기 능력'이라는 별도의 변수가 학자들의 능력을 평가하는데 개입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물론 이는 학계 안의  평가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평가이겠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학적으로는 함량미달이지만 대중적인 글쓰기 능력이 있기 때문에 뛰어난 다른 학자보다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학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이 극단적으로 심해지는 것은 시민들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만큼 풍부한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되는 셈이니 말이다.


시민들이 이 정도로 학자들의 언어에서 유리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 그들 자신의 책임은 아니다. 교육이라든지, 꼭 그게 아니더라도 어떤 사회분위기의 영향력이 언급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유리됨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 책임을 온전히 학자들에게 돌리고 학자들만을 욕한다면, 시민들 역시 이 현상에 대한 책임을 벗어나기 어렵다. "대한민국엔 왜 미네르바만 있고 학자들이 없는가?"라고 많은 이들이 개탄한다. 나는 그들에게 "왜 당신들은 미네르바 밖에 보지 못하는가? 그것까진 이해한다고 쳐도, 왜 당신들이 볼 수 있는 것만 쓸모있는 소리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말을 돌려주고 싶다.


이쯤에서 적절한 경제학자 김상조의 현상분석글 인용. 매우 간결하게 현재의 위기를 짚고 있는 글이다.




[프레시안] 정부 스스로 '미네르바의 예언'을 실현할 셈인가"
[기고] 익히 보아왔던, 그리고 예외없이 실패했던 '관치금융'의 망령

기사입력 2008-11-19 오후 5:33:59

    
이제 한국경제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침체의 골짜기로 들어서고 있다. 다시 말해, 문제의 핵심이 유동성 부족(illiquidity)에서 지급 불능(insolvency)으로 바뀌었다. 이른바 펀더멘탈은 건전한데 단지 일시적으로 유동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부채가 자산을 초과하여 원리금을 정상적으로 상환할 수 없는 기업들이 늘어나는 상황이다. 상호저축은행, 건설사, 조선사 등 일부 업종의 부실기업 문제는 더 이상 뉴스거리도 아니다. 10년 전의 악몽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한국 국민에게 또다시 구조조정의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18일 열린 대주단협약 설명회. ⓒ뉴시스
그러나 부실기업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더 공포스러운 것이 있다. 그것은 부실기업 문제에 대처하는 정부정책이 예정된 실패의 길을 걷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다. 요즘 정부가 동원하는 모든 정책수단들이 '예전에 익히 보아 왔던' 것들이고, 그리고 '예외 없이 실패했던' 것들이다.


건설사에 대한 대주단협약? 1997년 부도방지협약의 재판이다; 10조 원의 채권시장안정펀드 조성? 1999년 대우채 사태와 2003년 카드대란 때 봤던 것과 다를 바 없다; 정부소유 주식의 현물출자를 통한 산업은행의 부실기업 지원 여력 확대? 대우그룹, 현대그룹, LG카드 등 대형 부실기업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사용했던 전가의 보도이다; 연기금을 동원한 주가부양과 부동산 규제완화를 통한 건설경기 부양? 이건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사례들이 있다. 현재의 정부정책을 보면서 과거의 정책실패를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데자뷰(déjà vu; 旣視感) 현상, 이거야말로 진짜 공포다.


그럼 왜 이런 정책수단들, 즉 관치금융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건설사에 대한 대주단협약의 지지부진한 진행 상황이 그 이유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애초 정부는 채권금융기관 중심으로 건설사에 대한 신용위험 평가를 거쳐, A등급(양호)은 채권금융기관 자체 지원, B등급(중간영역)은 대주단협약을 통한 기존채권의 만기연장과 신규자금 지원, C등급(회생가능)은 워크아웃 프로그램 적용, D등급(회생곤란)은 회사정리 절차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건설사의 입장에서는 채권금융기관의 지원을 요청하는 순간 자신의 재무건전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자인하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나아가 금융지원에 따른 경영간섭과 책임추궁의 가능성 때문에 주저할 수밖에 없다. 채권금융기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코도 석자인 마당에 부실채권의 확대를 가져올 건설사 지원에 대해 적극적일 수가 없다. 또한 정책관료의 입장에서도 이런 관치금융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감사원 감사 내지 청문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법률에 근거하여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한 구조조정 절차가 아닌 한, 어느 주체가 이런 일에 총대를 메고 나서겠는가?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정부가 애초 천명한대로 건전한 기업(good company)에 대해서는 유동성을 지원하되 부실기업(bad company)에 대해서는 구조조정을 진행한다는 이른바 '옥석 가리기' 원칙을 엄격히 지킨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옥석을 가릴 능력과 의지가 있는가? 과거에 그런 사례가 있는가? 천만에…


이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지 않는 한, 시장은 정부의 지원을 받는 기업은 일단 부실기업(bad company)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어느 기업도 금융지원을 신청하지 않게 된다.


정부는 이런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모든 기업이 지원대상으로 들어올 수 있게끔 요건을 완화하게 되고, 결국 애초의 옥석 가리기 원칙은 붕괴된다. 굿 컴퍼니와 배드 컴퍼니를 구분할 수 없으니, 정부가 아무리 돈을 많이 풀어도 신용경색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다. 이것이 정보의 비대칭성에 따른 사전적 기회주의의 문제, 즉 역선택의 문제(adverse selection)이다. 정부가 관치금융으로 모든 기업을 살리려고 하면, 모든 기업이 사경을 헤매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또한, 정부가 당장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해 굿 컴퍼니와 배드 컴퍼니를 불문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관치금융을 밀어붙이면, 배드 컴퍼니의 부실경영 및 불법경영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과거를 묻지 않으니, 현재도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되고, 결국 미래에도 동일한 문제가 재발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보의 비대칭성에 따른 사후적 기회주의의 문제, 즉 도덕적 해이의 문제(moral hazard)이다. 정부가 관치금융으로 배드 컴퍼니까지 살려주고 책임도 묻지 않는다면, 모든 기업이 배드 컴퍼니의 전략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강조하지만, 시장기능이 붕괴된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수수방관하는 것은 직무유기이다. 정부개입의 필요성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가 관치금융 방식으로 개입함으로써 역선택과 도덕적 해이의 문제를 오히려 심화시킨다면, 정부가 경제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지금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과거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특히 환율과 주가 관리도 모자라 이제는 시중금리까지 끌어내리라고 직접 지시하는 대통령의 경제인식을 보면서, 정부정책 실패의 예감은 확신으로 굳어진다.


현재의 신용경색 상황을 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는 시장 스스로가 굿 컴퍼니와 배드 컴퍼니를 구분할 수 있도록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재무상황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시장에 제공하여야 한다. 특히 상호저축은행, 건설사, 조선사에 대한 최신의 정보가 즉각 공개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역선택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리고 부실 금융기관과 부실기업의 처리 부담 규모가 시장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는 것이라면, 구조조정촉진법 또는 예보와 캠코를 통한 공적자금 투입(예금자보호법 및 자산관리공사법) 등 기존의 법률적 절차를 통해 구조조정을 진행하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도덕적 해이의 창궐을 막아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니고, 정부가 정보를 독점한 채 밀실에서 의사결정하는 관치금융 방식을 고집한다면, 한국경제의 미래는 10년 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정부 스스로가 '미네르바의 예언'을 실현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 경제개혁연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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