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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안티조선운동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조회 수 9525 추천 수 0 2001.05.16 03:14:00
강연회꼬마자료집의 한 꼭지를 위해 쓴 글이다. 강연자는.... 진중권이었던가? 홍세화였던가? '사료'로서 가치가 있을 듯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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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 운동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 안티조선 운동 이전의 상황

<조선일보>의 행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는 사람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조선일보>와의 싸움이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한 '굴곡점'(전북대 강준만 교수 표현)이라는 표현이 가능해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치권력이 언론을 제어하기란 힘들어 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자유로워 지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의 언론은 기본적으로 일개 가문이 대부분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족벌언론'이며 그들은 경영에 무한대의 영향을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사주의 성향은 지면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편집국은 이에 맞춰 기자를 제약할 수밖에 없다. 언론은 정치적 민주화로 막강한 권력을 누리게 되었지만 스스로는 민주화와 별 관련이 없는 길을 걸었다.

그 중 <조선일보>의 행태는 특이한 면모를 지닌다. 기타 족벌언론들이 기껏해야 스스로의 치부를 숨기고 미화하는데 애쓴데 반해서, <조선일보>는 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생존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간다. <조선일보>의 온갖 폐해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그들이 '극우 헤게모니의 사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갖은 왜곡을 다 자행한다는 데에 있다. 김영삼 정권 시절 진보·개혁적 인사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여 낙마시키는 수법을 <월간조선>을 통해 자행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빨갱이'라고 이름표를 붙이면 토론의 대상에서 제거의 대상으로 추락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잘 이용한 수법이요, 그 '현실'을 영원토록 이어나가겠다는 그들의 의지다.

그래서, 이러한 <조선일보>의 극우성을 문제삼으면서 그 신문에 기고하는 진보적 지식인을 비판한 강준만 교수의 작업이 일정 수준의 지지를 받으면서 이루어지게 되었고, 노골적으로 <조선일보>의 행태를 패러디하는 <딴지일보>가 탄생했다. 이러한 작업은 아직 '안티조선운동'이라 불릴만한 단계는 아니었다. 강교수의 작업은 지식인들의 언행일치나 행동에 대한 성찰의 부족 등을 문제삼은 것이었고, <딴지일보>의 딴지걸기가 정교한 면도 많았으나 기본적으로 '패러디'라는 장르는 운동에 적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조선일보>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가지게 하는데는 큰 기여를 하게 되고 그 에너지가 어떠한 계기를 통해 안티조선 운동으로 분출된다.

2. 안티조선 운동의 시작

<조선일보>는 김대중 정권 이후 자신들이 지켜야 할 극우 이데올로기에 일말의 불안을 느끼고 먹이감을 주시하게 된다. 그러다가 예의 그 '빨갱이 사냥'을 강행하게 되는데 그 타깃이 당시 대통령 자문정책위원장이었던 최장집 교수였다. 그들은 <월간조선>을 통해서 최장집 교수의 한국전쟁 관련 논문이 이상한 시각에서 쓰여져 있다고 주장했고, '빨갱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은 후, <조선일보> 98년 10월 26일자 4면의 거의 절반을 통해 <월간조선>의 기사를 인용하는 총력전을 펼쳤다.

<조선일보>가 비판한 최장집 교수의 논문은 이미 학계에서 검증받은 세계적 수준의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일보>의 마녀사냥 광풍에 외국 학자들까지 우려를 나타냈다. 학자들은 한 목소리로 <조선일보>를 비판했고, 수십 개 시민단체가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최장집 교수는 명예훼손 혐의로 <월간조선>을 고소해서 승소했다. 이미 <조선일보> 문제에 관심이 많던 사람들 역시 <조선일보>의 행태를 비판했는데 그 중에는 <인물과 사상>을 출판하는 전북대 강준만 교수와 <말>지 정지환 기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명예훼손 혐의로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에 의해 고소당했다. <조선일보> 우종창 기자 역시 MBC를 고소했지만, '최장집 사건'이 정권과의 어설픈 타협으로 봉합된 뒤에는 소를 취하했다. 그들에게 MBC는 덩치가 컸지만, <인물과 사상>과 <말>은 덩치가 작고 손봐줄만한 매체였던 것이다.

'최장집 사건'이 끝난 후 이한우 기자의 승소 판결이 나왔다. 상대방의 비판에 고소로 맞대응하는 <조선일보>의 언론답지 않은 행태에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안티조선운동의 불씨가 된다. 초창기 운동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하나는 <한겨레신문>에 실린 홍세화 씨의 글이고, 하나는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로 무한증식되며 퍼져나갔던 진중권 씨의 글이다. 홍세화 씨의 글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연쇄적으로 '나를 고소하라!'며 외치는 릴레이 서명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진중권 씨의 글은 강준만 교수, 정지환 기자를 위한 배상금 모금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홍세화의 빨간신호등] 나를 고소하라!


최근 한국과 프랑스에 비슷한 재판이 있었다. 둘 다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소송사건이었다. 프랑스의 소송에선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우두머리인 장 마리 르펜이 이겼고 한국에선 <조선일보> 기자가 이겼다. 이른바 `명예'가 문제되어 제소된 두개의 재판-한국판과 프랑스판-을 비교해보자.

한국판에선 대통령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이던 최장집 교수의 사상을 검증한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를 가리켜 `스승의 등에 칼을 꽂은 청부살인업자'라고 쓴 강준만 교수가 월간 <인물과 사상>과 함께 7백만원의 벌금형을, `마조히즘적인 정신분열증상'이라고 쓴 정지환 기자가 월간 <말>과 함께 4백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판에선 <리베라시옹>의 기자가 쓴 소설이 문제됐다. 프랑스판에선 기자가 피고였는데 한국판에선 기자가 피고도 됐지만 원고도 됐다. 프랑스의 기자는 비판하고 토론하지 소송 같은 일은 벌이지 않는 데 반해, 한국의 <조선일보> 기자는 소송을 택한 차이에서 온 것이겠다. 혹은 극우세력은 어디서나 소송을 즐기는 것일 수도 있겠다.

<리베라시옹>의 마티외 랭동 기자가 쓴 소설의 제목은 `장 마리 르펜의 소송'이다. 소송당할 줄을 미리 알고 붙인 제목 같지만 그렇진 않다. 소설 내용이 제목 그대로 장 마리 르펜의 소송이다. 말하자면 랭동 기자는 프랑스의 극우세력을 실명 비판하기 위해 소설을 쓴 것이다. 그가 출판사와 함께 치러야 하는 벌금액은 4만프랑(약 8백만원). 문제된 글이 `살인자 집단의 수괴', `인간 역사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망령', `피로 살찌는 흡혈귀' 등이어서 한국판과 비교가 안 되는데 벌금액은 비슷하다. 사실 한국에서 문제된 말들은 프랑스에선 소송 대상이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한국판과 프랑스판은 비슷하면서 서로 다르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재판 뒤에 프랑스의 문인들이 즉각 들고 일어났다는 점이다. 일차 서명자만 100명에 이르는 문인들은 문제된 네개의 구문을 <리베라시옹>에 그대로 옮겨 쓰면서 `똑같이 쓸 준비가 돼 있다'는 후렴을 붙였다. 그리고는 `그대로 썼으니', `나를 고소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야 논리가 서지 않느냐면서.

`나를 고소하라!'

이 말은 100여년 전의 에밀 졸라를 상기시킨다. 그는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에서 억울한 드레퓌스 대위에게 반역죄를 들씌운 책임자들의 죄상을 조목조목 고발한 뒤에 `내가 그대들을 무고했다면 나를 고소하라!'고 외쳤다. 실제로 그는 고소당해 피고석에 섰고 3천프랑의 벌금형과 1년 금고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때 최후진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프랑스는 프랑스의 명예를 구하는 데 도와준 나에게 감사할 것이다.”

그도 `명예'를 말했다. 자신의 명예가 아닌 `프랑스의 명예'를. 그리고 그의 말대로 프랑스의 명예는 구해졌다.

<조선일보> 기자와 장 마리 르펜은 이번 재판 결과로 훼손됐다는 명예를 보상받았을까? 나는 알 수 없다. 실은 그들의 명예에 나는 관심조차 없다. 또 장 마리 르펜이 우두머리로 있는 프랑스의 극우세력에게도 나는 큰 관심이 없다. 나의 주된 관심은, 감히 말하건대 `한국의 명예'에 있고, 따라서 `한국의 명예'라는 말조차 초라하게 만들고 있는 한국의 극우세력과 그 대표격인 <조선일보>의 극복에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조선일보> 기자가 최장집 교수를 빨갱이로 몰기 위해 `스승의 등에 칼을 꽂은 청부살인업자'가 되어 `마조히즘적인 정신분열증상'을 보이며 사상 검증을 했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나를 고소하라! 서명 홍세화.”

홍세화/<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지은이


21세기는 '우리모두' 와 함께

  얼마 전 조선일보의 이한우 기자가 '말'지와 강준만 교수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법원은 명예훼손이 인정된다며 말지에 4백만원, 강준만 교수에게 7백만원을 내라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 물론 재판의 최종결과를 보려면 2심과 3심까지 기다려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우리 사회에 정당한 비판에는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비판을 하는 데에 사용된 몇 가지 표현을 구실로 법원으로 달려가는 부정적인 현상이 하나의 관례로 정착될 것을 우려하기에, 저희들이 강준만 교수를 위한 성금모금을 벌이고 있습니다.

문제가 된 상황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일보의 이한우 기자는 자기가 쓴 "한국사회의 학맥"이라는 책에서 최장집 교수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던 중 조선일보의 우종창 기자가 최교수의 사상을 문제삼아 사회적 문제가 되자, 입장을 180도로 바꾸어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자기가 한때 그토록 칭찬했던 최교수를 빨갱이로 모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일조를 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속한 언론사의 불순한 정치적 의도에 맞추느라 자신의 학자 시절의 신념을 배반한 이한우 기자를 강준만 교수는 "스승의 등 뒤에 칼 침을 꽂"았다고 비난했고, 이 비난에 대해 법원은 명예훼손의 여지가 있다고 보아, 애초에 그가 청구했던 1억원의 10분의 1이 채 안 되는 배상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저희들은 일단 법원의 판결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다만, 법원의 판결은 표현의 부적합성에 관한 것이니 만큼 사태의 본질을 드러내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 판결이 '이한우 기자가 한 행위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잘못 인식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오해의 여지를 없애고, 이 문제를 원래의 맥락으로되돌리기 위해서, 저희는 일단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는 한에서 가능한 합법적 대응(?)의 일환으로 이번 모금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번 소송의 원인을 제공한 애초의 문제로 돌아가, 최장집 교수를 극찬한 학자 이한우와 최장집 교수가 좌파(=빨갱이라는 의미에서)라고 주장하는 기자 이한우, 이 두 가지 현저하게 모순적인 태도에 대한 논리적 해명을 그에게 촉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이번 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 일은 자연인 강준만과 자연인 이한우 간의 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로 강준만 교수가 단지 사적인 감정 때문에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이한우라는 개인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합니다. 이 사태의 본질은 조선일보라는 미디어 무굴제국의 횡포에 대항하는 이 사회의 상식인들의 싸움에 있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이 두 개인 사이의 사적인 민사소송으로 축소되지 않고, 우리 사회의 공공성을 확보하는 데에 필요한 공적인 싸움으로 인식이 되도록, 이번의 모금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 싸움이 두 개인 사이의 사적인 원한관계로 오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좀 더 넓은 맥락에서 보면, 최근에 우리 지식인 사회에 걱정스럽게도 명예훼손 소송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단지 강준만 교수 뿐 아니라 교수사회의 비리나 재단의 횡포와 싸우는 많은 지식인들이 지금 명예훼손 소송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훼손된 명예에 대해 배상을 받는 것은 개인의 권리입니다. 하지만 법원으로 달려가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합리적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택하는 극단적 방법이라는 것은 사회상식에 속하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소송을 거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대부분 정당한 비판에는 침묵으로 일관을 합니다. 그러다가 빌미만 잡으면 곧바로 법원으로 달려갑니다. 따라서 이는 훼손된 자기의 권리를 찾으려는 정당한 노력으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가 해결해야 할 논리적 문제를 슬쩍 법적 문제로 둔갑시켜 교묘하게 피해가려는 고도의 지능적인 전술인 셈입니다.

우리의 모금운동은 이 못된 관행에 쐐기를 박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합리적 의사소통을 현저히 왜곡시키는 '침묵, 무시, 무마, 눈감아주기'의 문화에 종지부를 찍고, 모든 문제를 비판과 반박, 토론과 논쟁이라는 합리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성숙한 지식인문화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명예훼손'의 소송은 평소에 자기 명예를 스스로 훼손하고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사람들의 구명조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이번에 모금운동이 성공하면, 이 번 사건뿐 아니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와 유사한 모든 다른 사건의 해결에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마침 프랑스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극우파 르펜에게 고소당하기'라는 재미있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바야흐로 운동도 재미있게 놀면서 하는 시대입니다. 저희는 여러분에게 이 운동에 동참하시어 우리와 함께 사태의 진행을 지켜보는 즐거운 놀이를 함께 하자고 초청하는 바입니다. 성금이 마련되면, 이한우 기자께 돈을 전달하는 화려한 이벤트 행사도 있을 예정입니다. 본 행사를 밀레니엄을 기념하는 초호화 버라이어티 쇼우로 만들기 위해 이 운동에 참가하는 분들의 기발한 아이디어도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신 분은 언제라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경우에 따라선 경품행사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중권 올림

3. 안티조선 운동의 전개

'인물과 사상 홈페이지'(
http://inmul.co.kr/) 등의 곳에서 두 개의 운동을 벌이던 네티즌들은 99년 12월 3일에 '적지'랄 수 있는 '코리아나 호텔'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네티즌들의 모임이 이번 서명·모금 운동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반조선일보 운동 사이트를 기획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현재 이루어지는 안티조선 운동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안티조선 우리모두'(http://urimodu.com/)이다.

'안티조선 우리모두'가 <조선일보>를 반대하는 네티즌들의 기지로서 <조선일보>의 사설과, 논설, 기사, 편집 등에 관해 체계적으로 비판을 시작하고, 이들의 이벤트가 언론에도 소개가 되는 등 운동의 저변이 넓어지면서 지식인 사회와 시민단체에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000년 8월 7일 154명 지식인들이 <조선일보>와는 기고나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는 1차 지식인 서명에 참가했고, 이 선언 이후 시민·사회단체는 '조선일보 공동대책위 준비위원회'를 통해 조선일보 반대 시민·사회 연대기구를 준비하여 9월 20일 <조선일보 반대 시민연대>(상임대표 김동민, 문규현, 오종렬, 홍근수)가 출범했다. 이후 지금까지 총 3차에 걸친 조선일보 기고·인터뷰 거부 지식인 서명에 700여명의 지식인이 참가하였고, <조선일보 반대 시민연대>는 <조선일보> 왜곡 보도 모니터링 자료를 작성하고 <조선일보> 사옥 앞의 '릴레이 일인 시위'를 기획하여 5월 18일까지 시위를 행하는 등의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안티조선 우리모두' 역시 온라인 활동과 오프라인 활동을 적절히 병행하며 <조선일보>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힘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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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티조선운동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뉴녕 2001-05-16 9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