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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금기(禁忌), 세력균형, 합리성, 이념

조회 수 1281 추천 수 0 2003.03.10 14:15:00
거의 진보누리가 처음 생겼을 무렵에 쓴 글인 것 같다. '허접했다.'라고 기억에는 남아 있는데, 다시 읽어보니 생각보다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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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禁忌)

태어나서부터 주욱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설령 극단적 자유쥬의자라 하더라도, 자기 집의 애완견이 아무데서나 오줌을 갈기는 것을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해서는 안될 일"을 했을 때 불이익(예를 들자면 위협이나 매질이 있겠는데)을 주는 방식으로 강아지를 "교육"시키다 보면, 자유로운 듯한 자신의 행동도 숱한 금기(禁忌) 교육을 통해 패턴화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사람은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구분한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 혹은 "다른 일보다 더욱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을 언급하면 상당 부분 개인적인 가치를 평가해야 하므로, 이 논의에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0과 1의 이진법으로 구성되어 있는 컴퓨터처럼. 이중 0을 가리키는 것이 바로 금기일 것이다.  

금기는 생리적인 필요에 의해 생기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독초(毒草)를 먹지 못하게 하는 금기는 필요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물 역시 금기로 제약되기도 한다. 이 경우 주목되어야 할 것은 금기의 실용성이 아니라 금기가 작용하는 패턴이다. 금기는 자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형이상학적 갈망에서 추동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리적 필요에 연유하지 않는 후자의 금기는 윤리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정치경제적인 문제를 탐구하려는 우리의 논의에서는 제외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필요에 의하지 않는 금기가 인간을 지나치게 제약할 때 그것의 비실재성을 비판하는 것은 합리성의 임무가 될 것이다.


세력균형

사회영역에서 인정되는 규칙 역시 금기와 같은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다. 사실 규칙은 금기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금기와 비슷한 패턴으로 구조화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회영역에선 "독초는 인간에게 해로운 화학물질을 만든다."와 같은, 언제나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필요를 산출해낼 수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회 영역에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어떤 "필요"가 있다. 이 때 이 "필요"는 바로 세력균형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금기의 사회적 진화인 규칙이나 제도는, 세력균형을 통해 현실화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아무런 제약조건없이 부려먹을 수 있다면, 어떤 규칙이나 제도가 생길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이것은 논의전개를 위한 가상상황이다. 현실상황에서는 "무조건 복종"이 없다.) 그러나 어떤 저항과 위험이 감지되면, 그것은 노예제라는 제도로 나타난다. 따라서 제도는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것"이지만, 여기서 "합리화"의 필요성은 세력균형에서 나온다. 세력균형이 보다 평등한 지점에서 이루어지면, 제도 역시 그런 식으로 수정될 것이다.

따라서, 수군작은 다수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진보라고 말하지만, 나는 반대로 말할 것이다. 차별받는 이들을 "다수자"로 만드는 것이 진보라고. 태생적으로 소수일 수밖에 없는 장애인, 동성애자, 외국인 노동자 등의 인권을 지키려면, 이들을 엮어내어 거대한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월러스틴이 말한 "무지개 연합"의 뜻인 것 같다. 그들은 "같은 계급"이기에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누리기 위해 연대하는 것이다.

변희재가 주장하는 "당파적 언론의 균형" 역시 좋은 쪽으로 보면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즉, 정당을 대변하는 언론의 영향력이 비슷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선 중앙 동아보다 아직 영향력이 작은 한겨레나 오마이뉴스를 옹호하는 논리가 나온다. 나 역시 안티조선 운동의 초창기에는, 이 "당파적 언론의 균형"을 언론운동의 가장 낮은 수준에서의 원리로 차용했다. 즉, 한나라당의 헤게모니는 40, 민주당의 헤게모니는 30정도 인데, 지지언론사의 헤게모니는 75 : 5 정도이니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일리가 있었지만, 당시로서도 방송권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내가 그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강준만이 신문권력이 진지한 독자들에게 영향을 더 미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강준만의 순수성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신문영향력의 전반적인 퇴조와 네티즌의 성장 때문에 더 이상 "당파적 언론의 균형"에 신경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과거 민주당은 한나라당에 비해 약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번 대선을 계기로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드디어 거의 대등한 평형세력이 되었다. 변희재와 서프라이즈의 자신감은 거기서 나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동안 "합리성"과 "상식"이란 명분으로 포섭해 왔던 진보진영을 노골적으로 배제하고, 조소할 수 있다. 한편, 어떤 이들의 생각에는, 한나라당을 매번 이기기 위해서는 여전히 잔여세력의 지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진보진영에 손을 뻗친다. 이 때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아직 상대적으로 민주당이 약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이제 민주당-한나라당의 구도에서는, 민주당이 스스로 잘하는 것이 선이지, 한나라당을 이기는 것이 선은 아니다. 양강 구도에서 한쪽이 계속해서 승리한다고 해서 다른 한쪽이 망하는 것은 아니다. 한나라당을 망하게 하려면 오히려 양강구도 바깥편에서 새로운 조류가 밀어닥쳐야 할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새로운 조류가 민주노동당에서 태동하기를 바란다.



합리성

앞에서 거론한 한국사회의 예 덕분에, 우리는 세력균형이 제도를 만들지만, 그것이 제도가 가져야 할 합리성을 100% 담보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균형을 이룬 세력이 사회구성원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사회구성원 전체를 대변한다 하더라도, 사회구성원의 "모든 욕구"를 대변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세력균형을 이뤄 받게될 혜택은, 기타 정당 지지자들에게까지 퍼지지 않는다. 그리고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호남 서민과 영남 서민의 경우에도, 그들의 다른 욕망 (이를테면 진보적 욕망)을 드러내는 길은 막혀 있는 상태다. 이렇게 균형을 이룬 세력이 대변하지 못하는 부분은, 여전히 불공정한 상태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둘째, 세력이 균형을 이뤄 실천되는 주장이 반드시 합리적이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가령 갑이라는 집단과 을이라는 집단이 세력균형을 이뤄, 동수의 의견을 사회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러나 사회구성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의견의 숫자는, 이렇게 평형적으로 반영된 의견의 숫자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은 경향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하려 한다는 점에서, 세력균형은 의견수렴의 합리성을 도모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될 수 있다. 갑 집단과 을 집단의 의견을 동수로 뽑는 것은, 분명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는 의견 중에서 무작위로 선출하는 것보다는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제도가 합리성 그 자체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금기의 사회적 확장인 규칙, 제도, 담론의 실재성을 검증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확정된 합리적인 규칙, 제도, 담론을 사회구성원 전체에 적용되도록 확장하도록 노력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금기를 그것이 미치는 효과의 측면에서만 바라본다면,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독초를 먹고 배가 아픈 것처럼, 어기면 정말로 피해가 오는 금기.

둘째, 독초가 아닌데 금기를 어긴 두려움에 탈이 나는 것처럼, 실재로는 아무 피해가 없으나 너무 일상적으로 인식되어 심리적인 피해가 오는 금기.

셋째, 어겨도 실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아무 피해가 없는 금기.


"김대중은 빨갱이다"류의 진술은 이제 셋째 부류로 집어넣을 수 있다. "주한미군 철수" 같은 주장은 아무래도 둘째에 넣어야 할 듯 하다. 남한군이 북한군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투자자들이 불안해서 철수하는 것은 사실이므로. "이회창이 집권하면 사형집행 감행할 것이다."같은 주장은 아마 첫째에 속할는 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1. 먼저 첫째 금기와 둘째,셋째 금기를 구별해내고,  2. 셋째 금기를 우선적으로 폐지하며, 3. 둘째 금기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여론화 작업으로 셋째 금기로 만든 후 폐지하는 것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합리적인 금기 역시, 어떤 상황에서는 비합리적인 선동의 효과를 띨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나는 옥석논쟁에서 강준만이 사용한 "소극적 진보"라는 수사를, 강준만이 평소에 옹호하던 그 행동-그러니까 최악이 두려워 이길 수 있는 차악을 선택하는 행위-에 대한 개념화라고 판단한다면, 하나의 입장으로 인정해줄 용의가 있다. 그러나 진중권과의 논쟁 맥락에서 그것은 분명 거짓이었다. 왜냐하면 진중권은 "소극적 진보"를 공격했다기 보다는 "김민석 같은 놈도 소극적 진보로 옹호하는 "바로 그 행태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자신의 "소극적 진보" 방정식에, "이명박" "김민석" "이문옥" 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를 대입한 후 그 값을 알려줬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소극적 진보라는 방정식을 가지고 있음을 선언하는데 그쳤다. 이는 진실한 논쟁의 자세가 아니며, 하나의 선동이다. 특정 맥락에서 인정되는 금기를 자신이 필요한 상황에 확장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정당정치는 대선의 전초전인가?"라는 진중권의 질문 (이것은 금기의 실재성을 검증하자는 질문이다.)에 강준만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상기해보라. 강준만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 사람이 많으면 정말로 영향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내 언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금기인지 아닌지는 잘 몰라. 근데 둘째 금기이면 실제로 배탈이 날 거잖아. 그런데 왜 욕을 해?"

강준만은 분명 금기를 깨뜨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세력균형의 양대축 중 하나가 되자, 더 이상 금기를 깨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이제 금기는 자신에게 유리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좀더 지켜봐야 되겠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모습은 매우 실망스럽다.



이념

그렇다면 이념은 무엇일까? 그다지 자신은 없지만 아마 내 글의 논지를 계속해서 밀어붙인다면, 이념은 "사회적 금기들을 가지런하게 담아놓은 체계"가 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하나의 피상적인 접근이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의 맥락에서는 의의가 있다.

왜냐하면 금기들을 가지런하게 담는 과정에서, 금기의 실재성(=합리성)이 검증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념은 자신이 담아놓은 금기들의 합리성을 주장하고 (통합적이고 체계적인 논거로), 자신이 담아놓지 않은 금기들의 합리성을 부정할 것이다.  그래서 이념과 이념은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념과 이념이 부딪힐 경우엔, 다시 이념을 벗어나 쟁점이 되고 있는 그 하나의 금기를 합리적으로 평가하는 방법으로 돌아가 보는 것도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문제를 폭넓게 보는 방법이다.

아흐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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