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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소통

조회 수 4332 추천 수 0 2010.08.14 16:09:40

NHK 토론 프로그램에서 만난 한국인 패널 전옥표(전 삼성 사장, 자기계발도서 저자, 숭실대학교 교수)의 발언은 일본인 패널들의 그것과 격차가 컸다. 회사사장, 전직 관료, 대학교수 등으로 구성된 일본인 패널들은 적어도 논란이 되는 지점을 부여잡고 거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 흐름을 가지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전옥표는 추상어 7개 정도를 붙들고 동어반복을 하면서, 한 두가지 예시를 섞었고, 논점에 대해서는 이쪽도 옳고 저쪽도 옳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이건 그 개인의 문제를 넘어 한국의 사회적 명사라는 인간들이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방식 그 자체다. 그나마 정치인들이 찬반을 가지고 얘기할 뿐 이에 대해 코멘트하는 인간들은 대개 다 저런 식이다. 그래서 이들의 논의는 노골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갈라선 정치인들의 거친 찬반논의의 본질을 대중에게 드러내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특히 우파진영이 그런 문제가 심각한데, 글쓰기 책을 펼쳐보면 정치적인 주제로 그럴듯한 얘기를 하는 사람의 압도적 다수가 '좌파'다. (여기서 '좌파'란 단어는 엄밀한 이념적 정의가 아니라, 한국의 주류 보수 담론이 '좌파'라 부르는 것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 묶이는 사람들의 생각은 천차만별이지만, 국가권력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생각들이란 점에선 동일하다.) 우파진영의 인물 중 그럴듯한 글을 쓰는 사람은 손에 꼽을 지경인데, 복거일이나 김훈 정도를 얘기할 수 있겠다.


이것은 한국 우파의 '무능'을 질타하는 얘기가 아니다. 이 '무능'의 기저에 깔린 구조는 실은 좌파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드는 그것이다. 예전에 한번 했던 얘기인데, 어느 법조인이 대학에 와서 법대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하고 질문을 받았다. 어느 학생이 "전관예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이 얘기를 전해준 내 친구는 만일 그 법조인이 "전관예우라니. 판사나 검사 출신 변호사가 더 유능해서 더 잘 이기는 거다." 정도의 얘기만 해도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법조인은 이렇게 대꾸했다. "전관예우? 그런 게 있나요?"


자신이 권력을 가진 이유에 대해 정당성 논리를 계발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한국 보수라는 얘기다. 권력은 그냥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정당한 거지 다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글쓰기나 말하기 능력이 계발될 수는 없다. 다른 측면으로 보면 그만큼 권력이 공고했다는 얘기도 된다.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더라."는 얘기에 사람들이 빡쳐서 들고 일어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그냥 아무렇게나 얘기해도 "뭐 '힘'이 '정의'지 '정의'가 따로 있는게 아니니까..."하면서 체념했다는 얘기다. 이번에 국회의원 강용석의 발언이 문제가 되긴 했지만 그 전의 오랜시간 동안 강용석은 비슷한 소리를 하면서도 문제가 되는 꼴을 못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에서 좌파들은 70년대의 해직기자들이 보여주듯 제도권에서 철저히 배척당했고 사회 각 영역에서 실무를 경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참여정부 시절 386 관료들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조중동의 조소는 이런 맥락 위에 있다. 아마추어리즘이 아니라고 하기도 뭐한게, 그 시절엔 청와대에서 '생애 첫 직장'을 얻은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좌파들에게 행정 경험이나 실무 경험을 쌓은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고 조언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그들이 현재 그런 전문가를 보유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노무현이 당선되었을 때 재경부 관료들이 "노무현이 아니라 권영길이 당선되어도 문제없다."고 말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관료들의 성향이 대개 한나라당스러운데 (단순화된 표현이지만 편의상) 개혁정치를 실시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이런 현실은 '정치적 진보성을 드러내는 글쓰기'가 어떻게 가능하며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강력한 의문을 제기한다. 소위 진보지식인들의 미문이란 것이 대한민국이란 사회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주는 힐링 포션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분한 것이다. (마스터베이션이라 폄하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힐링 포션이 더 적절하겠다.) 물론 이런 비평을 하는 나 자신의 글쓰기도 저 진보지식인들의 바운더리 안에서 훨씬 좁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과거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동의 여부로 좌파와 우파를 가늠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좌파와 우파는,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적인 생각의 차이로 구별되지 않는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좌파이고 그렇지 못한 이들이 우파다. 글쓰기 교재에서 우파의 글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해서 우파들이 멍청하다고 타박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치적이지 않은 모든 에세이가 바로 우파들이 사랑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복거일과 김훈을 비교해봐도 김훈은 그냥 자기 정치의식이 보수라고 얘기할 뿐 일종의 생활에세이로 독자에게 다가선다. 이렇게 보면 한국 사회에서 우파적인 정치적 쟁점을 내세워 제대로 된 글을 쓰는 사람은 복거일 하나 뿐이란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우파의 무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파가 작동하는 방식인 거다.


당연한 얘기지만 생활에세이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정치의식이 우익적이라고 말할 근거는 없다. 김훈의 문체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 김훈보다 훨씬 더 왼쪽인 사람이 수두룩하고, 정치적으로 진보지만 장영희의 수필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을 거다. 문제의 핵심은 도대체가 이들의 글도 일종의 힐링 포션이란 건데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삶을 견디기 위해 글을 읽을 뿐이고 단지 무엇과 무엇을 배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정치의식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자폐적인 구조는 글쓰기가 무언가 사회적인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의 숨을 막히게 한다.


시골에 내려가서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라. 정치얘기가 꽤 나오지만, 어떤 책에서 나온 정보가 대화에 틈입하는 법이 없다. 어르신들은 일 년에 책 한두권도 읽지 않는다. 신문을 읽는 분들과 신문도 안 보고 TV뉴스만 보는 분들이 대화할 뿐이다. 젊은 세대로 내려오면 그거보단 사정이 낫다. 하지만 삶을 예찬하는 수필을 읽는 이들은 꽤 글을 좋아하는 축이고, 어쩌면 얘기가 가능한 축이다. 장영희의 수필 오른쪽에는 자기계발도서와 실용서들이 있다. 좌파들은 자기계발도서를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마취제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분초를 쪼개가며 사는 인간들의 경우 그야말로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 비슷하고 뻔한 얘기가 쓰여 있는 줄 알면서도 자기계발도서를 꺼내들어 읽는다. 이 정도로 바쁜 이들에겐 정치적 담론이 끼어들 여지가 없고 설득가능한 최선의 주장이래봤자 "한나라당이 아닌 민주당을 찍어야 한다." 정도의 주장일 뿐이다.


오늘날 소통에 대해 말한다는 건 소통이 되지 않는 조건에 대해 말한다는 것과 비슷한 것이 되어 버렸다. 기존의 진보담론이 수용되는 방식을 재검토해 봐야 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이 담론이 어디에서 어디까지 순환되며 어떤 이들에게 위안을 주는지를 파악해야, 이 담론이 어떻게 하면 그 바깥으로 (혹은 사람들 안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을지를 말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김사과

2010.08.14 21:07:15
*.12.2.151

"비밀글입니다."

:

하뉴녕

2010.08.14 21:40:10
*.241.65.128

긴 여행 즐기시는 것 같아 부럽습니다. 전 한국에서 하던 짓들만 반복하고 돌아왔답니다. 돌아오시면 한번 뵙지요.

아무개

2010.08.14 23:53:48
*.202.110.36

고 장영희 교수가 정치적으로 보수였나요? 수필만 읽어서 잘 몰랐군요. 어떤 면으로 그렇죠?

하뉴녕

2010.08.15 00:26:58
*.241.65.128

그분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좌파지식인들의 사회평론을 읽는 것과 대비되는 것이 우파지식인들의 사회평론이 아니라 그런 분들의 에세이라는 것이죠. 물론 둘다 즐기는 사람도 있겠고 그게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장영희 선생님의 글이나 그분 글을 읽는 독자들이 문제라는 것도 아니죠. 다만 텍스트가 소비되는 양상에 대해 스케치해 봤을 때 그렇다는 겁니다.

처절한기타맨

2010.08.15 02:09:51
*.231.53.11

힐링 포션은 HP채워주는건데 전 문득 마나 포션이 적절할거 같다는 생각이 듬. 디아2 보라돌이 왕포도 물약이 쵝오긴 하겠지만도... 잘 지내시지용?

하뉴녕

2010.08.15 02:22:13
*.241.65.128

ㅎㅎㅎ 그러고보니 그렇긴 하네요. ^^;;; 잘지냅니다~. 언제 한번 뵈어야죠 ㅠㅠㅠㅠㅠ

놀이네트

2010.08.16 18:41:51
*.234.83.32

님하의 글이 나에겐 마취제...

ah..

2010.08.17 06:09:11
*.104.163.123

"비밀글입니다."

:

하뉴녕

2010.08.17 14:09:52
*.6.78.199

제가 바쁜 사람들의 정치의식을 비판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라 그들에게 좌파들이 다가서지 못한다는 점을 말하려고 한 것인데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단정은 글에서 불가피했습니다.

그런데 '지지합니다'가 아니라 '지지했었습니다.'라니 조금 궁금해집니다. 현재는 지지 안하신다는 말씀이신지요?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ah..

2010.08.17 14:27:06
*.104.163.123

"비밀글입니다."

:

하뉴녕

2010.08.17 14:33:54
*.6.78.199

예 무슨 상황인지 이해갑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해양장미

2010.08.24 20:54:23
*.206.86.75

글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사회가 전반적으로 정치적 무지에 적합하도록, 빈틈이 적게 잘 짜여진 구조라는 생각을 합니다. 개선을 위해서는 효율적인 조처가 필요하겠지요. 노동 시간을 줄이던지, 강한 언론 개혁이 이루어지던지, 공교육 개혁이 크게 이루어지던지요. 어차피 뭘 해도 개선은 점진적으로 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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