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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제목만 흘깃보면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내가 한겨레 창간 15주년 특별기고문을 썼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겨레 창간 15주년 특별기고문들이 말하고 있는 언론관을 분석하는 글이라는 것이다. 웹진에 보낸 글이라는데 어느 웹진인지 기억이 안 난다. '아흐리만'으로 보냈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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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 15주년 특별기고문, 한국언론을 말하다.




한겨레는 창간 15주년을 맞아 다섯 사람의 한겨레에 대한 특별기고문을 게재했다. 인터넷 "독립신문" 대표 신혜식, 소설가 복거일, 전북대 신방과 교수 강준만, 문화비평가 진중권, 인터넷 "서프라이즈" 대표 변희재가 그 기고문의 필자들이다. 필자들 스스로는 부인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한겨레의 필자 선정 의도는 다음과 같다.


1. 인터넷 언론에서 "동지적 고언"과 "비판"을 해줄 필자를 각각 한 명씩 선정한다.
2. 지식인들 중에서 "보수적 비판", "동지적 고언", 그리고 "진보적 비판"을 해줄 필자를 각각 한 명씩 선정한다.


필자들은 대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겨레에 대한 이들의 풍성한 말잔치가 한국언론을 바라보는 여러 사람들의 엇갈린 소망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점을 비교·분석하면 한국언론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정리하기 위한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신혜식의 "권력에 쓴소리하는 창간정신 되찾아라"를 보자. 내가 보기에 인터넷 "독립신문"은 한국언론이 흔히 일컫는 "보수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언론으로 보인다. (여기서 보수는 서구적 의미로서의 "보수"와는 개념이 틀리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들을 "수구꼴통"으로 매도할 일은 아니다. 신혜식의 글을 보자.


[한겨레]는 창간 초기 민주화와 야당지를 표방해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는 군사정권의 잔재로 인해 사회 곳곳에 반민주화 반인권적 요소가 많이 있었고, [한겨레]는 이의 고발과 권력집단과 정권에 대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신문이었다. (중략) 하지만 지금의 [한겨레]는 '정권과 함께 하는 신문' '정권의 입을 자처하는 신문' 심지어 '어용신문'이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최근 대통령의 방문을 받고 [한국방송] 사장을 배출하는 사례를 보면 언론권력이 돼가는 느낌이다.


인터넷 독립신문의 모토는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이것은 그들의 바라는 언론이 "권력을 비판하는 언론"임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은 "지난 시절 조선일보가 나빴던 것처럼, 요즘은 한겨레가 나쁘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 중에는 과거 조선일보를 비판했음직한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지만, 여기서 말하려는 건 그러한 "비판의 진정성"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정당성(正當性)을 가지는 이유다.


내가 보기에 이는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언로관(言路觀)에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언관(言官)들은 국왕이나 상급자들의 전횡에 맞서는 역할을 해야 했다. 그 시대의 문제는 권력이 말(言)의 흐름(路)을 한 방향으로 통제하려는 경향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기있는 언관들이 언로(言路)의 쌍방향성을 위해 노력하게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건 그 시대에 의미있는 역할이었다.  


신혜식은 "[한겨레]는 창간 때가 좋았다. 지금은 아니다."라며 글을 끝맺는다. 그것은 정확히 조선시대의 언로(言路) 정서와 상통한다. 한겨레는 창간 때에 권력에 저항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전통적인 가치관은 근대화를 통해 다른 가치관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문화가 "선거로 왕(王) 뽑는" 수준에서 정체되어 있었기에, 지금껏 존속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이 문화는 이제 바뀔 때가 되었다. 강준만이 적절하게 비판한바, 모든 것을 정치권력, 특히 대통령의 잘못으로 몰고 가는 행태는 더 이상 올바르지 않다. 현대 한국사회의 "권력"의 구조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독립신문이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치려면, 먼저 "권력"이 무엇인지부터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정부권력"을 비판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해도, 그 비판엔 진보적 비판과 보수적 비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 두 비판을 공존시킬 수 없다면, 독립신문의 모토는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동아일보가 1970년대에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이 신문이 박정희 독재 정권에 대해 언관(言官)의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동아일보가 힘을 잃은 이유는 1990년대의 지형도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김대중 정권에 대해서도 언관(言官)의 기능을 수행하려 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우리는 계속 야당지로 간다"고 외치다가 개혁적 정체성을 한겨레에게 다 뺏기고 조선일보, 중앙일보와 함께 "조중동"으로 묶이고 말았다. 더 이상 "정부권력 비판"이 언론의 정체성을 말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실례다.


다음으로 복거일의 "신조와 보도 사이의 균형"을 보자. 복거일은 특별기고문의 필자 중 성향상 한겨레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러나 나름의 내공 때문인지 적절한 어휘로 중요한 문제를 짚어내고 있다. 그 "문제"가 무엇인지는 제목만 봐도 유추가 가능하리라.


모든 신문들은 뚜렷하든 흐릿하든 나름의 신조를 지니게 마련이고, 그런 신조는 알게 모르게 보도에 영향을 미친다. (중략) 신문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신조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보도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세상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한국적 자유지상주의자(복거일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주장하지만, 유시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봐주질 않는다.)의 시각으로 바라본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관점도 분명 흥미롭지만, 나는 지금 한국언론을 말하고 있으므로 "신조"와 "보도"의 문제에 집중하겠다. 그는 한겨레가 "판단의 기준에서 신조가 발휘하는 면이 너무 커서" "뚜렷한 편향"을 보이는 신문이라 말한다. 이 점은 내 생각과 다르다. 한겨레가 "편향"이 없다는 게 아니라, 다른 언론의 편향성이 그보다 심하다는 의미다. 복거일은 자신의 사상과 친화적인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서 "신조"의 "발휘"를 느끼지 못하는 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 그곳에서 거의 매일 "신조"의 "발광"을 느낀다. 하여간 그러한 정치적 시각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그가 말하는 신조와 보도의 길항관계는 의미가 있다. 신조가 중시될수록 신문의 정보가치는 떨어진다. 반면 보도가 중시될수록 신문의 정체성은 엷어진다. 신문으로 장사를 하려는 사람은 전자를 비판하고, 신문으로 다른 무엇을 하려는 사람은 후자를 피해가려 한다.


복거일은 "신조는 논설란으로 족하다."란 말로 글을 맺는다. 비록 그가 한겨레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마당"으로 생각하지만, "신조" 보다는 "보도"의 손을 들어준 것은 틀림없는 일로 보인다. 이는 미국의 자유주의 언론의 관점에 부합한다. 좌파들 중에서도 신문에 "사실보도" 이상의 기대를 하지 않는 사람은 이러한 견해에 동조한다. 아래 인용문은 뉴스메이커에 실린 진중권의 "당기관과 당문학"에서 발췌한 것이다.


오늘날 서구에서 당파적 저널리즘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거기엔 몇 가지 원인이 있었다. 먼저 당파적 저널리즘의 폐해가 두 개의 전체주의를 통해 극명히 드러났고, 다원화된 사회의 목소리를 몇 개의 당파성에 담기 힘들어졌으며, 교육의 확대로 시민들도 더 이상 신문에 자기를 대신해 판단을 내려달라고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또 신문 자본도 당파성의 표출로 독자층을 좁히는 대신, 신문을 상품으로 간주하여 정보의 양과 질로 시장의 승리를 지향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 변화를 어떻게 평가하든, 당파적 저널리즘은 2차대전 이전의 현상이다.


이런 시각이 현대사회의 구성원이 가질 수 있는 바람직한 언론관 중의 하나라는 점은 틀림없으나, 용인될 수 있는 유일한 언론관인 것은 아니다. 물론 복거일과 진중권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이제 강준만의 글('열린 체제'로 '판'을 키우자)과 진중권의 글(낯설어진 '한겨레')을 비교해볼 차례다. 변희재의 "기자를 살리고 신문을 살려라" 역시 좋은 글이지만, 일단 이 글의 주제와는 벗어나 있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신혜식의 "언관(言官)적 언론"과 복거일의 "보도하는 언론"과 구별되는 두 사람의 언론관이다. 먼저 강준만의 언어를 보자.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의 색깔과 과거 행적을 사랑하는 수구 성향의 독자들도 적지 않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문의 '공정성'이나 '도덕'에 개의치 않으면서 '실용'과 '쾌락'이라는 잣대로 신문을 평가했다.


여기서 그는 신문에 "공정성"과 "도덕"을 주문하고 있다.


[한겨레]는 초기의 흥분과 감격이 가라앉으면서 그 다양성으로 인한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같은 갈등은 [한겨레]의 조직 내부에서도 치열한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한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대선 기간중 민주노동당 진영 일각에서 거론된 '[한겨레] 불매운동'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다양성"을 말한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조중동에 대해서 공정성과 도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그가, 민주노동당과 한겨레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성"의 "갈등"을 말한다. 한겨레와 민주노동당의 갈등에는 "공정성"과 "도덕"의 요소는 없다는 것인지? 여기서 진중권이 한겨레의 낯설음을 제시하는데 사용한 어법을 살펴보자.


특히 인터넷한겨레의 기자는 서울시장 후보들을 소개하면서 이문옥 후보만 슬쩍 빠뜨렸다. (중략)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작성된 그 글은 누가 봐도 작문이었다. (중략) 언론사에서 자기들이 청탁한 글을 놓고 필자와 사운을 걸고 논쟁을 벌이겠다고 덤비는 해괴한 문화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중략) 민주노동당이 그렇게도 못 마땅한가? 그럼 정면으로 비판할 일이다.


진중권이 말하는 것 역시 "공정성"과 "도덕"에 입각한 비판에 가깝다. 한겨레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못 마땅하면 정면으로 비판하라"는 외침은 한겨레와 자신의 불화가 "다양성"의 "갈등"이 아님을 주장한다. 강준만이 자신의 주장을 견지하려면, 진중권이 적시한 한겨레의 사례가 "공정성"과 "도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그가 한겨레의 "공정성"과 "도덕"에 대한 비판을 회피한 채 한국일보에서처럼 당파성을 민주주의의 원리로 축성한다면, 조중동의 공정성과 도덕에 대한 비판이 과연 "공정"하고 "도덕"적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준만이 바라는 것은 공정성과 도덕을 유지하면서도 색깔을 드러내는 언론이다. 진중권이 바라는 것은 공정성과 도덕을 유지하면서 사실보도에 충실한 언론이다. 진중권의 언론관은 앞서 지적했듯이 복거일과 흡사하지만, 그들의 상황인식 차이는 매우 크다. 복거일은 한겨레가 가장 공정하지 않다고 보는 반면, 진중권은 그나마 한겨레가 공정한 편이라고 본다. 그러나 진중권의 문제제기는 "그나마"를 넘어가고 있으니, 사실상 강준만의 "공정성"과 "도덕"이 진짜 "공정성"과 "도덕"인가에 관해 묻고 있는 셈이다.


대개 대중언론을 바라는 것은 우파요, 이념언론을 바라는 것은 좌파이기 때문에, 강준만과 진중권의 위치는 뒤집어져 있다. 어떤 좌파들은 이를 근거로 "강준만의 입장이 더 옳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이는 논의의 맥락을 짚지 못한 헛똑똑이의 분석일 뿐이다. "한국축구는 유럽형으로 가야 하는가, 남미형으로 가야 하는가?"라고 진지하게 묻는 것이 현 상황에서 우문(愚問)이듯, 사실보도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한국언론의 현실 앞에서 이념언론과 대중언론의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하고, 그에 맞춰 사람들을 편가르기 하는 것은 우스울 뿐만 아니라 한심하다. 문제는 강준만이 피해간 지점을 짚어들어간 진중권의 문제제기가 적절한가이다. 이 부분에 대한 대답이 한국언론을 바라보는 관점을 결정짓게 되리라. 최근 다소 정체되고 있는 안티조선 등 여러 언론개혁 운동의 전망을 다시 짜는 작업도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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