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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진중권 : 조우커의 임무

조회 수 2321 추천 수 0 2002.12.08 02:12:00
동아대 교지에 실렸던 글이다. 1) 진중권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2) 진중권-강준만 논쟁에서 진중권의 입장에 대한 옹호로 이루어진 글이다. 교지의 기획은 내가 진중권에 대한 꼭지를 맡고, 강준만의 지지자 한명이 강준만에 대해서 같은 식의 형식으로 소개 및 옹호론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매체에 실은 글인 만큼 처음 읽는 사람에게도 그럭저럭 편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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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 조우커의 임무

한윤형



…즉 '총선연대는 앞으로 홍위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조심하라.' 말이야 맞는 말이다. 그의 말대로 총선연대는 '홍위병'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조직폭력배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총선연대는 아직 홍위병이 되어 보지도 못한 채 벌써부터 그 섬뜩한 이미지를 뒤집어쓰게 된다.…


2000년 2월 10일, 중앙일보 시론 란에 [이문열과 '젖소부인'의 관계?]라는 파격적인 제목의 글이 실렸다. 이틀 전 소설가 이문열 씨가 쓴 시론 [홍위병을 돌아보며]에 대해 직격탄과도 같은 반론이 나온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기고가 진중권"이라는 필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중앙일보 기자들은 찬반이 갈렸고, 신문사엔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그러나 그를 아는 소수의 사람들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이름은 몇 해를 넘기며 사랑받는 대중교양서 [미학 오디세이]를 쓴 사람의 것이었고, 극우 지식인들을 융단폭격한 "세기말의 명저"(유시민의 표현을 빌린다면)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쓴 사람의 것이었으며, 또한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싸움을 벌이는 어느 논객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학 전공자이며, "전투적 글쓰기"로 사회참여 활동을 하게 된 진중권을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뚜렷한 근거지도 없이 여러 매체와 사이트에 예고없이 출몰하는 그는 마치 강호(江湖)의 협객(俠客)과도 같다. 그러므로 결국 그를 알려면 그를 따라 같이 날아(?)다녀야 하는데, 시인 노혜경의 말처럼 "그의 글과 말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스토커가 되어 있는 행복한 경험"이 기다리고 있기에, 비판적이든 우호적이든 간에 그의 스토커 숫자는 급기야 일개 사단에 이른다. 비판적인 사람은 그를 "일개 게시판 낭인에 걸맞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모 네티즌)으로 보겠지만, 우호적인 사람은 존경심을 담뿍 담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티즌들은 둘로 분류할 수 있지요. 진중권과 토론해본 네티즌과… 그렇지 않은 네티즌… 근데 첫 부류가 좀더 많나?"(모 네티즌)


유력한 매체에 기고할 능력을 가진 사람 중에 지속적으로 인터넷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은 진중권밖에 없다시피하다. 그는 왜 그러는 걸까? 그의 협객행(俠客行)이 능력을 썩히는 시간낭비라고 보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그러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진중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의 생각에, 학술적 담론(談論)을 생산하는 한국사회의 지식인은 아무 힘이 없다. 언론에서 지식인이 "지역감정이 나쁘다"고 떠들어봤자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대중들의 세론(細論)에 빌붙어 선동질하는 언론의 존재 때문이다. 고로 지식인은 언론에 종속되며, 언론의 입맛에 맞게 요리된다. 그래서 어쩌면 일반인들의 뱃속이 온전히 드러나는 인터넷에 뛰어들어 뒹구는 것이 신문에 기고하는 것보다 훨씬 실천적이고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그래서 진중권은 조선일보 독자마당에서 호남차별주의를 조소하고, 웹진 월장에 대한 예비역들의 부당한 공격을 막기 위해 부산대 게시판에 뛰어들며, 서울대 국문과 김윤식 교수의 표절을 밝혀 문제가 된 문화평론가 이명원 씨를 옹호하기 위해 서울대 국문학과 게시판에 뛰어든다. [폭력과 상스러움]의 후기에서 진중권은 말한다. "모든 것이 너무 '고상하고 정신적'이어서 역겨운 시대에 철학은 광대가 되어 지저분한 장바닥에서 질펀하게 쌈박질을 하며 노는 게 낫다." 조우커의 철학. 진중권이 장바닥에서 논다고 해서 관객을 중시한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그가 생각하는 광대는 "군중이건 대중이건 그 머리 꼭대기 올라앉아서 노는" 존재, "수틀리면 군중이라는 넘들의 뒤통수를 갈"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게 "광대의 임무"란다. (인터넷에서 모음) 그리고 이 "임무"수행이 쓸데없는 시간낭비는 아니다. 대중의 사고에 직접 맞닥뜨리는 과정에서 그가 얻은 깨달음이 그의 글쓰기의 지반이 되기도 함을 [폭력과 상스러움]의 몇 단락은 보여준다.


"전투적 글쓰기"에 있어서 그의 선배라고 분류되는 강준만은 "실명비판"과 "출판의 언론화"라는 전술을 통해 지식인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김영민 교수의 비유를 빌린다면, 강준만은 "깊은 연못에 던져진 짱돌" 그 자체였다. 지식인 사회의 위선이 이 짱돌 덕분에 수면으로 급부상했다. 진중권 역시 강준만을 "그저 최소한의 상식, 최소한의 필력, 필요한 최소한의 도덕만을 가지고도, 우리 사회의 사이비들과 성공적으로 싸운다."고 평했다. "최소한의 상식"을 주된 무기로 한다는 점에서 강준만과 진중권은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상식이 두 사람의 무기의 전부는 아니다. 강준만은 상식으로 사이비를 격파하는 투사이기 이전에, 어떤 방식으로 어떤 지점을 타격해야 전체 싸움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는 전략가이다. 그의 전략적 판단이 사회학적(社會學的) 자질에서 나옴은 물론이다. 소위 "조선일보 문제"는 "강준만이라는 한 자유주의자가 발견한 문제"(김규항)이며, 진중권 역시 이를 공유하게 되었다.    


반면 진중권의 사회비판 방식은 다분히 인문학적(人文學的)이다. "상식"이라는 공통분모를 벗어나면 진중권의 글쓰기는 강준만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의 글은 가벼울 때는 상식을 바탕에 깔고 몰상식에 대해 다채로운 풍자를 보여주지만, 무거울 경우엔 담론과 세론을 연결하고자 하는 인문학적 시도를 행한다. 모든 글의 바탕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의 한 패러그래프를 깔았다는 [폭력과 상스러움]은 현재까지 나온 그의 사회비판 글쓰기의 가장 세련된 결정물이다.


최근 강준만은 진중권이 윤리적인 글쓰기를 한다고 비난했지만 사실 윤리적인 글쓰기는 강준만의 것이다. 대중에게 울림을 주는 강준만의 감성은 책상을 뒤엎는 분노다. "이건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야!" 그의 거친 외침이 우리의 고막을 때린다. 그러나 진중권의 글쓰기는 윤리적이라기보다는 미적(美的)이다. 그는 미적 촌스러움을 견뎌내지 못하며, 공격한다. "이건 뭐야??" 이 강한 물음표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두 사람의 방식은 다르지만, 다르기에 다른 방향으로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선비" 강준만과 "무당" 진중권이 동시대에 있으므로, 우리 다음 세대는 권위를 돌려야 마땅한 올바른 지식인 상이 둘 중 무엇인가에 대해 투쟁하게 될 지도 모른다. (결국엔 "선비"가 이기겠지만, 가끔 답답할 땐 "무당"의 필요성을 느끼겠지.)  


그런 두 사람이 최근 정면으로 맞붙었다. 아쉽게도 선비와 무당의 투쟁은 아니다. 이 싸움은 두 사람의 공통분모라할 "상식"의 부딪힘이었다. 강준만의 상식이 가끔 굴절되는 것 같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진중권이, 강준만의 저서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의 논의를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 이문옥에게 적용시켜 "이문옥과 국민사기극"을 주장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논쟁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 모두 성인군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두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 주장이므로 위와 같은 양비론은 불필요하다. 나는 논쟁의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볼 때, 진중권에 비해 강준만의 논리가 매우 부실했다고 본다.


먼저 강준만은 진중권이 좌파이면서 "시민적 상식"의 외투를 쓴다고 비판했다. 이는 그 자신과 진중권이 공통분모로 갖추어야 할 상식의 지반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두 사람이 만들어야 할 시민적 상식은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넘어서야 하지 않던가? 혹자는 진중권을 비판하길 "그렇다면 대선땐 '시민적 상식'에 의거해 노무현을 찍어야 한단 말이냐?"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진중권은 (당시) 대선에선 노무현과 권영길이 시민적 상식 안에 포함되지만, 서울시장 선거에선 김민석이 아닌 이문옥만이 시민적 상식 안에 포괄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주장에 반론하려면 김민석과 이문옥을 "상식"의 잣대로 재었을 때 발생하는 "거리"의 길이에 대해 논쟁해야 할텐데, 강준만은 결국 이 점에 대해서는 진중권과 진지하게 맞붙으려고 하지 않았다.  


또 강준만은 진중권이 말한 "시민적 상식"이 "정당정치의 원칙"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원칙"이라는 말에 쫄지 말자. 정당정치의 원칙은 내 사상과 취향에 맞는 후보를 찍기 위해 활용되는 수단적 원칙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 수단적 원칙이 활용되는 경우는 두 경우이다. 첫째, 후보 개인에 대해 잘 모를 때 우리는 정당을 통해 판단할 것이다. 둘째, 후보 개인에 대해 잘 알고 다른 당 후보가 더 취향에 맞다 하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내 사상과 취향을 맞추기 위해 정당을 통해 판단할 것이다. 진중권이 제기한 논쟁은 이문옥이 시민적 상식에 부합함을 말하고 있으니 일단 첫째 경우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둘째 경우의 가능성을 고려해 진중권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지방선거와 대선 사이에 연관관계가 있는가?" 이 질문은 둘째 경우가 말하는 "장기적인 관점"의 전략적 고려가 과연 필요한가를 묻는 질문이다. 따라서 강준만이 "정당정치의 원칙"을 말하려면 "연관관계 있다"고 답변한 뒤 논의를 진행시켜야 한다. 그러나 강준만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했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으면 있다"고 하기도 했다. 이런 부실한 토대 위에서 "정당정치의 원칙"을 말할 수 있을지 과연 의심스럽다.  


이 경우 진중권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노무현을 지지하는 유권자에게 "서울시장 이문옥"이 최상의 모범답안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문제이다. 진중권은 이문옥의 성향을 말하고 민주노동당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지말고 민주노동당의 정책은 민주당과는 차이가 많지만, 지방자치단체장의 권한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이문옥이 민주당 개혁세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바에 어긋나는 행동을 현실적으로 할 수 없음을 말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남게 되는 것은 이문옥과 노무현이 가지는 공통적인 개혁성과 상식임을 말해야 했다. 그러나 진중권은 이런 설명을 소홀히 함으로써 강준만의 "의혹"을 증폭시킨 책임이 있다.


마지막으로 강준만은 인터넷과 매체를 통해 이루어진 진중권의 논쟁방식이 부적절하기 때문에 그의 질문에 화답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진중권의 논쟁방식의 부적절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는 진중권 자신이 인터넷에서 적절히 지적했듯이 "대인논증의 오류"가 된다. 나는 강준만이 이전에 말했던 "선의적 해석, 생산적 논쟁"이라는 구호를 대단히 좋아한다. 강준만은 이번에 그것을 실천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 구호의 옳음이 사라지겠는가? 진중권의 행동에 대한 비판과는 별도로 강준만은 진중권의 논점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나는 의무를 소홀히 한 강준만을 비판한다.


물론 논쟁의 문제와는 별개로 두 사람은 충분히 경의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일부 네티즌들이 두 사람에 대해 과도한 비난을 퍼붓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특히 강준만의 진중권 비판의 논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진중권의 진실성 결여, 일관성 결여"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쉽게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진중권은 "풍자" 혹은 "미적 촌스러움에 대한 경멸"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는 그의 스타일 때문에 끊임없이 적을 만들고, 정보가 부족하거나 어떤 편견에 의해 올바르지 못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은 있지만, 결코 진실성 없는 행동을 하거나 일관성을 무시할 사람은 아니다. 그의 사소한 실수는 강준만이 논쟁과정에서 저지른 잘못과 함께 판단해야 공정할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진중권에게도 부족한 면이 있을 수 있다. 진중권은 "공통분모인 상식"을 중시하고, 이 영역을 넓히려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민주당 지지자나 NL의 편협함뿐만 아니라 관념좌파들의 경직성에 대해서도 "상식" 수준에서 신랄한 비판을 할 수 있을지 앞으로 지켜봐야 한다. 또 그가 주로 "상식"을 말하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고 모호하게 숨겨진 그의 "좌파적 정체성"에 대해서도 검증이 필요할 수 있다. 현재까지 진중권은 분명 한국 사회에 도움을 주는 논객이다. 그의 미래 행보를 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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