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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라캉을 모르면 막장인가효? / 아이추판다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이 아닌가? / 아이추판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 한윤형
라캉 논쟁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 / 노정태
일관성 / 아이추판다
라캉과 정신의학, 그리고 관념론 / 노정태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재론 / 한윤형
논쟁의 효과, 그리고 인문학과 과학 / 한윤형
프로이트, 융, 라캉 / 아이추판다
라캉적 임상 진단 및 치료 / 노정태
과학학은 반과학주의인가? / 아이추판다
메타 이론, 과학, 물리주의 / 한윤형
과학인 것과 과학이 아닌 것 / 노정태
쿤, 과학학, 김재권, 그리고 해킹 / 아이추판다
라캉과 심리학의 화해 가능성 / 이상한 모자 


1) 심리학에서 대륙철학에 가필할 수 있는 메타 이론이 출현할 수 있는가?
2) 심리학에서 심리철학의 일부를 구성하는 메타 이론이 출현할 수 있는가?


이 두 가지 명제는 전혀 다른 층위에 있다. 나는 1)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이 대륙철학에 가필을 하든 말든 심리학이 간섭을 할 일이 아니라고 말했고, 아이추판다 님이 메타 이론을 언급했기 때문에 2)를 검증해 보겠다고 주장했다. 아이추판다 님은 ‘기본적으로’ 철학은 분과 학문에 대한 메타 이론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내가 ‘그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대륙 철학을 방어할 줄 알았는데 김재권을 들먹여서 의아했던 모양이다. 노정태의 경우는 1)과 2)를 다 반대한다고 말하고 있긴 한데, 내가 보기엔 2)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마치 내가 1)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몰아가고, 나의 주장을 과학으로부터 형이상학적 주장을 내뱉으라고 요구하는 미친 소리로 취급한다.


형이상학을 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렇지만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철학의 질문이다. 이 시대에 과학이 아무리 용가리 통뼈라고 해도 그것 역시 명제들로 이루어진 지식의 체계인 이상 철학의 간섭에서 해방될 수 없다. 설령 과학자가 던지더라도 그것은 철학의 질문이고, 과학자가 답변하더라도 그건 철학의 답변이다. 모든 분과학문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철학의 몫이다. 이건 너무 고전적고 고리타분한 소리라서 누군가가 반대할 수도 있긴 있을 텐데, 적어도 철학이 ‘메타 이론’이란 소릴 입에 담은 사람이라면 부인할 수 없다. 그러고 있다면 그는 ‘메타 이론’이란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번의 내 글은 이런 상황을 반영한 ‘맥락 의존적 글쓰기’였다. 논쟁에 참여했던 사람이라면 그 맥락을 따라가야 한다. 맥락의 숙지 없이 그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소리가 등장했다고 자기가 이해한 수준에서 비판하는 건 논쟁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다. 


한번 콰인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아마 그는 20세기에 “철학은 메타 이론이다.”라는 정의를 내린 대표적인 철학자일 것이다. 그는 과학적 문장은 1차 술어 논리학으로 분석가능하다고 논증했다. 그 말대로라면 1차 술어 논리학으로 분석가능하지 않은 것을 다루는 학문은 과학이 아니라는 소리가 된다. 1차 술어 논리에는 믿음이나 가능 등을 서술하는 내포문맥이 포함되지 않는다. 이 정의에 의하면 심리학은 물론이고 수요나 공급을 법칙으로 하는 경제학도 학문일 수가 없다. 수요나 공급도 어떤 종류의 믿음을 그 개념 안에 포함하고 있고, 그래가지고선 명제가 1차 술어 논리로 분석이 되지 않으니까. 아마 이 정의에 따른다면 물리학, 화학, 생물학 정도만이 과학의 영역에 포섭될 것이다. 내가 굉장히 쇼킹한 소리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별스런 소리도 아니고 철학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월권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철학의 본질적인 권한에 속한다. 분과학문이 스스로를 정의내릴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사실 철학의 입장에선 월권일 것이다.


당연히 콰인의 정의는 과학에 대한 하나의 입장일 뿐이다. 이것은 명증한 지식의 체계를 구하려는 철학적 기획과 연관이 있다. 그리고 당연히 과학철학의 판단은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구별한다. 0 아니면 1이다. 그러나 거기에 (콰인의 것과 다른) 여러 개의 입장이 있다면, 우리는 과학에서 과학이 아닌 것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동심원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자신이 하나의 일관된 과학철학 이론을 미는 게 아닌 다음에야 “과학이다.” “과학이 아니다”는 판단보다는 “보다 과학이다” “보다 과학이 아니다”는 언급이 더 적절한 것이 아닐까? 쉽게 상상하도록 하기 위해 동심원이라 얘기했지만 꼭 모양이 동심원이 아닐 수도 있다. 아이추판다 님은 이론을 더 중시하냐 실험을 더 중시하냐에 따라 경제학이 더 과학인지 심리학이 더 과학인지에 대한 입장이 다를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나는 그 입장을 온전히 인정한다. 내 말은 과학인 것에서 과학이 아닌 것으로 나아가는 지도를 그릴 때, 심리학이 차지하는 위치도 그리 과학의 중심에서 가깝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가 이상한 모자 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마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과학적 방법론이 전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 역시 훌륭하게도 그 지점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심리학을 과학으로서만 옹호한다면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이 내 주장이고, 그런 상황을 인지한다면 정신분석학을 단죄하는 이유도 조금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내 문제의식이다. 


노정태의 경우는 과학적 활동이 어떤 것인가를 서술하면서 그 정당성을 강변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서술하는 것이 ‘정당성’이란 낱말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그의 시선은 문화인류학에서 하나의 부족의 의례를 바라보는 것과 흡사하다. 물론 그가 내세운 과학의 특징에 대한 견해는 건전하고, 아마도 과학이 매우 유용한 학문인 이유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에 대한 그의 견해를 요약하려면 “단순성의 원리, 요소론적 접근, 그리고 반증주의”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좋다. 왜냐하면 그의 서술은 직관적으로는 탁월하지만, 과학이 아닌 것들에게 “우리도 그것을 하고 있어!”라는 반론거리를 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물론 알렝 밀레가 교주질을 하면서 지젝과 핑크가 좌우광명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저 정신분석교는 그러한 반론의 틀에도 들어가지 못하지만, 정신분석 하나만을 내쫓기 위해 과학의 정의를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노정태의 견해를 내가 한 것과 같이 축약할 때, 저것은 당연히 과학을 정의하는 하나의 훌륭한 과학철학적 입장이지만, 또한 각각의 난점을 지니고 있는 입장이기도 하다. 이 역시 (내 견해처럼) 하나의 동심원을 그리는 견해에 해당한다. 노정태는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학문이 바로 과학철학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분과철학들이 그러하듯이 언제나 실패를 거듭하고 있고요. 그래서 저는 과학적 방법론을 어떤 지식이나 철학적 입장의 소유가 아닌 '태도'에 가까운 무언가로 우선 생각하고 있는 편”이라고 고백한다. 그 태도는 훌륭한 것이나, 학적이지는 않다. 윤리학(윤리학은 그 자체로 도덕철학이니까)이 언제나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의 방법론을 ‘태도’로 치환하는 것이 학적인 자세는 아니듯이 말이다.


그리고 노정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메타 이론에 대한 나의 태도는 “과학적 방법론이 과학철학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과학적 방법론을 설명하거나 추가하기 위해 과학철학이 존재한다”는 노정태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다만 메타 이론과 분과 학문의 영향력은 쌍무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고, 사실 이건 당연한 소리다. 과학적 방법론을 설명하거나 추가하기 위해 과학철학이 발생했지만, 그 과학철학의 방법으로 설명하다 보면 당연히 더욱 과학이 되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 지에 대한 지침도 대략적으로는 내릴 수 있게 된다. 노정태의 주장에 담겨 있는 단순성의 원리나 요소론적 접근도 내가 말하는 메타적 차원에서 분석된 전제조건에 해당한다. 이 전제조건은 학문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노정태의 의견처럼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학문이 이루어지다가 나중에 지각된 것이다.


노정태가 요새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읽고 있을 테니 그 철학자의 논법을 빌려보자. ‘그것’과 ‘그것을 그것이게 만드는 것’이 있다. (이 말이 잘 안 읽히는 사람은 ‘책상’과 ‘책상을 책상이게 만드는 것’으로 바꾸어 읽어보자.) 논리적으로 볼 땐 ‘그것을 그것이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그것’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먼저 인식되고 그후에야 ‘그것을 그것이게 만드는 것’이 인지된다. 발생론적 순서와 형이상학적 순서가 다르다. 그러므로 신경생리학자가 메타 이론을 지각하지 못하고 있고, 사실 만들 필요도 없으며, 신경생리학의 발달과정이 환원론적 물리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참’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내 논지를 전혀 반박하지 못한다. 나는 심리학이 메타 이론을 만들지 않는다는 ‘무-행위’를 공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관적인 메타 이론을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무능’을 지적하고 있다. 신경생리학의 탐구 조건이 환원론적 물리주의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얘기할 수 있으되, 심리학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경제학의 사례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학은 전제 이후에 이론을 발달시킨 것이 아니라 한참 이론을 발달시킨 후에야 전제를 추론해 보는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나름의 일관된 전제가 추론이 된다는 ‘사실’은 경제학이 꽤나 성숙한 학문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래도 이해가 안 간다면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들어보자. 나와 노정태가 술을 마시면서 서로를 갈굴 때, 이 행위는 고르기아스의 회의주의가 실천적으로 오류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우리가 비록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그렇게 얘기한다면 당연히 그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고르기아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두 사람이 술을 마시면서 떠들고 있을 때라도, 그리하여 누군가 그렇게 지적했을 때 그들이 동의를 하지 못할 지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들의 행위 역시 고르기아스의 회의주의가 실천적으로 오류라는 사실을 ‘전제’한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서술이 오류이거나 형이상학적인가? 아니다. 그저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나는 이것을 ‘메타 이론’이라 칭했고 당연히 이는 대륙철학을 도출해야 한다는 말과는 현저히 다르다. 이 ‘메타 이론’은 어떤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분과학문의 존립근거에 대해 묻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근거는 시간적으로는 후에 생기고 논리적으로는 먼저 있다. 이것이 도출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어떤 학문이 얼마나 정합적인지, 얼마나 과학인지를 판명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 (이 기준은 아이추판다 님이 쿤의 기준을 인용하면서 언급한 ‘일관성’과도 합치하지 않는가?) 앞서 말했듯 이것이 동심원 중의 하나라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얘기하자면 나는 메타 이론이 도출이 안 된다는 사실이 심리학을 과학으로서만 옹호한다면 분열이 일어난다는 정황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있고, 이런 상황을 인지한다면 정신분석학을 단죄하는 이유도 조금은 달라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인 심리학의 맥락에서 파악하려면 라캉과 심리학의 화해 가능성 / 이상한 모자를 읽으면 될 것이다.





P.S 이상한 모자의 견해에 대개 동의하지만, 지금의 방식으로 나갈 때 심리학의 미래가 없다는 설레발에까지 동의하지는 않는다. 입으로 정신분석학을 갈군다 해도 그 행위가 함축하는 철학적 입장을 심리학이 모두 실천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P.P.S 아이추판다 님이 언급한 파이어아벤트와 관련된 문제는 내가 좀 부주의했던 것이 사실인 듯 하다. 다만 내 말의 요지는 (논쟁이 그렇게 번지지 않는 것이 다행이지만) 한의학의 옹호자들이 과학철학을 인용한다면 비빌 언덕이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나는 아이추판다 님의 글이 그 사실 역시 부인하고 있다고 느꼈다.

 
P.P.P.S 최근 며칠간 블로그 조회수의 추이를 보니 이 논쟁을 여기서 맺어야 한다는 아주 강력한 의무감정이 생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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