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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진보누리에 아흐리만이란 아이디로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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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은 당파성에 대해, "숨기는게 문제"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인물과 사상 25권을 읽어보면, 홍세화가 한겨레에 항의하며 말했듯, (사실 홍세화의 주장은 매우 정당한 것인데) "당파성을 커밍아웃하게 하면 노골적인 사실 왜곡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어딘가 다른 게시판에 "언론의 당파성, 이념성, 공정성 -강준만과 진중권의 글을 보고"를 퍼다 올리자, 한 준마니스트가 "당신이 생각하는 공정한 언론과, 강준만이 생각하는 공정한 언론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건 이미 강준만도 다 한 말이 아닌가?"라는 요지의 항의를 한 바 있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나는 현시국을 바라보는 강준만의 선의를 인정한다. 그의 주장을 한편의 칼럼이 아니라  긴 글로 읽어보면, (사실 그는 요약적 글쓰기에 별로 재능이 없는 듯 한데) 별로 반박할 거리를 찾을 수 없는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강준만 역시 나나 진중권처럼 "공정한 이념성"을 추구한다고 해두자. 최근 칼럼에서 "사설과 기사의 구별" 같은 얘기도 했으니 말이다. (옛날에도 분명 이런 얘기를 한 것 같다는 추정이, 나의 선의적 분석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문제는 강준만이 준마니즘을 전개함에 있어, 문제가 많은 "당파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진중권이 이미 작살을 내놨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나는 강준만이 수군닭의 주장을 참조했다는 진중권의 주장은 오버라고 본다.) 진중권이 강준만을 선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학자에게 학적 용어의 엄밀성을 주문하는 것을 "무리한 주문"이라고 보긴 힘들지 않은가.


그리고 분명 편향적인 논리의 왜곡이 보여진다는 문제도 있다. "노무현 당파성 언론"에 대한 비판이 강준만이 이른바 "당파성 옹호" 칼럼을 쓰게 될 동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옹호하려면 그들의 편향성이 공정하게 드러났음을 주장하고, 오히려 한나라당 편향성 언론들이 언론의 정도에 어긋나는 닭짓을 했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면 될 것 아닌가? 아마 강준만은 거기에 대해 자신이 없었거나, 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런저런 섬세한 논법은 모조리 다 생략하고, 우리 사회의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문제인 "편향성 혐오주의"와 "정치 중도주의"를 까고 들어간 것이다. 물론 포괄적인 지점을 노린 그의 주장들이 대개 올바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구를 위한 생략이었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이것은 준마니즘의 고질적인 병폐다. 준마니즘은 정치혐오에 반대하여 상대적으로 나은 정치인을 옹호하고자 한다. 이는 분명 참여지식인으로서, 찬탄받을 만한 일이다. 진중권 역시 엑스리브리스에서 "주사위 던지면 1에서 6까지 나온다고 하는 지식인들의 발언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며, 비슷한 요지의 말을 한바 있다.


그러나 준마니즘의 첫째 문제는 이 작업을 함에 있어, 자신이 옹호하는 정치인의 잘못에 관대할 것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 폐해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드러난 바 있다. (거악을 상정해놓고 소악을 방어하는 논리는 일부 NL의 극단적인 북한 옹호와 논리적 구조면에서 흡사하기에, 준마니즘은 NL에 매우 친화적인 사상이 되었다.)


그리고 준마니즘의 둘째 문제는 자신의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도무지 일반성을 띄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김대중과 노무현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된 논리를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준만은 논리적용의 일반성을 원작자가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행위다.


이 시점에서 그를 위해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김대중 죽이기"에 있어 준마니즘의 둘째 문제는 아직 표면화되지 않았다. 즉, 강준만의 업적이 과오를 억눌렀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진보정치인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은 당시로서도 지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강준만 한 개인에게 주어야 할 짐으로서는 너무 큰 것이다. 강준만은 당시로서는 일반성을 지키고 있었다. (의도된 일반성인지, 우연적인 일반성인지 구별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강준만의 "김대중 죽이기" 논리는 김대중 처럼 현실정치계에 뛰어든 사람 중 수구언론의 십자포격을 받는 사람에게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당시 진보정치의 설움은 "죽이기"가 아니라 "외면"이었다. 강준만이 이 점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출마하지 말라"는 망언까지 했다는 건 분명 "문제"이지만, 강준만은 아직까지 적어도 자신의 작업에서의 내적일관성은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에 있어, 문제는 달라진다. "국민사기극"은 유권자의 행태에 대한 분석이다. 여기에 대해 강준만은 몇가지 근거를 들어 노무현이란 대안을 내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노무현 역시 당시로서는 "죽이기"의 대상이 아니라 "외면"의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강준만은 노무현을 구하기 위해 "현실성"의 여러 층위를 파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중 시대의 강준만은 김대중을 옹호하기 위해 현실성의 가장 낮은 층위를 파악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이 오히려 이인제보다 더욱 현실성이 있다."라고 말하기 위해 사용한 "현실성"이란 개념은, 이제 그런 즉자적인 현실성과는 다른 무엇이 되어야 했다.


바로 이 점이 진강논쟁의 첨예함을 가져왔다. 준마니즘은 현실에 맞춰 진화했다. 이 점을 좌파들은 인정하자. 간혹 강준만이 신문칼럼에 대고 "왜 언론은 진보정당을 무시하는가?"라고 호통을 쳐야 할만큼, 사회 일반의 문제에 해답을 제시해야 하는 거대한 이론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준마니즘에 일정 부분 빚지고 있는 안티조선의 극적인 성공 (운동의 목표가 성공했다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전개가 성공했다는 뜻이다.)이 아마 그것을 가속화시켰으리라. 그러나 당파성이란 용어의 남용에서도 드러나듯, 준마니즘은 자신의 진화에 걸맞는 정치한 개념분석을 거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원작자 강준만 역시 새로운 전개에 대해 제대로 감을 못잡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화한 준마니즘에 대해 논리의 일반성에 대한 요구가 터져나오리라는 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강준만은 이문옥을 준마니즘으로 분석하는 것을 거절했다." 진강논쟁을 준마니즘의 진화과정에서 발생한 마찰로 분석한다면, (물론 다른 방향에서의 접근도 가능하고 필요하지만) 간단히 이 한문장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다. 진중권이 어찌했을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강준만이 이문옥을 준마니즘의 분석틀로 끌어들여, 어떤 점이 노무현의 상황과 다른 지를 합리적 언어로 풀어냈다면, 나는 강준만을 그렇게 "호되게 비판" (강준만 자신의 표현으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중권이 준마니즘의 분석틀로 이문옥을 옹호했기 때문에, 애초에 강준만이 피해나갈 구멍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링 위로 올라왔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강준만은 자신의 분석틀을 점검하기 보다, 진중권의 문제제기를 "진보진영의 역공격"으로 규정하는 등 이리저리 피해다니기만 했다. 그리고 "국민 비판"하는 지식인이 되겠다는 그가 진중권의 "적용"에 맞서 "그렇다면 호남 사람이 국민사기극의 주범이란 말이냐?" (사실 이 주장은 예전에 이미 내가 분석했듯, 국민사기극 논의에 그다지 부합하지도 않는데) 라며 국민의 온정에 호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외 그의 주장들도 대개 내 수준에서 아작내는게 가능하지만, 여기서는 그저 "논점과 상관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는데서 그치기로 한다.


여하간 이리하여 준마니즘의 진화는 원작자의 내적 일관성 부재에 의해, 파손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하필 그 논쟁 당사자가 진중권이었다는 점에서, "온건 좌우파 연합"에 가까웠던 안티조선의 연대성을 결정적으로 훼손시키게 된다. 나는 여기에서 변희재처럼 "책임,책임"하며 특정개인에게 책임을 물 생각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내가 무엇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지에 대해서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준마니즘의 진화가 파손됨에 따라, 준마니즘의 본래적 선의가 아닌, 부실한 이론틀에 기대어 논리를 극단적으로 확장한 "속류 준마니즘"이 기승을 부리게 된다. 속류 준마니즘은 강준만의 논리를 극단화하여 상업주의, 차악주의, 현실주의를 내세우게 되는데, 이들이 내세우는 "현실" 개념이 과연 제대로된 현실인가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최근 미둥 류의 속류 준마니스트가 주장하는 "현실"에 대한 생명연습의 경제학적 검토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또한 속류 준마니즘은 준마니즘에 논리성과 일반성을 도입하려 했던 진중권에 대한 안티 심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향적으로 반합리주의의 성향을 띠고 있다. 원래 대중을 위한 글쓰기도 강준만의 것이다. 그러나 강준만은 독자들에게 접근하고 호소력을 높이기 위해 그런 글쓰기를 채택한 것이지, 본인 스스로 합리성이나 학적 논리를 거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언젠가 내게 자신이 너무 쉬운 글쓰기로 시작했기 때문에, 이젠 좀더 정교하게 쓰려해도 독자들이 못 받아줘서 속상하다는 요지의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속류 준마니스트에게 있어, 반합리주의는 상업주의와 교묘하게 융합하여 일종의 정형화된 글쓰기 패턴을 만든다. (속류 준마니즘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을 잡기 위한 좋은 텍스트는, 최초의 속류 준마니스트라고 할 수 있는 변희재가 최근 강준만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면 된다. 속류 준마니즘의 실체를 명확히 설명하는 명문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사태는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어도 강준만을 비판함에 있어 속류 준마니즘을 비판하는 논리로 대하지는 말아야 겠다. 물론 당신의 개념의 부실함이 이런 엉터리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점은 지적해야겠지만.


-내가 똑같이 강준만을 "호되게" 비판하면서도, 진중권/평검사와 약간 수위의 차이가 나는 까닭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이 글을 쓴다.

속류 준마니즘 타도하라!!

아흐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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