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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함성, 그것이 헌법?

조회 수 1266 추천 수 0 2004.06.07 00:58:00

도올 김용옥의 "민중의 함성,그것이 헌법!"을 비판한 글. 이글루스 블로그에 올렸던 글이고, 그래서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진보누리 누리카페에서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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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이 하는 소리는 나치 법철학자 칼 슈미트가 한 소리와 비슷하다고, 노정태는 말한다. 일단 옳은 얘기다. 그러니까 현재 스코어로 칼 슈미트=나치=나쁜 놈=도올 김용옥의 관계가 성립한다. 어디선가 진중권은 도올이 실정법과 자연법의 차이에 대해 모르고 있다고 핀잔을 줬다. 역시 옳은 얘기다. 헌법 : 민중의 함성=실정법 : 자연법?? 정말이지 듣다듣다 그런 소린 처음 듣는다. 그러니까 현재 스코어로 도올 김용옥=법철학을 모르는 분의 관계도 성립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았을까?


도올의 글에 찬탄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정말이지 그게 왜 나쁜 거야? 의회든 행정부든 법원이든 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는, 이름하여 '주권재민', 민주주의 국가인데, 왜 헌법이 '민중의 함성'이 되면 안 되는 것이지? 그 이유가 뭐여? 혹시 거기엔 민주주의를 시샘하는 지식엘리트들의 음모가 개입되어 있으며, 도올이야말로 '진정한' 석학이 아닐까? 물론 아니다. 그리고 그런 어법은 지식인을 혐오하는 파시즘의 어법이다. 지식인이라고 외계어 쓰지 않는다. 우리도 다 알아먹을 수 있는 이유다. 그래서 나의 트랙백은 바로 그 심오한 이유에 대한 단순한 고찰이 되겠다.


민주주의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민중의 지배'라는 뜻이다. 왜 국가를 민중이 지배해야 할까? 다름이 아니라 '피지배자'가 민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일치시키는 제도다. 나에게 명령을 내릴 권리는 내게만 있다는 것이다. 민중의 지배는 이것을 확장시킨 것이다. 고로 '민중의 지배'는 '민중에 대한 민중의 지배'다.


귀족사회:  
지배/피지배 = 귀족/민중 = 10/100 = 1/10 (피지배와 지배가 일치하지 않음)

민주사회:
지배/피지배 = 민중/민중 = 100/100 = 1/1 (피지배와 지배가 일치함.)


위 수식을 보면 민주주의는 자신의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00/100에서 1/1로의 변환에 주목해 보자. 100/100이 1/1과 같으려면, '개개인'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개개인'이 100명 모여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건 단순한 자유인의 집합일 뿐이지 '국가'라고 볼 수 없다. 만약 그들 100명이 만장일치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든다면, 사회의 규율이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역시 단 한 명의 반대로 붕괴될 수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아나키즘을 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철학자 볼프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는 칸트의 윤리이론의 핵심에 해당하는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과 막스 베버가 국가의 특징으로서 규정한 '권위'를 양립시키는 문제다. 그런데 이 양립은 불가능하다. 볼프는 이런저런 사례들을 제시하며 다수결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를 고발한다. 그 중엔 우리에게 낯익은 광경도 있다. 가령 어느 지역구 선거에서 한나라당 40% 열린우리당 37%, 민주노동당 10%의 결과가 나왔을 경우, 한나라당의 당선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의 숫자가 훨씬 많은데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이 당선된다. 이 경우 1순위 지망자가 많은 정당(한나라당)을 당선시킬 것인지, 비토세력이 가장 적은 정당(열린우리당)을 당선시킬 것인지는 그야말로 '제도 마음'이다. (결선투표제 유무에 달렸다.) 비슷한 이유 때문에 많은 회의에서 안건에 대한 찬반이 첨예하게 맞설 때, 어떤 안건이 통과되느냐는 대개 수정안이 발의되는 순서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정치철학의 근본을 탐구하려던 볼프는 아나키즘으로 돌아선다. 상식적인 견지에서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를 긍정하는 근거는 분명 볼프의 말대로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이다. 그러나 (다른 국가는 말할 필요도 없고) 어떤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그것은 국가에게 필수적인 '권위'와 양립할 수 없다. 민중이란 집단의 의사는 민중 개인과 별 상관이 없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은 노동자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어느 정당의 일당독재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는 개별 노동자의 삶과 무관했다. 100/100은 1/1로 나뉘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100/100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갈 수 있는 길 하나는 볼프가 그랬듯, 그리고 독재에 심정적으로 공감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민주주의 역시 다수의 독재, 혹은 대중의 독재에 불과하므로 다른 체제에 비해 우월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다른 길은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 혹은 '지배와 피지배의 일치'가 아닌 다른 부분에서 찾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으므로 후자의 길로 나아가자. 민주주의의 이상에 따르자면,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다. 그러나 저 이상은 실현될 수 없는 미망임이 드러났으므로, 서술을 현실적으로 바꾸어 보자.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다.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이 생산하는 것은 혼돈과 두려움밖에 없지 않은가? 바로 그것이 대답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혼돈과 두려움이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도 지배와 피지배의 일상적인 구조는 존재한다. 권력행사의 시기(선거)를 무한정 늘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화되고 조직화된 인간은 선거라는 권력행사의 장 속에서 철저하게 개인화되고 원자화된다. 정기적으로 혼돈과 두려움이, 모든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권력행사의 순간이 엄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권력행사의 내용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힘의 벡터의 움직임은 마치 스타크래프트 맵을 가득 채운 리버의 스크랩을 보는 듯하다. 스크랩은 구불구불 움직이며, 누구를 칠지 모른다. 열린우리당이 보수적이라는 이유로 민주노동당에게 표를 줬는데, 한나라당이 당선된다. 물론 이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이 불합리를 '해소'하려든다면 민주주의의 힘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열린우리당을 전략적으로 지지한다면, 열린우리당은 두려움을 잊게 되며, 따라서 언제까지나 한나라당보다 조금 더 진보적인 상태에 머무를 것이기 때문이다. 불합리와 혼돈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비밀이다. 다수결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지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또 누구에게나 불합리의 가능성을 속삭이기 때문에 지지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수가 될 가능성과 소수가 될 가능성을 가진다. 그래서 소수라는 이유로 좌절하지 않고, 다수라는 이유로 우쭐하지 않는다.


랜덤과 카오스에 기반한 이 음험한 힘을 제어하는 장치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말했다.  "감각경험에 있지 않던 어떠한 인식 내용도 지성 중에 있지 않다. 단, 지성 자체는 제외하고."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옹호자인 우리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다수결을 통하지 않는 어떠한 결정사항도 민주주의엔 존재하지 않는다. 단, 민주주의 정체(政體) 자체는 제외하고."


그것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보호와 인권의 옹호로 나타난다. 민주주의 체제가 보호되지 않는다면, 투표를 통해 위헌적인 독재정권을 선출했던 바이마르의 악몽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인권을 옹호하지 않는다면,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결의를 다수결로 채택하는 사태도 묵과할 셈인가. 보수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소위 '민중'의 변덕스러움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건강함을 지키는 보루다. 지역주의가 문제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어떤 지역 유권자들이 변덕을 부리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민주주의 체제 자체와 그 체제의 이상이었던 '도덕적 자율성'을 일부 보장하는 인권은 강제적으로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변덕스러움을 조장하고, 그 변덕스러움을 통제하는 민주주의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순결주의나 상대주의에 빠지게 된다. 탄핵의 절차적 정당성에만 논의를 소급하는 것이 순결주의요, 민주주의 정체를 구성하는 헌법에 대한 판단을 헌재에게 양도할 수 없다는 도울의 주장이 상대주의다.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의하는 사람들로, 그들이 다수 국민의 의사와 다른 행동을 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판사들은 국민을 대의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국민도 민중도 아닌, 민주주의 체제 자체, 그리고 그것을 명문화한 헌법을 대의하는 사람들이다. 헌법정신의 현현에 대해 압박을 가해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탄핵찬성자의 숫자가 많았다면 탄핵가결이 국민의 뜻이요 헌법이라고 주장할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탄핵요건이 심히 부족하다는 '법리적'인 판단을 '논리적'으로 내릴 수 있었단 말인가? 그래도 그네들의 헌법은 결코 쓰여진 적이 없고, '민중의 함성'이란 두리뭉실한 이름으로 영원히 미래에 남을 텐가?


나는 분명 민주주의 사회에 살며, 그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최소한 내가 정치체제를 분간할 만큼 철이든 이후부터는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였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것은 내가 횡행하는 엉터리 주장들을 비웃을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도올의 논리는 그 지지자의 숫자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 그는 민주주의를 모른다.


운명의 철문 사이에 시간의 씨앗은 뿌려졌고, 아는 자 알려진 자들이 물을 주었다. 민중이 우리의 헌장을 만들지 않는다면 모든 지식은 죽음의 키스일 뿐. 모든 인간의 운명이 바보들의 손에 쥐어져 있다니!


오오, 모든 지식은 죽음의 콧구멍파기일 뿐. 모든 인간의 감성이 바보들의 펜에 쥐어져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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