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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선택과 복종

조회 수 891 추천 수 0 2003.11.27 17:49:00

이글루스 블로그에 올렸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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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복종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219번


잠시 같이 살았던 나보다 나이가 좀 더 많았던 친구는 황당한 농담을 즐겨하는 이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가 썰렁한 농담을 한다고 비난했지만, 나는 그 사람이 TV를 보다가 참신하고 황당한 얘기를 툭툭 던질 때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가령 TV의 공익광고가 "우리는 UN이 정한 물부족 국가입니다."라고 말하면, 그는 자뭇 심각하게 역사적인 고민에 빠져들곤 한다. "우리나라는 곰부족 국가가 아니었던가? 웅녀가 단군을 낳았는데... 아니야. 하긴 하백의 딸 유화가 고주몽을 낳았으니 물부족 국가인지도 몰라. 그런데 왜 그런걸 UN이 정하지?"


또 어떤 기업의 이미지 광고가 "달에 호텔을 짓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라며 자기 기업의 참신함을 강조하면 그는 법적인 반론을 편다. "바보. 호텔 법은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란 말이야. 그러니까 '짓지 말라는 법'이 없어도 '지어도 된다는 법'이 있어야 지을 수 있어."


그러나 그의 농담 중 가장 나를 어이없이 웃겼던 것은 "선택과 복종"의 범주오류에 의한 농담이었을 것이다. TV에서 중국인이 중국어를 말하는 장면이 나오면, 그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참 중국은 대단한 나라야. 어떻게 저렇게 어려운 중국어를 잘 할 수 있지? 그것도 12억씩이나." CNN 뉴스가 흘러나오면 그는 진지한 어조로 묻는다. "미국인들은 어떻게 저렇게 영어를 잘할까? 나는 십년 넘게 배워도 저 정도는 안 되던데."


말하자면 그는 선택의 영역과 복종의 영역을 교란시키면서 우리의 상식을 비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조소섞인 농담. "나는 왜 어렸을 때 한국어를 선택했을까? 별로 써먹을 데도 없는데. 영어,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 하나로 할 걸."


내가 뭐라고 대답했을까? 나는 "그것은 선택의 영역이 아니야!" 라고 외치는 대신, 상대방의 언어를 현실화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사실 나도 태어나자 마자 그런 고민에 빠져들었어. 한국어를 선택하기 싫었지. 하지만 어째? 주위 녀석들이 다 한국어로 떠들고 있더라구. 다른 언어를 선택했다가는 의사소통이 안 될 것 같아서."


비트겐슈타인은 지금 이런 농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다. 철학자들, 특히 합리주의 계열의 의식철학자들은 '주체'에게 무한한 '선택'의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주체'를 행위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사실 그의 농담에 대한 나의 답변은 데카르트나 칸트의 주장과 흡사하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선택'하고, 그것에 복종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선택할 수 없는 종류의 것들에 대해선 어찌하란 말인가?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주체'는 그러한 것들을 이미 선택했다고 가정하는 한에서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당신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날 것을 '선택'했다고 우기는 한에서 우연의 표류물이 아닌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우김'이 반석을 이루면, 그 위에서 당신은 마음 편하게 "나는 블로그를 만드는 것을 선택했어.^^ " 라고 말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대적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종류의 '기만'이다. 그가 '규칙'을 말할 때, 그것이 우리 사회의 법률과 같은 현실적인 층위의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의 말을 "악법도 법이다. 따라라!"고 명령하는 보수주의자의 외침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가 말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유지되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하는 아주 심층적인 층위의 규칙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늘이 파랗다는 사실을 그저 알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문법적 착각의 문제를 교정하는 그의 철학에 의하면, 아이가 "왜 하늘이 파래?"라고 어른에게 질문하는 것은 일종의 범주오류에 해당한다. 그저 알고 있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왜?"라고 물을 수 없다. 우리는 상당히 많은 것을 전제하고 난 다음에야 의사소통을 행할 수 있다.


라캉의 해설자 슬라보예 지젝도 비슷한 소리를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어린이가 "왜 하늘이 파래"라고 어른에게 질문하는 것은 정말로 왜 하늘이 파란지 궁금해서가 아니다. 어린이는 단지 주체가 무력해지는 지점, 아버지가 답변을 못하고 쩔쩔매는 광경을 보고 싶은 것이다. 어린이의 속마음은 이렇다. "하늘은 저렇게 파란데, 당신은 아무 짓거리도 못하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니!"


여기서 우리는 내 친구의 농담처럼 선택의 영역과 복종의 영역을 교란하는 근대의 주체철학, 의식철학을 해체하는 두 가지 접근법을 만난다. 하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이고, 하나는 포스트모던의 정신분석이다.


만약 비트겐슈타인이 살아 있었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회의주의를 근대 경험주의자의 회의주의와 비슷한 맥락에서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젝에게도 할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라캉을 일련의 포스트모던 철학으로부터 구원하고, 그를 합리주의의 전통에 위치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합리주의는 비트겐슈타인이 비판한 합리주의라기보다는, 합리성을 초월한 영역에 대해 합리성을 견지하는 합리주의인 것 같다.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빌려 우리의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며, 어떻게 허위의식에 빠져 살아가게 되는지를 기술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내 친구가 그러했던 것처럼 농담으로 간지럽힌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못한다. 사실 라캉과 지젝은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조건이며, 우리는 그러한 환상을 살아가야 한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환상에 비판적 거리를 획득하는 (라캉식으로 말하면 '횡단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이며, 정신분석학 답게 매우 임상적인 대안인 것 같다. 그러나 뭔가 애매모호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수미일관하다. 그의 언어철학은 복종의 영역과 선택의 영역을 구별하고, 복종의 영역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묻는다. 그의 생각에, 우리가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아주 많은 부분을 아래에 깔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심리적으로 "우리 외부에 세계가 존재하며 언어는 그것을 지시함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언어를 사용하면서 "나의 외부에 세계가 존재하는가?"라고 묻는 철학자는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엔 '문법적 착각'이란 물병에 빠져버린 가련한 파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구획을 가르는 것은, 합리적으로 이해하기엔 매우 수월하지만, 또한 어떤 초월의 영역에 대한 탐구의 가능성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가끔 언어를 사용해서 언어 바깥의 것을 대면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자는 의사이지만, 우리는 가끔 시인으로서의 철학자도 필요하다고 믿는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젝이 보기엔 바로 이 명제가 비트겐슈타인이 공박한 "환자"의 증세에 해당한다. 지젝은 되묻는다. "어차피 말할 수 없는 것인데, 왜 당신은 침묵하라고 명령을 내리는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당분간은 두 개의 접근법에 모두 관심을 가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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