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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yes24 서평란과 스누나우에 올렸던 글이다. 앙겔루스 노부스는 <폭력과 상스러움>과 함께 진중권의 책 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책이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빼도록 하자. 그건 '책'을 넘어서는 '물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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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루스 노부스 상세보기
진중권 지음 | 아웃사이더 펴냄
탈근대의 관점에서 서양 미학사를 다시 읽는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미학에 관한 딱딱한 담론이 아니라 미학을 주제로 한 가벼운 에세이로 새로운 시선으로 미학사를 보고 있다. 이 책은 작품에 관한 담론을 위주로 한 기존의 인식론적 미학의 관점에서 벗어나 존재론적 미학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존재론적 미학이란 삶을 하나의 작품처럼 꾸며 나가는 데 필요한 영감을 주며, 사회의 폭력적 독단성과 천박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미학 오딧세이>에서 그는 "모자이크"를 말했었다. 하나의 입장은 해석의 틀을 주지만, 동시에 해석을 구속한다. 그래서 그는 여러 입장의 장점을 얼기설기 엮은 "모자이크"로 애매모호한 세상을 엮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 점으로 이루어진 산을 그렸던 누군가의 그림처럼. 하지만 그가 "모자이크"를 통해 엮어내려했던 그림 역시 하나의 입장 위에 서 있다면? <미학 오딧세이>는 모자이크였지만, 그 자신도 말하듯 철저히 근대적인 입장에서 서술된 미학사였다. <앙겔루스 노부스>에서 그는, 그 자신이 놓치고, 다른 사람들이 놓친 탈근대적인 부분을 미학사에 담아내려 한다. 그가 이제 말하는 것은 "모자이크"보다 훨씬 겸손한 "다른 독해"다. 모든 독해는 맹점을 가진다. 맹점이 없이는 아예 독해가 가능하지 않다. 그러기에 고유한 독해가 가진 고유한 맹점을 바라볼 수 있는 다른 독해가 필요하다. 그것이 그가 미학사를 "다른 독해"로 바라보려 했던 이유다.


그는 푸코의 <쾌락의 활용>에서 "존재미학"이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미학사를 다시 읽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바라보는 근대미학은 예술작품을 조용히, 그리고 관조적으로 "인식"하는 미학이다. 그것들은 미술관이나 콘서트홀에 있다. 자본주의의 산문성을 감싸는 얄팍한 포장지. 그러나 존재미학은 그런게 아니다. 사람은 예술작품을 통해 인식론적 감동이 아니라, 존재론적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진중권 자신이 파울 클레의 그림 "앙겔루스 노부스"(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를 바라보며 그랬듯이. 존재미학은 삶을 예술로 만들고, 자기의 육체와 영혼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창조의 미학이다. 이를 통해 사람은 자신의 주인이 된다.


이러한 존재미학의 관점은 예술, 종교, 철학이 분화되지 않았던 시대, 철학자가 제사장이며 예술가이며 또한 통치자이던 시대에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유일한 관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존재미학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의 위대한 힘에 경외심을 느끼면서, 시와 작별한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 존재미학을 말했지만, 존재미학을 파괴할 공간을 마련한 바로 그다. 저자는 그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면서, "난 그를 이해할 수 있다.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이 느낀 위대함을 느끼지 못하고,시(=예술)를 좀더 간단하게 이성의 틀 안에 가둬버린다. 켐벨이었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형이상의 영역에 대한 약간의 인식을 분명 포함하고 있다고 말했던 건.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의 "논리"는 더 이상 신비의 영역을 포함하지 않는다. 플라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그의 제자들. 자신이 깨달은 입장의 "맹점"을 알았던 스승들과, 자신이 배운 입장의 "맹점"을 알 수 없었던 제자들의 차이. 그래서 훗날 니체는 하나의 입장을 비판하기 위해 무려 플라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번민하는 플라톤에 대비해서 저자가 제시하는 인물은 디오게네스다. 플라톤으로부터 "미친 소크라테스"라 불리며 말그대로 존재미학을 "살았던" 디오게네스. 그를 묘사하는 저자의 문체는 마치 신들린듯 하여, 저자의 애정어린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칸트는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말하며, 미학이 그 사이에서 다리의 역할을 하리라고 봤다. 그러나 디오게네스의 몸속에서 그것들은 애초에 하나였고, 동시에 미학이었던 것. 디오게네스는 그가 말하는 "존재미학"의 훌륭한 예시다. "창조적 개새끼", 디오게네스의 삶의 시공간을 벗어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대결할 수 있는 "존재미학"은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 그는 이를 위해 다시 역사의 시계를 돌린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숭고"라는 감정이다. 아직 자신의 삶의 주인이었던, 소크라테스나 디오게네스와 같은 메갈로프시키아(위대한 영혼)에서 그가 보는 것은 "숭고"인 바, 이 숭고란 감정에 대해 다음 세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그에게 소중하다.


그리스도와 동시대에 살았던 롱기누스, 그가 말하는 고대의 숭고는, 위대한 영혼의 크기로 파악한 어떤 신적인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추종자들은 예술을 "명석판명한 인식"으로 취급하려 했고, 그 중 하나인 비평가 브왈로는 롱기누스를 번역하면서도 예술에 대한 그의 관점을 바꾸지 않았다. 그후 숭고를 바라보는 여러 태도, 영국 경험론자들의 해석, 칸트의 해석 등이 제시되나, 고대의 숭고의 위엄에 걸맞는 해석은 나오지 않는다. 이성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의 틀 속에 위치하기 힘든 숭고의 힘. 그래서 그는, 반복해서 "포스트모던의 문제는, 숭고의 가능성의 문제다."라는 관점을 피력한다. 그는 포스트모던의 의의를 인정하나, 아직 의미를 평가하는 데엔 주저하는 듯하다. 테크네주의와 영감주의를 뛰어넘었던 롱기누스와 같은 관점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장마다 거듭되는 그의 비판(모든 것들에 대한)은 어느 순간에는 심지어 매우 반복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숭고의 힘을 부활시키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꾀하며, "자기에의 배려"를 가능케하는 존재미학. 신천사, 앙겔루스 노부스를 그는 하나의 "결론"으로 제시하지만, 그 결론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을지에 대해선 다음 저서를 기다려봐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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