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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단호한 글쓰기'로 진실을 호도하기

조회 수 852 추천 수 0 2008.04.15 13:00:02

단호한 글쓰기는 그 자체로는 미덕도 악덕도 아니다. 하지만 근거를 대지 않고 단호함만을 견지한다면 그건 웃음거리가 된다. 게다가 근거가 아닌 것을 근거로 제시해놓고 뻣대고 있으면 보는 사람의 입장이 더 난감해진다.


아이추판다 님의 반응이 바로 그런 글쓰기의 한 예시라 볼 수 있다.
대단히 만족스러운 선거 결과 라는 글에 대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선거 결과 라는 반론을 썼더니 그는 민주화 이후 투표율 경향 이라는 그래프 하나로 반박한다. 문제는 이 그래프는 무엇에 대한 반박도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아이추판다 님의 주장의 근거를 두 가지로 파악한 후 그것들에 대해 반론했고, 투표율 하락 문제에 대해선 그 후에 언급했다. 그러니까 내 반론은 크게 세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추판다 님의 그래프가 최소한 투표율 문제에 대한 반박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내 글의 1/3에 밖에 반박하지 않은 셈이다.


만일 내가 이전 글을 아이추판다 님 방식대로 썼다면 이렇게 썼을 거다.


아이추판다 님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하더라도 정상적으로 잘 작동하고 있다는 근거로, 프랑스의 국민전선같은 극우 정당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극우전선이 뭔진 알고 말하는 걸까. 극우전선의 정책을 보면 "이민의 중지, 노동조합의 권리축소, 경찰 지원, 테러리즘과 마약부정거래자에 대한 사형 실시, 해외 영토에 대한 프랑스 지위의 유지, 국가의 경제제한 폐지" 등을 주장하고 있다. 이게 유럽에서야 제나라 국민 쪽팔리게 할 만한 극우 정당이지만, 한국으로 오면 어떤가? 이념 분화가 명확히 되어 있지 않은 한국 사회지만 적어도 한나라당, 자유선진당, 친박연대는 극우전선에 맞먹거나 그보다 심한 정당들이 아닌가. 그런 정당들의 의석 합계가 200석이다. 아이추판다 님의 견해에 따른다면 한국은 오히려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셈이다.  


이렇게 글을 맺은 후 태그에 "부끄러운줄알아야지"나 "양심이있어야지" 혹은 "무슨말이더필요한지" 정도를 덧붙이면 완벽한 재현이 되겠다. 그런데 이런 짓은 내 취미가 아니다. 일단 논의를 지나치게 협소화시키는 면이 있고, 블로그에 올리는 글에 대한 기대치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칼럼이나 기자의 기사라면 또 모를까, 블로그 포스트에다 대고 저렇게까지 비아냥 대고 싶진 않다. 하지만 대충 넘어가도 지적을 하면 알아는 먹어야 할 게 아닌가.  


나는 공대생이 아니라서 저런 그래프를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는지, 회귀분석 결과라는 걸 뽑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모른다. 하지만 저런 거 만들 시간에 남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나 찬찬히 들여다 보는게 사태파악에 더 도움이 될 거다. 아이추판다 님은 상대방의 글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혹은 자신이 설명할 수 있는, 또는 자신이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논점만을 뽑아내어 그것에 대해 반론한 후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심리학이야 자기 전공 분야이니 계속해서 새로운 정보를 제시하면서 나름대로 논쟁을 끌어나갈 수 있었지만, 이렇게 주제가 일반적인 토론으로 넘어오면 얘기가 또 다르다.


사실 노정태의 반론에 대해서, 약간 우려되는 지점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글을 썼다. 그의 글은 "이 모든 건 다 유시민 때문이다."로 요약될 수 있다. 그 견해에 동의하는 면이 없는 바는 아닌데, 결국에 노정태의 글은 이 투표율 하락의 책임도 유시민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적어도 아이추판다 님은 그렇게 읽었다. 그래서 그는 이 그래프에 대해" 이번 총선 투표율이 특별히 낮은게 아니란 거죠. 예를 들면 "노무현 정권을 심판하는 대신 정치적 의사표현을 포기했다"라는 식의 주장은 무리가 있습니다. 정치적 의사표현을 포기하는 비율은 10년전 정권교체 때나 지금이나 똑같거든요."라는 변명을 덧붙인다.

확실히 이 그래프를 보면 이번 총선의 투표율이 낮은 것이 아니라 2004년 총선의 투표율이 지나치게 높다. (61%) 그래서 문제는 해결된 것일까? 하지만 투표율이 낮아지는 비율이 일정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 기울기가 (절대값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크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의 덧글에서 한 말을 다시 옮겨오자.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p20을 보면 "물론 투표율이 낮아지는 경향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투표율이 우리의 경우처럼 이렇게 급격하게 떨어지고 그 결과 선거의 절차적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할 지경에 이른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나는 최장집의 말을 신뢰하지만, 말이 나온 김에 한번 민주주의 선진국들이 보여있다는 유럽지역의 총선 투표율을 찾아보자.


2007년 프랑스 총선의 득표율은 60% 정도였다. 1차 투표 때 기권율이 39%, 2차 투표 때 기권율이 40%였다고 하는데, 이쪽의 투표율 역시 역대 최저 수준이라 한다. 아무래도 국민전선이 활개치는 이 나라는 민주주의가 한국보다 후져서 아직도 투표를 많이 하고 있나 보지? (그런데 2002년도 대선에서 낮은 투표율 때문에 장 마리 르펜을 결선으로 보냈던 이 나라의 투표율은 2007년 대선 때는 무려 84%로 치솟았다. 이 친구들 왜 이럴까. 2007년 한국 대선투표율도 60% 간신히 넘는데. 과연 극우전선이 설치고 다니는 민주주의 후진국이라서?)  

 
2005년 영국 총선의 득표율은 61%였다. 2004년 한국 총선의 득표율이 60.6%였으니 그나마 근접한 값이다. 하지만 아이추판다 님의 그래프에서도 2004년 한국 총선의 득표율은 예외적으로 높은 곳에 있다. 이 수치는 2000년 총선의 득표율보다 오히려 약간 더 높고 1996년 득표율보다는 좀 낮은 수치다. 반면 2005년 영국 총선의 득표율은 2001년(59%)과 비슷하게 예외적으로 낮은 득표율로 기록되었다. (1997년의 득표율은 71%였다.) 2008년 한국의 투표율은 50%가 안 된다. 아무래도 이 나라도 우리보다 민주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것 같다.


2005년 독일 총선의 득표율이 77.7%였다. 민주주의 후진국이다. 2006년 스웨덴 총선 득표율은 82%였다. 물론 민주주의 후진국이다. 2007년 덴마크 총선 득표율은 86.6%였다. 후진국? 명백히 밝히지만 이 나라들은 의무투표제를 실시하는 나라가 아니다. 의무투표제를 실시하는 나라들의 투표율은 90%를 웃돈다.


그런데도 "민주주의가 잘 정착된 나라일 수록 투표율이 낮"고 한국도 그런 선진국의 경향성을 따라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보자면 전세계를 다 뒤져도 우리만큼 민주주의가 잘 발달한 나라가 없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투표율 하락세는 서구 유럽을 뛰어넘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지금껏 한국말로 떠들었으니, 굳이 그래프 그려주지 않아도 기울기를 얼추 예상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기울기의 절대값만 큰 게 아니라, 이젠 투표율 자체가 선진국보다 낮다. 무려 46%란다. 누가 이에 대항할 것인가? 그나마 한국의 투표율에 근접한 영국의 상황에 대한 분석을 가져와 보겠다.


이것은 사람들이 냉담하기 때문이 아니다. 압도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국적 정치 의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성의 정치는 이런 관심에 집중점이나 접근 수단을 제공하지 않는다.

국민의 3분의 2가 국가 운영의 방도에 관해 발언하고 싶어하지만 겨우 27%만이 실제로 발언권을 갖고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주요 정당들 사이에 차이점이 거의 없다는 확고한 믿음과 이런 현실이 결부되어 있다. 1980년대 초에는 국민의 80%가 보수당과 노동당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그 수치는 27%로 떨어졌다

선거 특별호 Socialist Worker(영국) 2005년 5월 중에서


내가 한국 상황 설명하면서 하는 말이나 비슷하다. (최장집의 말이기도 하다.) 투표율이 낮아지면 선진국에서조차 민주주의의 위기를 운운한다. 민주주의의 안정기에 들어서면 점진적으로 투표율이 낮아지는 추세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투표율 하락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토록 급격하게 투표율이 떨어지는 상황의 원인을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기능'으로 진단하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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