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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강철의 훈육관

조회 수 1212 추천 수 0 2004.05.31 03:16:00
이글루스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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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르상티망이 데카당스라는 이유로 싫어했다." 이 문장이 해독(?) 가능하다면, 당신은 니체의 취향에 대해 뭘 좀 아는 것이다.


'르상티망'은 '약자들의 원한'이란 뜻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윤리적) 강자로 단련하지 않고 강자들의 소유물을 증오하는 약자들의 경향성을 의미한다. 최근 동아일보에서는 몇번인가 노무현 지지자들이 부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 는 식으로 때렸는데, 대충 르상티망을 말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개소리다. 노무현 지지자들의 문제는 르상티망이 아니라 자신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 과잉이니까. 그들은 대개 중산층이고, '부자들'을 증오하는게 아니라, 자기들이 부자들보다 더 똑똑하며, 한국 사회를 이끄는 방법을 더 잘 알고 있다고 느낀다. 노무현 지지자들이 재벌보다 상대적 약자라고, 단결하면 무조건 르상티망이 되는게 아니다. 니체가 얘기하는 약자는 자신감도 없고 앞으로의 계획도 없고 강자들을 미워하기만 하는, 그야말로 뭣도 없는 '윤리적 약자'를 뜻한다. 니체는 적어도 수구세력에 대한 노빠들의 자신감은 좋아했을 것이다. 다른 부분은 어떠냐고? 그게 주제가 아니잖아. (내가 노빠 싫어하는거 다 알면서.) 그냥 생략하자.


'데카당스'의 사전적 의미는 '퇴폐, 향락'이다. 그것은 니체 철학에서는 "힘에의 의지"(흔히 '권력의지'라고 번역하지만, 최근 나오고 있는 책세상 니체 전집 번역자들이 잘못된 번역이라고 하더라. 독어 잘 못하지만 설명이 그럴듯해 그냥 믿기로 했다.)를 하강시키는 경향을 나타낸다. 아주 쉽게 말해서 흥청망청 마시고 노는 퇴폐/향락적인 행위는 뭔가 나의 생의 의지를 깎아먹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게 데카당스란 얘기다. 니체에겐 인간이 가진 힘에의 의지를 깎아먹는 건 그게 예술이든 종교든 다 나쁜 거다. 그가 바그너의 음악과 크리스트교를 '같잖게' 보는건 바로 그 때문.


하여간, 그래서 니체는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자는 발가락의 때로도 보지 않았다. 그것들은 언제나 약자인 척 이득만 얻으려고 하는, 윤리적 주체가 못되는 천한 것들이란 뜻이다. 니체에겐 "그런 건 모두 데카당!"이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것을 '괄호넣기'로 해석한다. 즉, 니체는 주체의 윤리학이란 측면을 보기 위해 사회학적 측면을 괄호 안에 넣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럴 법도 하다. 니체의 관심사는 주체의 윤리일 뿐이지, 사회학적 정의는 아니었으니까. 나는 니체를 윤리학자로 파악하며, 그의 윤리학에 꽤 관심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로마의 시민-귀족의 윤리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이며, 그 작업은 푸코로 계승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얘기하려는게 아니니까 이것도 생략하자.


핵심은 이러한 윤리학적 평가가 사회적 정당성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니체는 자신을 독일사회 구성원들의 '교육자'로 생각했다. 페미니즘과 사회주의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니체가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자를 '르상티망과 데카당스에 쩔은 천것들'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정당성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다른 문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 구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주류사회와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윤리적 영웅'이 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매우 합리적이라고 여기지만, 그건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 지고 넘어온 예수에게 가시관을 씌우며 "니가 왕이라니까 왕관을 씌워줘야지, 즐~ ^^ "이라고 했던 유대인의 심뽀를 연상시킨다. 그 정도 고생을 해야 인정해줄 수 있다는 더러운 심뽀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지뢰제거 시키자는 것도 비슷한 장면을 연출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니가 평화주의자라니까 지뢰제거해야지, 즐~ ^^ " 발목지뢰에 발이 날아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보며 그들은 그제서야 감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 진짜로 양심적이었구나!" 하지만 이미 발목은 날아간 뒤다.


예전에 만화가와 대여점에 대한 어떤 글을 보고 매우 분노했던 적이 있다. 나는 사실 대여점 문제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 친구가 만화가들을 윤리적으로 조롱하고 싶다면, 그거야 자기 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분노했던 이유는 그가 만화가들이 윤리적으로 모자라다는 이유로 대여점 문제에 대해 발언권이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는 논리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다. 다만, "네가 고생을 하지 않으면 권리를 가질 자격이 없다."는 심뽀의 발현일 뿐이다.


나는 그 심뽀를 '강철의 훈육관'이라 칭한다. 그 심뽀의 진리는 사회적 환경에서 나온다. 교육자는 피교육자에게 가르칠 것이다. "네가 투쟁해야 권리를 쟁취할 수 있단다." 물론 그건 진리다. 그러나 그건 개체의 입장에서, 현상적으로, 그리고 실존적으로 진리다. 인식의 영역에서 그건 전혀 진리가 아니다. 내가 투쟁을 해서 두발자유화의 권리가 '발생'한 것이 아니다. 나는 원래 그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 상황은 부당하다.


그러므로, "네가 투쟁해야 권리를 쟁취할 수 있단다."는 말은 부모가 자식에게, 교사가 학생에게, 그리고 사회가 사회구성원에게 교육적 의미로 말할 때에만 '진리'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그건 더러운 심뽀에 불과하다. 가령,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말한다. "네가 파업해야 임금을 인상시킬 수 있단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네가 투쟁해야 우리 관계가 평등해져." 정치인이 대중에게 말한다. "너희들이 난리쳐야 내가 깨끗해져." 대중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이 개고생하며 난리쳐야 우리가 인정해줄까 말까야." 마지막으로, 대중이 만화가에게 말한다. "씨발 너희들이 졸라 열심히 싸워서 권리를 주장해야 대여점을 없애주든지 할 거 아니야!"


나는 이런 개소리들을 들을 때마다 '강철의 훈육관'이라고 되뇌이며, 그들의 주장을 저주한다. 그건 상대방을 자신과 평등한 하나의 주체로 보는 심뽀가 아니다. 자신을 편안한 안락 의자에 앉혀놓고, 상대방에게 노력봉사를 요구하는 더러운 심뽀다. 이런 심뽀가 다수결과 민주주의란 이름 하에 통용되는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그 개소리들의 근간에는 '잡초 이데올로기'가 있다. 한국인들은 잡초를 너무나 사랑한다. 20세기의 고난에서 살아나온 한국사회는, 그리고 대다수 한국인들은, 원래부터 잡초다. 황무지 평원에서 보살핌 없이 잘 자란다. 그러나 사회는, 황무지가 아니라 온실이다. 아니, 온실이 되어야 한다. '사회계약론'이라고, 학교에서 다들 배웠잖은가? 화초가 온실의 온도와 비료의 상태에 대해 불평함은 마땅한 권리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선 불평하면 옆에 있는 잡초들이 혀를 끌끌 찬다! "쯧쯧....배가 불러 가지고...."


잡초는 꽃을 피우지 못한다. 절대절명의 상황에서는 생존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도 벅차기 때문이다. 그러나 햇빛 잘 들고 비료 팍팍 주는데도 꽃을 피우지 말자고 하는 건 바보다. 곳간에서 인심나며, 부르주아들이 문화를 만든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국민소득이 1만불이 되어도 마인드는 300불이다. "고상한 것, 그런건 치열한 생존경쟁에 맞지 않아!" 그래서 세계정복을 할 때까지 무한경쟁의 이데올로기를 증폭시키자는 것인가? 노조가 제 밥그릇 찾아먹는 거 욕하는 것도 '강철의 훈육관'의 변형이다.


한때 유행했던 김형태인가 하는 문화평론가의 20대에 대한 질타의 글을 보고 내가 황당했던 것도 그때문이었다. 문화는 꽃이다. 그것은 안락함에서, 고상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대중문화를 그렇게 아득바득 잡초처럼 추구해야 하다니! 나는 대중문화에 뒷골목 정서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게 문화의 전부가 되어서야 곤란하지 않은가. 그리고 뒷골목 정서는 적당히 엉터리같은 면이 있어야지, 그렇게 꽉 조여서야 곤란한 것이다.


문제는 그 글에 열광한 이들이 20대였다는 것이다. 20대가 멍청하다면 김형태의 주장이 옳기 때문에 멍청한 것이 아니라, 그 글에 열광했기 때문에 멍청한 것이다. 나는 풍요로운 산업사회에서 태어난 20대들조차 '잡초 이데올로기'에 이끌리는 걸 보고 황망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나태한 삶을 정당화하지 못할 정도로, 그 정도로 바보인 것이다. 그런 바보들이라면 정말로 김형태 말처럼 고생이나 이빠이 하는 것이 그들을 위해서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잡초의 영혼을 가지고 꽃 흉내를 내어서야 쓰겠는가.


김형태의 글 역시 '강철의 훈육관'의 일종이라는 것은, 많은 이들이 단지 '수사적 오버'로만 바라볼 어이없는 인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대의 나태함이 경제위기의 원인이라는 것, 말이 되는가? 20대가 모두 김형태의 바램처럼 아득바득 산다면, 대한민국은 망한다. 소비를 누가 하는데. 수출만 해서 국민소득 1만불 국가의 경기가 돌아갈 것 같은가? 20대가 윤리적으로 멍청이들임을 지적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핵심은 그들이 윤리적으로 또라이라는 것과, 그들이 실업자라는 사실에 별다른 연관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 어느 젊은이들이 김형태가 바라듯 '잡초'처럼 산단 말인가? 찾고 싶다면 국민소득 1천불 이하 국가에서 찾아라. 선진국애들은 요트타며 놀아도 취직된다.


'강철의 훈육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어떤 굴절된 심성을 보여주는 외상의 핵인 것처럼 보인다. 참으로 많은 현상이 그것으로 설명되며, 세대와 지역을 넘어 수많은 이들이 그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있다. 한국인들에게 윤리를 가르치려면 반드시 '강철의 훈육관'과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과제를 몇이나 인식하고 있을까?


괄태충

2011.07.30 15:48:29
*.30.45.204

한윤형씨 글을 읽기 전엔 명확하게는 몰랐는데, 읽고 나서는 인식하게 됐습니다. ㅋㅋ 여기 몇 중에 하나 추가염. 그리고 몇몇 더 있겠죠. 근데 이택광씨 말하길 한국에서 인문학 책 내면 3천부 이상 팔리면 많이 팔린걸로 친다는데, 인구 5천만에 3천명이면 만분의 일도 안되잖아....

괄태충

2011.07.30 15:49:42
*.30.45.204

http://rmflarmfla.egloos.com/1857244
↑혹시 이거 아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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