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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유토피아, 그리고 좌파의 유토피아.

조회 수 1516 추천 수 0 2003.06.20 13:13:00
진보누리 세라핌씨의 무지막지한 잘난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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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는 있다. 다만 어머니의 자궁 안에, 그 편안함을 잊지 못하는 유년기 인간의 상상력 속에, 그 갈망이 낳은 상상력을 승화시킨 위대한 예술작품 속에 있다.


두 개의 신화가 있다. 하나는 신과 인간을 떼어놓는, 태초의 완벽한 상태에서 인간이 떨어져 나왔음을 기술하는 서양적인 신화다. 하나는 신과 만유를 동일시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세상을 말하는 동양적인 신화다.


전자의 신은 오직 존재와 선만을 관장하는 신이다. 그래서 그 신은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 완벽한 신적 상태에 대한 갈망이 인간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해 끊임없는 정당화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천국에 가겠다며 면죄부를 샀던 중세 상인들의 모습은, 이 불안함이 낳은 희극이다.


후자의 신은 생성과 파괴, 선과 악을 모두 관장하는 신이다. 그래서 그 신은 인간을 폐쇄적으로 만든다. 모든 것은 이미 정당화되어 있고, 인간은 그것을 따르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근세까지도 인도에서 인간 제물이 바쳐졌다는 사실은 이 폐쇄성이 낳은 비극이다.


유토피아는, 주로 서양적인 신화의 사유구조에서 나온다. 그것은 불완전함의 완전함에 대한 갈망, 내적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체계에 대한 갈망이다.


그러나 "완전한 체계"는 없다. 체계는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하며, 컨텍스트를 모두 포괄하지 못한다. 그래서 체계는 내적 모순에 직면한다. 프로이트-라깡식으로 말하면, 상징화는 실재의 어느 부분을 필연적으로 배제하며, 배제된 "실재는 증상으로 되돌아온다."  


인간의 인식은 어쩔 수 없이 체계 의존적이고, 이론 의존적이다. 그래서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단지 관념의 역사, 관념의 진화일 뿐이다. 그래서 관념의 운동은 "내 멋대로 장난"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착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매트릭스 바깥의 세상은 분명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으나, 냉엄한 유물론은 그것을 체계에 대한 모순으로, 상징화에 대한 증상으로 되돌려 준다.


마르크스는 상품형식을 분석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증상을 파악했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자유"가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의 수많은 자식 중엔 구조적 필연성에 의해 그 보편적인 개념을 뒤집는 어떤 특별한 자유가 있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시장에 자유롭게 팔 수 있는 자유! 이 자유는 다른 자유의 정반대이다. 노동자는 그것을 자유롭게 팜으로써 자유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르주아적인 자유는 바로 이 자유를 통해 완성된다. 잉여가치의 착취가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그렇다면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가지면 되지!"라고 말하는 것이 고전적인 해결방식이었다. 이것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 체계 안에서) 근본적인 해결방식이다. 그래서 유토피아적이다. 아쉽게도 현재 이 게시판에서 논의되고 있는 "유토피아" 역시 기본적으로는 이 기획과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것은 가능할까? 진중권은 "군작랜드의 햏자2"라는 풍자소설을 통해 신세계 체계의 허점을 무자비하게 폭로하고, 매트릭스 설계자가 고려하지 못한 온갖 "실재"를 증상으로 되돌려준다. 이에 대해 수군작은 "<상층부 소수엘리트의 권력독점 제거>라는 수군작 사상의 노른자, 요체 중의 요체, 핵심의 핵심"을 짚어달라고 강조한다. 또한 햏자2는 진중권이 인민의 선진의식을 믿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수군작에겐 매우 아쉽게도, 유물론의 무자비한 힘은 "관념의 핵심"을 봐주지 않는다. 레닌이라고  해서 "노른자"가 잘못 되었겠는가? 그것은 소비에트를 가루로 찢어버렸던 것처럼, 체계의 모순을 후벼판다. 그리고 햏자2의 기획은 좌파적이라기보단, 개인의 성찰을 믿는 인문운동에 가깝다. 인민의 선진의식을 믿는다면 구태여 체계를 다시 만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반국가>와 <반자본>이란 두 가지 이상을 동시에 지키기 위해, 진중권이 모순을 찌를 때마다 술래잡기하듯 다른 쪽으로 도망다닌다. 마치 두더지 잡기 게임의 두더지를 보는 듯 하다.


무엇보다 "잉여가치"를 "해소"하려는 유토피아적 기획은 탈산업사회의 60%를 차지하는 3차산업 노동자들에 대해 아무런 진보적 전망도 제시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를테면 기계를 통해 공산품을 생산해내는 2차 산업 노동자와, 공산품을 생산해내는 기계를 만드는 기계를 만드는 기계를... 생산해내는 고도화된 2차 산업 숙련 노동자의 괴리도 전혀 설명할 수 없다. 또한 그것은 자본주의의 산업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이쯤 고려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노동자의 생산수단 점유율은 한 사회의 진보성을 가늠하는 척도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좌파적 기획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  


이쯤 되면 지에팡과 같은 분이 나와 "그렇다면 너희들은 무슨 대안을 가지고 있느냐? 이 진빠들아!"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의미있는 지적이다. 그리고 이는 유토피아적 기획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편리한 공격방식이다.


지젝에 의하면, "자본의 한계는 자본 자신, 다시 말해 생산의 자본주의적 양식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요점은 자본주의를 영원히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내적 모순이라는 것. 성장은 자본주의가 자신의 "모순"과 타협해서 "그것을 계속해서 다시 한번 해소하려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회민주주의적 대안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이러한 자본주의의 "타협"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물론 문제해결의 근본적인 대안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 신의 입장에서 내려와 민중적으로 생각해보자. 그것은 "일국 현실사회주의"가 지탱할 수 없는 세계적 자본주의 시대에 민중의 고통을 최소화시키는 방향이다. 그것은 당장 한국사회 서민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어쩌면 불확실한 가능성의 체제이행보다는 이것이 더욱 소중한 문제가 아닌가? 진보는 사람에 대한 존중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 "자본주의"라는 한 이름에 포섭된 천차만별의 실태를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은 진보의 감수성이라 볼 수 없다.


하지만 세라핌은 그 이상의 대안에 대한 고민도 존중한다. 또한 신세계 체제를 고민해야 할 날이 우리의 생각보다 빠르게, 예수님 말씀처럼 "도둑처럼 들이닥칠" 때를 대비하여 세계체제를 고민하는 "좌파"를 비웃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렇게 꿈꾸는 것이 좌파이다."라는 입장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으며, 그들이 그 "꿈"의 동일성 여부에 따라 "좌파"니 "진보"니 하는 개념들을 독점하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리 래디컬한 "좌파"라도 현실정치 공간에서 진보세력에 해가 되는 짓을 할 경우엔 비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그들의 고민의 성과물이 어줍잖을 경우엔, 그들 자신을 위해서라도 비판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 좋은 것은 유토피아적 입장에서 체제의 모순을 지적하되, 쉽사리 그 모순을 해소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를 예로 들어보자. 민주주의 체제 역시 내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칸트의 "자유" 개념이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관념적이란 이유로 비판했지만, 정치철학자 볼프는 민주주의 체제가 엄밀히 말하면 칸트의 자유 개념도 100% 충족시킬 수 없음을 증명한 바 있다.


그의 논의는 올바르다. 따라서 우리는 유토피아적 관점에서 민주주의 체제가 일종의 봉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를 수정하거나, 새로운 체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인정해야 하며, 그들에게 유토피아적 지침을 제공해줘야 한다. 그런데 볼프는 여기서 아나키즘을 논증해낸다. 그것이 칸트의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 체계 안에서) 근본적인 해결방식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에 대해 노동자의 생산수단 점유가 근본적인 해결방식이듯 말이다. 문제는 이제 그의 세계가 "오직 칸트의 자유"만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바야흐로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칸트적으로 실현될 채비를 갖춘 것이다.


완전한 체계는 없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체계를 보편적으로, 완전하게 실현하려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망가진다. 볼프의 주장이 전략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것이라면, 틀렸다. 유토피아적 관점의 비판의 효용은 오직 현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고 변혁의 필요성을 떠올리는 데서 그친다.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 하나의 체계를 완전화시키기 위한 "대안"의 모습을 띠면, 흉측해진다. 설계자가 실재를 아무리 억압할지라도, 결국 그것은 증상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좌파의 유토피아 역시 이러한 진리를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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