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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왕당파'와 '파시스트'

조회 수 1105 추천 수 0 2003.10.16 14:28:00
논란이 많은 글이었고, 사실 논란이 많이 일어나라고 쓴 글이다. 이런 종류의 글을 쓸 때에는 나도 이 글의 내용이 다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 이 직전의 시기에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읽었을 게다. '어설픈 지젝주의자'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진보누리에 아흐리만이란 아이디로 올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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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하나 마나

국민들은 국민투표를 바라고 있다. '재신임'이든 '불신임'이든 자신이 직접 선택하고 도장을 찍고 싶어한다. 이것이 노무현의 정치 술수의 탁월함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국민투표'를 철회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그들은 대중의 지지도를 외려 잃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국민투표를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서다. 기회비용을 따지면, 국민투표가 실시될 경우 노무현과 통합신당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막대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경우는 이 계산이 맞는 것 같다. 즉 그들은 국민투표를 저지하면 조금 잃게 되겠지만, 국민투표를 저지하지 못하면 많이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경우는 그리 확실하지 않다. 국민투표를 저지하면 그들은 한나라당보다 많이 잃게 될 것이다. 한나라당과 '원수'임을 만방에 선포하고 다니는 것이 지금까지의 민주당의 존재의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을 때의 '손해'는 함부로 예측하기 힘들다. 따라서 민주당은 한나라당처럼 이득에 따라 행동하는 게 아니라, 단지 '불확실성'이 싫어서 '확실한 손해'를 감수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이 에피소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수구세력을 '극우파'로, '파시스트'로 정의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극우파 한나라당에 대항하는 민주당은 손쉽게 '보수 우파'라는 인식명을 획득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홍세화가 들여온 '똘레랑스'에 따라 한쪽은 극복대상, 한쪽은 경쟁대상으로 정의된다. 이 패러다임은 비록 '진보세력의 비판적 지지'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절묘한 균형을 지킬 경우 적어도 작년까지는 유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두 개의 봉건주의 왕당파 정당과 한 개의 파시즘 정당의 대립을 보고 있다. 간편한 분석방식은 이제 역사의 퇴물로 사라질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서구적 의미의 파시즘은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대중의 열망을 자신의 이데올로기 안에 조직해내고, 그 결과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등장하는 것이 파시즘이다. 한국에서 이와 제일 비슷한 현상을 꼽으라면 '노무현'을 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노무현 개인이 히틀러나 무솔리니나 프랑코와 같은 지도자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파시스트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파시즘적 코드'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두 개의 파시즘

그럼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고 비판해왔던 '파시즘'이란 무엇이었나? 그것은 박정희가 수입해온 일본적 파시즘이었다. 일본의 파시즘은 일본 문화의 특수성에서 배태된 '유사 파시즘'이다. 일본 사회의 원래 모습에다가 인종주의와 군국주의를 덧붙인 것이다. 히틀러는 대중과 직접 만나지만, 천황과 신민 사이엔 수많은 권력장들이 매개자로써 존재한다. 박정희가 되고 싶어했던 것은 히틀러가 아니라 천황이었다.


비록 이 문화가 일제시대부터 이식되어 오기는 했지만, 한국인들에게 그리 잘 맞는 문화는 아니었다. 그래서 박정희 역시 '본의 아니게' 농촌에서 막걸리 마시며 인간적 매력을 증대시키는 '쇼'를 벌여야 했다. 그리고 그 '매력'이 체제를 유지시키고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그를 잊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반면 노무현과 노사모가 합작으로 만들어낸 파시즘 코드는 훨씬 더 서구적이다. 그것은 집단적 감동과 '참여'를 기반으로 한다. 진보누리의 존레넌은 이렇게 물었다. "개혁은 어디로 갔으며, 참여는 어디로 갔는가?" 이는 중요한 질문이지만, 노무현 지지자들을 당황케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개혁'은 왕당파와 싸우는 행위이며, 그들의 '참여'는 노무현을 지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여정부'다. 이는 스탈린의 세계에서 '노동자'가 나라의 주인이지만, 노동자가 되려면 먼저 노동조합과 당을 지지해야 하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다.  


노무현 지지자들이 만들어 낸 "국민의 힘"은 '생활 정치 네트워크'라고 한다. 과연 그들은 대한민국의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일상적'으로 정치를 한다. 매일매일 정치 생각만 하는 정치중독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정치이슈를 제기하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민주노동당의 학교급식조례 제정운동에 필적할 '생활' 이슈를 말하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나치 하에서도 독일 국민들은 매일매일 정치를 즐기는 '정치중독자'들이었지만, 한번도 생활이슈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치의 힘을 증대시키고 '독일의 적'을 찾아내서 처단하는데 골몰했을 뿐이다. 그들은 생활에서 이데올로기를 끌어내는게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생활화한다. 그게 그들이 말하는 '생활정치'의 어법이다. 바로 이것이 파시즘 코드다.


붉은 악마와 노사모

예로 든 "국민의 힘"의 사례의 경우는 이미 파시즘화가 심각하게 진행되었다고 보지만, 내가 단지 파시즘 코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노무현 지지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붉은 악마 현상에서 보여지듯 한국인들은 집단적 경험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파시즘으로 전화될 위험성을 경계는 해야겠지만 '일탈'의 쾌락을 그들로부터 빼앗아야 한다는 비판은 무리가 있다하겠다. 나 역시 노사모를 처음부터 문제삼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노무현 지지자들의 파시즘 코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증대하고 있다. 먼저 집단 내부를 볼 때 '감성적 통합'에 비판적 거리를 두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몇몇 사건들을 계기로 노무현 지지자들은 지적이고 시니컬한 사람들을 쫓아내는 데에 성공했고, 그 자리는 꾸역꾸역 파시즘 코드에 우호적인 사람들로 메꿔졌다. 나름대로 순박했던 "노사모"에서 더욱 조직적인 "국민의 힘"으로의 전환은 또한 어떠한가.


그래도 노사모를 긍정적으로 보고 싶다고?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 서구적 의미의 파시즘은 대중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므로, 비록 노사모가 독일제 파시즘 코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참여민주주의의 긍정성을 볼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본제 파시스트들, '왕당파'보다 훨씬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이 도대체 무엇에 '참여'했는지 생각해보라.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이후 그들이 무슨 이슈를 만들어냈던가? 아니다. 그저 대통령 뽑고 그를 옹호한 일 뿐이다. 그것은 '정치중독자' 이상의 폐해다. 정치중독자라면 대통령 레벨의 정치에 포박당해 있기는 하겠지만 대통령을 어느 경우엔 옹호하고 어느 경우엔 비판도 할 것이다. 하지만 노사모의 경우, '노사모에서 노감모로'라는 주장은 레토릭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버렸다. 대통령에게 힘 실어주기. "국민의 힘"은 그것을 '생활정치'라 주장하지만, 이는 앞서 말했듯 그들의 정치의식이 파시즘적임을 증명하는 사례일 뿐이다.


불신임?

그래서 나는 위험한 파시스트를 끌어내리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면 나도 좋겠다. 좌파들은 노무현이 불신임 될 확률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반겨야 한다. '불신임 조직화'는 불타는 짚단에 기름을 붓는 우스운 행위다.


만일 노무현이 불신임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한나라당 좋은 일만 시킨다"는 주장은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정답은 "통합신당 좋은 일만 시킨다"다. (물론 그들 중 누구도 아직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노무현의 행동이 어떤 면에서 사람들의 감성을 조직하는 행위인가. 말하자면 그는 대중들이 모두 보고 있는 장소에서 "나를 죽여라!"라고 선언한 셈이다. 이 때 그를 가장 크게 도와주는 방법은 물론 정말로 그를 죽이는 일이다. 이로써 노무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윤리적 영웅'의 위상을 얻게 되고, 대중들은 부친 살해에 대한 죄책감에서 살해자를 집단 학살한다. 한나라당의 일부가, 민주당의 절반 정도가 통합신당으로 달려갈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이전에 명확히 '재신임' 입장을 표명한 경우를 제외하면 궤멸될 가능성이 높다. 원래 대중들의 분노는 소수자에게 쏠리기 말련, 어쩌면 테러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통합신당은 직후의 총선에서 슬픔을 딛고 위대한 승리를 거둘 것이다. '아버지의 몸'을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법'을 영원하게 만든다. 카이사르(독재자)를 죽였더니, 세습되는 카이저(황제)가 탄생한다.


그러므로 '불신임' 운운하는 한심한 짓거리는 집어치워라. 그렇게도 역사를 모른단 말인가. 죽여라 할 때 진짜 죽이면 그가 죽는게 아니라 우리가 죽는다.


그리고 왕당파

왕당파들은 기를 쓰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막으려 한다. 조선일보의 문체는 기본적으로 아이를 달래는 어른의 문체다. 즉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데 세상은 엘리트들이 움직여야 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을 타격하고 국민들을 정치적 주체로 세운다는 점에 있어선 '파시스트'들도 기여하는 바가 있다.


대중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하는 세상은 왕당파들에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같은 세상, 천재지변이 일상화된 세상이다. 그래서 그들은 귀를 막고, 대중들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안정된 체계를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허위적이며, 내전의 상태에서 안정된 통합이 가능할 수 있음은 이미 로크가 그의 [통치이론]에서 제시한 바 있다. 우리는 왕당파들의 막힌 귀를 뚫어내고 그들에게 대중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줘야 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파시즘적 코드의 정치행위의 위험성을 지적해야 한다. 대중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치권에 요구해야지, 이데올로기적 동일시 상태로 특정 정치집단의 들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좌파들 역시 이데올로기적인 강박관념이 있어, 이들의 행위를 '모범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그들이 사회변혁의 주체로써 함량미달임을 증명하는 행위다. 왕당파와 파시스트의 대립 속에서 우리는 1. 대중의 정치참여 보장 2. '선동'의 정치에서 '설득'의 정치로라는 두 개의 원칙을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선 먼저 현재의 정국이 '왕당파'와 '파시스트'의 대립구도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누리논객들이 쏟아놓는 비현실적인 대안은 이 대립구도의 본질과 문제점에 대한 성찰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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