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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장미와 주판'에 올렸던 글이다. 적절하지 않은 인용도 있을 듯 하지만, 고치기는 어려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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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Meta화(化)의 끝? -아이러니의 해결책: 전제(前提)와 격률(格率)에 대해...



어려서부터 나는, "아무런 원칙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신을 <허무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개념이 로티가 말하는 <아이러니스트>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은 최근에 김영민 선생을 통해 알게 되었다. 로티에 의하면, 아이러니스트는 <근본어휘>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근본어휘가 없기에 아이러니스트는 끊임없는 <재서술> 전략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하나의 근거에 있어, <반민족세력>이라는 편리한 정의를 밀어두고 내가 "친일행위는 왜 나쁜가?"에 대해서 골몰해야 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리는 판단들은 수많은, 그리고 다층적인 원칙들에 근거한다. 우리는 그 원칙들의 정당성을 암암리에 인정하고 지나간다. 그것은 일상생활에서는 별 무리가 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원칙의 정당함과, 거기에서 근거한 판단의 정당함을 추구해야 하는 영역에서는 이렇게 <증명과정생략>된 원칙들 역시 끌어내서 검토해봐야 한다. 이것은 학문의 영역일 것이다.



그런데 숨겨진 원칙을 끌어내는 행위는 대개 명제(命題)에 대한 메타Meta화(化)를 통해 이루어진다. 학문이 무엇인지를 투박하게 말한다면, "우리의 현실변화를 언어로 담아내, 예측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될 것인데, 이 언어를 신뢰하기 위해선 메타화의 검증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라는, 일견 반박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주장을 살펴보자. 여기서 주창자가 "거짓말이 무엇이냐?"라는 질문 -이것은 전형적인 메타적인 질문인데-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이 주장은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듣는 이들은 이 말을 제각기 자신의 관점에서 받아들여 이용할 수 있다. 이 말은 양심을 일깨울 수 있지만, 사생활의 영역까지 침투하는 종교권력의 힘을 재생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의미를 가지려면, 그 <위>의 것이 정의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래>에서 <위>를 연역해 가지만, 판단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메타화는 한 차원 올라서는 것이며, 메타질문은 판뒤엎기이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 사태는 논의지형만 바라봐서는 해결되지 않으며, 메타화의 과정을 필히 거쳐야 한다.



나는 일년쯤 전에 쓴 글에서 일상생활에서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대단히 현대적인 성찰이었다. 자신을 로티적 의미의 <아이러니스트>로 규정한 것으로 모자라, 나는 <공통지반>을 강조하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 비슷한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말>지 기고문에도 빈번히 사용된 <공통지반>이란 어휘가 진중권의 생각에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보다 전에 이미 내 어휘목록에 들어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공통지반이란 어휘를 사용하면서도, 나는 아이러니스트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사실 공통지반이란 표현은 일종의 대화기술이었다. 예컨대, "조선일보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므로,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 이것은 <너의 원칙>은 될 수 있어도, <나의 원칙>은 될 수 없다. 나는 <왜 자유민주주의인가?>라는 질문에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없다고 (혹은 가져서는 안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통지반을 전제한 합의는 처음부터 규정지었듯, <일상생활에서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방법>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학문하는 입장에서 나는, <왜 자유민주주의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옳은 것이 아니라, 내가 긍정적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들을 비교적 잘 실현시켜준다는 점에서 다른 체제보다 권장할만한 체제로 인정된다. 전자의 판단은 <도그마>인 것이요, 후자의 판단은 포퍼의 방식으로 말한다면 <반증가능한 가설>인 셈이다. 이 양자의 차이는, 이것만으로도 매우 크다. 그러나 나는 정치학도가 아니라 철학도이므로 이것으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네가 국가에서 실현되길 원하는 가치들, 그 가치들을 어째서 너는 긍정적이라고 판단하느냐?>라는 질문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물론 배움이 부족한 나는 아직까지 이 문제들에 대해 잠정적인 답변을 내릴 수준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질문하는 방식은 올바른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도대체 <메타Meta화(化)의 끝>엔 어떤 것을 위치시킬 수 있을까? 학문의 새내기에 있어 중요한 건 그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사실 <무엇>이라 누가 주장한들 내가 믿지도 않을 것이므로)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냐다. 물론 그 <어떤> 대답도 당장에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올라갈 길에 대한 전망(前望)은 비추어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메타화의 끝을 고민했던 철학은 두 개의 상이한 방식(方式)을 발전시켰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방식의 <전제(前提)>요, 하나는 칸트적 방식의 <격률(格率)>이다. 그 외에도 물론 주장은 많지만 합리적인 영역에선 둘 중 하나로 소급시킬 수 있다. 가령 동서양의 어떤 지적 전통과도 동떨어져 있는 니체의 경우, "진리란 그것이 없으면 생물이 멸망할 그 어떤 것밖에 없다"고 선언할 때는 <전제(前提)>를, "<영원회귀>와 <힘에의 의지>를 믿는 것이 인간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때는 <격률(格率)>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통합하자면, 그는 격률을 부수고 그 위에 새로운 격률을 세웠다는 결론이 나온다.)



<전제(前提)>는 형식논리학이 팽배한 현대에서는 앞서 말한 <공통지반>과 비슷한 의미로 해석되거나, 취급당한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기로 <전제(前提)>의 정의는 "더 이상 메타화가 불가능한 명제"가 될 것같다. 언어는 현실에서 출발하므로, 우리는 그런 명제를 그려낼 수 있다. 가령,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 하는 것이 학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을 보자. 이것을 한번 메타화시켜보라.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리고 <없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있는 것을 있다함>이라는 행위엔 이미 <있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뒤의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명제는 이미 자기 안에 메타명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명제는 메타가 불가능한 명제, <전제(前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무릇 모든 것은 이 아래 설 수 있을 뿐이지, 이 위에 설 수는 없다. 이것은 너무 포괄적인, <전제 중의 전제>가 될 것이므로, 개별학문의 영역으로 들어가보자.



사람은 (자기에게 있어) 좋은 것을 추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이것을 한번 메타화시켜보라. 역시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흔히 위 "좋은 것"을 "선"이라 번역하는데, 내가 이해하기로는 善과 好의 개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우리 말 "좋은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희랍어에서 윤리적 선함과 취향적 좋음은 구별되지 않는 듯하다.) 이 문장은 <무엇이 좋은 것이냐?>라는 질문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문제는 끝난 것이 아니냐?"고 질문할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전제(前提)의 선포>는 확실히 탐구의 시작을 의미하기는 한다. 그러나 단지 시작만을 의미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근원적 메타질문을 질문 안에 포섭했다고 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확고부동한 <전제(前提)>를 추구했다. 그러나 철학은 한번도 확고부동했던 적이 없다. 하나를 세우면 하나를 잃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전제(前提)>와 실천적인 <판단(判斷)> 사이엔, 어느 정도 여백의 공간이 존재하게 된다.



전제: 사람은 (자기에게 있어) 좋은 것을 추구한다.


판단: 사람은 "선하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선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



포괄적인 의미의 <좋은 것>이라는 개념에서 윤리적인 <선>이 어떻게 도출될 수 있는지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이 부실하다는 점에 대해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실천적인 맥락에선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간극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약간의 플라톤주의와, 약간의 다수결주의로 메꾸어 놓았다. 후세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中庸)을 <사람들의 습관의 평균> 정도로 이해하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이런 이해의 단초를 스스로 제공했음은 인정해야 한다.



그나마 이 정도 상황은 양호한 편이다. <전제(前提)>는 메타질문을 포섭하는 최초의 명제이지만, 이것이 하나의 사안에 대해서 하나만 존재할 수 있으리란 법은 없다. 대상의 특성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전제는 바뀌기 마련이다. 특히 개별학문에 들어갈수록 이런 상황은 두드러진다. 가령,



꿈은 소망충족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입문강의>)


라는 프로이트 심리학의 꿈 해석 전제와,



꿈은 무의식의 의식에 대한 보상작용이다. (칼 구스타프 융, <인간과 상징>)


라는 융 심리학의 꿈 해석 전제는 둘다 하나의 대상을 향하고 있고, 메타질문을 포섭한 전제이며, (물론 <소망충족>과 <보상작용>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는 있지만, 이 단어들은 쓰임이 너무나 한정된 단어들이다. 따라서 나는 이것들을 전제로 이해한다.) 통합되어 새로운 전제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는 있을지언정 양립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전제>와 <전제>의 투쟁도 가능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면 칸트적인 방식의 <격률(格率)>은 어떠한가? 그것은 분명 <전제(前提)>의 방식이 보여주는, <전제가 아무 답도 주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할 수 있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바로 실천적인 윤리형식으로 연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방식은 성공적이다. 그러나 <격률(格率)>에서 연역된 판단이 언제나 올바르지는 않다는 한계가 있다.



정치철학자 볼프는 칸트철학의 원칙, <인간은 자율적이어야 한다>를 내세워 모든 국가권력은 인간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밖에 없음을 논증했다. (철학적 아나키즘 논증.) 이 경우 일반상식인들은 이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국가가 가져오는 수많은 이득이 있는데, 자율성 좀 제한하면 어디 덧나나?" 이것은 칸트의 <격률>을 부정하고 아리스토텔레스적 <전제>, "인간은 (자기에게 있어) 좋은 것을 추구한다."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즉, "자율적이기에 선한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상태를 대개 좋아하기에 선한 것이다." 고로 다른 "좋은 것" 혹은 "선"을 위해서 "자율성"을 충분히 제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격률>은 명확한 판단을 가능하게 하지만, 융통성과 가용성이 떨어진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자유의 문제에 좀더 천착해 보면, 흔히 자유주의자들은 자유 그 자체를 신성(神聖)시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런 그들의 행동양식은 <자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내가 칼 포퍼의 플라톤 비판을 읽으며 조금 불편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포퍼는 종종 용어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주욱 늘어놓고 그 바탕 위에서 플라톤을 비판했다. 그의 정의에서 드러나는 사상이 내 취향에 들어맞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포퍼가 이런 식으로 해주길 바랬다.



"플라톤이 인간의 선을 위해 고민했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이상적으로 보는 전체주의적인 사회는 결코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거대한 악을 발생시킬 수 있음이 역사적 사례를 통해 확인되었다. 그의 시대에 알려진 자료들을 생각해 볼때, 그가 이상국가의 원형을 원시부족사회에서 발견했던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나, 현대의 우리는 그의 정치철학을 비판하고 배격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자유>가 다른 것이 보장해 줄 수 없는 많은 <선(善)>을 발생시킨다는 것은 사실이고, 또 인간의 <자유>를 <자율>에 맡겨두면 쉽사리 포기되는 영향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에리히 프롬, <자유에서의 도피> 참조)  이런 경우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전제(前提)>를 믿는 것보다는 실용성 있는 <격률(格率)>에 맡겨두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는지도 모른다. <전제>는 종종 가치판단을 수행해야 할 시점에서, 현상분석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에리히 프롬으로부터 "프로이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대주의자"라는 평을 들었던 융의 경우, 무의식이 파시즘의 형태로 흉하게 드러나는 것을 염려하는 글 몇편을 남기고 있긴 하지만, 파시즘을 비난하기보다는 그것이 자유주의적인, 혹은 유태인 심리학자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하는 정도의 노력만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또 민감한 시기에 유태인의 무의식 구조와 게르만인의 무의식 구조가 사뭇 다름을 지적하여 나중에 공식적으로 사과하기도 했다. 이 일화는 <전제>에 온 신경을 기울이며, <통합성>을 지고의 가치로 보는 학자들이 놓치기 쉬운 어떤 덕목을 암시하는 듯하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다른 사상을 용인하지 못하는 사상은 용인할 수 없다"는 법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자유민주주의 기본을 부인하는 사상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전제>가 아니라 <격률>에서 나온 판단이다. 그리고 이 <격률>을 통해, 인류역사상 가장 긍정적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지점들에 대해서 우리는 좀더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전제(前提)>와 <격률(格率)>은 대략 구별할 수 있는 두 개의 경향성이기는 하나 완전히 따로 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전제>는 올바른 <격률>을 생산해 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요, (별로 성공적이진 않지만) <격률>은 부단한 메타화의 과정을 통해 (<전제>를 생산해낼 때와 같은) 자신의 정당성을 조금이라도 더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전제>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어떤 편견이나 불순한 의도로 인해 치장되어, 일종의 부당한 <격률>의 역할을 했음이 밝혀지는 경우도 있다. 몇몇 철학자들은 단지 이것을 밝혀냄으로서 자신의 천재성을 증명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단지 편의적인 구별일는지도 모른다. 총체성을 획득한 신(神)의 철학이 있다면 <전제(前提)>와 <격률(格率)>을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불완전한 시야로는, 일단 무엇을 우선적으로 보느냐를 정할 수밖에 없으니, 그것만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다시 한번 학문과 사유의 본질은 메타화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니, 이것은 이성(理性)이란 도구를 가지고 사태를 언어화해야 하는 인간의 슬픈 운명(運命)일 것이다.


아흐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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