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1. 중산층, 혹은 '강남 사람들'

 

흔히 한나라당을 "1% 부자와 50% 서민이 지지하는 정당"인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거기에 대해선 의구심이 있다. 이를테면 그런 견해가 민주당/노무현 지지성향의 사람들에게 '진보'의 이름으로 못 가진 사람들에 대한 계급적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쓰이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다. 손낙구의 연구결과는 이 의구심을 좀 더 실체화시켰는데, 사실 손낙구의 통계읽기에 대해서는 반론도 많은 것으로 아니 이걸로 뭔가가 증명되었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흥미로운 부분은 최근 '뜨고 있는' 하우스푸어 담론이다. 집값이 지속적으로 오를 것을 기대해 빚을 내어 수도권 지역의 비싼 아파트를 구입해버린 이들이 최근의 경제국면에서 고통받고 있는데, 이들을 '하우스푸어'라고 부른다. 김광수경제연구소는 하우스푸어 가구를 198만가구로 추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야말로 '유물론적으로' 이명박 정부/한나라당 정권을 지지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이들은 부동산 거품을 잡아내는데 실패한 참여정부 시절 '투기'에 뒤늦게 합류했고, 투기에서 이득을 챙겨야 했기에 더 화끈하게 거품을 부양할 것 같은 이명박 정부/한나라당 정권을 선택해야만 했지 않겠냐는 거다. (물론 무지막지하게 단순화시킨 이야기다.)

 

198만 가구면 그냥 부부만 생각해도 유권자 400만을 포괄하는 숫자다. (성인 자녀는 한나라당을 찍을 수도 있지만 투표 안 하고 놀러갈 수도 있으니 일단은 빼자.) 한국의 유권자가 2,800만 정도라 본다면 이는 1/7, 14% 정도의 수치에 해당한다. 만일 투표율이 70%라면 이 사람들은 20%의 득표율을 이끌어낼 수 있다. 하우스푸어 위에 하우스리치도 있을 거라고 추정해본다면 사실 한나라당을 지지해야 하는 유물론적 근거를 지닌 사람은 이보다도 많다. 여기에 세대(민주당을 친북세력이라 생각하는 고령층)와 지역(영남)을 합산한다면 한나라당을 만들어내는 유권자의 30%, 득표율 50%를 그럭저럭 해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한나라당 지지층은 1% 부자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 그럴듯한 부르주아 계급이 없다는 점과 연결이 된다. 1% 부자가 계급하락의 공포없이 부를 세습하고 있다면 나름의 엘리트의식/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형성할 것이고 그중 일부는 예술을 애호하는 후원자가 될 게다. 그 1%만으로는 정치세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조건 때문이라도 사회의 대다수의 성원들을 설득하기 위한 '건전한 보수주의'를 발전시켜나가게 될 게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차라리 20대 80 (혹은 20대 50대 30)에 가깝다. 그리고 이 20은 스스로 중산층 이하로 미끌어질까 노심초사하고 아둥바둥 빡세게 경쟁하는 계층인 거다. 그리고 이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위해 총력투표하는 반면 서민층과 취약계층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는 것(혹은 가질 겨를이 없다는 것)이 (최장집 학파가 줄곧 얘기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라 볼 수 있겠다.

 

강남은 저 20을 지리적으로 대변하는 공간인데, 이들을 부르주아라기 보다는 차라리 중산층으로 호명하는 것이 혼돈을 줄이는 길이겠다. ('진짜 부자'는 성북동 등 강북 부자동네에 저택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풍문은 서울사는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 봤을 법한 것이다.) 그러니까 감세정책이 '중산층'을 대변한다는 강만수의 말은 구라는 아니었던 거다. 우리가 중산층이란 말을 중간층과 비슷하게 사용해서 문제였던 거지.

 

강남 사람들이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부르주아가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아둥바둥 경쟁해야 하는 중산층이란 점에서, 그들이 '한국 사회의 욕망의 폭주 기관차'(진중권의 표현이었던가)라는 설명이 적절해진다. 1%의 특권층과 99%의 민중 사이에 넘사벽이 존재한다면 한국 사회의 '룰'은 유지될 수 없다. 20%의 선도집단이, 그것도 대대손손 부자였던 게 아니라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운이 좋아서' 자산을 잘 굴려서 '부자'가 된 듯한 이 선도집단이 자기들끼리도 계급상승 및 재생산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으므로, 나머지 80%도 '강남사람들처럼' 살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기관차가 20을 점유한다면 기관차 워너비들은 그 뒤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굳이 한나라당이 서민층을 홀리고 있다고 가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물론 많은 서민들이 (민주당이나 진보정당 정치인들에 대해선 관심이 없고) 박근혜 밖에 모르더라는 증언은 소중한 것인데, 이는 군부독재시절에 서민층의 삶이 개선되었고 민주정부 시절에는 외려 양극화가 심화되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결부해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을 거다.

 

2. 중간층, 혹은 중간계급

 

문제는 이 20의 아래에 있는 계층이다. 이택광은 이들을 중간계급이라 부르는데, 영세자영업자가 너무 많아 생산수단 소유 여부가 계층을 판별하는데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한국 실정에서 '계급'이란 규정이 그렇게 좋은 것 같진 않다. 이택광의 용법은 마르크스주의의 용법도 아니고 알튀세르의 어법도 아니고 그렇다고 에릭 올린 라이트의 규준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이 용어의 탁월함은 스스로를 '국민'/'시민'/'깨어있는 시민'/'행동하는 양심' 등으로 '보편화시켜' 부르던 집단의 특수한 계급적(계층적?) 실체를 톡 까놓고 끄집어 냈다는 점이다. 이들은 생활수준으로도 느슨하게 정의될 수 있고 정치의식으로도 느슨하게 정의될 수 있겠는데, 십 년동안 인터넷에서 정치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면밀히 지켜본 내 관점으로는, "스스로를 시민(혹은 국민)이라 칭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제일 간편한 것 같다. 적어도 텍스트적으로는 말이다.

 

당장에 문성근은 야권단일후보를 만드는 것이 '국민의 명령'에 따르는 길이라 말하고 있지 않나? (국민의 명령 운운하던 그 분들이 예전에 만들었던 시민단체 이름은 '국민의 힘'이었다.) 유시민은 진보정당에 대해 "국민보다 제 이념을 위해서 정치한다."라고 평하고 있지 않나? 심상정 역시 경기도지사 후보에서 사퇴할 때 "정권심판을 바라는 국민의 뜻을 따른 사퇴" 운운하지 않았던가? 이는 몇몇 개인들의 개드립이 아니라 '정치에 관심있다'는 일군의 대중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진술이다. 그들은 '대한민국이란 정치적 공동체에 소속된 모든 이들을 남김없이 지칭해야만 하는' 어휘를 가지고서 그들 특수한 집단을, 반MB정서를 공유한 집단을 지칭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위해, 자신들이 자본주의-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근대 시민혁명이 일어날 당시의 부르주아 계급 비슷한 것으로 여긴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전근대적이다."라는 그들의 어법은 다음의 진술에 연결된다. "그러므로 (왕당파 기득권 세력인 한나라당이나 수구적 노동조합주의자나 관념적인 좌파들이 아니라) 우리 시민들이 진보적이다." 따라서 이들은 스스로를 (정치적 진보의 관점에서 볼 때) '비판받을 수 없는 이들'로 여긴다. 그리고 그 의식에 의거하여, 자신보다 왼쪽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을 비판한다. 이들은 '시민'이나 '국민'이란 보편적 어휘 뒤에 숨어서  특수한 이해관계를 관철시킨다. 탐욕스러운 기득권세력과 못 배우고 무식해서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서민들, 그리고 먹물을 뽐내는 좌파들을 '혐오'하는 이들의 '시민' 의식은 스스로를 '정상적인 것'으로 호명하고 주변의 모든 것을 배제한다. 이놈은 많이 배워서 문제, 저놈은 못 배워서 문제, 그놈은 돈이 많아서 문제, 제놈은 오늘 벌어 오늘 먹는지라 정치의식이 없어서 문제인 것이다. 모든 집단에 대해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공부하지 않는 엘리트주의자이며, 스스로 민중이라 주장하는 민중주의자이다. 대체로 이들은 스스로를 엘리트와 민중 사이에,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 위치시키고 양쪽을 모두 경멸한다.

 

 2007년에 있었던 민주당 지지층의 붕괴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민주정부 시절 추진된 신자유주의 개혁은, 중간계급이 사회문제를 정치적으로 조정하는 것을 포기하고 '중산층 워너비'가 되도록 만들었다." 부동산(특히 2004-2006년 사이 수도권 아파트 가격의 폭등)과 교육(평준화 정책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교육비의 지속적이고 가파른 증가) 문제는 이 진술의 구체적인 내용을 채울 수 있는 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2005년 이후 진보정당 운동의 지속적인 쇠락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진보정당 운동은 민주당/친노세력의 지지기반인 중간계급 이하의 계층을 만나는데 실패했다."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3. 서민층과 취약계층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햇수로 10년간 진행된 진보정당 운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이들이 제 지지층을 민주당이 점유하고 있는 중간계급에서만 충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결이 있다. 하나는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지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계층이 중간계급이었다는 것이다. 둘은 민주노조운동이 10%의 조직화된 노동자에 갇히면서 스스로 중간계급화되어 갔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노동자들은 학력에 있어서는 화이트칼라와 차이가 있지만, 소득에선 그들에 맞먹거나 오히려 웃돈다. 몇가지 우연과 실책이 겹쳐 '민주노조운동'이 '장년층 대기업 정규직 남성'의 것으로 고착화되면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진보운동은 크나큰 난관에 봉착한다.

 

이 '실패'의 두 가지 결은 곧바로 오늘날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서 맞닥트린 두 가지 난관을 시사한다. 첫째로,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지적으로 납득하는 중간계급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한나라당-민주당의 문제를 보수정당-진보정당의 문제보다 우위에 놓을 수 있다. 이것은 과거 운동권의 내부담론이었던 '비판적 지지'론과 다소 결이 다른 '야권단일화론'의 유물론적 토대다. 둘째로, 민주노총이란 대중조직에 기반한 진보정당 운동, 민주노동당 실험은 민주노총의 '실패'에 따라 자동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 방식을 계속 고수하는 것은 예견된 실패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 밖에 안 된다. 특별히 대북관계의 경색 탓에 민주당과 이념적 이해관계도 함께 하게 된 민주노동당과 함께 하는 길이 '중간계급을 위한 진보정당(?) 운동'에 갇히게 되는 이유는 그런 까닭이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상세한 논의를 보고 싶다면 두편의 글을 추천할 수 있겠는데, 하나는 진보신당 내 전진 정파의 이론가 장석준의 글이고, 다른 하나는 내 글이다. 장석준의 글이 발제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더 깔끔한 반면, 내 글은 이런저런 부연설명들이 더 들어가 있다.

 

 장석준의 글 : http://acidkiss.8con.net/xe/11352

 본인의 글 :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851

 

이것이야말로 진보정당 운동을 유지하려는 이가 '연합정치론'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다.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은 물론이거니와, 민주노동당과의 통합 속에서도 진보정당 운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정체성이 확립된 상황에서 구체적인 선거연합의 문제는 별도의 논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통합은 선거연합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아울러 별로 큰 목소리는 아니지만 "자유주의자를 더 비판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빈약한 몇 개의 어휘로 이념적 재무장을 하면 당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현실인식에 대한 비판도 여기에서 가능하다. 이를테면 우리가 대변해야할 서민 및 취약계층이 '자유주의자의 위선'에 속아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을 지지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들과 경쟁하여 그 지지층을 쟁취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놓여 있는 현실은 취약계층은 정치에서 배제되어 있거나 막연히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자 비판'은 문성근이 '국민'이라 부르는 '중간계급'의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담론경쟁이다. 물론 그런 담론경쟁도 필요하다. 당장에 취약계층을 위한 정치가 필요하다고 지적으로 납득하지 않는 중간계급 인자들이 없다면 진보정당 운동은 유지가 불가능하니까. 싸울 때는 싸워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진보정당 운동을 위해 '본질적인'일인 것 같지는 않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노회찬 대표의 TV토론 전략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현임시장이고 지지율 1위인 오세훈을 제껴두고 한명숙 비판에 집중했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있다면 이만한 코미디가 없다. '자유주의자 비판'이란 이념적(?) 당위성(?) 앞에 구체적인 팩트는 모조리 날라가 버리는 것이다.

 

문성근 등의 '국민'담론은 80년대의 민중주의에서 억압받던 민중을 조금은 살만해지고 지적으로 개화된 '국민'(혹은 '시민')이란 단어로 바꾼 것이다. 이에 대항해 급진좌파들은 '국민'이란 말을 다시 '민중'으로 끌어내리려는 것 같다. 갈릴래아 사람들을 위한 예수를 조명한 김규항의 <예수전>은 한 사례인데, 여기서 그는 민중-바리사이인-사두가이인의 구도를 만들고 바리사이인을 존경받는 자유주의자, 사두가이인을 특권계급으로 묘사하고 혁명을 하려면 바리사이인을 더욱 비판해야 한다고 한다. 문제는 오늘날의 체제는 생활이 고만고만한 대다수의 민중을 지배계급이 무력으로 억압하는 체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생산관계가 계층을 다양하게 분화시키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다양하게 조정하여 그들이 실제로 '사두가이인들에게 투표하도록 하는' (혹은 '사두가이인에게 투표하지 않을 사람에겐 바리사이인 이외의 정치적 선택지를 주지 않는') 체제라는 것이다.

 

'국민' 담론은 폭력적이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을 1970년대 이전의 농촌사회로 되돌리려는 '민중' 담론은 멍청하다. 그리고 이런 담론은 다시 취약계층과 생활수준의 갭을 벌린 '중간계급'에게 "저들은 한나라당이나 찍겠지. 그러니까 정치의 희망은 우리에게 있어. 우리가 가는 길이 곧 '진보'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우리에게 절실한 문제는 취약계층이 1) 어디에 2) 얼마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며, 그들에게 3)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1)과 2)는 그래도 해명이 된다. 한국은 은수미의 논의를 빌리자면, 성장=고용과 고용=복지 연계가 모두 깨진 상태다. 성장≠고용은 수출증대≠내수확산과 중소기업의 내수기반 약화, 대기업 고용율의 하락에 따른 것이다. 고용≠복지는 비정규직 및 근로빈민의 증가와 완전고용에 가까운 실업율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며 외부자 노동시장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이 시장의 안정화 및 규율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취업자시장은 정규직 1/3, 비정규직 1/3, 자영업 및 무급가족종사자 1/3으로 구성되며 비정규직과 자영업 시장에 근로빈민의 대부분이 존재한다. 한국은 실업이 아니라 근로 빈민 및 비정규직 문제가 빈곤의 주요한 이유인 사회인 것이다. 2009년 기준으로 1,648만 명의 근로인구 중 51.9%인 855만 명이 비정규직이다. 정규직 비정규직 막론하고 노동인구 중 평균 임금의 2/3 이하의 저소득층이 430만 명이며, 그 중 최저임금도 못 받는 사람만 175만 명이다. 2007년 기준으로 한국의 자영업자는 604만 명인데, 그 중 월 150만원 미만의 영세자영업자가 무려 40.1%이다. 중위임금 2/3 이하의 소득을 얻는 저소득층이 242만 명이란 얘기다. 추가로 145만 명이 무급 가족 종사자도 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자영업자가 몰락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저소득층으로 분류되는 인구가 800만에 육박한다는 뜻이다. 몰락한 자영업자는 또 다시 불안정한 저임금 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가족까지 고려하면 1천만이 넘는 영세자영업자와 저임금노동자들이 자리를 바꿔가며 서로가 서로를 파먹고 산다는 거다. 이것이 20의 중산층과 50의 중간계급 혹은 중산층 워너비들 아래에 존재하는 취약계층의 실태다. 한나라당을 총력지지하는 이들이 하우스푸어라면 정치적 논의에서 배제되고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은 워킹푸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을 대변하지 않는 진보정당 운동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세상을 조금 더 합리적으로 바꾸고 싶다면, '상식'을 찾고 '희망'을 말하고 싶다면 차라리 민주당에 들어가버리는 것이 솔직한 길이다. (물론 민주당이 전향한 좌익들에게 쉽게 공천을 주진 않을 것 같다.) 이들을 대변해야 한다는데 사회주의자인지 자유주의자인지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나는 이런 이들이 정치-바깥에 위치한 사회를 '자유로운' 사회라고 결코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지난 10년간 진보정당에 당비를 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답답하게 만드는 가장 큰 문제는 결국 3)이다. 비정규직 노동운동에도 영세자영업자 운동에도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 사회의 거의 유일한 대중운동 조직이 민주노총이란 것이다. 한국에서 진보정당 운동을 하려면 사용주가 명확하지 않는 공장노동자, 공장밖의 노동자, 가사노동자, 영세자영업자 등을 공략하는 담론과 조직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들에 맞닿은 대중조직이 없으므로, 진보운동은 조직운동과 정당운동을 '동시에' 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그렇다고 대중조직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진보정당 시기상조론'이 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노회찬은 그래도 한때 국회의원이라도 한 전력이 있으니 SSM 반대투쟁을 하는 영세자영업자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정치권력에 대해서도 체념하고 있지만, 그래도 정치권력을 가진 이들이어야 제 삶의 문제를 의탁하려고 한다. 이런 조건에서 정당운동과 대중운동은 같이 갈 수밖에 없다. 

 

4. 중간계급 진보정당론을 극복할 때

 

이 길은 힘든 길이고, 고민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가령 무상급식 추진을 예찬하고 촛불시위에 나온 소비자 대중의 마음을 진보정당이 헤아려야 한다고 주장한 진중권을 생각해보자. 그의 주장은 분명 중간계급의 윤리의식에 어필하여 진보정당 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함의를 깔고 있다. 그리고 이 논의를 통해 명백해지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노회찬과 심상정과, 진중권과, 김규항이 공유하고 있는 현실인식이라는 것이다. 어디와 통합할 것인지 누구를 먼저 쳐야할 것인지에 대한 이견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모두 문성근의 '국민' 속에서 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문성근에게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어째서 중간계급들의 윤리의식을 활용한 진보정당 운동은 불가능한가? 한국의 맥락과 세계의 맥락을 모두 살펴볼 수 있겠다. 한국의 맥락은 앞서 말했듯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십년 동안 중간계급의 다수가 '중산층 워너비'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들이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몸서리치며 '개혁'을 원한다 하더라도 그 정책 수준은 무상급식 정도에서 멈출 확률이 높다. 부동산과 교육문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이들 중간계급인데, 중간계급을 활용한 개혁담론은 바로 그 틀 안에서 놀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맥락은 '복지국가가 쇠퇴한 사연'이다. 이를테면 복지국가 모델이 실패했기 때문에 사민주의자는 오류고 사회주의의 길이 옳다는 식의 주장에 나는 동조하지 않는다. 일단은 그렇게 얘기하는 이들이 '사회주의'를 정치경제체제로 정의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주의'를 말하는 이들이 노력해서 얻어낼 수 있는 실천도 좀더 급진적인 복지정책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기본소득을 말하는 이들은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체제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를 뒤흔드는 것이라고 주장할 법한데, 그것은 기본소득만 그런 것이 아니라 '복지국가 담론' 자체에 내재한 모순이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복지국가 모델이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왜 실패했느냐는 거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새로운 빈곤>에서 그 이유를 대략 두 가지로 정리한다. 이유 중 하나는 기업 성과의 대부분의 수익이 더 이상 노동력의 투입을 수반하지 않는 '선행' 지출을 통해 거두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용하지 않아도 기업은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는 건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예비 노동력 자원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국가에게 세금을 납부한다는 과정을 경유하여) 복지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 기업에게 불필요해졌다.

 

다른 이유는 이 논의와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데, 복지국가를 통해 폭넓게 형성된 중간층이 더 이상 복지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민간보험을 들 여력이 있는 이들에게 국가가 억지로 소비를 강요하는 '복지제도'는 소비자의 권리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그리하여 여력이 없는 취약계층에게만 복지국가가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을 때, 중간계급은 자신의 자원을 퍼서 취약계층을 부양하는데에 불쾌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즉 복지국가의 하락의 정치적인 요인은 중간계급 역시 자신의 이해관계에 반응하며 그 이해관계는 복지정책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의 이해관계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유럽사회보다 훨씬 더 자신의 이해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그러나 결코 '밥그릇' 얘기로 드러내지는 않는 한국 사회에서 이 얘기의 시사점은 간단하다. 복지국가이든 정치적 진보이든 취약계층이 스스로 요구할 때 실현이 가능할 수 있으며, 사실상 그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그외엔 없다. 체제 내부를 게토화시키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진보정당 운동은 게토화된 내부를 찾아 들어가야 한다. 다른 정치세력처럼 마치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한다면 진보정당 운동은 존속해야할 이유가 없는 거다. 중간계급의 윤리의식을 활용한 진보정당 건설이 미망인 이유는 이와 같다.

 

진보신당은 민주노총에 기반한 민주노동당과의 결별 이후 자신의 '실패'가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명확하게 깨달았는가? 정치인들의 언사를 보면 그랬던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면 어찌됐든 민주노총 바깥의 취약계층을 만나기 위해 힘을 쏟았는가? 내가 한달에 1만원씩 당비와 별도로 꼬박꼬박 낸 비정규직 연대기금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은 현실을 볼 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진보신당은 창당 이후 스타 정치인의 이미지 관리와 선거연합을 활용한 정치공학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유급상근자들이 데이터를 보고 훌륭한 정책을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그 정책마저도 홍보하는 라인이 없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다가 이제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큰 물'로 나가자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무력함은 우리의 유연하지 못함이나 분열 때문에 나타난 증상이 아니다. 우리의 객관적 꼬라지의 원인을 제대로 고찰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 진보정당 운동은 이쯤에서 종결되는 것이 오히려 한국 사회에 유익하다. 내가 연합론자들과 김규항 등을 소리높여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hwal-in

2011.01.16 06:43:12
*.67.184.46

우와, 재미있네요-ㅎㅎ

1번 분석의 경우는 제가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사회,정치지형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물론 그 이후의 해법은 다르지만요-^^)

여튼, 진보신당의 입장에서는 중간 50%와 하위 30%를 어떻게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이겠죠 : )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에- 윤형님이 말씀하신 전략이 한국 사회에서 성립하려면, 진보신당의 역량 보다는 외부환경이 더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세계화(신자유주의) & 기계화 (국가간 빈부 격차는 줄어들고, 선진국 내의 빈부 격차는 극심해지는)가 지금과 같은 수준보다 "더" 국가 내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이게 하위 80% 분들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수준까지 가야 한다는 거죠. (지금은 버틸만 한거고..)


지금 추세가 더욱 심해져서 '아 나는 절대 20%에 들 수 없겠구나."라고 저 분들이 인지하는 순간, 지금 님이 말하는 정치 집단에 대한 수요가 형성이 되겠지요... (물이 100도가 넘으면 끓어 넘치듯이^^)

그게 아닌 이상, 한국적인 배경(코리안 드림, 신분상승의 꿈, 고성장의 경험 등등)에서 님이 말하는 정당의 형성은 쉽지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 이 사회의 끓는 점 자체를 (인식 자체를) 바꿔야 하는 건데, 쉽지 않죠..

그리고, 기존 정당들도 이런 상황을 손 놓고 있을만큼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하구요.. 최근에 민주당이나 박근혜의 복지 행보를 보면 알수 있죠..

적고보니 괜히 딴지를 거는 거 같아서 죄송하네요-ㅎㅎ

여튼 늘 좋은 글 읽고 있습니다! ^^ 건필하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41 [경향신문] 프로게이머 이윤열의 '명예' 하뉴녕 2010-09-25 3842
1240 [갤리온] 진중권과 김규항의 논쟁을 보며 하뉴녕 2010-09-14 5316
» 정당 지지자의 계층 분포와 진보정당 운동 [1] 하뉴녕 2010-09-10 8894
1238 진보정당 독자노선론 정리 (1) - 연합정치론의 불가능함에 대해 [36] 하뉴녕 2010-08-28 7150
1237 [경향신문] 디스토피아 소설 다시 읽기 [1] 하뉴녕 2010-08-28 3625
1236 잘못된 서사 [89] 하뉴녕 2010-08-24 11825
1235 좌파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예의? 그리고 진보정당의 문제 [33] 하뉴녕 2010-08-20 6307
1234 [펌] PD수첩 방영 보류에 대한 단상 / 이상한 모자 하뉴녕 2010-08-20 5885
1233 좌파를 찾아서 [29] 하뉴녕 2010-08-18 3445
1232 김규항의 진중권 비평에 대해 [39] [1] 하뉴녕 2010-08-17 7151
1231 구대성 은퇴 [7] 하뉴녕 2010-08-16 3419
1230 소통 [12] [1] 하뉴녕 2010-08-14 4332
1229 돈키호테 하뉴녕 2010-08-13 3108
1228 한국 자본가 계급의 탄생과 국가의 역할 - 노정태/홍명교 논쟁에 부쳐 [10] [3] 하뉴녕 2010-08-11 7907
1227 자전거와 지렁이 [9] 하뉴녕 2010-08-06 3104
1226 [경향신문] 전시와 처벌 [8] 하뉴녕 2010-07-31 4850
1225 [문화과학] 월드컵 주체와 촛불시위 사이, 불안의 세대를 말한다 [13] [1] 하뉴녕 2010-07-30 6998
1224 아래 은영전 비평에서 빠진 것 두 가지. [34] 하뉴녕 2010-07-29 3828
1223 본격 은영전 비평 : 양 웬리와 탈정치성 [22] [1] 하뉴녕 2010-07-29 384720
1222 [유머] 참여정부의 실정은... [10] 하뉴녕 2010-07-24 7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