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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진보누리에 아흐리만으로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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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이슈라면 뭐니뭐니 해도 대외적으론 북핵문제, 대내적으론 노동문제를 들 수 있겠다. 정치권의 신당논의는 공회전하고 있고, 여야 간의 소모적인 갈등은 한국 사회가 보수 정치권이 올스톱해도 별 문제 없음을 반증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핵문제와 노동문제에 대한 주류 언론의 시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그건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기 위해서도 일정부분은 필요한 일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노무현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그들의) 선택을 왜곡하는 적들"의 실체를 감지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실체를 감지하려는 노력이 노무현 정권의 선택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경사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 '조중동 트리오'의 성격엔 별 차이가 없지만, 이중 조선일보의 특출함은 따로 주목해볼 만하다. 이 '차이'는 과거엔 이른바 "안티 조선 운동"을 이끌어낼 만한 사회적 의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과연 현재에도 그러한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그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쓸데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1.
북핵 문제에 대한 사설은 최근의 6자회담에 대한 평가성 사설이 있다. 조선일보의 경우 이 문제에 있어 다른 신문들에 비해서도 가히 '반북' 성향을 뚜렷이 드러낸다. 먼저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사설을 보자.

중앙일보는 [평화적 해결 불씨 지핀 6자회담]라는 사설을 통해, 6자 회담이 '평화적 해결'을 향한 기착지가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긍정성을 분명히 했다. "북미 양국의 강경파"라는 표현, 그리고 사설 말미에서 북한과 미국의 강경대응을 자제하는 등의 발언은 그들이 북핵 위기의 책임을 (최소한 일정부분은) 북미 양자에게 모두 물리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동아일보의 [북핵 해결, 타협과 양보 필요하다] 역시 이 기조에서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 "북한과 미국이 각각 ‘일괄타결 동시행동’과 ‘선(先) 핵포기’를 고수한다면 타결은 어려워 보인다. 양측은 적절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라는 표현은 중앙일보의 사태 인식과 흡사한 지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경우 "북핵 사태를 풀어야 할" 궁극적인 "책임"은 "북한에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그들이 사태를 양비론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조선일보의 사설은 중앙 동아와는 기본 인식 자체가 다르다. 그들 사설의 제목은 [북핵 6자회담이 성과를 거두려면]인데, 물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주장은 "북한이 변해야 한다!"이다.

조선일보는 회담 결과의 실망스러움을 먼저 강조한다. "핵 카드를 무기 삼아 국제사회를 상대로 끝없이 ‘협박과 공갈의 게임’을 벌이려는 북한의 태도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앙과 동아가 북한의 '카드'를 미국의 '카드'와 동격으로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조선일보의 주장에선 성숙한 국제사회를 상대로 떼를 쓰는 철부지 소년 북한의 모습이 연상된다.

6자회담을 성공시키려면 나머지 5자가 북한에 왕따를 놓아야 한다는 식의 상황인식엔 차라리 웃음이 나온다. 하여간 조선일보의 결론은 북한에 대한 강경한 압박을 통해 그들의 요구조건을 포기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언제나 그랬듯 이 결론이 무력응징까지 불사하겠다는 미 국방부 강경파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선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들식의 주장이 가져올 위험성이 있는 "전쟁"에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는 것은 지나치게 무책임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북핵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중앙과 동아의 견해를 우리 사회의 "보수층"의 것을 대변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반면, 조선의 견해는 합리와는 상관없는 어떤 유아적인 정신 상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떼를 쓴다는 점에 있어선 휴전선 이북의 정권과 쌍둥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북핵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사설의 경우 중앙일보에 비해 유니버시아드 대회와 관련한 북측의 태도를 비판하는 사설을 자주 싣는다는 점도 주목해야 겠다. 특히 조선일보의 경우 '반북'뿐만 아니라 '친미'에도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념적 성실성을 보이기도 했다. [미국 배구팀이 왜 야유를 받아야하나]라는 사설은 정말이지 압권이다. ^^


2.  
노동문제에 관한 사설을 보면 조중동 사이에 관점의 차이는 없다. 반면 사설의 제목이나 어투에서 '감정'의 차이는 조금 감지되는데, 북핵문제에 있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더 친화성을 보여준다면, 노동문제에 있어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더 친화성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이는 "재벌언론"으로 출발한 중앙일보의 태생적 한계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노동문제에 대한 동아일보의 보수적 시선은 적어도 [화물연대 재파업 명분 없다]는 점잖은 제목으로 표출된다. 중앙일보의 [화물연대 정말 이래도 되는가]와, 아예 수구세력을 선동하는 듯한 조선일보의 [화물연대 파업 두려워 말자]와는 차이가 있다.

'감정'의 차이를 변별하는 이유에 대해 조금 변명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서구의 여러 조사에서, 보도하는 언론인의 감성적 상태가 미디어 수용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다각도로 알려져 있다. 가령 어떤 미국의 뉴스앵커가 민주당 지지성향이라는 사실을 시청자가 모를 경우라도, 이 뉴스앵커가 민주당 관련 보도를 할 때 (무의식중에) 좀더 미소를 짓는 것에 수용자는 영향을 받아 민주당에 대해 더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다는 식이다. 그래서 뉴스앵커들의 정치성향과 그 뉴스 시청자들의 지지율은 연동되게 되는데, 이는 뉴스앵커들의 정치적 커밍아웃이 금기시되는 미국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보면, 차라리 유럽처럼 개인적인 성향에 맞는 다른 언론을 선택하는 것이 위험성을 줄이는 일이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서구의 경우 주로 감성적 미디어인 TV에 의해 '감정'의 위험함이 전파되어 온데 비해, 한국의 경우 서구의 잣대로는 이성적 미디어라는 신문이 오히려 (정치적 문제에 있어선) 감성적 선동을 주도하는 특이성이 있다. 한국의 TV의 경우 자본주의 대중문화를 충실히 대변하는 지점에선 분명 감성적이지만, 정치문제에 대한 논평에선 오히려 신문들 보다도 차분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MBC 미디어비평 등의 매체가 신문들이 신설한 "미디어비평"란 보다는 훨씬 합리적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신문을 비판할 때엔 논조의 수구성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수용자를 합리적 주체로 세우기를 거부하고 '선동의 대상'으로 유지시키려는 '감성'에 대한 비판 역시 이루어져야 한다. 조선일보는 이 분야의 선두주자로 볼 수 있으며,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앞서 말했듯 사안에 따라 순위가 왔다 갔다 한다. 특히 노동문제에 관한한 중앙일보의 "감정"은 조선일보의 그것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수법 역시 신선(?)하다. 조선 중앙 동아는 모두 노무현의 민주노총 비판 발언을 앞세워 화물연대와 민주노총을 비판하는 이이제이(?) 전략을 수립했다. 여기엔 이중의 왜곡이 숨어 있다. 먼저 노무현의 민주노총 비판을 '옹호'함으로써 자신들의 위치를 숨기는 기동이 숨어있고, 최근 쟁점인 화물연대를 슬쩍 '민주노총'으로 치환시키면서 상대방에 대한 공세를 좀 더 편하게 만드는 기동이 숨어 있다.

이들은 최근 사설에서 민주노총이 전체 노동자의 12% 정도를 대변하며, 그 노동자들은 대개 대기업 노조이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화물연대는 대기업 노동자가 아니며, 정부의 편의적인 기준에 따라 자영업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신분 이동을 일삼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생활 수준은 전체 노동자의 평균을 별로 앞서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식의 논리대로라면 전체 노동자 중 주로 상층만을 대변하던 민주노총이 화물연대와 연대투쟁한 것은 노동운동의 건전함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논법에선 이런 복잡한(?) 논리는 생략되며, 민주노총에 대한 (부당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만 공격의 재료로 활용된다. 대기업 노조 민주노총, 화물연대에서 손떼라?

그나마 중앙일보의 일부 사설들의 경우 감정의 부적절한 표출에도 불구하고 화물연대 파업의 근본 이유에 대한 최소한의 성찰을 보여준다. 물론 중앙일보의 주장은 자본주의의 사회적인 성격을 강화시키자는 주장이 아니며,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증대를 꾀하기 위한 방해요소를 제거시키기 우한 주장이다. 그러나 여하간 중앙일보의 경우 이러한 자신의 포지션에 힘쓰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신문들보다 좀더 경제문제의 해법에 능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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