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알라딘에 올렸던 서평이다.


리처드 로티
이유선 지음 / 이룸 / 2003년 8월
 

1. 누구나 철학총서

사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란 없다. '청소년'들의 독해력이란 제각각이고, 고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사정은 '성인'이 된 후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운 철학책'에 대한 욕망이 끊이지 않는 것은 한국 땅에 태어나 철학에 접근한다는 것이 정말로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고전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도 어설픈 번역서가 앞길을 가로막으니, '충실한 대중도서'에 대한 기대는 아예 접는 것이 좋다고 해야 할 정도다.

이런 점을 고려해보면 '누구나 철학총서'라는 기획은 일단 올바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운 이 총서의 세 가지 특징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첫째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백명의 철학자를 선정했다는 것은, 사상사의 맥락을 짚어내기에 힘들어하던 '교양인 지망생'들에게 큰 힘을 줄 수 있다. 한국의 생활인의 입장에서 철학사의 맥락을 파악하려면 여기저기 산재한 한 권짜리 철학사 책을 지지부진한 마음으로 매번 열심히 읽으며 '독서백편의자현'의 날을 기다리거나, 밑빠진 독에 물붓는 심정으로 손에 잡히는 대로 철학자들의 주저를 읽거나, (그나마 번역이 안된 책들이 많다.) 그도 아니면 한때 강유원이 그랬듯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를 50번쯤 읽어버리는 방법들이 있는데, 이 중 어느 것도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둘째로 국내학자들을 저자로 삼았다는 특징 역시 번역문투에 힘들어하던 이들에게 기쁜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글'을 대중에게 보이는 것을 중시하지 않거나 꺼려하던 학자들에게도 좋은 자극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특징으로 그들이 내세운 것은 가독성이 높다는 것인데, 책을 읽은 입장에서 조금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확실히 이 책에 사용된 문장들은 평이하고 단어들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철학책을 읽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던 내 경험으로는, 이 책의 중반부인 2장과 3장쯤에서 독해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 같다. 사실 이것은 새로운 개념어가 나올 때마다 간략한 정의를 바로 밑에 기술함으로써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가령 '인식론적 기초주의'나 '인식론적 행동주의' 같은 용어들에 대한 정의가 용어가 나오자마자 간략하게 몇 줄로 기술된다면, 가독성은 훨씬 더 높아질 것이다. 물론 그러한 정의는 사태의 본질을 어느 정도 놓칠 수 있지만, '누구나' 볼 수 있는 철학총서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졌다면 그 정도 손해는 감수해야 할 것 같다. 어차피 이 정도 분량의 책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 자체도 한계가 있을 테니 말이다. 다른 저자분들은 가독성을 높이는 것은 단순히 문장이나 단어의 문제를 넘어 글의 구조와도 관련이 있음을 생각해 주시길 바란다. 교양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모니터링을 시켜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2. 로티 개설서  

나는 리처드 로티의 저작을 직접 읽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동식 교수의 <로티의 신실용주의>는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김동식 교수의 저서가 로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거의 '알고 넘어서자!'는 수준이니) 로티의 입장에 찬동하고 로티의 견해를 변호하는 또 다른 개설서가 나온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인 것 같다. 이제 한국의 학생들도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면 로티가 어떤 맥락에서 칭송받고 어떤 맥락에서 비판받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게 아닌가.

김동식 교수의 저서와 비교해서 이 책의 특징을 알아보자면, 아무래도 김동식 교수의 저서는 개설서라 하더라도 이유선 교수의 이 책처럼 예상 독자의 수준을 낮춘 책은 아니기 때문에, 책의 분량이나 내용의 충실함 면에서 훨씬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로티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유선 교수는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의 전통을 대략 살펴보는 것에 그친 반면 김동식 교수는 로티와 관련이 있는 한에서 분석철학자들의 전통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그쪽 방면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겐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앞서 말했듯 예상독자의 수준과 책의 분량과 관계있는 것들이지 두 저자의 능력과 관계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번역의 부분에 있어서는 이 책을 쓴 이유선 교수의 것이 훨씬 그럴 듯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로티의 신실용주의>에서 김동식 교수가 Fundamentalism을 '정초(定礎)주의'라고 번역한 것을 보았을 때, 뜻을 명확히 하려는 고심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좀더 일상적으로 쓰이는 어구를 사용해서 '기초(基礎)주의'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하며 아쉬워했던 적이 있다. 이유선 교수의 책에서 내 생각과 같은 번역어를 보게 되어 매우 반가웠는데, 이 역어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봐서 (물론 예상독자의 수준이 낮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유선 교수는 이러한 번역이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하신 듯하다.

그리고 김동식 교수의 저서의 경우 제 문제에 대한 로티의 견해를 나누어서 기술하다보니 설명이 연역적이고 구조적인 측면은 분명 있었지만, 워낙에 견해라는 것이 여기서 연유하고 저기서 연유하는 것이다보니 중언부언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반면 이유선 교수의 저서의 경우 설명의 방식에서 좀더 자유로웠고 (말하자면 로티의 글쓰기에 좀더 가까웠다고 해야 할 듯) 그 때문에 중언부언이 거의 없었다. 아마 이 때문에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가독성이 높아지고 로티의 견해에 대한 호오와는 상관없이 유쾌한 독서가 가능했던 것 같다. 책의 중반부에서 느꼈던 가독성에 대한 우려는 후반부에서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3. 로티 철학

앞서 말했듯 나는 로티의 저작을 직접 읽은 적이 없는 사람이므로, 로티에 대해 세밀한 평가를 내릴 처지에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한 철학자에 대한 훌륭한 개설서를 읽고 난 후 '소개받은 이'에 대한 간략한 감상을 적는 것도 일종의 예의가 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과정들을 생략하고 철학과 사회에 대한 로티의 견해를 요약하면, 진리탐구와 창조활동은 사적인 영역이며, 정치문제는 공적인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적 영역에 대해서는 관용과 불간섭을 주장하고, 공적 영역에 대해서는 대화와 합의를 추구할 것을 주장한다. 진리탐구가 창조활동의 일종으로써 기술된다는 점에서, 그럼으로써 철학자가 공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시인(詩人)의 하위범주가 된다는 점에서 로티는 진정 포스트모더니스트이다. 로티는 철학이 사회에 미치는 권위가 없다고 믿는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이론이 실천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는 이론과 실천 사이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며, 따라서 자신의 이론 역시 자신의 정치적 실천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도 말한다. 그래서 그는 하버마스 등 다른 철학자들에게 "철학이론에서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끌어내려고 하지말고, 민주주의가 (적어도 정치적인 면에선) 철학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이 사적이고 무엇이 공적이라는 그의 언설은 인과관계가 교묘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로티에게 있어 공적인 것은 합의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로티의 명제가 무엇이 사적이며 무엇이 공적이냐는 문제에 대해 대답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의 공사구분의 정의는 그의 공적 문제에 대한 정의 (즉, 대화와 합의가 가능하다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만 메타의 위치를 점유해보면 가령 질문만 살짝 바꿔서 "그런데 무엇이 합의할 수 있는 것이고, 무엇이 합의할 수 없는 것이냐. 그 기준은 무엇이냐."라고 물어도 대답할 말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질문에 대답하려고 드는 것은 로티가 싫어하는 대문자 철학Philosophy의 자세가 될 것이다. 말하자면 로티는 저런 식의 '합의할 수 없는 대답'을 공적인 영역에서 소거해 버리면서 안정을 추구하지만, 그의 체계를 본질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합의할 수 없는 대답'일 뿐이다.

사실 메타화의 질문에 이르러 수행모순에 빠지는 것은 대개의 철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로티의 불완전성을 계속해서 성토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의 철학에 대한 질문이 발생하는 부분이 어디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그의 철학의 성격을 규정짓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생각으로는, 로티의 철학은 일종의 "메타-철학적인 행동이론"으로써, 갖가지 학파가 있고 사람들이 제각기 진리를 추구하는 시대에 한쪽의 입장에 편항되지 않고 일상사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설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로티가 말하는 소문자 철학philosophy은 비록 명제적으로 '철학의 종언'을 설파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나올 이론은 다 나왔다."라는 어떤 실질적인 차원에서의 '철학의 종언'을 대비할 수 있는 '좋은 이론'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로서는 나이가 젊기 때문인지 형이상학의 찌꺼기가 남아있기 때문인지 "이미 나올 이론은 다 나왔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철학을 사적 영역으로 밀쳐버리는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다만 그의 이론은 (로티가 말하는) 대문자 철학Philosophy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을 적절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선 공부하는 이들이 응당 갖춰야 할 '자세'로 생각해도 좋지 않겠느냐는 속편한 타협을 해본다. 아마 로티는 이러한 '타협'까지는 '아이러니스트'의 것으로 인정해 줄는지도 모르는 일.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51 이택광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21] [1] 하뉴녕 2009-09-14 1846
50 강준만의 논리기계 분석 하뉴녕 2002-05-20 1831
49 우생학, 진화생물학, 그리고 대중적 진보담론 [24] [2] 하뉴녕 2009-07-07 1708
48 헐뜯기, 비판, 그리고 대중성 [21] [1] 하뉴녕 2010-01-07 1633
47 법을 보는 법 : 훌륭한 교양도서이면서 훌륭한 에세이 [9] [1] 하뉴녕 2009-08-26 1633
46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를 검증(?)해 보자. [28] 하뉴녕 2010-04-02 1617
45 민주노동당과 나 [15] 하뉴녕 2008-02-16 1613
44 [펌] 선빵의 사실관계, 그리고 <디 워>의 마케팅에 대해서 한 말씀... / tango님 [91] [2] 하뉴녕 2007-09-06 1581
43 노혜경 님의 허수아비 논증에 대해. 하뉴녕 2003-07-25 1536
42 김창현 비판, 어디까지 정당한가? 하뉴녕 2004-05-12 1385
41 언론의 당파성, 이념성, 공정성 -강준만과 진중권의 글을 보고 하뉴녕 2003-03-08 1358
» 리처드 로티 : 책에 관한 몇가지 이야기들 하뉴녕 2004-12-02 1351
39 준마니즘 분석 - 준마니즘의 진화와 속류 준마니즘의 탄생. 하뉴녕 2003-03-20 1350
38 저는 그냥 생중계하겠습니다. [58] 하뉴녕 2010-04-03 1338
37 냉소주의 [9] 하뉴녕 2007-09-13 1309
36 다큐멘터리 “개청춘” : 20대적인, 너무나 20대적인 [4] 하뉴녕 2009-09-04 1265
35 상상마당 포럼 6회 대중비평 시대의 글쓰기 09. 4. 18 file [3] 하뉴녕 2009-04-25 1223
34 “돌출 행동을 수습하는 방법에 대하여” 비평 [69] [4] 하뉴녕 2009-04-09 1198
33 정말로 미네르바 밖에 없는가? [19] [2] 하뉴녕 2008-11-21 1195
32 그래프 오타쿠의 정치평론 [18] 하뉴녕 2008-04-19 1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