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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일본은 없다"와 한류열풍

조회 수 1766 추천 수 0 2005.02.12 02:01:00
카이만이라는 아이디도 정하지 못한 그는, 군인이었고, 단지 훈련병이었다.
하지만 이 글은 내 군생활 동안에 쓴 글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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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없다 1 상세보기
전여옥 지음 | 푸른숲 펴냄
일본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일본 특파원 시절의 체험을 바탕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의 실체를 오기에 찬 한국인의 시선으로 풀어쓴 저서.


금세 30만부가 팔렸던 <일본은 없다>가 출판된 것은 1994년, 당시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반일·민족주의자로서 그 책에 열광했던 소년과 군대 안에 있는 나 사이의 11년간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유는 그것을 둘러싼 문화현상이 미래에 발생할 하나의 사건을 예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미래의 사건을 격발시킬 방아쇠는 '한류 열풍'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다시 11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내가 <일본은 없다>에 열광한 이유는 단지 일본이라는 국가가 미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어른'들이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장점, 국가나 회사 등의 조직에 개인을 온전히 귀속시키고 무서울 정도의 결속력을 발휘하는 생활 방식이 싫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것을 보고 좋다고 박수치는 놈들이 싫었다. <일본은 없다>는 내가 기억하는 한에선 “그런 식의 삶은 가능하지도 않고,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좋은 게 아니다.”라고 말해준 최초의 책이었다.


이런 식의 의미를 따지는 데엔 저자의 존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유재순이 일본에서 출판한 <하품의 일본인>의 한국어판을 읽었고, 전여옥이 그녀의 원고를 그대로 들고 갔다는 유재순의 주장이 꽤 신빙성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법적 공방은 이 책을 둘러싼 문화사회학과 큰 상관이 없다. 더 재미있는 일은 만일 그 원고가 전여옥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과연 그러한 포맷으로 출판되었을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하품의 일본인>에서 느껴진 유재순은 전여옥보다 훨씬 더 사려깊고 균형잡힌 사람으로, <일본은 없다>와 같은 센세이셔널한 기획을 전여옥처럼 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었을 것 같지 않다.

하품의 일본인 상세보기
유재순 지음 | 청맥 펴냄



<일본은 없다> 이후 한국인은 하나의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그 책의 뒷표지에 붙어있던 광고문구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일본’이라는 욕망의 문을 열어제꼈을 때 한국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그 사실에 분노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얘기하자면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던 ‘일본’의 이미지는 실제의 ‘일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한국인들의 욕망의 투사였던 것이다. 그 욕망의 정체는 (선진국과) 일본을 따라잡고 추월하고 싶다는 것이었고, 그 과업을 위한 방법으로 선택된 것이 바로 ‘집단주의’였으며, 그러한 집단주의의 성공의 표본으로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잡기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행복해지지 못했다고 느꼈을 때 그 ‘허구의 정체성’은 깨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없다>의 상업적 성공은 그 허구의 정체성이 깨지면서 생긴 파열음이었다.


물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이라는 문 뒤에 정말로 아무 것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거기엔 한국인들의 ‘따라잡기’ 욕망이 있었고, 바로 그것이 ‘일본’이라는 문을 성립시키는 조건이었다. 욕망이야말로 욕망 자체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한국인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에 의해 왜곡된 일본의 ‘상’이 실제의 일본과 별 관련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을 ‘일본’에 돌렸다. 모든 걸 만들어 낸 것은 그들의 욕망 그 자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것 역시 그런대로 하나의 진전이었다. ‘일본’이라는 허구의 정체성에 연연하지 않게 된 한국 사회는 4년 후인 1998년 김지룡의 <나는 일본 문화가 재미있다>를 통해 한국인들이 적어도 일본 대중 문화를 흔쾌히 수용할 만한 주체성을 확립했음을 천명한다. 다시 4년 후인 2002년 6월 한국의 젊은이들은 “우리는 4강, 일본은 16강(싱글벙글)”이라는 단순한 도식 속에서 일본에 대한 해묵은 콤플렉스를 거의 극복해 낸다. 오늘날에도 과거사 문제 등 양국간에 문제는 많지만 그 정도 투닥거림은 ‘이웃나라’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일상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의 일본 콤플렉스는 앞으로도 점점 더 약화되어 갈 것이다. 이미 ‘일본식 성공 신화’보다는 ‘일본형 불황’이라는 말이 더 빈번히 쓰이는 시대가 아닌가.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 특히 중국의 ‘한류 열풍’이 이러한 한국의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최근 중국에서는 “한국을 배우자”는 내용의 책이 출판되어 인기를 끌었다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비교·대조하는 한국인의 장점과 중국인의 단점의 내용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저자는 한국인들은 애국심이 강하고 단합이 잘 되는 반면 중국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한국인은 모래알, 일본인은 진흙”이라는 우리의 오랜 레퍼토리의 리바이벌인 셈이다.


그런데 과연 한국은 중국보다 더 집단주의가 강한 사회일까? 그런 부분이 있기도 할 것이다. 특히 ‘붉은 악마’를 보면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 게다. 그러나 다른 많은 부분에서 한국은 중국보다 훨씬 개인주의적인 사회이며, 민주주의 정치 문화를 중국보다는 훨씬 더 체화하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부분이 훨씬 더 본받을 만한 점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은 그 점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는 것은 한국이 아니라 ‘단합된 중국인이 선진국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는’ 중국인들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한류열풍’은 이제는 한국 사회가 타국에게 ‘환상의 스크린’을 제공할 정도로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다. 그러나 그 뒤에 올 것은 과거 한국이 그랬듯 “한국은 없다!”는 아시아인의 외침일 뿐이다. 그 외침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한국의 국제적 위치를 결정할지도 모른다. 오직 ‘미국’만을 ‘국제사회로 통하는 다리’, 아니 ‘국제 사회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섬나라 한국이 아닌, 아시아라는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의 대한민국의 위치 말이다. 그들의 외침을 너무 슬프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환상’과 ‘환상의 부정’을 모두 거치고 넘어선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그들과 사귈 수 있는 권리를, 아시아인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얻을 테니까. 그 권리를 원한다면 우리는 ‘한류’를 우리의 과거 속에서 바라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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