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서평: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조회 수 2258 추천 수 0 2005.01.12 15:27:00

알라딘과 진보누리에 올린 서평. 지금보면 어떤 부분은 무슨 소리 한 건지 나도 잘 이해가 안 간다. 참고로, 더럽게 길다.
---------------------------------------------------------------------------------------------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상세보기
김상환 지음 | 창작과비평사 펴냄
철학사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헤겔 이후의 사상사적 지형도에서 가장 중요한 이정표는 니체,프로이트,맑스이다. 20세기의 유럽사상사는 이들이 일으킨 지각변동,그 융기지반의 경사면에서 펼쳐쳤다. 현대의 인문적 전통을 이루는 다양한 사조들,주류,지류,하천들은 많은 경우 그 세 봉우리의 계곡으로부터 흘러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 봉우리가 현대사상사에 대한 지형학적 탐구에서 일차적 측향의 대상이





(나는 한국말의 외래어 표기법을 무시하는 ‘원음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원음주의를 따르고 있다. 아마도 <창작과 비평>의 편집원칙인 것 같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책을 사본 이의 예의로 이 서평에서는 그들이 적어 놓은 대로 표기한다.)  


1.
이 책이 출간될 때 나는 책의 저자인 김상환 선생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은 후반기 강의의 교재로 쓰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일종의 자체휴학을 하게 되었고, 그후 이 책은 서점에 갈 때마다 매번 "나중에 사야할 책"의 목록에 오르곤 했다.


나의 자체휴학은 분명 선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고 그 점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하지만, 오늘의 나는 이 책을 읽는 시기가 2년반 정도 유예되었다는 사실을 환영한다. 그때 이 책을 보았다면, 나는 생경한 어휘의 그물에 포획당해 어쩔 줄 몰랐으리라.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김형효, 인간사랑, 1990)은 적어도 라깡을 이해하기엔 전혀 좋은 책이 아니었다. 나의 경우는 그 책을 읽고는 구조주의조차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남들이 좋은 책이라고 하는 책을 보고 이 모양인걸 보면, 나의 인식체계는 그 책의 것과 대단히 어긋나는 모양이다. 하여간 요는 지젝과 핑크를 경유해 읽은 라깡의 경험이 이 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그 경험은 유예된 시기 동안의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후기 라깡을 이해하고 나면 매우 쉽게 읽힐 수 있는 책이다. 쉽게 읽히지만, 과거의 독서경험을 정리해주며, 그 독서경험을 어떤 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침을 주는 책이다. 아마도 이 책은 한국어로 쓰여진 철학책 중에서 수준만으로도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다루고 있는 사조(思潮)의 희소성과 현대성까지 계산한다면 거의 최상급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별을 네 개만 주는 이유는 이 책의 저자가 그 이상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책에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대개의 철학자의 책이 그렇듯 여기저기 발표해 놓은 논문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가끔 내용상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쏘쒸르의 언어학에 대한 내용설명의 중복은 조금 심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 부분인 제5부에서 책은 다시 새로운 얘기들을 시작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볼 때 지루하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은 잠깐 밖에 없다. 이 점 또한 찬탄할 만하다.



2.
책의 의의는 저자의 말에서부터 찾는 것이 좋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외래성의 극복보다 먼저 와야 하는 것이 낙후성의 극복이며, 서양의 극복보다 더 시급한 것이 동양의 자기극복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 책에 등장하는 저자의 독창적인 '계사존재론'과 비서양인의 입장에서 철학하는 처지에 대한 고민 등은 부차적인 것이다. (분량으로 봐도 그렇다.) 핵심은 탈근대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탈구조주의가 계사존재론이나 그러한 고민까지 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생동감 넘치는 의미를 담지한다는 것을 이 책이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탈근대론의 의미를 제대로 제시한 개설서라는 것이다. 탈근대론이 어떤 의미에서 필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써먹을 수 있는지를 제시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낙후성의 극복을 위한 조건일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 수용된 탈근대론은 의의는 인정받되 의미의 부분에선 의구심을 피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성중심에서 감성에 대한 고려로, 동일성이 아닌 다양성으로, 철학중심의 진선미에 대한 통합이 아닌 예술중심의 진선미의 통합으로, 등등의 레토릭은 근대성의 폐해를 지적하고 보완한다는 의의는 있지만, 탈근대론이 무엇을 통해 철학사의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엔 역부족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보편적 이성의 역사에 대한 반동으로, 일시적인 유행으로, 다시 새로운 이성을 통해 통합될 무언가로 비칠 수도 있었다. 헤겔 이전의 낭만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진리의 정치성을 주로 논급한 저자의 전작인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역시 그 점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책에서도 리오따르의 "탈근대는 근대에 대한 다시 쓰기"라는 말을 통해 다른 식의 이해가 언급된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이 이 책에선 가장 중요한 줄기다. 저자는 반복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탈근대는 근대성의 구조에 속하되 다만 근대성 자체에 대하여 아직 사유되거나 의식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탈근대는 근대적 조직화 과정의 산물이자 그 조직화된 구조의 징후이다."(p270), "탈근대는 근대성이 아무리 조여도 새어나오는 것,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어떤 것에 있다." "탈근대는 근대성과 하나의 구조,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동일한 구조에 속한다."(p318)


이점이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탈근대 철학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보자. 가령 구조주의자들은 "주체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푸꼬가 <성의 역사> 3권에서 돌연 '자기에의 배려'를 들고 나온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없는-주체'는 분석을 통해 사라질 수 없는 존재다. 그렇기에 그것은 '환상'이지만, 또한 라깡적 의미의 '증상'이라 부를 만하다. 또는 데리다적 의미의 '해체 불가능자'라고 불릴 수 있다. 이 해체가 불가능한 부분은 이론 체계 내에 있는 비이론적인 요소이며, 우리는 이 부분을 인식함으로써 이론 체계가 성립된 흔적을, 그것을 그것의 바깥과 구별짓는 최초의 근거를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주체가 없다"고 말하는 데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주체의 허위성을 인지하면서도 주체를 안고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탈구조주의자들이 하려는 일이며, 그런 의미에서 탈근대 철학은 근대 철학의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계승하는 철학이 된다. 구조주의의 계보학과 역사학의 작업을 받아들이면서도 모든 것을 역사적 관점으로 환원하여 무화시키지는 않는 철학, '단절'의 철학이 아닌 '재서술'의 철학이 되는 것이다.


인용된 저자의 문장들은 탈근대가 근대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을 더 높은 의미에서 더 넓은 범위로 포괄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탈근대는 이론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이론이 무력한 지점에 대한 모색이다. 탈근대는 그 관점을 견지한 재서술을 통해 의미를 발생시키며, 이를 통해 철학사에 남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사조이다. 이 점을 인식한다면 단순한 상대주의나 편리한 회의주의는 탈근대와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3.
이 책에 정확한 제목을 붙인다면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를 주로 라깡과 데리다를 통해 탐색하기>일 것이다. 니체, 프로이트, 맑스라는 '혐의의 세 대가'를 읽어내고 적용하는 주연배우는 라깡과 데리다다. 하이데거, 카씨러, 들뢰즈가 조연배우고, 그들 모두와 저자가 동원하는 과거의 철학자는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등이다. 다시 읽기의 결과물을 과거의 철학사에 대입할 때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은 플라톤의 저작의 일부와 <주역>의 계사전, 노자의 <도덕경> 등이다. 그리고 특별히, 세 사람을 한 자리에 불러내는 구조주의의 장을 열어낸 쏘쒸르가 언급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의 방대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서술은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


1부는 프로이트다. 여정이 프로이트로 시작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로는 프로이트의 '사후성'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재서술'의 타당성을 말하기가 힘들기 때문일 테고, 둘째는 프로이트의 제자인 라깡이 데까르트적 주체로 돌아가서 정신분석학을 정초(定礎)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근대를 다시 쓰고 싶다면, 프로이트부터다.


라깡은 데까르트적 주체가 없이는 무의식도 탄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의식은 주체 이전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억압 이전엔 무의식이 생기지 않는다는 프로이트의 주장과 동일하다. 라깡은 데까르트가 프로이트와 비슷한 길로 나아갔으되, '언표행위'와 '언표'를 구별하지 못하고 잘못된 전제 위에 이론을 세웠다고 말한다. 그 결과는 '사유의 주체'와 '존재의 주체' 사이의 분열이다. 이러한 분열은 필연적이지만, 문제는 그가 그러한 분열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열된 주체는 그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일종의 방어적 회피, '환상'을 구성하게 된다. 데까르트 이후의 주체철학은 대체로 이런 식의 환상이라고 볼 수 있다. (짧게 하기 위해 '대타자'의 차원은 아예 기술하지 않았다. 그래서 약간의 비약이 있다.) 인지되지 못한 분열의 결과 억압된 무의식적 주체를 발굴하는 것이 바로 프로이트다. 그래서 데까르트의 길과 프로이트의 길은 일부분 겹친다. 데까르트의 길은 프로이트의 길을 예고한다.


주체는 분열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환상'은 사라질 수 없는 거라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 '환상'이 칸트가 '선험적인 도식'으로 부른 것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라깡이 하는 말은 칸트의 '현상존재론'의 틀을 그리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주의의 경우엔 실제로 이런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한 훌륭한 반론은 이 '환상'이 칸트의 현상존재론과는 달리 저 바깥의 실재적인 힘들에 의해 변할 수 있는 무언가라는 것이다. 바로 데리다가 라깡을 비판하며 변하지 않는 구조와 변별되는 '기조'를 이야기한다. 기조는 이론-바깥의 힘에 의해 변화하는 구조다. 라깡은 이에 질세라 자신의 구조를 유동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가 그린 '욕망의 그래프'에서 아랫부분은 의미의 영역이며 윗부분은 향락의 영역이다.


의미의 영역, 즉 상징적인 영역은 지금까지의 철학이 탐구했던 부분이다. 이러한 상징은 실재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체를 실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실재를 명확히 이해하려는 것은, 아메바가 세포막을 뚫고 실재로 나아가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충동에 해당된다. (세포막을 뚫은 아메바는 세상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아메바와 세상의 일치는 아메바의 죽음이다.) 칸트의 현상은 물자체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세포막이다. 그러나 이 세포막은 실재로부터 무언가가 공급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다. 그것을 공급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래프 윗부분의 향락의 영역이다. 그렇게 공급된 것이 의미의 영역으로 들어온 '실재적 대상'(object a)이다. 그리고 이 실재적 대상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대응이 라깡적 의미의 환상이다. 그런데 이 대상은 실재 자체가 아니라, 상징에 의해 부정된 실재의 잔여물이며, 허상이며, 무의미다. 그러나 상징적 질서는 그러한 '실재적 대상'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실재적 대상'은 이론으로 환원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해체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의미가 없지만 의미를 만들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여기서 이론은 이전과는 달리 이론-바깥과 관계를 맺는 부분까지 '이론화'한다. 데리다는 이를 '접경적 경제'라는 용어로 칭한다.



4.
2부는 니체다. 니체는 라깡적 의미의 환상이 무엇을 통해서 구성되는 지를 가장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언어의 구조가 환상을 만든다. 니체는 데까르트의 코기토는 "각각의 행위에 어떤 행위자를 가정하는 우리들의 문법적 습관에서 비롯된 공식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가령 니체 본인이 든 예시로 "번개가 친다."와 같은 문장을 생각해 보자. 문장에는 기본적으로 주어-술어(SP)의 구조가 들어있기 때문에, 순간 번쩍이는 번개와 같은 찰나의 현상도 주어-술어를 통해 표현되며, 그 결과 모든 행위엔 행위자가 있을 거라고 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니체는 주체가 생겨나면 실체가 생겨나고, 이 실체에서 우리가 철학에서 보는 온갖 오류들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 습관 속에 싹트는 '근본신앙'은 명제의 구조와 세계의 존재론적 구조가 같다는 믿음이다."(p142-143) 결국 우리의 철학은 우리가 우연히 선택한 언어의 구조에 기인한다는 얘기다.


가령 테드 창의 중편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외계인 헵타포드를 보자. 헵타포드가 사용하는 언어의 구조는 헵타포드의 사유의 구조와 일치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니체의 관점에 따른다면 여기서 원인은 헵타포드의 언어의 구조다. 테드 창의 소설에서 이 점은 명료하지 않다. 오히려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를 분리해서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먼저 사유의 구조가 이랬기 때문에, 이런 언어를 고안했다는 식으로 나온다. 여하간 여기서는 헵타포드와 인간의 인식방식의 차이가 뚜렷하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들 사이에선 이 정도의 차이는 나지 않기 때문에, 한두가지 의문이 도출된다.  


1) 서양정신을 상대화하는 측면에서 "서양철학은 서양인의 언어의 구조를 반영한다."고 언명한다면, 서양언어의 구조와는 다른 동양언어의 구조가 있는가? 동양언어는 SP존재론과 다른 존재론을 소유하고 있는가? 앞서 우리는 라깡의 환상이 접경적 경제를 통해 변화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 그의 이론을 칸트의 현상존재론과 효과적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환상을 만드는 것이 SP존재론이고, 그 존재론이 동양에서도 통용된다면, 동양의 특수성이라는 것은 적어도 철학 부분에서는 무력화되는 것이며, 철학적 진리의 상대화는 '인간에 고유한 것'의 상대화가 되는 것이며, 그러한 사유의 결론은 또다시 칸트의 현상존재론과 강력한 친화성을 띠게 되지 않을까?


2) 설령 서양정신을 상대화할 수 있는 언어구조가 있다쳐도, 그것은 동양 바깥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서양과 동양의 이분법은 양자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지워버리는 이분법이다. 그리고 동양은 서양을 제외하고는 가장 발달된(통상적인 관점에서) 문명을 이룩했고 서양패권의 시기에도 가장 잘 적응했기 때문에 이 이분법의 한축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동양은 서양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닌가? 가령 한국어에서는 주어를 사용하지 않는 어법이 두드러지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주어가 흔히 생략되는 것이지 주술구조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이런 의문들이 드는 까닭에 나는 "우리('서양'이 아니라)의 철학은 우리가 우연히 선택한 언어의 구조에 기인한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칸트 등 독일의 주체철학자들을 라깡과 연결지어 서술하려는 지젝의 시도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칸트의 선험적 구조와 라깡의 환상의 차이는 어쩌면 변화가능성이 아니라 서술의 문맥에서 드러날 지도 모른다. 이 점은 탈근대론의 재서술 작업이 좀더 진척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며, 아직 많은 논의가 필요한 것 같다.


5.
맑스에 대한 언급은 3,4,5부에 고르게 퍼져있다. 맑스가 밝혀내는 것은 화폐의 탄생과 물신의 구조다. 이 역시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환상의 것으로 밝혀내는 절차다. 맑스에 대해서는 데리다의 <맑스의 유령>에 나오는 논의들이 많이 활용되고 있다. 저자의 요약이 올바르다면, 데리다의 유령학은 라깡의 정신분석학과 일맥상통한다. 데리다의 유령은 라깡의 '실재적 대상'이며 데리다의 유령의 출몰은 라깡의 실재의 귀환이다.


맑스에 대한 언급을 통해 우리는 탈근대론의 재서술이 탈근대론의 사유를 제시한 '혐의의 세 대가'들에 대해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후세의 탈근대론자들은 교조가 말한 것 중에서 배워야 할 관점을 추려내고, 그 관점을 통해 교조의 다른 주장을 비판해야 한다. 라깡은 프로이트에 대해 이미 그렇게 하면서, "프로이트는 라깡주의자이다."라고 선언했다. 저자는 맑스의 화폐이론을 분석하면서 일부 그러한 작업을 하는 듯하다. 맑스의 화폐이론이 미래의 화폐의 전개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예측능력의 부재가 아닌 다른 것이 문제인 것 같다. 이론의 한계는 경험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소박한 믿음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맑스가 화폐에 대한 분석을 종료하는 이유는 화폐형성에 개입되는 이데올로기가 분석을 통해 사라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에 원저자들의 한계 역시 구조적인 측면에서, 즉 실재가 틈입한 증상이 쉽게 해소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은 어느 곳에서는 증상엔 실재가 틈입해 있기 때문에 앎을 통해 해소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또 다른 곳에선 앎을 통해 증상을 해소할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을 피력하고 있는데, 전자를 기조로 삼아 후자를 비판하는 것이 올바른 독법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역사성과 초역사성의 문제인 것 같다. 이들 혐의의 세 대가들은 남들에겐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역사성 속에서, 특정한 문맥 속에서 나타나는 '환상'이란 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환상'이 그것을 없애면 진리가 드러나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실재성을 간직한 환상, 활동성을 지닌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해소하기 어려운 환상, 일종의 초역사성의 흔적을 간직한 '증상'이란 사실을 간파했다는 점에서 더욱 위대하다. 이 두가지 사항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서 세사람은 어느 정도 차이가 날 수 있다. 가령 저자는 맑스를 (내 분류를 따른다면) 후자에 대한 이해가 가장 부족했던 사람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맑스는 그 암호의 해독을 낙관한다.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과 물신숭배는 과학적으로 해석되고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다. (중략) 그러나 니체와 프로이트에게 기호 배후의 활동적 해석은 구조적으로 해소불가능하다."(p172)


그리고 맑스의 물신숭배에 대한 분석은 '토대-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실재적 대상이 틈입한 이데올로기라는 점이 강조된다. 이는 맑스의 물신숭배 분석의 내용에 대한 올바른 평가이지만, 맑스 본인의 말은 아니다. "물신숭배는 단순히 특정한 계급을 위해서 조작된 표상도, 특정한 계급에 속하기 때문에 사로잡히는 허위의식도 아니다." "물신이 이데올로기적 사태라면, 이 사태는 관념과 대상,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 있기 위해서 먼저 있어야 하는 처음의 사태이다."(p468)


물론 이는 올바른 지적이다. 그러나 그다지 공정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그런 식의 비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가 개념을 두고 "결코 생겨나지 말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출처를 기억하지 못한 어딘가에서 니체가 기독교를 두고 "데카당이긴 하지만 그것이 없었다면 인간의 사물에 대한 이해가 한층 더 천박했을 그런 데카당"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이중 긍정되어야 할 것은 후자이며 비판받아야 할 것은 전자다. 그 이유는 "추상적 개념을 비판하는 위치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쉽사리 깨달을 수 있다. 추상적 개념을 비판하는 위치는 당연히 개념이 생긴 이후다. 니체적 사유는 개념 이전에는 발달할 수 없는 것이다. 형이상학이 허무주의를 배태하고 있다는 니체의 말이 옳다면, 허무주의는 형이상학 이전에 올 수 없는 것이다. 니체는 아직 프로이트의 '사후적' 구성을 모르고 있거나, 본인의 착각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경우는 이미 라깡이라는 탈구조주의자의 틀을 거쳐서 수용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문제를 찾아내야 할 필요가 없지만, 굳이 찾아낸다면 생물학주의와 기원주의 등이 있을 것이다. 변혁을 위해 역사성을 강조하며 초역사성을 지나치는 맑스의 오류와 반대로,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에 힘을 싣기 위해 그것을 초역사적인 것(과학적인 것, 실제의 기원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치부하려는 욕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류다. 라깡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페니스가 아닌 팔루스를 말하고 부친살해 사건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사건으로 명명한다. "아버지, 그것은 은유"라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과거의 사상가를 재단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재서술에 성공하기 위한 조건을 보여준다. 탈근대론자의 비판은 근대성의 논리들을 해체시켜 없애버리는 데에 있지 않다. 비판은 근대성을 보존하면서 근대성 안에서 근대성을 넘어가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탈근대성은 근대성의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사실이 끊임없이 언급된다. 그것은 외밀한, 외심적인 것이다. 개념은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 이후의 위치에서 개념을 비판하면서 넘어서야 한다. 다른 문제들에 있어서도 상황은 동일하다.


6.
특히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선 더욱 더 그렇다. 책은 알뛰쎄르의 견해를 "그러므로 진리가 필연적으로 갈등적인 차원에서, 그것의 반대말은 오류나 무지라기보다 중립성/객관성/비당파성/자율성 등일 것이다."로 요약한다. 물론 이는 옳은 말이다. 서구의 탈맑스주의자인 라끌라우와 무페는 아예 (상상적 연대가 허구라는 의미에서) "사회는 없다.", "사회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물론 이도 옳은 말이다. 하지만 '주체'를 증상으로 파악했던 것처럼, '사회'도 증상으로 파악할 수는 없을까? 저자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충분히 가능한 관점이다.


사회가 불가능하다는 관점을 실천하는 것은 프로이트적인 죽음충동과 맞닿아 있다. 말하자면 맑스주의적 정치비평은 가능하지만, 맑스주의적 정치활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해체하며, 종국에는 노동계급마저 해체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객관성'을 해체하기 위해 특수한 '당파성'을 '객관성'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논리가 극단화될 때 '분석'을 거부하는 마지막 '객관성'은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는 없다"의 실천은 "노동계급은 없다."로 귀결된다.


그런데 맑스는 "사회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환원불가능한 인간학적 사태이다."(p447)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는 사회가 그것을 유지하는 상상적 연대가 허구라는 분석만으로 사라질 수 없는 일종의 증상임을 선언하는 문장이 아닐까. 그렇다면 진리를 곧바로 인식하는 것이 죽음이므로 환상의 스크린이 필요한 것처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립성/객관성/비당파성/자율성 등을 가정하는 구조적 오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런 지점을 고려할 때 맑스주의는 현실정치의 맥락에서 훨씬 생동감을 갖출 수 있을 것 같다. 철학사에 대한 재서술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플라톤의 <국가>에서 벌어지는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논쟁은, "현대적인 것은 트라시마코스이나, 승리한 것은 소크라테스다."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한국의 좌파들은 합리주의의 전통이 결여된 한국의 맥락에서 맑스의 이론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서구의 좌파들보다 훨씬 쉽게 이론을 확신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이론을 비판하게 될 관점들은 아직 한국에 제대로 수입되지 않았다.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은 일종의 '합리적 광신'이다.  가령 민주노동당의 소수정파인 평등연대 성두현의 다음과 같은 글은, 나같은 민주노동당 '당원'을 매우 곤혹스럽게 만든다.
  

"맑스가 상품생산에 부정적 시각을 갖게 된 핵심적 요인은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가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전도되어 나타나고, 생산과 유통을 생산자들이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에 지배받게 되는 점에 있었다. 따라서 생산과 유통의 의식적 통제가 상품생산을 대체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대안으로 도출된다. 맑스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현실의 자본주의의 역사는 상품생산, 시장을 위한 생산의 폐해를 수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민주적 사회주의를 향하여, 이론과실천 2002년 8월호)


이를 정신분석학의 맥락으로 번역하자면, 증상을 발견하면, 그 증상의 원인을 규명하고, 그 원인을 때려잡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식의 주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탈구조주의에서는 이런 식의 주장은 가장 위험한 것으로 반박된다. 그것은 핵가족을 해체하고 아이들의 육아를 국유화시키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다.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은 물론 핵가족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분석불가능한 것(라깡), 해체불가능한 것(데리다)을 포함하고 있는 실재적 대상(라깡)이며 유령적 현상(데리다)이다. 이를 없앨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지젝식으로 말하면 "증상이 없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디스토피아로 추락할 운명을 가진 유토피아주의다.


당대의 정치적 현실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탈구조주의는 역할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누차 설명한 것처럼, 탈구조주의의 비판이 이루어지는 위치가 어딘지를 기억하는 것이 언제나 필요하다. 탈구조주의는 하나의 이론의 보편적 확장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혁신적인 이론인데, 한국에서 탈근대를 떠드는 이들은 탈근대론 그 자체를 맥락없이 보편적으로 확장하려고 시도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그들은 탈근대론이 근대적 중심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그 광경을 볼 때 느끼는 두려움은 너무 위험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애기를 볼 때 느끼는 두려움과 같다. 탈근대론은 너무 위험한 진리라서 그것을 독재자로 받아들이느니, 중세의 종교적 광신이나 근대의 이성적 광신을 독재자로 삼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니 말이다.



7.
그래서 다시금 이 책의 주제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탈근대론은 이렇게 다루는 것이라는 것, 그것을 보여주는 데에 이 책은 전력을 다하고 있다. 마지막을 참신하게 만드는 5부 2장과 3장의 사회비평조차도 그렇다. 그것은 재서술이 기존 철학사에 대한 재서술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비평을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것이 가능하다면, 앞으로는 또다른 창조적인 비평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작업을 좀더 현실적인 부분에 접맥시키려고 생각해 본다면, 이를 방해하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도 분명히 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할 때 탈구조주의 이론이 한국에 적용될 때 넘어서야 할 산과 같은 거다. 하나는 '대타자'다. 라깡의 '대타자'는 주체를 둘러싼 상징적 질서의 총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것은 철저히 주체에 대한 것, 주관적인 것, 임상적인 것이지만 라깡은 간혹 그것을 사회적인 맥락으로 확장시킨다. 지젝은 아예 라깡의 임상의학을 사회비평에 활용한다. 그것이 가능한 조건은 결국 서양사회의 대타자는 사회적으로 상당부분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선 데까르트가 코기토 논증 후 고민한 '신'이 대타자와 같다는 라깡의 참신한 해석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에 비추어 본다면 신존재증명이 없었던 한국 사회엔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는 대타자가 없이, 제각각의 '골목대타자'를 통해 주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정신분석학을 활용하는 비평가가 대타자의 통합을 추구해야 하는지, 아니면 제각각의 골목대타자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정신분석학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못한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스스로 찾아야 할 대답이다.


둘은 같은 현상을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데리다의 접경적 경제에 관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회적 맥락에서, 혹은 좀더 거창하게 인간 정신의 한계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접경적 경제와, 그 개인의 사적인 사유의 한계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접경적 경제를 구분해야 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경계 바깥에 대한 존중과 인정이 중요한 태도일 수 있으나, 후자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인류 이성이 그럭저럭 해결한 문제들에 대해서 땡깡을 부리는 사적 예술가(?)들을 용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 역시 서구인들은 접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에 내가 탈근대론이 순진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한국에 존재하는 이런 특수한 문제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이런 문제(=한국인의 땡깡)들은 '이성'을 비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탈근대론자들이)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거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탈구조주의식의 재서술이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한 지금은, 오히려 통상적인 사회철학보다 탈구조주의가 한국 사회의 맥락에 더 활용하기 좋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통상적인 사회철학이 가정하는 '정상성'은 한국에 오지 않았고, 자본주의 발전의 국면이 탈근대에 접어든 이상 (말하자면, 자본의 요구가 포드주의식의 거대한 중심의 질서를 노동관계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스스로의 경쟁력을 위해 일부분 탈중심화된 질서를 요구하고 있다면) 영원히 한국에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대립구도는 "근대를 받아들이느냐, 탈근대를 받아들이느냐."가 아니라, "근대적 권위를 행사하는 탈근대를 받아들일 것이냐, 탈근대를 통해 번역한 근대를 받아들일 것이냐."가 된 것 같다. 그리고 한국인이 이 시대에 해야 할 일은 (근대적 권위를 행사하는 탈근대가 아니라) 탈근대를 통해 재서술한 근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81 악마에게 영혼 팔기 하뉴녕 2005-08-17 1768
180 호의를 거절하는 것 [3] 하뉴녕 2005-08-10 1880
179 라캉과 현대철학 하뉴녕 2005-08-09 1440
178 '얼음공주'에 관해 [1] 하뉴녕 2005-08-04 2841
177 ssy의 충무로 리포트 하뉴녕 2005-08-02 960
176 말아톤 하뉴녕 2005-07-29 1047
175 숭배하는 남성 하뉴녕 2005-02-22 1170
174 "일본은 없다"와 한류열풍 하뉴녕 2005-02-12 1766
173 쿵푸허슬 : 종교와 어긋난 미학 하뉴녕 2005-02-03 1244
» 서평: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하뉴녕 2005-01-12 2258
171 교육정책에 대하여 하뉴녕 2005-01-12 964
170 시뮬라시옹 : 한계가 뚜렷한, 그러나 의의는 있는 하뉴녕 2005-01-10 1176
169 라캉과 정신의학 : 임상의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라캉 하뉴녕 2005-01-08 3243
168 서양 윤리학사 : 윤리학 입문 뿐 아니라 철학 입문에도 좋은 교양도서 [1] 하뉴녕 2005-01-08 2551
167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욕망의 위험성 [1] 하뉴녕 2005-01-07 1129
166 상무게임단에 관한 생각 하뉴녕 2005-01-05 853
165 진보담론과 개혁담론의 화해를 위해 하뉴녕 2005-01-05 2311
164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폴리티즌 선정 10대뉴스 4) 하뉴녕 2004-12-31 1022
163 박경순과 '국보법 올인론자'들에게 하뉴녕 2004-12-28 3418
162 국보법 폐지와 민주노동당 하뉴녕 2004-12-26 2023