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정글에서 살아가기

조회 수 1060 추천 수 0 2002.01.28 03:10:00
냉소주의의 체험. 스무살의 나는 90년대 냉소주의의 잘못된 제자였다. 아니면 그놈이 정직하지 못한 스승이었거나. 안티조선 우리모두에 이가엘이란 아이디로 올린 글.  

---------------------------------------------------------------------------------------------

"히틀러는 어째서 유대인들을 다 죽이지 못했을까?"

라는 질문을 친구에게서 듣는 순간,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때 그에게 짜증 섞인 반응을 보여야 했던 것을 아직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나의
"설명"(?)은 설명이 아니라 거의 비난에 가까웠던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인정할 만큼 강하지 않다."는 말은 내가 좋아하는 어느 소설의 등장인물의 말이다. "신념"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마다 그에 대한 평가를 10% 이상 깎아 내렸다는 그 사람은 신념으로 자신을 정당화, 합리화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온갖 범죄들을 진정으로 혐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인간이라는 집단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도덕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는 말이다. 인간에겐,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도덕을.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반인륜적인 범죄를 "합리화"할 필요도 없이 개념없이 행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커다란 범죄가 아닐지라도,  범지를 저지르면서 그것을 정당화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더욱 무서운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등장인물이 싫어한 신념의 인물들 - 종교적 신념에 가득차 역사를 역류시키려고 하는 암살자들이나, 극우적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쿠데타 세력들 - 이나,  유색인종을 테러하는 서구의 극우파들이 두려운 것은 그들이 "내가 옳다"는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확신보다 더욱 사람을 전율케 하는 것은, 어떠한 도덕이나 신념 이전에 원초적으로 전제된(?) "힘의 논리(?)"이다.

    힘이 강한 자가 힘이 약한 자를 어떻게든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일찍이 내면적으로 깊이 체득하고 자란 우리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인종주의적인 광기를 가지고 유태인을 학살했던 히틀러의 시기에 어째서 유태인들이 다죽지 않았는 지가 의심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독일인들이 자신들이 죄 ( 그것이 "죄"라면) 를 저지른다고 의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왜 그런 일에 죄의식을 가졌을까, 나치들이? 그들이 마치 현재 우리가 북한의 어린이들이 굶어죽는 것을 "알지만,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고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을 것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스실에서 죽어간 유태인들도 많았지만, 과학적으로 정량 (방관하면 천천히 죽을 정도의 양의 분량)의 식사를 정해서 천천히 굶겨죽이는 방식이 선호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인간이, "죄"에서 어떻게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는 지를, 죄의식 따위를 감지하지 못하는 우리의 잘난 영혼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나라의 성공자들, 주류에 속한 사람들이 그토록 악의 무리로 헐뜯던 현실 사회주의의 가장 추악한 일면을 보여주는 소련의 "탱크 공산주의"를 살펴보자. 1968년, 체코의 프라하의 봄을 짓밟은 소련의 탱크를 떠올려보자. 역사는 소련의 군인들이 "의아해했다"고 전한다. 그들이 너무나도 평화스런 우방국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일반군인들은 체코가 독일의 침공을 받았다는 설명을 듣고 체코로 왔다. 그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그러한 "설명"이 필요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그들이 프라하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정복자를 비난하는 낙서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도 한국인들이라면 아무런 죄의식을 가지지 않고 발포했으리라는 건 너무나도 삐뚤어진 내 착각일 뿐일까?

  한겨레의 올바른 켐페인 덕택에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많이 들었다.  그들이 "학살"을 정당화하는 온갖 발화에 귀기울일수 있었다. 주된 주장은 이것이었다. "양민을 가장하고 덤벼드는 적으로 가득찬 곳에서, 전우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이성을 잃었고, 양민과 군인을 구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똑같다. 여기서 학살을 긍정하는 양심적인 측은 "그런 상황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학살을 부정하는 측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내가 궁금한 건 이런 것이다. 그들은 알고 있다. 일선에서 전투를 수행했던 그들은 알고 있다. 양민들이 모두 적이었다. 그나라 누구도 그들에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그런 전쟁이었다는 걸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몰랐던 것일까? 자기들이 수행하는 전쟁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일까?  세상에 도대체 어떻게 양민들을 모두 적으로 돌린 전쟁이 그들 스스로 강변하듯 "자유를 수호하는 정의의 전쟁"이라고 생각했을까?  그 행위에  대해 한번이라도 죄책감을 느껴본 적은 없었을까? 전쟁을 일으킨 미군들은 일부나마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격렬한 반전시위를 일으켰는데, 우리 한국군들은 그저 말잘듣는 모범생처럼 방아쇠를 당겼을까?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어째서 우리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과 합리성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정글의 논리"가 마음속 깊이 스며들게 된 것일까? 그것의 끔찍함을 느끼는 것이 너무 힘들때면, 이런 생각을 하면서 도피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도피의 의미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원인을 안다면, 치유책을 찾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딜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설명이야 어떻게든 가능하다. 먼저 읽어야 할 것은,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의 4부 "인종주의와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증오와 멸시의 논리"이다. 이 글은 대한민국의 인종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 지에 대해 역사적으로 짚고 있다. 우리나라의 인종주의가 자본주의적 힘의 논리로 서열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인종주의의 침투를 살펴보는 것은 정글의 시작을 추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전후 한국에 그대로 계승된 일본 군인의 행태다. 흔히 식민지 시대의 일제의 학살을 처음으로 시작하는데, 가장 처음은 의병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던 일제의 "남한 대토벌"일 것이다. 이 잔혹함을 그대로 느끼려면 F.A 메켄지의 [한국의 독립운동]을 읽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의병들과 남한 대토벌에서 시작해서, 3.1 운동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탄압방식. 그리고 물론 가장 중요한 건 그 책엔 안나오지만, 그러한 폭력에 상관했거나 묵인했거나 찬양한 자들이 전혀 처벌받지 않았다는 사실.

  그후에 봐야 할 건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다. 한국에 만연한 학살문화를 광복후 좌우파 대립으로부터 찾은 김동춘 교수는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벌어진 폭력 사태를 정리하는 수고를 했다. "한국전쟁의 기억이 한국인의 정치의식을 규정한다. 광주학살은 그 재판일 뿐이다."는 그의 요지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보다 일상적이고 의식하지 못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사회의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력을 살펴보려면, [페니스 파시즘]을 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사실 그 문제로 내게 처음으로 충격을 줬던 글은, 군가산점제를 배경으로한 웹진 대자보 장형석 기자의 글이었는데, (아마 학살 문화 어쩌구하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검색이 되지 않는다.

  어쨌든 힘있는 자들이 저지른 폭력이 처벌되지 않고 오히려 연속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속에 힘에 대한 숭배가 각인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을 알려면 이러한 상황을 "문제"라고 인식하는 우리들 소수의 연구가 필요하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이 "정글"이라는 사실을 느낄 때. 너무나도 힘이 든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역시  내 안에서 "정글" 을 강하게 느낄 때가 아닌가 싶다. 나는 종종 그 "정글"을 이런 식으로 느낀다. 나는 가끔 힘있는 자들이 저지른 범죄행위가 처단되지 않는 데에서 우리의 정글문화가 시작되었다면, 그들의 행위를 힘으로 처단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압도적인 "힘"으로 거꾸로 그들을 매달고 싶다. 아주 진지하게. 내 안의 "정글"이다. 물론 다음 순간 나는 내가 그런 식으로 복수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큰 의미가 없을 거라고 고쳐 생각한다. 그러나 아마 테러라는  것이 이런 느낌에서 시작되리라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가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1 [월간말] “꼬마 조선일보"를 경계하라 하뉴녕 2002-10-30 1619
20 민주당을 안 찍으면 전쟁이 납니까? 하뉴녕 2002-06-05 1143
19 강준만의 논리기계 분석 하뉴녕 2002-05-20 1831
18 "깨끗한 손" 이문옥, 논쟁의 중심에 서다. 하뉴녕 2002-05-14 1858
17 노풍 바로봐야 노무현 위기 넘긴다 하뉴녕 2002-04-23 3070
16 노무현 노풍은 과연 안전한가? 하뉴녕 2002-04-21 1177
15 [고찰] 마초이즘의 문화적 표류와 계통 발생 하뉴녕 2002-03-10 1198
» 정글에서 살아가기 하뉴녕 2002-01-28 1060
13 평준화 교육, 평준화 교육... 하뉴녕 2002-01-17 1172
12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까? - 원칙을 줄이기 [1] 하뉴녕 2002-01-15 1290
11 [매니아/오타쿠] 문화의 탄생과 그 의미 [1] 하뉴녕 2002-01-13 2009
10 충돌을 야기하는 편협함-하나의 전선 하뉴녕 2001-12-19 1122
9 민주당은 노무현을 밀어라! 하뉴녕 2001-11-30 1117
8 민주당 지지자의 안티조선, 민주당의 안티조선 하뉴녕 2001-11-16 1379
7 안티조선-단계적 현실타개, 내적 일관성 하뉴녕 2001-11-16 1255
6 정권 바뀌면 안티조선은 끝장이다? 하뉴녕 2001-11-16 1358
5 조선일보의 친일이 죄되는 이유 하뉴녕 2001-11-06 1742
4 침팬지만도 못한 조선일보의 대북보도 하뉴녕 2001-09-20 1222
3 "뮤지션 서태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뉴녕 2001-09-11 2651
2 안티조선 운동의 주요 쟁점 하뉴녕 2001-05-22 36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