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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강준만의 노무현 비판을 보고

조회 수 1507 추천 수 0 2004.08.26 00:47:00
미디어몹 블로그에 올렸던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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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은 <한국현대사 산책>이라는 전무후무한 명저를 남기고 있으면서도 (아쉽게도 사서 정독한 건 70년대 편밖에 없다. 언제쯤 볼 수 있으려나.)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이 식지도 않았으며, 분석력 또한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그의 글 중 민주당을 옹호한 일부 부분을 내세워 그의 글 전체를 매도하는 노빠들의 짓거리는 한심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강준만 전담마크맨 역할을 하게 된 서프라이즈의 김동렬은 강준만의 주장이 인터넷에 떠돌기 시작하자마자 장문의 글을 써서 서프라이즈 대문에 올렸다. 김동렬 글은 대개 내용이 없지만, 이번엔 김동렬 특유의 개그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정색하고 쓴 글인데도 전혀 내용이 없었다. 마치 과거 이인제의 연설처럼 의미없는 기호가 무언가를 중심으로 공회전하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공회전의 축은 "노무현은 역사가 선택했다."라는 허무한 문장이다. 김동렬은 그 글에서 헤겔적인 용어들을 갖다 썼지만, 역사의 선택과 그 선택된 승자는 무슨 짓을 해도 되도록 용서해달라는 논리(?)를 가졌던 역사철학이 있다면, 스탈린주의 역사철학밖에 없다.

노빠들은 글을 눈으로 읽는 것들이 아니라 코로 읽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강준만의 글에 분노하리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비율이 좀 심하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오마이뉴스에 올라온 전문을 보고 나서야 의문이 풀렸다. 원문은 인물과 사상측 보도자료와 프레시안의 보도에 비해 훨씬 더 '민주당의 억울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프레시안의 보도는 강준만의 글에 대한 '우호적인' 인용이다.) 이 글은 그의 관점이 사뭇 민주당 편향적임을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 그러나 강준만이 말했듯 민주당의 부활은 거의 바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으니, 다시 지속적으로 정치평론을 쓴다면 훨씬 더 좋은 글들이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강준만이 제시한 노무현 정권의 현상과 이에 대한 비판에 대해 매우 공감한다. 그동안 내가 인터넷에서 말해왔던 것들과 비슷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매우 반갑기까지 하다. 한나라당 역시 정치적 실체로 대우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조중동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조중동의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이라는 주장, (나는 언젠가 "조선일보는 노무현 지지자들의 일그러진 거울이다."라고 썼다.) 노무현 지지자들의 흑백논리에 대한 비판 등은 그간 '개혁세력'임을 자임하는 이들에게 꺼냈다가는 "너 조선일보 보냐?"라는 대꾸를 들었을, 금기시된 주장이었다. 물론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이 그런 비판을 많이 하고 있지만, 민주노동당의 경우 기본적으로 그 부분이 아니라 "어차피 우파 정당이니까..."라는 정조가 우선이기 때문에 얘기가 다르다. 노무현 정권이 이념이나 정책과 상관없이 정치를 아주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드넓은 인터넷에서조차 나를 포함해 몇 사람 안되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강준만의 비평은 환영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강준만이 노무현 정권의 '현상'의 원인을 민주당 분당이라는 '원죄'에서 찾고 있는 것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민주당 분당이라는 행위에 깔린 전제들과 최근 노무현 정권의 행위의 전제들이 같은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만약 노무현이 강준만이 말한 바 '어설픈 마키아벨리스트'가 아니라 좀더 제대로 된 마키아벨리스트였다면, 민주당 분당이라는 헤게모니 투쟁과 별개로 일반정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는 노무현이 마키아벨리스트가 아니라 자기 네러티브를 굳게 믿는 확신범이라는 것이며, 헤게모니 투쟁에만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라는 것이지, 민주당 분당이란 사건 자체가 모든 상황을 촉발시킨 원인은 아니다. 나는 강준만이 스스로 민주당 분당이라는 사건에 부여하고 있는 가치 때문에, 그 사건의 위상마저도 과대평가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글에서도 민주당 문제가 아니라 노무현이 조중동의 음모에 휘둘리는 '실례'가 무엇인지를 조목조목 짚어주었다면, 좀더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민주당 분당이라는 사건에 대해서는, 나 역시 열린우리당쪽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당시부터 "개혁당을 서서히 키우거나, 민주당을 내부적으로 개혁하는 것, 혹은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면서 서로를 견제하는 것이 대안이다. 열린우리당이란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것은 대안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집권여당을 노리는 개혁신당의 덩치로는 개혁당의 당원민주주의의 포맷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하다못해 개혁적인 인물로만 공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열린우리당은 스스로의 명분을 위해 전자를 어영부영 받아들이다 보니 후자는 아예 시도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버렸다. 개혁적 인물에 대한 공천은 김대중처럼 어떤 지역구에선 공천장사를 하면서 몇몇 인물을 통해 개혁성향을 드러내고 싶을 때 오히려 화끈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상향식 공천'은 오히려 2류 지역유지들을 위한 등용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누리 게시판에서 진중권과 loser 등은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은 계급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러나 '지역주의 타파'라는 점에선 열린우리당에 한표를 던질 수 있으며, 그러므로 열린우리당이 상대적으로 더 낫다."라는 논변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들은 흔히 강준만이 착각하듯, 전통적인 민주노동당 지지자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민주노동당의 정서는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투쟁에 '무관심'한 것이다. 그들의 관심의 이유는 그들이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했던 좌파, 민주당 지지자들과의 헤게모니 투쟁에 진절머리를 낸 좌파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생각을 '심정적으로는' 이해한다.

만약 강준만이나 고종석이라면 열린우리당의 전략이 호남을 배제하고 영남표를 얻는 것이라는 점을 들어 그들의 견해를 논박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논변을 펼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내파의 방법을 택했다. "지역주의가 나쁜 이유는 '출신지역'이 정치인을 평가하는 데에 올바른 기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은 곧 '출신지역'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정치인을 평가해야 한다는 뜻도 된다. 그렇다면 '지역주의 타파'는 "지역주의 타파"라는 구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출신지역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기준'을 제시하고 그 기준이 받아들여질 때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이 "지역 대신 계급"이라고 생각하듯 말이다. 그런데 열린우리당이 내세우는 '개혁'이란 레토릭은 그 구체적인 내용이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적인 기만이며, 실제적인 행태로도 열린우리당이 민주당보다 '개혁적인' 행위를 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열린우리당의 포지션이 의미를 가지려면 적어도 민노당 > 열린우리당 > 민주당 의 위치에 열린우리당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열린우리당은 말로는 그 점을 열심히 강변했으나, 행동으로는 전혀 그 점을 증명하지 못했다.) 열린우리당이 '지역주의 타파'에 일조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 논변은 민주당 분당의 본질이 밥그릇 싸움이라는 강준만 교수의 주장과 그리 먼 거리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민주당 분당이 가장 사악한 행위이며, 이 행위의 사악함을 지적하는 것이 거대담론에 매몰된 인권을 구출하는 개인주의자의 선택이라는 강준만 교수의 '오버'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실은 비판적지지 담론이야말로 거대담론의 개인에 대한 억압이라는 점을 지적해도 될 것이나, 그점은 일단 제외하도록 하자. 강준만의 말이 옳다면 꼬마민주당에 대한 김대중의 행동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김대중과 노무현의 차이가 있다면 김대중이 솜씨좋게, 단칼에 꼬마민주당을 죽여준 반면 노무현은 민주당을 뒤지게 두들겨 팬 이후 뒤주에 집어넣어 굶겨죽이는 중이라는 것뿐이다.

나는 그 차이는 두사람의 능력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왕에 나쁜 짓 할 바에야 능력이 있는 정치인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것과 노무현이 (그 행위만으로) 더 사악하다고 판단하는 것과는 별개다. 그건 노무현의 친미주의가 '가장 한심한 친미주의'일망정 '가장 사악한 친미주의'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사실과도 통한다. 노무현의 문제는 미국에게 굽실거렸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통령들이 뒷구멍에서 하는 짓을 대놓고 했다는 것이며, 그러면서 자기가 솔직하고 투명하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한심하다고 불러야 할 일이지 사악하다고 불러야 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분당과정에 대한 강준만의 기술도 나의 기억과는 조금 다르다. 강준만이나 고종석은 유시민 등이 애초부터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그렇기도 할 것이다. 나는 유시민이 개혁당 처음에 만들 때 "나중에 이 정당, 개혁신당에 꿀꺽 바치고 지분 타내야지."라고 짱돌굴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 떠오르면,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 희대의 벤처사기꾼을 처벌할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해서도. 그러나 존재한다고 확증되지도 않은 열린우리당의 시나리오가 눈앞에 분명히 존재하는 민주당의 무능을 덮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손석희가 탄핵 이후에 적절히 말했듯, 열린우리당의 시나리오를 말하는 이들에게 시민들이 돌려줄 수 있는 대답은 이거 하나 뿐이다. "알면서 왜 그러셨습니까."

열린우리당은 강준만의 생각처럼 처음부터 '강자'의 입장에 있지 않았다. 강준만이 파르르 떠는 '인격살인'이라는 것도 열린우리당이 약자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 그들이 김대중처럼 솜씨좋게 민주당을 피말릴 수 있었다면 그런 쓸데없는 일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민주당이 처음부터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면, 과거 국민회의로 갈아탔을 때처럼 금세 그들 중 대다수가 배를 갈아탔을 것이다.

열린우리당 맴버들은 처음에 후단협 핵심맴버에 대한 책임묻기부터 시작했으며, 이 부분은 정당한 것이다. 강준만 교수는 후단협 맴버의 기회주의가 '용감한 기회주의'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 용감한 일이라면 책임도 용감하게 지는 것이 맞다. 어차피 원칙에 어긋난 일 아닌가. 그런데 그 몇 명 처벌하는 것도 싫다고 우기다가 구주류와 신주류의 전면전으로 비화된 면이 있다. 강준만이 억울해하듯 시민사회 진영에서 민주당에 대한 옹호가 거의 없었던 것은 호남에 대한 편견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비록 열린우리당 맴버들의 행동이 '올바른' 것은 아니었지만, 이에 대한 민주당의 대응을 통해 호남의 저 항적 지역주의에 기생하여 먹고 살던 호남 토호들의 실체가 너무나 명명백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강준만의 '소설'에 나오는 가냘픈 여성으로 보기에는 배때기에 기름기가 너무 가득했으며, 난닝구 조직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

탄핵 사태의 원인이 심리적인 것이라는 강준만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심리적인 원인이 정치적 판단을 면책시키지는 못한다. 기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노무현의 민주당 분당조차도 심리적인 것이다. 노무현 입장에서 소설을 쓴다면 심지어 대선후보가 된 다음에도 민주당에서 얼마나 억울한 핍박을 당했는지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애석한 것은 강준만 교수가 체계화시킨 '약자 신파'의 정조를 열린우리당이 너무나 유효적절하게 써먹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약자다. 그러니 양비론은 불가!"라는 텔레토비 수준의 논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정당한 비평이 가로막혔는지 모른다.

나는 만일 강준만 교수가 자성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오히려 '상대적 진보'를 '약자'와 연결시키는 그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한다. NL운동권들이 강준만 교수를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는 그 '약자'의 위치에 '북한'을 놓아두고 온갖 (자기들에게) 편리한 논변을 다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쪽이 약자이니까 더 차분히 들어보고 판결내려야 한다는 건 옳다. 그러나 약자라는 사실이 벼슬은 아니다. 우리가 '올바른 판단'이라고 말할 때는 이미 약자를 약자가 안되도록 조정하는 판단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 그저 '올바른 판단'을 내리면 되는 것이지, 다른 무언가가 필요할 이유가 없다. '약자 신파'는 아무리 잘봐줘봤자 '정의'의 하위가치로써나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 얘기가 샜는데, 핵심은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민주당의 행위가 열린우리당에게 손쉽게 정당성을 부여해줬을 만큼 문제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준만 교수는 그때부터 열린우리당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었지 민주당에 대해선 너무나도 관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강준만 교수의 선의에 대해 오해함은 그 때문이다. 민주당이 추진한 '탄핵'에 대해서도 강준만의 시선은 너무 온정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강교수의 '소설'의 내용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은 이미 위에서 지적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그만 생략한다.

이 모든 반론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서 말했듯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보여준 열린우리당의 행위와 현재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행위를 인과적으로 바라보지는 않기 때문에, 비록 전자에 대한 강준만 교수의 서술이 조금 의심스러울 지라도 그 점이 후자에 대한 강준만의 빛나는 비평을 덮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노빠들의 얘기는 전자가 의심스럽기 때문에 후자도 오류라는 것이다. 혹은, 강준만이 후자에 대해선 별다른 실례를 제시하지 못했는데, 이것은 이 비평이 전자에 대한 강준만의 감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강준만 교수가 이런 비평을 이겨내려면 계속 글을 쓰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강준만은 아직도 강준만이기 때문에, 비평을 계속하는 것을 망설일지도 모른다. 강준만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노선과 원칙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 누구건 그 어떤 차별화도 없이 전투적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자세가 있을 수 있겠다. 어제까지 뜨거운 연대의식을 공유한 동지였다 하더라도 오늘부터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면 그 사람을 <조선일보>처럼 대하는 자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자세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으며 앞으로 그렇게 살 뜻도 없다. 나는 그런 자세가 공사(公私) 구분에 엄격한 것이라거나 ‘성역과 금기’가 없는 진정한 비판정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도취일 것이다."

애석하게도, 진중권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악의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이 부분에 대해 나 역시 이렇게 대답해야겠다. "(강준만과 같은) 그런 자세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으며 그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런 자세가 담론의 맥락적 효과를 충실히 고려하는 것이라거나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는 진정한 비판정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지식인의 자세라기보다는 정치인의 자세일 것이다." 비록 사회참여지식인이 어느 정도의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일지라도, (임지현처럼 너무 순진해서 자기가 무엇에 이용당하는지도 모르면 곤란하기 때문에) 강준만 교수가 (남들에게도) 요구하는 정치력은 너무 엄격하고 사람들의 자유로운 의견개진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준만이 평소에 진중권에게 이견을 가지는 부분을 그때그때 반론했다면, 강진논쟁이 그렇게 파국적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진 선의적 해석을 하다가 임계점을 넘으면 다 쏟아버리는 강준만식 정치를 노무현에 대해서도 적용할 것인가. '득'과 '실'을 계산하고 있었다는 강준만 교수의 서술을 보면서, 물론 당연히 계산해야겠지만 너무 오래 계산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비판이 의미를 가지려면, '평소'에 하는 것이 맞다. 그 과정에서 강준만의 논변을 조중동이 크게 보도해줄는지도 모르지만, 그 사실 자체로 강준만이 그르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강준만 교수는 좀더 적극적으로 노무현을 비평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강준만은 진중권이 히스테리 환자로 보여 하찮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추론을 딛고 무례를 범하자면, 강준만은 그 반대로 강박증 환자라고 볼 수 있다.

그건 흉이 아니라 두 사람의 힘의 원동력이다. 히스테리가 없는 진중권이 그렇게 순발력 있는 정치평론을 쓸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며, 강박증이 없는 강준만이 그토록 철저한 자료수집으로 비판에 임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준만의 오랜 독자로써, 노무현 비판은 그 지지자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인만큼, 꾸준하고 신중하게 비판에 임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내가 너무 지나친 것인가?

강준만 교수의 컴백을 축하드리며, 마지막으로 책을 사지도 않았으면서 긴 비평을 남긴 최악의 독자가 된 나 자신에 대해 용서의 말씀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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