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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말 그대로 이대교지에 보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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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감정적인가?

대선은 현 정권에 대한 심판이다. 정부와 집권당의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가 투표를 통해 매겨져야 한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정당은 없고 후보만 있는 괴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미디어 선거라는 새로운 선거행태가 정책보다는 이미지, 이성보다는 감성 쪽으로만 흐른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중략) 몇몇 후보의 선심성 공약이나 위장(僞裝)을 분별 못하게 하는 상황에는 말바꾸기와 베끼기 못지않게 이성을 마비시키는 감성위주 여론 조작이 작용할 여지가 있었다. (중략)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젊은 세대의 선거 참여가 대선의 중요 변수로 자리잡은 것도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젊은 유권자들의 투표권 행사가 감성적으로만 행해져서는 안될 것이다. ([중앙일보 사설] 2002 한국인의 이성적 선택 12.19)

대선 투표직전에 유권자들에게 배달되었을 중앙일보의 사설은 대충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 같다. "감성위주 여론조작"에 속지 말자, 정책과 이성을 보고 판단하자, 투표권 행사를 감성적으로 행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여기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중앙일보가 그 "감성위주 여론조작"에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라. "대선은 현 정권에 대한 심판"이란 말은 일견 그럴듯하게 들리는 엉터리에 불과하다. 선거에는 후보자가 있다. 다른 후보자와의 비교없이 "심판"을 외치는 것은 이상한일이다. 고대에 부여에서는, 나라가 어려워지면 왕을 죽이고 새 왕을 세우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잘못은 무조건 새것으로 처단해야 한다는 생각은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주술적이다. 선거는 상대적으로 괜찮은 정치인을 뽑는 장(章)일 뿐이다.  

"정당은 없고 후보만 있는 괴이한 양상"이란 말은, 중앙일보가 민주당의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한 노무현 후보를 마땅치 않게 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중앙일보는 "심판"을 말할게 아니라, 현 정권의 과(過)가 다른 후보자 누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정책비교를 통해 후보자 모씨가 노무현보다 우월함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 중앙일보의 "노무현 비토"가 이성적 행위일 수 있다. "심판"이라는 애매한 단어에 의지하는 한, 중앙일보는 감정의 선동가에 불과하다.  

중앙일보는 현행선거법에서 언론의 특정 후보 지지를 금지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는지도 모르겠다. 그 말은 일리가 있으며, 필자 역시 현행선거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언론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성적인 근거를 들어 특정 후보를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재 상황이라고 해서, "감정적 선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 판단에 의한 지지선언을 할 수 없다면, 그저 중립적인 입장에서 침묵했어야 했다.

문제는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 등의 거대언론들은 젊은 세대를 "감성세대"라 칭하며, 이들의 감성적 선택이 대선결과를 좌우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새 정부의 "포퓰리즘"을 우려하는 세력이다.  그런데 내가 최근에 본 가장 대중선동적인 글은 대선당일 조선일보의 사설이었다. 제목과 내용을 보라. 도대체 누가 감정적일까?

16대 대통령 선거의 코미디 대상(大賞)은 단연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다. (중략)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다. 이제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다. ([조선일보 사설]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 12.19)

감정(感情)과 열정(熱情)

2002 대선은 굳이 표현하자면, 감정(感情)과 열정(熱情)의 대결장이었다. 감정은 주위의 어떤 대상이나 일이나 상태에 대해 느끼게 되는 여러 기분의 상태를 말한다. 길 위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을 보고 기분이 나빴다는 것은, 감정의 문제이다. 그것은 상황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반면 열정은 어떤 목적에 대해 세차게 일어나는 적극적인 감정을 의미한다. 아이스크림을 사먹기 위해 돈을 모은다는 것은, 열정의 문제이다. 그것은 판단(判斷)에 감정이 결합한 것이다.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인류의 문화는 인간이 감정에 치우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유도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사람은 감정만으로는 외부세계의 요구에 제대로 반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정의는 사실상 "사람은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윤리원칙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특이하게도 감정이 매우 중시되는 사회다. 가령 한국인의 특징적인 정서라는 한(恨)은, 감정이 제때 풀리지 않아 응축된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무속(巫俗)은 (한국에는 어떤 종교든 들어오고나면 무속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감정이 쌓이지 않도록 풀어내는 의식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거의 원시부족공동체처럼 풍부한 감정의 에너지를 가진 이 나라에 오면, 심지어 정치에서도 "국민감정" 혹은 "국민정서"가 중요시된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면 검찰은, "법으로 하면 이렇게 되지만 국민정서를 고려하여 이런 식으로.."라는 식의, 다른 나라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말을 내뱉는다.  

이런 나라에서 정치의 발전을 기약하려면, 감정적 반응을 합리적인 틀 안에서 제어할 수 있는 건조한 "평가의 문화"가 필요할 것이다. 감정의 풍부함은 어떤 이성적인 판단과 결합할 경우 긍정적인 열정의 에너지로 전환될 수도 있지만, 지역감정과 같은 맹목적인 감정대립으로 소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평가의 문화를 앞장서서 만들어가야 할 단체가 있다면, 언론(言論)이 될 것이다. 언론은 사회의 여론을 합리적으로 수렴하여 공론(公論)으로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대선보도 -선동과 왜곡

그래서인지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는 다같이 2030세대의 즉흥적이며, 감성적인 선택을 꼬집는다. 하지만 나는 권영길의 어법을 빌려, 이들이 적반하장(賊反荷杖) 언론(言論)이라고 말하겠다. 한나라당이 내건 "부패정권 심판"이란 구호는 이성에서, 민주당이 내건 "낡은 정치청산"이란 구호는 감성에서 나왔다는 말인가? 무슨 이유일까? 사실 두 구호 모두 추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이 문제를 평가하려면 이회창과 한나라당의 과거가 "부패정권 심판"에 적절한지, 노무현과 민주당의 과거가 "낡은 정치청산"에 부합하는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조선·중앙·동아는 두 개의 과제 중 후자에만 충실하다는 점에서, 그것도 과도하게 충실하다는 점에서 공정한 언론이 아니다. 가령, 조선일보 사설은 이회창 후보의 20만달러 수수의혹을 제기한 민주당 설훈 의원이 "카더라" 뒤에 숨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병풍 시나리오" 문건에 대해서는 "일이 터질 때마다 매번 부인부터 해놓고 보는 그간의 전례로 미루어...."라며, "괴문서일 뿐"이라는 민주당의 해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쪽은 증거가 없으면 무죄고, 한쪽은 증거가 없어도 의심한다. 사실 매번 문건이 흘러나온 이후 정쟁만 격화되다가 진위여부는 유야무야되어 온 그간의 전례로 미루어 보면, 조선일보의 주장은 교묘한 선동에 불과하다. 조선일보 사설은 병역비리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한 적도 거의 없다.  

대선 마지막 일주일 동안 펼쳐진 세 언론의 합작쇼는 가히 예술적인 수준이다. "즉흥적이며 감성적인 선택"을 비판하는 세 언론은 마땅히 합리적인 정책검증의 장(場)을 만들었어야 했다. 그러나 노무현측이 막판에 제시한 이른바 "행정수도이전론"에 대한 그들의 보도행태는 대개 양당의 정치공방을 그대로 지면화하는 "경마식 중계보도"에 지나지 않았고, 얼마되지 않는 기획검증은 지나치게 편파적이었다.

특히 동아일보는 ‘검증 없는 중계보도’가 심각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동아일보는 1면 기사 제목만 보더라도 13일 <이 “충청권 기술산업 육성”/노 “돈 더 들어도 수도이전”>, 16일 <이 “말 자주 바꾸는 후보는 불안”/ 노 “집값 폭락 주장은 흑색선전”>, 17일 <이 “국가기관 연쇄이전 공황 불러”/ 노 “50만명 빠진다고 공동화 되나”>, 18일(초판) <이 “수도 옮기면 충청 투기장화”/ 노 “DJ정권 부패책임 묻겠다”> 등 연일 대대적으로 양당의 주장을 ‘중계’했다.

그러나 정작 이에 대한 검증은 11일자 <‘행정수도 충청이전’ 전문가들 견해> 정도였으며, 그 내용은 제목이 <“국가적 문제 신중히 접근해야”/신도시 기능까지 갖추려면 천문학적 비용 소요>인 데서 보듯 해당공약을 부정적으로 보는 전문가들 견해가 중심이었다.

조선일보의 기획 역시 부정적 평가 일변도였다. 11일자 <행정수도 충청이전 논란/전문가들 견해> 기획의 큰 제목은 <이전비 : 대다수 “40∼50조” 일부 “5∼6조”> <일, 수도 이전 논의만 ‘14년째’>였고, 12일자 <‘수도 충청권이전’ 논란 확산> 기획의 제목도 <50만명 대이동…인프라 태부족> <“급조된 공약” vs “실현성 있다”>였다.

조선일보는 또 <수도 이전은 통일 후 거론해야>(11일자 기고), <수도 이전 쉽게 다룰 일 아니다>(12일자 사설), <수도 이전론의 맹점들>(13일자 조선데스크), <기능분산과 균형발전>(14일자 기고), <물 대책 없는 수도 이전>(18일자 기고) 등 각종 사내외 칼럼·사설들을 통해 수도이전 공약을 비판했다. ([미디어오늘] 373호 3면)


또한 조선·중앙·동아는 12일에서 16일에 이르기까지, 노·정 단일화로 인해 공동정부 구성이나 공약의 굴절이 이루어질 경우 노무현 후보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는 신뢰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은 노·정 단일화가 성사될 때부터 "무원칙한 야합"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러한 비판은 일리도 있고, 문제제기 역시 의미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일관성을 의심스럽게 만든다. 민주당의 일부 인사들이 절차에 따라 선출된 자당 후보를 제껴두고 "후보단일화론"을 주장한 것은 원칙에 어긋난 일이 아니었던가? 조선·중앙·동아는 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는커녕 노무현과 민주당의 안정성을 문제삼지 않았던가?

요약하면, 세 보수언론은 대선 기간 동안 "감정적인 선동"과 "불평등한 비판"을 통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유리한 선거 국면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보수언론의 이회창 후보 지지는 정당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선동"과 "왜곡"은 언론의 본분(本分)을 훼손하는 행동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감정을 대변한 세력이었다. 이들이 이용한 것은 현정권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다. 반면 이들이 반대한 세력은, 지역감정을 타파하기 위한 <열정>,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열정>,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열정>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목표를 가진 <열정>은 감정에 비해 지속적이기에, 자발적인 정치참여를 이끌어 낸다. 노사모나, 촛불시위나, 민주노동당의 당비를 내는 당원들처럼. <감정>은 이러한 정치참여를 이끌어낼 수는 없지만, 충분히 투표장의 한표를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수구세력은 <감정>을 이용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 든다. 그들이 진정으로 대변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기에, <감정>에 공명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조선-중앙-동아의 거리

그렇다면 이번 대선에서 수구세력을 대변한 신문들 중에서 특별히 조선일보를 문제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려면 각 언론사의 과거와 성향을 개략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나는 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조선일보에 전염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전두환 정권의 전면적인 지원아래 1등언론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민주화 이후 92년 대선, 97년 대선, 2002년 대선 국면에서 "극우세력 대통령 만들기"의 역할을 꾸준히 수행해 왔다. 또, 선거국면이 아닌 상황에서도, 한완상·이장희·김정남·최장집 등 YS·DJ 정권의 개혁성향 인사들을 "빨갱이"로 몰아 낙마시키는 저력을 과시한 바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들은 조선일보가 단순한 수구세력이 아니라, "사상의 다양성"이라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극우세력>임을 보여준다. 또 조선일보의 행동이 "사실보도와 논평"이라는 언론의 임무를 넘어, 정치적 효과를 노리는 정치세력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반면 중앙일보는 자본의 이해를 철저히 대변하는 상업신문으로서, 보수적이긴 했으나 다른 이의 사상을 문제삼을 만큼 극우적이진 않았다. 오히려 대북정책과 관련해서는 조선일보의 맹목적 딴지와는 선을 긋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킹메이커를 자처하며 "밤의 대통령"으로 불리게 되자, 97년 대선에서는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또한 동아일보는 박정희 시절 독재정권에 가장 비판적인 야당지였으며, 5.18 민주항쟁을 전두환 정권이 무력진압했을 때도 "백지사설"로 항의하는 등 (비판적인 사설을 썼다면 당시 상황에서 게재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예 사설의 자리를 비워놓은 것이다.) 나름대로 독재세력과 선을 긋는 모습을 보여왔다.  동아일보는 97년 대선까지 "중립"을 지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언론사 세무조사"를 계기로 DJ 정권의 맹렬한 안티세력이 된 동아일보는, 위에서 보았듯이 2002년에 "노무현 비토"에 참가하게 된다.


그들이 보여주는 정치적 행동은 상당부분 "조선일보의 성공"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한나라당 기관지" 역할이 줄 수 있는 사회적 영향력을 탐낸 것이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단순히 한나라당을 대변하는 "한나라당 기관지" 수준을 넘어, 한나라당의 승리를 위한 전략을 제시하는 "한나라당 참모지"로 도약하고 있다. 이번 대선국면의 경우, 월간조선의 편집장인 조갑제 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에서, 노무현을 "좌파"로 규정하고 이 선거를 "좌우대결"과 "이념검증"으로 이끌어 가라고 한나라당에 주문한다. 또, 이회창이 권영길이 제안한 부시 사과 요구 성명서에 서명한 사건에 격분하여 "반미운동에 우파 지도자가 동조함으로써 이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는 그의 이상한 전략은 일종의 자해적 선거운동"이라고 외친다. 그는 한나라당이 취해야 할 구체적인 선거전략까지 제시하는데, 그중 "행정수도 이전하면 수도권 땅값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려라."는 주문은 실제로 그 후 한나라당에 채택되기도 했다. 이는 조선일보가 수구세력의 단순한 대변인이 아닌, 탁월한 선동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또,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대선공간에서 <극우세력>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극우세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사실도 고려해야겠다. 중앙 동아의 극우세력 지지는 이권과 관계가 있지만, 조선의 극우세력 지지는 사상적인 일관성을 가진다.


이번 대선국면에서도 조선일보는 대략 중앙일보·동아일보와 행동을 같이 하기는 했지만, 일정부분 차별되는 면을 보여주었다. 그중 큰 부분은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에 대한 조선일보의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앞서 나는 "이들이 반대한 세력"에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열정을 소유한 사람"을 포함시켰다. 조선·중앙·동아가 대개 "노무현 비토"에 앞장섰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민주당 노무현이 진보적 열정도 포함한다는 것이냐, 진보정당의 독자성을 무시하는 분석이 아니냐."고 말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수구언론이 형성하는 세력구도가 <양강구도>에 국한된다고는 보지 않으며, 그들이 포괄적으로 노무현과 권영길을 포함한 반수구세력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보고 있다. 조선일보가 형평성을 맞추느라 권영길 현상에 대해 긍정적인 시론을 한번 게재했다 해서, 한겨레와 오마이뉴스가 "수구세력이 권영길을 띄워 노무현 표를 잠식하려 한다!"는 식으로 반응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수구언론은 권영길에 대해 적절한 대접을 해주지 않았으며, 특히 조선일보의 경우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였다.

권영길을 위한 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대선 TV 토론 이후, 조선일보만큼 "제 3후보"의 존재를 공격한 언론은 없다.

기본적으로 이회창·노무현 후보의 양자대좌였다면 더 본격적일 수 있었을 토론이, 그렇지 않은 3자대결로 진행된 탓으로 집중력과 긴박감에서 미흡했다는 지적을 들을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사설] 허와 실 함께 드러낸 TV토론 12.4)

이·노 후보 간의 첨예한 상호 공방 속에서 권영길 후보의 질책성 결론 제시는 여론조사상의 지지율 분포를 무색케 하는 모습이었다. ([조선일보 시론] 형식에 얽매인 토론 12.5)

이런 가운데 권 후보의 참가로 TV토론이 희극화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당선 가능성이 높고, 실제 유권자 관심이 높은 이회창·노무현 후보의 공방이 제대로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권영길 현상? / 민노당 “TV토론 선전…득표율 상승 기대”12.5)


사설과 외부필진의 시론 뿐 아니라, 권영길의 부상을 점친 박스 기사에서마저 "지지율 분포"를 이유로 권영길의 토론 참가를 탐탁치않게 바라보는 시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중앙·동아의 보도행태와는 구별되는 점이다. 수구언론이 권영길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이유는 "부패정권 심판론"을 희석시켰기 때문인데, "극우" 조선일보는 그것과 함께 진보세력의 성장에 대해서도 일정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론의 "꼬마 조선일보"화 경계한다

2002 대선은 한국언론이 공정성에 대한 고려없이 특정 정치권력을 창출하려고 노력하는 세력임을 보여주었다. 이는 다른 언론들이 주로 조선일보의 행동을 모방하면서 생긴 현상이므로, 수구세력의 탁월한 선동가인 조선일보의 보도행태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년간의 "안티조선 운동"은 <조선일보>의 영향력은 감소시켰으나, <조선일보적인 행동>이 가져올 이득을 감소시키지는 못했다. 그래서 중앙 동아 등 수구언론 뿐 아니라, 개혁성향의 대안언론들 역시 정치세력화 되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나름대로 중도적이었던 동아일보가 "조중동" 연합전선에 가담하면서, 반대편에 선 한겨레의 영향력이 갑자기 커졌다. 그러나 한겨레 역시 "조선일보적"으로 이 영향력을 활용할 경우 얻을 수 있는 이득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번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한 한겨레와 오마이뉴스는, 수구언론만큼은 아니더라도 분명 비판받아야 할 역(逆)편향 보도를 일삼았다.

오마이뉴스에 비해서는 언론의 정도를 지켰던 한겨레에 대해서만 간단히 역편향 보도의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한겨레는 "한반도 평화정착 방안"에 대한 3인 후보의 [5대 국정과제 비교평가] 기사에서 민주노동당의 평화협정 방안이 <남북미평화협정>임에도 불구하고 <남북평화협정>으로 소개했다. 같은 기사에서 한겨레는, 핵위기의 근본책임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입장은 <미국과 북한>의 동시책임론이었음에도 <미국>만 서술하고 있으며, 거꾸로 노무현 후보는 <북한>책임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북한> 동시 책임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한겨레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민주노동당의 공약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노무현 후보의 공약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이런 보도가 오보(誤報)인지 왜곡보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진보진영의 "노무현 비판적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 내지는 욕망이 엿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수구언론에게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 입장은 자유롭게 표방하되, 보도는 공정하게 하라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설에선 적합한 근거를 들어 주장을 개진하되, 기사에서는 형평성을 지키라는 뜻이다. 이런 요구는 다른 언론에도 예외일 수 없다.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해서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지원하는, 조선일보의 방식을 답습하는 언론은 민주사회의 건전한 여론형성에 방해가 될 뿐이다. 언론은 정치를 하는 집단이 아니라, 보여주는 집단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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